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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5장
예수님이 가르치신 언약 백성의 복과 언약의 율법
(찬송 550장)
2023-11-27, 월
맥락과 의미
5-7장의 설교는 산상수훈이라고도 합니다. 산 위에서 교훈을 내려주셨다는 뜻입니다. 5:1에 예수님이 산 위에 올라가신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것과 비슷합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은 모세가 받은 십계명과 율법의 의도를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 유익을 줍니다.
첫째,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말씀을 어긴 우리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심판 받으시며 죄용서 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믿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죄용서 받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기준을 배웁니다.
셋째, 우리가 일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국가의 법을 만드는 기준을 배웁니다.
1. 산상수훈 서론: 하나님 나라에서 받는 언약 백성의 축복(1-16절)
2. 완전하게 된 율법: 예수님이 가르치고 성취하심(17-48절)
3. 예수 그리스도: 산 위에서 언약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구원
1. 산상수훈 서론: 하나님 나라에서 받는 언약 백성의 축복(1-16절)
1) 천국 백성의 복(1-12절)
예수님께서는 “복되다!” 하시면서 복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보통 불행으로 생각하는 것을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①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가 어떻게 복됩니까? 마음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자를 복되다고 합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 가난하게 된 사람은 복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는 자도 저주를 받은 자 같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기 위해 울기 때문에 복됩니다.
② 애통하는 자: 의롭게 살다가 피해를 당해서 우는 자를 하나님께서 위로할 것입니다.
③ 온유한 자: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사람을 향해서도 온유한 자는 땅을 상속받습니다.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 땅과 재산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5절)입니다.
기업은 성도가 누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그 복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뒤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의를 위해 살아가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과 일하는 직장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그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습니다.
⑤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⑥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봅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자는 깨끗한 자여야 합니다.
⑦ 화평하게 하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④, ⑧ 의에 목말라하고 핍박받는 자의 복
8복에서 아주 강조하는 것은 “의”입니다. 네 번째 복과 여덟 번째 복은 의에 대한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과 물을 찾듯이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복됩니다(6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10절) 복됩니다. “의를 위하여”는 “나(예수님)로 말미암아”(11절)와 같은 뜻입니다.
단순히 정의의 원칙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우리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거룩한 삶을 살고 그 때문에 핍박을 당합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11절) 하는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합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고난을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입시다. 예수님은 고난 받을 때 기뻐하라고 하십니다(12절).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완성될 그 나라에 우리는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는 지금의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거룩한 나라입니다.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생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이 세상 기준으로 보면 불행하고 비참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수고가 끝난 후 완성될 그 나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복을 충분히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면서(롬 14:17) 그것을 누리며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이것보다 더 풍성한 기쁨을 내세에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픔 가운데서도 성령 안에서 지금 기쁨을 누리고 또 더 큰 기쁨을 누릴 것을 소망하며 기뻐합시다.
2)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13-16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절). 소금은 지혜라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쓰입니다. 13절의 “맛을 잃는다”는 “어리석음”(롬 1:22, 고전 1:20)과 같은 뜻입니다. 소금이 맛을 갖는 것은 지혜를 갖는 것입니다. 신명기 4장에서 말했듯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신명기 4:6).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는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성도가 세상과 다르게 지혜롭게 살아갈 때 세상이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소금이 음식 맛을 내듯이 성도는 세상살이를 맛있게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 등불은 등대 위에 두어서 온 집안을 비춥니다. 우리 성도는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세상에 빛을 비춥니다. “너희 빛”(16절)은 4:16의 “큰 빛”, 곧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빛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쳐졌습니다(고린도후서 4:6).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온 빛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비칩니다. 믿고 순종할 그 빛이 우리의 말과 행동에 비칩니다. 우리 안의 빛이 세상에 빛을 비춥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는 이미 그 빛입니다. 빛은 먼저 교회 안에, 성도 안에 비치고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삶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삶이 전도가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소금이다. 이미 빛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연합하였기 때문에 이미 소금과 빛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소금으로 또한 빛으로 말씀대로 살아갈 때 세상에서 고난을 당합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감사합시다.
2. 완전하게 된 율법: 예수님이 가르치고 성취하심(17-48절)
이 부분은 ‘완전하다’로 시작하여 ‘온전하다’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17절). 제자인 우리는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가르치신 율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게 되라고 주님이 명령하십니다(48절).
1) 예수님이 성취하시는 언약의 율법(17-20절)
예수님은 온전하게 하려 오셨습니다. 율법을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첫째, 구약에서 주신 율법의 의도와 완전한 뜻을 권위있게 가르치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도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성자 하나님으로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약에서는 우선 한 민족에게 율법을 먼저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고 더 풍요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구약의 율법도 바깥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거룩함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율법의 정신을 그리스도께서는 더 분명히 회복해 주십니다. 마음 속에 있는 죄의 뿌리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심판을 가르치실 때도 이 세상에서의 심판뿐만 아니라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뿐 아니라 스스로도 율법에 복종하여 율법을 다 성취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성취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 곧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의 의는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20절).
“더 낫다”는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과 생명의 풍성함을 은혜로 우리에게 흘려 보내주십니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우리가 온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더 큰 은혜를 간구하고 더 믿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더 순종합시다.
2) 살인죄를 넘어 화해하는 데로 감(21-27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21, 27, 33, 38절). 사람들이 갖고 있던 율법에 대한 이해를 교정해 주십니다.
사람을 육체적으로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죄이며, 살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에서 이미 살인이 시작되었습니다.
“미련한 자”라는 뜻의 “라가”와 같은 욕설은 사람의 정신을 죽입니다.
사람끼리 서로 미워하는 관계가 있으면서도 예물(도라, 구약의 화목제)을 가지고 성전에 와 예배 드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서로가 화해해야 합니다. 함께 예배 드리는 성도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화해하라고 합니다. 공식 재판이 있기 전에 서로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 받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이 땅에서 부지런히 화해해야 합니다.
3) 간음과 이혼에 대해(27-32절)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입니다. 또 자신의 배우자가 간음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혼하는 것은 간음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이혼당한 쪽이 재혼하는 경우 그로 하여금 간음의 죄를 범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간음죄의 책임은 부당하게 이혼한 전 남편이 져야 합니다. 부당하게 이혼을 당하여 재혼할 쪽은 간음죄의 책임이 없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아내에게 이혼 증서만 써 주면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혼증서의 의도를 악용했습니다.
구약 율법에서 이혼증서의 제도를 둔 이유는 이혼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며, 여성들이 애매하게 이혼당한 경우에 간음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남성우월주의를 위해 이혼증서 제도를 악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행한 이유 외에는 이혼을 허용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4) 맹세에 대해(33-42절)
맹세는 원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맹세를 어기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맹세한 것을 그대로 지키지 않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었습니다. 하늘이나 땅, 그리고 자기의 머리로 맹세하는 관행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 땅, 머리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모든 말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고 하십니다. 옳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옳다고 맹세하듯이 말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말은 하나님께 맹세하듯이 정직해야 합니다. 행동도 맹세를 이루듯이 진실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5) 결론: 사랑의 공동체(43-48절)
그리스도의 나라는 죄를 짓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43절).
구약 성경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레 19:18)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성경에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출애굽기 23:4에서 원수의 나귀가 길을 잃을 때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히 가르칩니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마치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인 양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에게 비추십니다(45절). 그런 아버지를 모신 성도는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46절) 악한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48절).
어리석게 자꾸 손해 보고 피해를 당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핍박하는 자를 피하여 도망하라고 했습니다(마 10:23).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보복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사랑을 지혜롭게 베푸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산 위에서 언약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구원
5-7장의 설교는 산상수훈이라고도 합니다. 산 위에서 교훈을 내려주셨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맺은 언약과 그 언약의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새롭고 더 풍성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오래 전에 삼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다음 시내산에서 언약을 새롭게 맺으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너희는 나의 거룩한 백성”(출 19:5)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자신을 헌신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헌신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언약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갈지 가르치기 위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이 언약의 말씀을 성부와 성령님과 함께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이 그것을 함께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모세에게만 말씀하시고 백성에게는 모세를 통해 전해주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언약의 말씀을 하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백성도 그 말을 함께 들었습니다.
앞으로 제자들은 이 언약의 말씀을 세례와 성찬과 함께 온 세상에 전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으로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출애굽보다 더 좋은 출애굽을 새롭게 주십니다. 구약, 즉 옛 언약을 더 선명하고 풍성하게 새롭게 해서 신약, 곧 새로운 언약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헌법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죄에 대한 형벌에 관해 쓴 법률 용어를 산상수훈에서도 썼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의 의도를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그 말씀을 잘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을 어기면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레위기 26장, 나중에 신명기 28장). 백성도 거기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성상 율법을 어기는 죄인입니다.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제사를 통해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믿는 제자들과 성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님 안에서 이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 다 이루어지게 하십니다(롬 8:1-4).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이 산상수훈의 언약의 말씀을 삶에서 이루어갑니다.
믿고 복종할 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키고 하나님처럼 악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우리 힘으로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계속 이 말씀을 어기며 죄를 짓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그 이름을 믿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용서의 사랑을 알고 회개하는 성도를 이미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제 은혜가 흘러넘치는 새로운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이 가르치는 삶은 교회 안에서 완성되지만 세상을 향해 흘러나갑니다. 원수와 이방인에게도 흘러갑니다(46, 47절).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고(13절), 세상의 빛이었습니다(14절). 그러나 순종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에게 밟힙니다.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는 원문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깥 사람이 아니라 집안 사람, 즉 성도들에게 먼저 빛이 비칩니다. 그러나 그 빛은 세상으로 새어 나갑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죄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 성령의 충만을 받은 성도만이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으니 성령님을 의지하여 순종합시다. 이 삶의 방식은 세상의 어떤 힘이나 즐거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죄용서와 성령님의 일하심, 그 강력한 힘에서 나옵니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마태복음의 설교와 전체 구성>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과 설교를 번갈아 가며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다섯 개의 설교가 나옵니다. 설교가 아닌 부분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행동하시며,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하신 일(1-4장)에 이어서
예수님이 가르친 내용(5-7장)이 나옵니다.
그 가르침에 따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또 나옵니다(11-12장).
행동하신 부분이 설교로 이어지고, 설교가 그 다음에 나오는 행함과 연결됩니다.
1-4장: 태어나심과 사역을 준비하심 5-7장: 산상 설교- 교회를 위한 헌법 8-9장: 병을 고치심 10장: 제자 파송 설교 11-12장: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반대 13장: 천국에 대한 설교 14-17장: 예수님의 주 되심 18장: 교회의 조직에 대한 설교 19-23장: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 24-25장: 마지막 날에 대한 설교 26-28장: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
<참고> 13절, 맛을 잃는다 =어리석음
13절의 “맛을 잃는다”(모라이오)는 “어리석음”(롬 1:22, 고전 1:20)과 같은 뜻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는 것은 지혜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참고> 말씀을 온전히 성취(7절), 더 나음(20절), 하나님처럼 온전(48절)
예수님께서 이 모든 언약의 말씀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17절, 플레로오). 성부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우리도 온전해야만 합니다(48절, 텔로). 이렇게 행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20절). ‘낫다’(페리수에, 페리손)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남은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참고> 21절, 심판을 받게 되고, 22절, 심판을 받게 되고, 공회에 잡히게 되고,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고
“되고”(에노코스)는 죄 지은 자가 형벌을 받는 것에 사용하는 법률 용어입니다. 구약 율법에서 쓰인 법률 용어를 예수님께서 계속 사용하십니다. “죄가 있으리라”, “면죄하지 않고”(출 22:3, 34:7), “피가 자기에게 돌아간다”(레 20:9, 11, 12, 13, 16, 27). 구약의 율법이 정한 행동 규칙과 형벌의 내용을 그리스도께서 더 분명히 보완하고 더 좋게 완성하신 것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참고> 23절, 예물
23절의 “예물”(도라)은 구약의 화목제의 제물을 말합니다. 화목제를 드릴 때 제물의 기름은 태워서 연기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남은 고기는 그 제물을 가져온 사람과 제사장들이 함께 먹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고 기뻐합니다. 사람들끼리 함께 먹고 평화를 누립니다. 이런 평화의 잔치에 가는 사람은 먼저 생활에서 이웃과 평화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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