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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元淳 • 白善燁 두 사람의
葬禮를 둘러싼 대한민국의 瑤池鏡] ^^
^^[寸評] 어느 두 장례식(葬禮式)이 보여주는 함의(含意)^^
하루 사이로 전해진 두 분의 부고로 온 나라가 들썩인다.
현직 서울시장 박원순 씨와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이 그 주인공이다.
호불호(好不好)에 상관없이 먼저 망자에 대한 명복을 기원한다. - “영면하소서!”
고인들과 관련된 공과(功過)는 이미 속속들이 알려져 있고,
또 개인적으로도 흔들림 없이 확고하기에, 세세히 되짚을 필요는 없을 듯싶다.
다만 대한민국 사회가 두 장례식을 대하는 자세에 심각한 이견이 있어 조금 살펴본다.
첫째, 업적을 살펴야겠지만
‘자유대한민국에의 기여도’는 비교의 대상이 안 된다.
한 명은 ‘대단히 유해한 행적’이 넘치고
한 명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공로’가 인정되는 사람이다.
둘째, 사인(死因)이다.
한 명은 ‘파렴치한 행위에 따른 자살’이고
한 명은 ‘노환에 의한 자연사’이다.
셋째, 사회의 반응이다.
한 명은 ‘초유의 서울 시장(市葬=5일장)’으로 결정되어
과분한 예우로 비판받는 한편(청와대 청원게시판에
단 하룻만에 30여 만 명의 반대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있음),
한 명은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겨우 ‘국립현충원 안장’에
만족하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듯싶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국민장’ 청원이 제기되어 있다).
샅샅이 비교하고픈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간략히 함축한 위의 3가지만으로도
두 고인을 향한 예우에 엄청난 괴리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즉 ‘파렴치한 혐의의 자살자’와 ‘구국의 영웅’에 대한 대접이
완벽히 전도(顚倒)되었다는 사실이다.
과례(過禮)와 비례(非禮)가 뒤바뀐 것이다.
폐일언하고, 전자(前者)에게는 가족장이,
후자에게는 국장(國葬)으로 예우하는 것이 합당하다.
정상적인 장례법(葬禮法)이 작동되는 합리적인 나라에 살고 싶다!!!
^^조선의 국장제도^^
낙엽이 떨어지니 능도 쓸쓸한 갈색으로 물들었다.
영릉의 쌍릉 잔디도 누렇게 변했다. 영
릉은 같은 언덕에 나란히 배치한 쌍릉이라
많은 사람들이 어느 쪽이 왕이고 어느 쪽이 왕비냐고 궁금해 한다.
"어느 쪽에 왕이 있어요?"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많은 걸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꽤 궁금한 내용인가 보다.
왕과 왕비, 남자와 여자의 위치는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왕과 왕비가 한 자리에 있는 경우,
마주 보아 왼편이 왕이 잠든 곳이고 오른편이 왕비의 자리다.
*'남좌여우' 영릉 쌍릉. 원으로 조성된 뒤 후에
추존된 능이라 장명등과 석물이 왕릉에 비해 작다.*
"아아, 남좌여우야.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
우스갯소리로 아이들에게 쉽게 기억하라고 한 말하지만, 다시 재설명이 필요하다.
왼쪽이 오른쪽보다 서열상 높다는 규칙은 엄격히 지켜져 왔다.
이는 비록 왕실뿐 아니라, 사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남좌여우(男左女右)라고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살아 생전에 지키던 것이고 죽으면 반대로 오른편이 높아진다.
즉, 살아서는 왼편이 왕의 자리로 좌의정이 섰고,
오른편에는 왕비와 우의정, 또 문인은 왼편, 무인은 오른편에 서는 규칙을 지켰다.
그러나 죽으면 오른쪽이 왕, 왼쪽이 왕비 자리가 된다.
언젠가 해설사 한 분이 좌우 방향이 헷갈린다고 자세히 설명 좀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사실 헷갈린다. 계급사회였던 조선왕조에서
서열과 남녀에 따른 자리는 생전과 사후가 정반대로 달라지고,
보는 사람의 위치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
왕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 다르므로 혼란스럽다.
쉽게 왕이 가진 권력을 생각하면 된다.
모든 것은 왕을 기준으로 한다.
왕이 앉은 자리에서 왕의 왼쪽(동편)이 좌가 되고, 신하들에겐 우가 된다.
신하의 위치에서 오른쪽(동편)이 왕의 자리고, 왼쪽(서편)이 왕비 자리가 된다.
왕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내려다보며 앉기에,
왕의 왼편이 동쪽이 되며 우편은 서쪽이 되므로
왕에게 절을 할 때는 무조건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북향사배를 하는 것이다.
문무백관의 조회를 받을 때 동쪽이 문관의 자리고
서쪽이 무관의 자리가 되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죽으면 반대로 오른쪽을 높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겐 왼편이 왕의 무덤, 오른편이 왕비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합장릉일 때도 이 규칙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북향에 머리를 두고 발은 정자각 쪽에 두는 것도 정해진 원칙이다.
두 언덕에 왕과 왕비가 묻혀 있고
정자각 하나를 쓰는 동원이강릉 형식의 왕릉도 마찬가지다.
이 원칙은 지금도 내려온다. 예절 교육을 받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절을 하거나 두 손을 모아 서 있을 때,
남자는 왼손을 위로 올려 포개고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올린다.
그러나 상가에 갈 때는 정반대로 바뀐다. 남자는 오른손을 위로 포개 절을 하고
여자는 왼손을 위로 올려 포개는 것은 이 원칙에 따른 것이다.
서열에 따른 남녀차별이라고 분개할 일은 아니다.
원래의 의미는, 좌인 동편은 양이고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것이며 이는 남자의 위치이며,
우인 서편은 음이고 달이 서쪽에서 떠오른다는 여성의 위치를 본 뜬 것이라고 한다.
*커다란 능상으로 남아있는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 순릉은
지금도 찾는 사람들에게 많은 호기심을 낳게 한다.*
여기까지 들은 사람들이 꼭 물어보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조선왕릉 무덤 속에 무엇이 들었는가
(금으로 만든 금관이나 귀한 보물들이
들었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찬 눈빛이다)와
옛날 왕의 장례식에 대한 것이다.
수백년 전에 죽은 왕과 왕비가 어느 쪽에 묻혔는지
어느 방향으로 누웠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물을 법한 질문이다.
왕의 장례식은 사대부나 사가와 달라도 엄청 다르다.
보통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할 때 삼베로 만든 수의를 입히지만,
왕과 왕비의 습(襲)에는 흰 비단 옷을 9겹으로 입힌다.
그리고 죽은 지 2∼3일 내에 하는 소렴에 대행
(大行. 왕과 왕비가 죽은 후 시호가 붙기 전에 일컫는 말)에 겹옷,
겹이불로 19겹을 입히고, 4∼5일 후의 대렴에는 무려 90겹의 수의를 입힌다.
임금님의 장례
왕의 장례인 국장은 국가사업에 비견할 정도로
많은 돈과 인력을 퍼부은 대단한 중대사였고,
새로 등극한 왕이 첫 번째 국사를 맡는 일이기도 했다.
왕의 병환이 위급해지면 대신을 불러 왕위를 전하는 유교를 작성하게 한다.
임종 무렵부터 솜을 얹어 흔들리는지 살피며
소렴과 대렴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내시가 맡는다.
왕비일 때는 나인(女官)이 한다.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왕세자와 대군 이하의 친자, 왕비와 내명부, 외명부의 공주 등은
모두 관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며 금, 옥, 비취, 노리개 등을 제거한다.
지금도 각국 대통령이나 수장이 죽으면
전국에 계엄령이 내리고 삼엄한 경계태세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상이 선포되면 계령(戒令)이 내리고
병조에서는 군사들을 동원해 도성의 성문과 대궐을 겹겹이 에워싼다.
이어 예조에서 의정부에 보고하고 중앙과 지방에 공문을 보내
도성과 지방의 관청으로 하여금 계령을 지키게 한다.
5일간 장이 열지 못하며 작은 골목에서 필수품만 매매하게 한다.
왕이 승하 후 3개월이 지난 뒤 졸곡(卒哭)을 하는데
졸곡 전까지 혼인이나 돼지나 소 등 동물의 도살이 금지된다.
이 때문에 국상 한 번 나면 백성들은 고기 구경도 못하고 혼인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의 장례위원회와 같은 임시 관청이 3개 설치된다.
이조판서는 의정부에 보고하여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을 설치하고 국장을 분담하게 한다.
자세히 알리자면 복잡하므로 간단하게 설명하려 한다.
빈전도감은 제조(감독·지휘하는 겸임관직)가 세 명이고
그 중 한 명은 예조판서가 맡는다.
빈전도감의 일은 세 관청 중 비교적 간단하여 소렴과 대렴에 입을 옷,
빈전(일반인은 빈소라 한다), 찬궁(관을 설치하는 일), 성복(상복을 입는 일) 등을 맡는다.
국장도감은 호조판서, 예조판서가 제조를 맡고
명기, 집기류, 악기류, 대여(관을 싣는 큰 가마), 지석, 제기, 책보 등을 만드는 일을 한다.
*산릉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에 의해 세워진 순릉 문인석. *
산릉도감은 가장 고된 일을 맡는 곳이다.
즉, 능을 조성하는 일을 총지휘하며
공조판서와 선공감정이 제조로 임명되고 당하관은 10명이다.
광중(무덤)을 파고 정자각과 현궁, 비각, 수복방, 재실 등을 짓는 일을 한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 판윤을 교도돈체사로 임명하여
장지까지 가는 다리나 길을 수리, 설치하는 일을 하게 한다.
3도감의 도제조는 의정부 좌의정으로 임명하여
3도감 총호사라 하고 장례의 모든 일을 총괄 처리한다.
국장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세 곳의 관청 조직을
지금까지 대충 봐도 의정부 좌의정, 이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공조판서, 한성 판윤이 참여한 중대한 국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영의정 이하 모든 고위관료가
능 택지에 서로의 목소리를 내려고 풍수의 지식을 동원했고,
지방의 관료들까지 국장에 참여하려고
잘 본다는 풍수를 뽑아 올리는 일이 허다했다.
명당에 국장을 잘 치른 뒤 풍수를 천거한 관료들이나 자기 의견이 채택된 대신들은
새 왕이 등극한 후 첫 인사 업무인 논공행상에서 벼슬이 올라가,
이후에 새로운 권력자의 눈에 들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인조의 장릉 뒤에 불쑥 솟은 잉은 명당을 증명하며
영조가 아들을 얻기 위해 정성들여 천장한 왕릉이다.
천장한 지 3년 후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얻었으나 ...
재미있는 것은 이 능의 택지 선택 과정에서
새 왕의 성향에 따라 관료들이 물갈이가 된다는 점이다.
왕심을 잘 읽어 왕의 내심에 맞는 능지를 선택하면 그대로 남아 승진하고,
잘 읽지 못하면 즉시 삭탈관직을 당하고 귀양을 가야 했다.
이 때문에 조선왕릉이라 해서 다 명당이 아닌 이유가 밝혀진다.
1776년 3월 5일 영조가 죽자, 10일 등극한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계승이지,
효장세자(영릉. 사도세자의 이복형)의 계승이 아니다'는 첫 교지를 내리고,
영조 생전에 신후 지지로 잡아놓았던 왕비 정성왕후가 묻힌
서오릉의 홍릉을 쓰자는 황해도사 이현모를 삭탈관직한다.
또 3월 28일에 국장을 총지휘하는 3도감 총호사를 갈아치우는가 하면,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했던 숙의 문씨를 삭탈관직하고 가족을 멸문했다.
권력의 판도가 달라지는 긴박한 순간이다.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 영조에 대한 정조의 복수는,
100여년 전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 하느라 비워진 파묘 자리에
할아버지 영조를 묻어버리기에 이른다.
*공릉 숲길의 가을 단풍과 붉은 차돌의 조화는 자연이 만든 예술작품. *
제 아무리 천하의 권력을 가진 왕일지라도,
죽으면 새로운 왕 앞에선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왕권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그리고 정조의 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복수장면이다.
국장은 비록 왕의 장례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긴 풍수를 빌미 삼아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는다'는 원칙에 따라
자신에게 필요한 측근을 곁에 두고 선왕의 골 아픈 실세들을
정리하는 기간이 국장 기간이기도 했다.
지금도 대통령이 바뀌면 새로 각료를 인선하는 것과 같이
왕이 국장을 맞아 자신의 권력에 필요한 관료로 바꾸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장례를 치르기까지 5개월 동안 계령이 내려져
겉으로는 전 백성이 애도하는 기간으로 못박았으나,
실제로는 장례기간 동안은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해 왕권을 다진 시기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영욕의 시간을 보낸
왕과 왕비가 떠난 자리 위로 지나가는 자연은 무심하지만,
왕과 왕비였다는 이유로 후세에 무덤 앞에 선
인간들에게 회자되고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20년대 장릉(파주)의 모습. (출처 : 조선고적도보).
현재와 비교해서 봉분 뒤의 소나무들도 조금 휑한 편이고,
석물들에 이끼도 많이 끼어있는 모습이다.
봉분의 모습도 현재와 비교했을 때 더 뾰족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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