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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날 때마다 시(詩)를 써보렴. 가끔 내게 보여주고.’
지나간 학창시절 등단하신 시인 선생님께 국어과목을 배웠다. 이유는 몰랐지만 선생님은 자주 나에게 시를 써 볼 것을 권유하셨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구해가면서까지 열심히 시라는 것을 써 보았다. 어려웠다.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더욱 어려워져만 갔다. 희뿌연 느낌의 순간을, 금새 사라지고 마는 생각의 편린들을 글자로 옮겨 종이에 가두어 놓는다는 것이 여간 힘들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시에 담고자하는 생각과 느낌을 함축시켜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다는 부분이었다. 나는 생각이나 느낌을 풀어서 길고 세세하게 표현하는 것은 하겠는데, 줄여서 함축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자질이 없어보였던 것이다. 결국 나는 시를 포기했다. 대신 언젠가 소설을 꼭 써보겠다고 다짐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느닷없이 고전에 심취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아마도 그 시작이었던것 갔다. <폭풍의 언덕>과 세익스피어 작품을 지나 다음으로는 학문으로서의 <기독교 역사>와 <서양 미술사>와 <이슬람 문화>에 진심으로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충주 중앙시장 2호집에 가면 만날 수있는 막걸리와 욕쟁이 할머니가 구워주시는 녹두전에다 순대국에 매료되었다. 그곳에서 시인이신 국어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과 지인들이 함께하시는 자리에 곧 잘 불려가곤 했는데, 향토사학자 김 교수님. 향토 소설가 강 작가님. 그리고 이미 저명한 인사였던 신경림 시인께서 함께 자리하고 계셨다. 소설가 강 작가님의 따님이 내 초등학교 선배로 당시 함께 DJ 활동을 하고 있던 터라 몇 번 경찰서 뒤의 강 작가님 댁을 드나들었었다.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혹여 그때 ‘선생님 제가 글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소설가가 되는 방법 좀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씀 드렸었더라면..... 어쩌면 그 후의 내 인생이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군대에 다녀와서 아내를 만났고, 그녀에게서 책 한 권을 소개받았는데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었다.
순간처럼 나는 온통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때부터 내 인문학적 소양의 기준은 오로지 카잔차키스가 되었다. <영혼의 자서전>은 늘 가까이 놓아두는 최애장서가 되었다. 그리고 한 해 겨울동안 남들은 평생 동안 ‘성경 통독’을 여러 번 반복한다는데,<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다시 읽은 후에 내가 아는 한 가장 두껍고 방대한 분량의 목회자들이나 읽는 <성서주해>를 모두 탐독했다. 기독교 신자로 성령에 갈급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독교 윤리나 기독교 교육에 대한 이해와 지식 습득을 위한 것이었다.
그 시기에 고물상을 하는 친구의 작업장 폐지를 쌓아두는 창고에서 우연히 겉표지도 모두 달아난 시집 한권을 발견했는데....... 그 낡은 시집의 중반부에서 뮈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의 시 ‘10월의 밤(La Nuit d'octobre)’이 나의 폐부를 헤집고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왔다. 나로 하여금 아주 가끔은 시집을 펼쳐들게끔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는 직접 역사소설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순수한 아마추어로 내가 태어나 자라온 충주 지역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이야기를 꾸준히 써나갔다. 한때 꽤나 잘나간다고 소문이 났던 인터넷 모임 '피플 475(People 475)'에서 수필과 칼럼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써 올리다가, 창작 역사소설 <피안에 부는 바람>을 3년 가까이 연재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피플 475가 폐쇄되면서 소설의 연재도 자연스레 중단되고 말았다. 완성까지 예상했던 스토리의 40% 정도에서 끝을 맺고 말았다. 폐쇄까지 서너 달의 시간을 주면서 다른 곳으로 퍼 나르거나 백업 권고를 여러 번 받았지만, 그것 또한 그 이야기의 숙명이겠거니 생각되어 싸이트 폐쇄와 동시에 소설도 모두 순간처럼 사라져 버렸다. 다만 흔적이라도 남겨두어야겠다 싶어서 소설 시작의 일부를 인쇄하여 아직도 보관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을..... 역사소설을 쓴 다는 일에 있어서 내가 닮고싶은 롤 모델은 김주영 작가와 최인호 작가 선생님들이다. 그런 소설을 한 번쯤 제대로 써보고 싶다.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가 글을 써서 밥을 먹고사는 전문직이 아니었기에...... 또 언젠가 다시 새롭게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늘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그러다 지난해부터 사방에서 자료 수집을 다시 엄청나게 해대기 시작했다.
이유는 자명하게 다시 소설이 쓰고 싶어져서다. 어느 정도의 준비는 이제 마친 것 같다. 곧 다시 역사소설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이번소설의 소재는 조선시대 중기 ‘칠서의 변(七庶의 變亂)’에서 찾았다. 바라기는 남은 인생중에서 언젠가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한 번 살아봤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다가 나이 육십이 넘어 설 즈음에 또 한 번 사정없이 가슴을 파고드는 시를 만나게 되었다. 나이 탓인지 길고 긴 장시를 짬이 날 때마다 다시 펼쳐서 이어서 읽는 내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뮈세 다음으로 나의 뇌리에 각인된 시인은 상징주의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Valéry)였다. 발레리의 시집 <매혹.Charmes> 중에서 <해변 묘지(Cimetière Marin)> 에 끌리게 되었고, 특히 후반부의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는 부분에 유독 더 마음이 끌렸다. 혹여, 여성 싱어송 라이터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어떤 간절한 마음으로 감상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런 나의 느낌을 훨씬 수월하게 공감할 수 있을것만 같다.
폴 발레리는 바로 이곳 세테(Sete)에서 태어 난 시인이다. 그는 인생 대부분을 이곳 세테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수도승처럼 살았다. 그리고 그의 시에 등장하는 세인트 클레어 산중턱의 <해변 묘지(Cimetière Marin)> 잠들었다.
폴 발레리의 시를 읽으면서도 그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에 묻혔는지는 사실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몽펠리에 선택이 우연이었고, 몽펠리에에 온 만큼 주변 명소를 찾다가 세테를 알게 되었고, 세테를 공부하다가 폴 발레리가 이곳 사람이고 이곳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피에리 폴 리케의 미디 운하도 보고 싶었고, 석호(소금호수)마을 세테도 보고 싶었지만, 정작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속마음은 폴 발레리가 시로 썼고 죽어서 묻혀있는, 너른 코발트빛 지중해를 내려 보며 발레리가 누워 잠든 그 <해변 묘지>를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챠밍여사에게도 아침에 세테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야 겨우 언질을 해 주었을 정도로 <해변 묘지> 방문은 나만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애써 찾아 간 해변 묘지의 방문 결과를 전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힘들게 찾아갔는데..... 헐. 별거 아니야 하면 어떻게 감당하지?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세테에 도착해 있고, 운하 건너로 저만치 세인트 몽클레어 언덕이 올려다 보인다. 다만 해변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나 역시 아직 전혀 알지 못한다.
해서....... 일단은 맛있는 아점으로 분위기를 업그레이드 시키고 난 다음에 다시 새로운 기분으로 몽클레어 언덕을 올라가 봐야 할 것만 같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 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지식이로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간소한 사원,
정적의 더미, 눈에 보이는 저장고,
솟구쳐 오르는 물, 불꽃의 베일 아래
하고많은 잠을 네 속에 간직한 눈,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지붕!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지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과일이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 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마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 가는 기슭의 변모를.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보라 변해 가는 나를!
그토록 큰 교만 뒤에, 그토록 기이한,
그러나 힘에 넘치는 무위의 나태 뒤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녀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至日)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 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서,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항상 미래에 오는 공허함 영혼 속에 울리는
가혹하고 음울하며 반향도 드높은 저수조를!
그대는 아는가, 녹음의 가짜 포로여,
이 여윈 철책을 먹어드는 만(灣)이여,
내 감겨진 눈 위에 반짝이는 눈부신 비밀이여,
어떤 육체가 그 나태한 종말로 나를 끌어넣으며,
무슨 이마가 이 백골의 땅에 육체를 끌어당기는가를?
여기서 하나의 번득임이 나의 부재자들을 생각한다.
닫히고, 신성하고, 물질 없는 불로 가득 찬,
빛에 바쳐진 대지의 단편,
불꽃들에 지배되고, 황금과 돌과 침침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곳, 이토록 많은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에 잠잔다!
찬란한 암캐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헛된 꿈들을, 조심성 많은 천사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삶은 부재에 취해 있어 가이없고,
고초는 감미로우며, 정신은 맑도다.
감춰진 사자(死者)들은 바야흐로 이 대지 속에 있고,
대지는 사자들을 덥혀주며 그들의 신비를 말리운다.
저 하늘 높은 곳의 정오, 적연부동의 정오는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사유하고 스스로에 합치한다......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밤에,
나무뿌리에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 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어디 있는가? 사자들의 그 친밀한 언어들은,
고유한 기술은, 특이한 혼은?
눈물이 솟아나던 곳에서 애벌레가 기어간다.
간절한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쁜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짝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또한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바라는가
육체의 눈에 파도와 황금이 만들어내는,
이 거짓의 색채도 없을 덧없는 꿈을?
그대 노래하려나 그대 한줄기 연기로 화할 때에도?
가려무나! 일체는 사라진다! 내 존재는 구멍나고,
성스런 초조도 역시 사라진다!
깡마르고 금빛 도금한 검푸른 불멸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만드는,
끔찍하게 월계관 쓴 위안부여,
아름다운 거짓말 겸 경건한 책략이여!
뉘라서 모르리, 어느 누가 부인하지 않으리,
이 텅 빈 두개골과 이 영원한 홍소를!
땅밑에 누워 있는 조상들이여, 주민 없는 머리들이여,
가래삽으로 퍼 올린 하고많은 흙의 무게 아래
흙이 되어 우리네 발걸음을 혼동하는구나.
참으로 갉아먹는 자, 부인할 길 없는 구더기는
묘지의 석판 아래 잠자는 당신들을 위해 있지 않도다
생명을 먹고 살며, 나를 떠나지 않도다.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야!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킬레스여!
아니, 아니야!...... 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파도 속에 달려가 싱그럽게 용솟음치세!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석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 폴 발레리(Paul-Valéry)의 시 <해변 묘지(Le Cimetière marin)>
‘생선 요리를 먹을 때, 살을 발라 먹다가 뼈가 나온다고 나머지를 통째로 뒤집어 먹는 것은 실례인거 알지?’
‘알아. 귀가 따갑게 들었잖아. 셰프에게 무례한 행동으로 보이는 실례라며?’
유럽여행에서 팁 문화처럼 우리의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태도와 다른 경우 때문에 영 성가시거나 신경이 쓰이는 일들을 다반사로 경험하게 된다. 레스토랑에서는 무조건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허락을 받은 후 입장해야 하는 일과, 좋은 테이블에 대한 선택권이 손님의 권리가 아니라 매니저나 웨이터의 고유영역이라는 점 등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으니 어쩌겠는가? 이제는 ‘제발 좀 찾아오지 말라고 강제 도시여행세를 정당하게 징수’하는 세상까지 도래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누구는 훌륭하신 조상님들을 둔 이유로 풍부한 문화유산 덕분에 풍요롭게 살게 되고, 누구는 존귀하신 절대자의 착오로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강대국들의 무자비한 약탈행위에 노예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이 야만적인 역사의 아이러니를 말이다.
어쨌거나 유럽의 레스토랑에서 생선요리를 먹게 되면 어색하겠지만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살을 발라 먹는다. 뼈가 드러나면 역시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뼈를 통째로 발라서 옆으로 옮겨놓고 나서 남아있는 절반의 생선모양을 그대로 유지시키며 천천히 더 발라먹으면 된다. 한국 음식점에서 하듯이 절반을 발라먹고 뼈를 남겨둔 채 훌렁 뒤집어엎어서 처음 음식을 대했던 것처럼 말짱한 껍질부분부터 다시 벗기거나 뜯어먹는 것은 그 생선 요리에 정성을 쏟아 부어 만들어 낸 셰프의 노고와 헌신을 무시하는 행위라 받아 들여 진다는 것이다. 뒤집고 안 뒤집고 뭐가 그리 큰 문제이거나 실례가 되는지는 사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미 그렇다고 설명을 듣고 난 후에 굳이 그런 실례까지 범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우려를 할 필요가 없었다.
에스페레소 커피 잔을 들고 밖의 테라스로 나가던 셰프가 아내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다가왔던 것이다. 첫인상에 나는 그가 터키계의 셰프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들어맞았다. 그가 내 배낭에서 태극기를 발견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오셨군요. 작년에 아내와 한국의 부산을 방문했었습니다. 다양한 한국 로컬음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이곳의 음식도 그만큼 인상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세테도 부산만큼이나 수산물이 맛있고 풍부한 지역이지요. 부모님이 모두 터키인들이셔서 제가 만든 음식에 어느 정도는 터키식 조리방법이나 향신료들이 첨가된답니다.’
‘저희 부부가 이미 여러 번 터키여행을 했었답니다. 이스탄불은 고향처럼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랍니다. 곧 잘 이스탄불에서 먹었던 음식을 그리워하고는 했는데, 방금 막 음식이 나오는 것을 보고 벌써 군침이 돌 정도였습니다. 아주 훌륭하고 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셰프는 주방으로 가서 새로운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오더니 아내의 생선 접시를 자기 앞으로 가져다가 손수 뼈를 발라주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면서 고급 레스토랑에서 가끔 셰프의 특별 서비스를 목격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우리가 직접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지금 먹고 있는 생선과 세테 바다에서 잡히는 맛있는 생선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는데, 음식재료에 관한 전문 용어가 잔뜩 들어있는 영어 설명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냥 어색하게 웃으며 이따금 맞장구를 대충 쳐줄 뿐이었다. 그래도 2002년의 축구 이야기까지 이어지고 나서야 겨우 식사를 마칠 수가 있었다. 행복한 식사였다.
운하를 따라 길게 늘어선 세테에서 처음 형성된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아주 소박한 마르세이 항구마을은 곳곳이 매력적인 문화유산이다. 운하를 따라 걷다보면 세인트 클레어(Mount St. Clair) 산자락을 향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좁고 가파른 골목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 좁은 골목길을 오르면 다시 전형적인 항구 뒷골목의 풍경이 산비탈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곳곳에 당장 수리와 보수가 필요해 보이는 낡은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된 느낌이 들고, 소시민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빨래들이 창문과 테라스와 좁은 골목의 하늘에 나부끼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커다란 벽면이이란 벽면에는 모두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는데, 그 솜씨가 예사 솜씨들이 결코 아니다. 매우 뛰어난 예술품들이다.
골목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오르다보니 시청도 나타나고, 운하 어디에서도 건너 올려다보이던 노트르담 드 라 살레트 예배당 (Chapel of Notre Dame de la Salette)이 불쑥 모습을 나타낸다. 종탑 꼭대기에 우뚝 서있는 성모 마리아의 청동조각상이 항구를 떠나 지중해로 나가고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이 간절하게 안전항해와 평안을 염원하고 갈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자비로움’을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이다.
예배당의 뒤쪽 언덕에 중세풍의 크고 멋진 건물이 있어 찾아갔더니 고등학교였다.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었는지, 서너 명의 관리자가 곳곳에 서있으며 외부인의 학교 출입을 제한하고 있으며, 학생들과의 접촉도 제지하는 분위기가 역력해 보였다. 굳이 폐를 끼칠 필요가 없어서 얼른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폴 발레리가 묻혀있는 해변 묘지의 위치를 물어보는데, 그분들에겐 영어가 통용되지 않는다. 다만 폴 발레리라는 이름은 알아들었는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켜 찾아가 보았는데 그곳은 바로 폴 발레리 박물관(Paul Valery Museum)이었다. 세테에서 숙박이라도 하면서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혹시나 모르겠는데, 우리는 오늘 세테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 짐을 싸서 내일 아침엔 스페인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박물관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아주 친절하게 마당까지 나와서 해변 묘지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켜 준다. 문제는 아직 좀 더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는데, 여기서 좀 기다리면 해변 묘지로 가는 시내버스가 올 것이라 했다.
산자락에서 내려다보이는 항구지역의 풍경이랑 드넓게 펼쳐진 코발트 불루의 지중해가 쏟아지는 햇살로 반짝거리고 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세라 그냥 걸어서 가기로 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산중턱의 아름다운 길이 '오트 루트 (Haute-Route)'라고 알려진 뷰가 아름다운 길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이 길의 위로 몽클레어 산 정상에는 세테의 멋진 풍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전망대가 있다. 그 전망대 아래로 개인 아틀리에를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더불어 멋진 정원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고급 빌라가 들어서 있는 지역이다. 아마도 세테 최고의 부자들이 모여사는 곳일 것이다.
먼 과거에 이곳은 원래 현지인들에게 밀려난 이탈리아 어부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둥지를 틀고 살았기에 오트 거주지역(Quartier Haute)이라고 다소 냉소적이고 폄하적인 의미를 담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중세 유럽 곳곳에서 유대인들을 강제로 집단거주 하도록 하고 게토(Ghetto)라고 불렀듯이,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이태리 촌놈들 길’ 또 ‘이태리 촌놈들 동네’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유추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13세기로 돌아간다면....... 혹, 40대의 초라한 사내가 어린 꼬마의 손을 잡고 이 언덕을 올라 이태리 마을에 올라가지 않았을까? 이태리 제노바에서 방금 여기까지 온 지칠ㅈ대로 지친 사나이는 이곳에서 사나흘 체류하면서 자신과 아들의 컨디션을 다시 추슬렀을 것이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포루투갈 리스본이었으니 앞으로도 몇 달을 더 걸어서 가든가 혹시 배를 얻어 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먼여정을 겨우 소화했음에도 결국 그는 리스본에서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는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스페인 코르도바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다음해에 그는 세비야 항구를 떠나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찾아 나섰다. 그가 바로 콜럼버스였다. 이탈리아인 콜럼부스가 포루투갈로 가자니 이곳을 거처야 했을 것이고, 객지에서 편하게 발을 뻗고 쉴 수 있는 곳이 그래도 동포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을 통해 저만치 산자락 위의 촌놈들 동네를 향해 콜럼부스가 아들 손을 잡고 힘들게 거어 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다.
길을 걷는 발치 아래로 세테의 역사 자체라고 해도 무방할 '세인트 루이스 (Saint Louis)'부두가 나타난다. 세테가 시작된 장소다. 폴 발레리의 묘비명과도 같은 명언이 새겨진 등대가 항구의 어귀에 우뚝 서있다.
루이스 부두와 등대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해변 묘지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언덕길 도로를 포장하는 사람들을 만나 간식과 물을 얻어먹었다. 참 친절한 사람들이다.
시내버스를 두고 왜 걸어 오냐고 묻는다. 그러다가 이내 아무 걱정 말란다. 저기 저만치 보이는 모퉁이라 바로 해변 묘지라고 우리를 안심시켜 준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이승)에 있으므로 두렵고
'나(죽은 누이)는 간다'는 말도
다 하지 못하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서 태어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아, 극락 세계에서 만나볼 나는
불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兮伊遺
吳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遺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해변 묘지의 계단에 걸터앉아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작자미상임이 분명하지만 그냥 월명사(月明師)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살며시 읊조려 본다. 아무리 뮈세의 시가 있고 발레리의 시가 있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나 지금의 이런 분위기를 만나게 되면 나는 <제망매가> 이상의 시가 없다고 생각한다. 눈물을 펑펑 쏟고 대성통곡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이만큼 애잔하게 터진 마음결 사이로 삐져나오는 슬픔을 겹누벼 다시 잠기게 하는 시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아마도 그것이 우리만의 정서가 아닐까 싶다.
옛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상당히 너그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임을 전제로 해서 하는 말이다.
인간은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숙명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존재다. 어떻게 사는가(生)는 출생 내력이나 교육을 통한 가치관에 따라 어느 정도 자유의지가 영향을 끼치겠고, 늙는(老) 것 또한 생활방식이나 수련에 따라 다소 늦출 수 있겠고, 병드는(病) 것 또한 예방과 치료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맞을 수 있다. 다만, 이놈의 죽음(死)이란 놈은 예측도 예방도 불가능한 사람의 영역 밖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결국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죽음을 멀리하는 부류와 죽음을 가까이 두려는 부류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사람들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해 가까이에 두고 더불어 살았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놈은 멀리하면 할수록 더 가까이 달라붙어 쫓아다니고, 회피하면 할수록 극악할 정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양산 시켰기 때문이다.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상징하거나 연상시키는 물건이나 생활방식을 그냥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자연스레 더불어 살아가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죽음은 사전에 통보가 없기에 때론 매 순간을 더 성실하고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는 애초의 종말론적 사고가 여기에서 태동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분기점에 섰던 시인 페트라르카는 이렇게 자신의 일기에 적었다. ‘나는 내가 죽을 준비가 되었을 때 죽음이 나를 찾았으면 좋겠다. 글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니면 그리스도께 오늘 하루의 생활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눈물에 젖어 있을 때 말이다. 그때라면 좋겠다.’ 그는 일흔 살 생일인 1374년 7월 20일에 책에 기댄 채 잠들었다가 죽었다. 그는 죽음조차도 자신의 소망대로 맞이한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가 가수 나훈아의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라는 질문에는 시공의 차이 때문에 명확한 답을 해주지 못했겠지만, 어쨌거나 그는‘악법도 법이다’라는 철학적 명제를 답으로 내놓고 죽음을 맞이했다. 부당한 법의 판결로 사형 선고를 받자, 제자와 지인들이 그릇된 판결을 이유로 탈옥과 국외로 도망칠 것을 준비했지만, ‘내가 소크라테스야. 잘못된 법의 적용인 줄 알기에 당당하게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내가 살고자 도망을 친다면 그 악법이 정당성을 가지게 되고 나의 인생 모두가 범죄가 되는 것이지. 나는 정의로운 시민이야. 그러기에 악법을 거부하는 것이고 억울하게 죽어야만 하는 것이야.’ 그는 악법이 내린 독배를 기꺼이 들이마셨다.
죽음을 결코 내치거나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준 고대 로마의 실존 인물이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Petronius)라고 생각한다.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의 소설 쿼바디스(Quo Vadis.1895)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명이다.
페트로니우스는 로마제국의 집정관이자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폭군 네로 황제의 최측근이었다. 소설과 영화 속의 남자주인공이자 로마군 장교이며 귀족인 마르쿠스 비니시우스의 삼촌이기도 했다. 적나라한 그의 본모습과 행동은 소설 속에서 더 빛을 발하지만, 영화 속에 그려진 그의 모습 또한 보통의 일반적인 로마 귀족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공감하게끔 그려내 보여 준다.
“페트로니우스는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공무를 수행하거나 오락을 즐기며 지냈고, 방탕하고 정력적인 생활로 다른 사람들처럼 유명해졌으며, 평범한 방탕한 사람이 아니라 뛰어난 사업가로 여겨졌다. 솔직함으로 여겨지는 그의 무분별한 언론의 자유는 로마의 시민들에게서 커다란 인기를 가져와 주었다. 그러나 그의 지방 정부 시절, 그리고 나중에 그가 집정관직을 맡았을 때, 그는 정사에 대한 활력과 탁월한 능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후 그는 다시 사악한 방종의 삶으로 돌아갔고, 네로의 최측근 중 하나가 되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의 철학 및 학문에 관련하여 상당한 권위자로 칭송을 받았다.”라고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자신의 역사서 <연대기>에 적었다.
하지만, 권력다툼의 결과로 황제의 근위대 사령관인 티겔리누스의 질투를 받아 반역죄로 고발당했다. 그러자 페트로니우스는 법정에 끌려가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택했다.
그는 자신의 저택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고, 로마의 모든 귀족들과 지인들을 초대했다. 연회가 무르익자 그는 연단에 섰고,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최후의 연설을 늘어놓는다. 갚을 것은 그 자리에서 모두 갚고, 감사할 것은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감사를 표하고, 다툼과 은원이 있던 사람들에게는 화해를 청하고 용서를 구하고 베풀었다. 노예들을 공개적으로 풀어주고, 자신의 재산을 천천히 정리해 나갔다. 연설이 끝나자 연회장 높은 곳의 연단에 마련된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스스로 택한 자살을 공개적인 연회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자살을 시도하고, 연회 참석자들은 그런 장면을 목격하고 지나가면서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오느날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다. 119 전화가 불났을 것이고, 그의 행동을 강하게 가로막지 않고 방관했다면 살인 방조죄를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자살도 살인임이 분명한 세상이다.
영화에서는 마치 자살을 하나의 아름다운 영상 시처럼 보여주지만, 역시나 소설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 같다. 이 장면 또한 타키투스는 <연대기>에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페트로니우스는 서둘러 성급하게 자신의 인생을 끝내버리지 않고, 자신의 혈관을 절개한 다음, 그의 유언에 따라 그것들을 다시 묶은 다음, 다시 그것들을 열기를 반복했고, 죽음의 예식을 치루면서 그의 친구들과 대화하는 동안, 심각한 긴장이나 고통을 호소하는 등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면서도 귀를 기울였는데, 영혼 불멸이나 철학자들의 이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가벼운 시와 장난기 있는 구절이었다. 어떤 하인들에게는 후한 선물을 주었고, 어떤 하인들에게는 즉석에서 채찍질을 명령했다. 더욱이 마지막 식사를 하고, 서서히 잠에 빠져들면서, 이제 죽음이 그에게 강요되었지만, 끝까지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의 유언장에는 이제까지 여러 황제의 측근들이 마지막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네로나 티겔리누스, 또는 다른 어떤 권력자들에게도 아첨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황제의 부끄러운 폭정과 부패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하게 했고, 황제 측근들의 이름과 방탕한 그들이 행한 죄악을 상세히 묘사하고, 그 기록을 봉인하여 네로에게 보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인장 반지를 부러뜨렸는데, 이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데 사용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페트로니우스는 죽음을 맞았다.
영화 <쿼바디스>는 옛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는지를 고스란히 잘 보여주고 있는 한 사례라 하겠다. 물론 이런 한가지 사례가 동시대를 살아간 넒고 넓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 생각이나 모습은 결코 아니겠지만 말이다. 신분이나 지위나 처 해진 환경에 따라 그 모습들은 당연히 제각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접하게되는 다큐멘터리나 역사적 발굴에서 무덤을 생활 터전의 아주 가까이에 두거나, 심지어 조상의 해골을 집안에 두고 생활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미개인 풍습으로 폄하 할 일은 결코 아니다. 생활풍습과 문화 수준이 다를 뿐이지, 죽음을 대하는 근본적 취지는 모두 비슷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패를 집안에 모시고, 그 위패를 떠받들고 잘 보존하는 것이 후손의 최대 의무이며, 그 성실도가 곧 그 가문의 위상이 되던 유교적 관습이나 해골을 집안에 들이고 늘 조상과 함께 생활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럼 혹시 기독교인들은 ‘거봐! 우리는 다르지. 그것들은 모두 미신이며 우상숭배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글쎄다. 과연 그럴까?
본래의 기독교는 죽음에 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반대로 중세 이후로는 대단히 중요해졌지만 말이다.
구약 성경 전체를 탈탈 털어서 죽음(자살 포함)에 대해 거론된 사건들을 직접 찾아보자.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결국 그 자신은 가나안 땅에 발을 디디지도 못하고 요단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느님이 선택하셔서 유대민족의 초대 왕으로 세웠던 사울이 그렇게 썩 참 기독교인다운 모습으로 살지 못하다가 불레셋의 침입으로 위기에 몰리자 스스로 자살하였다 라고 구약에 기록되어 있다. 죽음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을 찾을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 굳이 ‘죽음’이라는 구절만 찾으려 하면 수도 없이 나오지만 말이다. 다윗의 계보를 따지자면 사실은..... 누가 누구를 낳고 살다가 죽고, 그가 또 누구를 낳고 살다가 죽고, 그 자식이 또 누구를 낳고 살다가 죽고......... 사실 구양 성경은 ‘낳고’ ‘죽고’가 전부인 어떤 한 유대인 집안의 족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관심과 생각이 변한 것도 아니다. 나사로가 죽기 직전에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되었다는 정도의 이야기 뿐이다.
하지만 신약은 아주 ‘특별한 죽음’에만 몰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내용이다. 이 대목에서 꼭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가 아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공생의 길을 살다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뜻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는 내용이 신약의 줄거리라고 하겠다. 거기에는 예수가 신으로 죽었고 다시 신의 존재로 부활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인간은 십자가 형에 처해져 생명이 끊어지고, 다시 사흘 후에 깨어나 하늘을 훨훨 날아서 올라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이후로 수많은 철학자들이 죽음 이후에 과연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분리가 되고, 또 영혼은 어떤 길을 가는지에 대하여 오랫동안 고뇌하고 연구에 몰두해왔던 것이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어떤 방식으로든 죽고, 또 사흘 만에 깨어나 부활할 수 있다면....... 지금 이시간 지구에는 기독교인 숫자에 버금갈 만큼 ‘재림 예수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의 길을 제자들과 함께 더불어 살다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AD 34년 이후로 초대 기독교가 생각하는 죽음은 바로 ‘로마’ 혹은 ‘로마군대’였다. 예수를 포함해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기독교인)이 이후로 300년이 지나는 동안에 150만 명 이상이 로마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은 이 순교자들에 대해서 이해가 쉽지 않은 모순투성이의 주장들을 하지만, 분명한 것은 150만의 희생자 중에서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은 오로지 한 명,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마저도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는 터무니 없는 황당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 기독교(로마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바로 이 십자가 사건을 믿는데서 탄생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만약 부활의 사건이 허구라 한다면 기독교 자체가 거짓이며 허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참 불편한 진실들이 발생한다. 모든 기독교가 인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이후로 가톨릭의 역사에서는 수많은 부활이 생겨나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도 부활 승천했고, 사도들은 물론 수많은 성인들이 부활 승천했던 것이다. 개신교는 이를 전면 부정한다. 유대교나 이슬람에서는 턱도 없는 소리 한다고 주장한다.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활했다고 주장하며, 이슬람에선 선지자 모하메드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부활 승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유일신 하나님 한 분을 놓고 이야기하면서도, 거기에 뿌리를 두고 파생된 유대교. 기독교(로마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포함). 이슬람교가 하나의 죽음(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놓고서도 모두 제각각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속된 표현으로 ‘Dog 판’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저마다 절대 신성과 종교적 정통성들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근본적 마찰은 어느 누가 나서도 풀고 해결할 수가 없다. 차라리 지구상에 있는 이제까지의 모든 종교들을 초월하는 (AI 종교)가 나타나 기성의 종교들을 싹쓸이 제거해 버리면 혹시나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한 재림예수(하나님)가 와도 현재의 종교분쟁을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의 종파를 가리키면서 ‘저들이 옳다’라고 하셨다 쳐도,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종파들이 합심해 ‘재림 예수가 가짜다’라고 부정해 버릴 테니까 말이다. 이미 저들에겐 자신들의 정당성을 넘어서 ‘신의 존재나 진위마저 결정할 수 있는 무한의 권능’을 각 종파들이 스스로 장착해 버렸으니 말이다.
현실에서 발생하고 당면한 이런 모든 문제의 책임은...... 로마의 국교로 추대받으면서 신성한 종교를 넘어 권력의 정점에서 방종과 부패와 타락을 일삼은 AD 4세기의 로마 가톨릭 최고 종교지도자들, 다시 말하자면 그 정점에 서게 된 교황(바티칸)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루아침에 카타콤베에 숨어서 겨우 연명하며 기도하던 도망자들의 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눈치빠른 로마에 주재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원대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머리에 올라 타 온세상을 호령할 계획을 짜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의 폭정을 피해 초대 기독교인들은 뿔뿔히 흩어져 살았으며, 당시의 억압받는 기독교인들의 중심은 안티옥. 알렉산드리아. 데살로니카. 카파도키아 등이 중심지였다. 흩어진 기독교인들을 안티옥의 기독교 지도부가 이끌어 가고 있었다. 기도교의 중심이자 최고 지도부는 안티옥의 종교회의 였다. 그들이 알렉산드리아. 데살로니카. 카파도키아에 사람을 파견하고 뒤를 돌봐주었다. 안티옥 최고 지도부는 마침내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지부를 결성하기로 하고 사제를 파견하였다. 어디까지나 로마교구는 안티옥에 있는 동방교구의 한 작은 지부였던 것이다.
초대교회 로마지부의 성립과정 또한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훌쩍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리고서는 그만 땡 치고 말았던 시대였다. 로마의 탄압은 극렬해졌고 제자들도 흩어지거나 꽁꽁 숨어서 문 밖 출입마저 자제하고 숨어 살았다. 그때 막돼먹은 괴물이 하나 나타났다. 로마 시민으로 공무원인 한 남자가 소아시아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가던 중, 다메섹 노상에서 놀라운 경험을 통해 전혀 딴사람이 된 것이다. 꿈이었는지 환영이었는지 암튼 그는 실물을 만났는데, 그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했다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 사건 이후로 당시 막달라 마리아와 도마를 만나고 제자들을 만난 이후로 예수가 신약에 등장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건이다. 비록 자신이 집필한 성경책이지만, 어쨌거나 신약 성경에 정식으로 이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또 한 번 이와 비슷하게 노상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적이 있다는데, ‘쿼바디스 도미네’에 등장하는 예수 만남 사건은 성경에 기록된 기독교 역사가 아니라 한 소설가가 쓴 이야기라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
어쨌거나, 로마의 관리일 정도로 인텔리였던 바울의 등장으로 오늘날의 기독교 역사는 제대로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바울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예수의 진짜 사도들이 숨어 사느라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기 시작했고, 서서히 명성을 날리며 새로운 기독교의 지도자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뭐 이런 놈이 있어?’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진짜 사도들이 열 받기 시작했다. 예수 학원을 직접 수료한 자신들보다 학원 근처에도 와보지 못한 놈이 마치 예수 학원 수석 졸업생처럼 하고 다니는 꼴을 더 볼 수가 없었고, 교인들의 열광에 위기를 느낀 것이다.
급기야 사도들은 예루살렘 종교재판에 바울이 출석하도록 소환장을 보냈다. 바울은 이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를 눈치챘다. 자신을 죽이기 위한 재판이었던 것이다. 예수를 보지도 못한 놈이 감히 사도를 사칭했다는 죄목이었다. 사도들이 주관하는 종교회의를 부정할 수 없는 처지의 바울은 재판에 출석했다. 결과는 사도들의 의도대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바울은 예루살렘 총독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은 로마인이니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알렸다. 사형 집행은 정지되었다. 바울은 로마인이었고, 로마인은 어떤 경우에도 식민지 법정이나 식민지 법에 의해 처벌을 할 수 없었다. 로마 시민권의 특권이었다. 바울은 로마의 법정을 요구했고, 결국 로마로 이송되었다. 그 이송과정에서 유명한 몰타와 시칠리아의 선교 활동이 이루어진다. 닭 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본다고 했듯이 사도들은 스스로 얼굴에 똥칠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로마인이 바울이 로마의 법정에서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날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송되는 과정에 수많은 인파가 열광적인 것을 보면, 로마의 법정에서 자유롭게 풀려난 바울이 이제 당당하게 기독교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은 받아놓은 밥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우두머리였던 야고보의 주재하에 긴급회의를 열었다. 결론은 어떻게든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바울이 죽어 사라져야 진짜 사도들의 명분과 권위가 보존된다는 전제하에서 음모가 꾸며졌다. 사람을 보내 도중에서 죽여버리던가, 아니면 재판정에서 사람들을 뇌물로 회유를 하던가 위증을 만들어서라도 끝까지 바울을 제거하기로 결론 내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로마로 파견된 사람이 바로 (시몬 베드로)이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실제로 유대인 역사에 기록으로 존재하는 부문이다. 베드로의 파견까지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으로....... 이 세상의 어떤 기록에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언제 무슨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대의 역사에도, 로마의 역사에도 전무하다. 바울의 재판 기록과 가택 연금형에 처해 졌음에도 몰래 고린도외 데살로니카에 전도 여행을 다녀왔다가 들통이 나고, 결국 로마인들의 고발에 의해 기독교인 죄목으로 다시 법정에 서서, 기독교를 버리라는 최후경고를 무시하고 결국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은 로마의 법정 기록에 분명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베드로가 로마에서 체포되어 법정에 서고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베드로의 로마 체류 자체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너의 무덤에 반석을 세우리라’는 예수의 말씀과, 베드로의 처형과 부덤 위에 바티칸(교황청)이 세워졌다는 현실적 문제는 전혀 정당성이 없어 보인다. 로마 가톨릭은 툭하면 한 세기에 한 번씩 정도로 교황청 지하의 무덤 진위와 유골 등에 관해 과학적 분석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베드로에서 시작된 교황의 계보와 로마 가톨릭의 정통성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역사학자와 과학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이다. 교황청이 가톨릭 내의 학자와 연구자들을 동원해 자신들 방식으로 검사하고 자신들이 입증한다는 방법으로 이 수도 없이 많이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세상의 역사학자와 과학자와 연구진들은 21세기 다운 연구 방식으로 함께 공동 조사를 하자는 데에 대해 교황청은 일절 대꾸조차 하지 않고 있다.
혹여, 외부의 학자들과 연구진이 타임머신을 만들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벌어지던 당시의 골고다 언덕이나, 베드로가 로마에서 처형을 당하던 시점으로 되돌아 가서 확인을 해보자고 하면 교황청의 답변이 어떨지 궁금하다. 이미 이천 년의 역사 동안 교회는 수도 없이 인류 학문과 과학의 발전에 깨지고 또 깨져왔기 때문이다. 그 기독교의 애매모호한 불합리성을 깨부순 학자들의 종교에는 거의 기독교가 절대적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이왕 여기까지 나온 김에........
로마 가톨릭이 베드로의 로마 체류설을 정당하 시키는 근거가 딱 하나 있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한 줄이다.
베드로 스스로가 적은 성경 구절에 유일하게 남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베드로가 쓴 성경이 외경이다. 초대교회의 교황을 비롯한 최고 성직자들은 복잡하고 혼란한 종교적 내부 갈등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경을 가져다가 새로운 시나리오를 짜는 편집과정을 거치게 했다. 마가.누가.요한.마태의 초대교회 핵심이자 엘리트 출신들 자체도 예수에 대한 생각과 판단과 행적 기록에 엄청난 차이와 오류를 보일 정도었으니 말이다. 그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하여, 당시의 ‘로마 가톨릭이 처한 시점과 주안점’을 기준으로 교리 선발과정을 거쳤다. 글을 전혀 모르는 성직자들도 즐비했던 시대였던 만큼, 수천 년을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구약이라는 이야기와 몇백 년을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수많은 서책들의 가치와 판단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인데, 당시 로마 가톨릭의 지휘부는 당시의 시대적 자신들의 입맞에 맞는 대로 선택을 했던 것이다. 별로 쓸모가 없다 생각되면 가차없이 버렸다. 고르고 골라서 남겨진 것들을 쌓아놓고, 이건 당장 써먹을 수 있겠다 판단되면 (정경)에 담아 지금의 성경이 되었고, 이건 필요하기는 한데 뒷부분에서 또 다른 분쟁의 소지가 있거나,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불리하겠다 싶으면 (외경)에 담아서 나무상자에 쳐 박았다.
지금의 성경은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고 모두가 (正經)으로 추스르고 고른것들이다.
그리고 나서 표지에 덧붙이기를, 5세기에 활약한 로마 가톨릭 성립의 최고 일등 공신인 성 아우구스투스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기록된 것이니 어떤 잘못도 있을 수가 없다’는 (성경 무오류설)을 꽝 하고 새겨넣어서,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절대 신성한 것이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아마도 내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하에서, 인류 역사 최고의 거짓말이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거짓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인 추대 취소를 지옥의 재판정에 청구하고 싶을 정도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진정한 예수의 후계자였다는 이야기도 ‘막달라 마리아 서’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지만 (외경)으로 분류해 신성과 정통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막달라 마리아의 후계설에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였고, 예수의 어린시절에서부터 30세에 공생에 나서기 전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도마 서’ 역시 (외경)으로 낙인 찍어서 다시는 재론하지 못하게 정통성을 상실시켜 버렸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실은 성 아우구스투스라 해도 모두 가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훗날, 베드로의 정통성 시비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들은 하지 못했다. 그저 중세 시대만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던 것이다. ‘베드로가 로마에 가기는 한 거야?’ ‘바티칸이 베드로의 무덤이 맞아?’라는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아뿔싸. 신약 성경 어디에도 그에 관한 단 한 줄의 말씀도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러면 안되잖아? 그래서 죽어라 다시 찾는 난리를 부렸는데....... 외경으로 분류 시킨 베드로 본인이 쓴 편지에 달랑 한 줄만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야 절대로 그런식으로 써 줄일이 없었겠지만, 흔하게 마가나 누가나 요한이라도 한 줄 써주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이제와서 외경을 정통성을 부여하기도 그렇고......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 서나 도마 서나 파티마 문서들이 어떤 편지 풍파를 일으키게 될지 상상도 안되는 마당에.......
생각해보라. ' 베드로는 예수가 죽기 전에 딱 한번만 그를 부인했고,(세번은 너무 심하니까) 이를 가슴 아프게 여겨 더욱 헌신적으로 선교활동에 임했으며, 고난의 길이 되고 자칫하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주변에서 만류했디만, 기꺼이 맡겨진 소임에 따라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밖혀 죽었다' 라고 누가든 마가든 요한이든...... 그것도 아니면 고린도의 한 주민이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면서 바울에게 보낸 편지의 맨 아래 추신란에라도 적었다면 시원하게 해결되었을 문제가 아니겠는가? 속된 말로 평소 베드로의 인간관계가 좀 그랬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같은 교회의 허구와 탐욕으로 얼룩진 죽음에 대한 개념은 17세기에 들어서 몽테뉴냐 베이컨 같은 인문학자들에 의해서, 종교적인 위협의 도구로 전락한 교회의 그릇된 죽음(자살)에 대한 개념에서 벗어나 그것은 자유인으로서의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사상의 자유와 존엄한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권리에 대한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며, 자살이 결코 아름다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신이 인간을 어여삐 여기셔서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통해서 ‘모두 이루었도다’하신 말씀으로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고귀한 생명체이며 신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런데 교회는 권력이 된 그때부터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는 그 자체가 씻을 수 없는 죄악 덩어리다’라고 낙인찍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권력과 탐욕과 영원히 지배할 지상의 기독교 왕국을 위해 예수께서 약속하시고 이룩하신 ‘구원의 역사’를 난도질해서 악의 구렁텅이에 묻어버린 것이다. 그게 중세 암흑기 천년이며, 어쩌면 기독교 역사 전체일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내가 속한 교회는 대한민국엔 없고, 저 멀고 먼 코카서스 산맥의 허물어져 지붕마저 사라진 돌무더기 교회에 마음의 적을 두고 살고 있다. 비를 맞고 눈을 맞으면서 그들은 텅 빈 회랑에서 의자도 없이 서서 기도한다. 뻥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눈을 뜬 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도하시던 할머니와 소녀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을음이 가득한 벽면 아래서 촛불에 의지해 성경을 읽어주던 사제의 모습이 무척이나 그립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과 직접 교류하며 더불어 생활하던, 거친 호밀빵을 먹고 다락방에서 모여 자면서 기독교인들이 살아가야 할 삶 자체를 고스란히 몸소 보여주시던 그 초대교회의 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중세의 카타리파에 연민을 느끼고 그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공부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 생각엔 이 순간에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활동하는 교회의 모습은 진실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라는 건축물과 제도와 행위의 상당 부분에 거부감 내지는 부정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예수의 첫 예루살렘 성전 방문에서 보았듯이 교회는 허상이다. 기독교적 사고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삶) 자체가 교회라고 생각한다. 사람들 마음속에 ‘내 교회’가 생겨나고 ‘우리 교회가 더 좋아’라는 의식이 생겨나는 순간부터 그 교회는 파멸의 내리막길로 내닫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적지 않은 내 경험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어느 특정 목회자를 위해 교회에 가지 않아. 우리는 특정 목회자가 아니라 저 높은 곳의 유일하신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하니까’ 하는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절대적 거짓말쟁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골라가지도 않을 것이고 종파를 따질 필요도 없고 내 교회를 내세울 필요도 없다. 이단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참 기독교인일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유대교인들에게 새삼스레 하나님의 약속이 달라졌다고 주장하는 예수는 분명 이단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만든 로마 가톨릭은 당연히 이단에서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다가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그리스 정교회)로 갈라졌다.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기독교에서 파문시켜 버렸다. 그렇다면 지금 지구상에 기독교인은 단 한 명도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모두가 이단으로 파문된 세상에 구세주가 재림해서 다시 시작해 주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끝난 것이다. 그 지경이 되자 가톨릭과 정교회가 은근슬쩍 서로를 파문에서 복권 시켜 주는 생쑈를 벌인다. 공멸보다 공생을 택한 것이다. 종교 권력의 힘과 달콤함에 이미 깊게 빠졌던 결과에서 나온 해프닝이었다. 영국의 헨리 8세가 결혼 문제를 놓고 교황과 다투다가 절교를 선언하고 냅다 성공회를 만들어 버렸다. 가톨릭은 즉시 이단으로 호적을 파내 버렸다. 그러자 성공회가 스스로 호적은 만들면서 교황을 이단으로 파문시켜 버렸다. 교회의 부패와 사치와 세기말적 타락에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마침내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등장했다. 가톨릭은 당연히 개신교를 이단으로 파문시켜 버렸다. 그런데 패면 팰수록 개신교는 커져만 갔다. 30년간 전쟁을 벌이고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음에도 개신교의 열풍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결국 로마 가톨릭은 이단 적용을 회수하고 공생공존을 선택했다. 그 후로 개신교 안에서 수많은 종파가 생겨났고, 그때마다 이단시 하는게 밥 먹듯 일상이 되었지만, 언제나처럼 이단으로 내쳤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세력을 이루고 나면 언제나 당당하게 다시 정통 교단 대접을 받는 것이 일상이자 다반사가 되었다.
'도대체 이단이 뭐야?'
시작할 때 ‘이단’ 취급을 당하지 않은 종파는 절대로 정상적인 정통이 아니라는 의미가 이단이 아닌가? 이단으로 시작해야만 진짜 정통임을 판정받게 되는 것이라고. 그런것도 모르면서.......ㅎㅎㅎ
폴 발레리는 남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크게 성공한 시인이다.
프랑스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한 보기 드문 예술가이며, 프랑스 아카데미 종신회원이었으며, 그가 죽자 프랑스 정부는 국장(國葬)의 예를 갖추어 고인을 추모했을 정도이다. 생전에 아폴리네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앙드레 지드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시인으로 성공하면서 얻은 지명도와 가진 부로 인해서 파리 상류사회를 누비고 즐겼을 법도 한 발레리였지만, 그에게는 남다르게 수도사와 같은 은둔 생활을 즐기려는 면이 있었다. 그의 인생은 결국 별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없이 조용히 살다가 떠났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시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허무와 죽음이 가득 채워진 듯 보이지만, 종국엔 결국 생동(生動)하는 삶의 의지와 희망이 끝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순수 정신의 승리인 것이다.
문득 시계를 들여다 보니 어느새 세테에서의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
세테 나들이에서 돌아가 이제 서서히 몽펠리에 여행을 접을 준비를 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내일은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날이다.
아쉬음 속에 건너다 보는 세테의 지중해는 유난히 눈이 부시다. 머지않아 지중해의 눈부신 노을이 장관을 이루겠지만 그대까지 이곳에 마냥 머물 수는 없을 것 만같다. 어쨌거나 다소 무리가 따를 수도 있겠다는 우려속에서 찾아온 (해변 묘지)였지만 그래도 와보기를 잘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몽클레어 언덕길을 내려가 좁은 골목길을 더듬거리듯 걷는다. 운하를 따라 길게 늘어선 마르세이 카페거리에서 노천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앉아서 역시나 알롱제 커피와 따듯한 물을 별도로 주문한다.
‘당신 당 떨어질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이 순간에 가장 크게 감사한 것은 당연히 ‘변함없이 씩씩하게 잘도 걸어주고 있는 마눌님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하여간 이 사람 걷는 것 하나는 변함이 없다. 정말 잘 걷는다. 이번 여행에서도 거의 모든 도시들을 오로지 걸어서 주파하지 않았던가. 파리 시내를 거의 횡단해 버렸으니 말이다. 그것도 데모대가 행진하고 폭죽이 터지고 경찰이 저지선을 쌓아 가로막는 한밤중에다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낯설은 파리에서 말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몽펠리에야 산책 정도이겠으나, 여기 세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로 (해변 묘지)를 찾아가는 언덕길이 제법 멀고 난이도가 있었다.
참 고맙고 신통한 사람이다.
일상에서야 늘 잔소리가 심하고 나를 구박하는 편이지만 여행을 시작하면 무조건 내 생각에 수긍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다. 내가 큰 사고를 치면 세상이 떠나가라 한숨을 쉬겠지만 그것도 잠시뿐, 오히려 나보다도 빠르게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사람이다.
‘에게게.얼씨구?’
기운 떨어지고 당떨어졌다고 쉬어가자고 했더니만,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나더니 평생 안 하던 재롱을 다 떨고 계신다. 쉬는 김에 팍 눌러앉아서 오늘의 세테여행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석호와 해변 구경을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아쉽다고 추가로 생맥주까지 주문해서 마시다보니....... ㅎㅎㅎㅎ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여기에서도 너무나 쉽게 시간이 지나버렸다.
허겁지겁 운하를 건너고 다리를 건너고 기차역을 찾아갔는데, 아뿔사! 아침에 가면서 생각했던 거리와 시간이랑 되돌아 오면서 드러난 거리와 시간 사이에 그 차이가 심했던 것이다. 결론은 우리가 예정했던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몽펠리에에서 기차표를 예약하면서 확인했던 다음 열차는 한 시간 이십 분 뒤에나 있었다. 난감해하는 처지에 안내판이 바뀌더니 십오 분쯤 후에 몽펠리에 가는 시간표가 뜨는 것이 아닌가? 혹시나 지방철도가 아니라 파리에서 오는 특급열차라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매한 표를 버리고서라도 특급열차표를 구매해 서둘러 돌아가야겠다고 매표소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매표소 아줌마 왈....... ‘이번 열차는 정기 열차가 아니라 비정기 노선 특별 열차인데요. 행사에 참석하고 몽펠리에로 귀환하는 특별열차란다. 그런데 이미 예매한 승차권으로 그냥 이용하면 된다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것이 아닌가? 아침 열차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탔고 몽펠리에로 돌아 왔다.
몽펠리에로 돌아와서 올드 시티 지역을 휘감듯 한 바퀴 돌아서 며칠동안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마트에 들렸다. 오늘은 좀 색다른 걸 먹어보려나 했는데, 역시나 눈에 띄는 게 매일 고르고 골랐던 것들이다. 외식을 해볼까 물어보니 일단 피곤하니까 씻고 대충 먹고 쉬자고 한다. 과일이랑 소시지들이 남았으니 와인이나 더 사서 실컷 마시고 잠에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래서 그대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변함없이 새벽 산책을 하고, 짐을 챙겨 배낭에 넣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우리가 머물던 장소 청소를 한다. 버릴 것과 겉을 벗겨서 빨아야 하는 베게 닢과 이불보를 제외하면 별반 더 손을 볼 것이 없을 정도로 싱크대까지 말끔하게 청소를 늘 해주는 편이다. 간단하게라도 ‘잘 머물다 간다’고 감사 인사로 메모를 남기는 편이고, 문을 잠그고 숙소와 아쉽게 작별을 한다. 열쇠는 길 건너 골목길로 한 블록을 더 가서 우측의 도시 청소원들이 쓰는 사물함 위쪽의 남의 집 창살에 매달려 있는 열쇠 보관함에 넣고 비밀번호를 돌려놓는다.
코미디 광장으로 가서 트램을 탈까? 기차역에서 탈까?
기차역에서 트램에 올라 사빈느 정류장으로 향한다. 다행히 시간은 넉넉하다.
며칠 전에 왔던 때와 너무나도 똑 같은 풍경이 재현되고 있다. 우리처럼 플랙스 버스를 기다리는 떠나려는 여행자와 방금 타지역에서 몽펠리에에 도착한 새로운 여행자들이 교대식을 펼치고 있는 전경이다.
겨우 정류장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넋 놓으면서 아쉬운 몽펠리에 여행과 작별을 하고 있는데...... 저쪽으로 마침내 녹색의 플랙스 버스가 들어서고 있다. 차량 전면의 안내판에 (바르셀로나)라고 선명하게 적혀있지 않은가?
차량 예약을 확인하고, 짐칸에 배낭과 트렁크를 싣고, 버스에 오른다. 여전히 버스는 초만원이다.
그리 오래지 않아서 우리가 탄 버스가 서서히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안도라를 스쳐지나 스페인과의 국경을 넘어서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 바르셀로나까지 쉬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굿바이 몽펠리에. 굿바이 프랑스. 무척 고마웠어. 기회되면 우리 꼭 다시 만나기로 해.
안녕!!!!!!
--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바르셀로나 여행기)로 이어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