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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7 강
37.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이는 선지사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7).”
마태복음 8장은 문둥병자와 중풍병자, 그리고 열병으로 누워 있었던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신 사건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왜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일에 관여를 하셨는가? 그것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하신 이사야서 53장에 있는 그 말씀을 이루려 하신 것이라고 마태복음의 저자는 해석을 했다.
1. 이사야서 53장 말씀을 이루려고 오심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사:52:13-15).”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이사야 53:1-9).”
이사야서 53장 1-9절 말씀은 유명한 종의 시라고 한다. 여기서 어떤 한 사람을 종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상하여 초라한 얼굴의 종의 모습이지만 그가 결국 열방을 놀라게 할 것이고 모든 인생도 그를 보고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마른 땅에서 나오는 연한 싹과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를 버리고 멸시했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을 어떻게 지극히 존귀하다고 말하고 있을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바로 이 종의 시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나온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모습으로 세상 앞에 비춰지게 되었는데, 세상은 그를 여러 모양으로 보았다.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메시아로 보았던 것이다. 당시에 예수를 받아들였어야 할 유대교에서는 그를 참람한 사람이라고 본 반면, 예수를 참으로 안 사람들은‘이 사람이 바로 종의 모습을 가진 그 사람이구나.’ 했던 것이다.
왜 유대교에서 예수를 그렇게 생각했는가? 그것은 자기 땅에 옴에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 함과 같이 어떤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아담의 세계에 와서 멸시를 받았는데, 왜 멸시를 받았는가? 아담은 모두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아담의 세계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온 그리스도는 아주 초라하고 볼모양이 없기 때문이었다. 두 세계가 다르고 두 사람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영광스러운 주님이시기 전에 아담의 세계 안에서는 버린 바 된 사람이었다. 아담 안에서는 쓸모가 없고, 가치도 없고, 용맹도 없는 사람이다.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도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려 할 때, 예수는 전혀 무용지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 거기에 필요하지 않는 돌이다. 어떤 집을 짓는데 합격하지 못한 돌과 같다. 세상이라는 집을 짓는데 예수라는 벽돌은 필요하지 않다. 예수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지어서 그로 하여금 땅을 경작케 하고, 땅에서 번성케 함으로 땅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가 땅을 경작하고 다스렸으면 하나님의 생명은 확장되어 그의 영광이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땅이 생산치 못하므로 엉겅퀴가 나게 되었다. 이 엉겅퀴가 바로 세상이다. 세상이 무성해진 곳에 새로운 한 씨가 왔을 때 무시와 멸시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가. 중풍병자가 치유 받음
예수께서 중풍병자와 문둥병자, 열병 앓는 사람을 고치셨다. 이 사건을 마태는 ‘이사야서에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한다는 분이 오신다고 하더니, 바로 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큰 능력으로 병을 고쳐주셨다고 하면 모두 다 이해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질고를 담당했다. 그가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졌다.”고 하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인생이 앓고 있는 문둥병, 즉 썩어 문드러져도 병인 줄 모르는 이것이 우리 인생의 현상이다. 당시에 이것은 유대교의 실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중풍병은 신체의 기능이 마비되는 병이다. 몸은 멀쩡하게 있는데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순리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항에 부딪혀 고통 당하고 있는 모습이다.
문둥병이나 중풍병은 아담 안에 있는 우리 인생의 모습이다. 이것을 치료하신 주님께 대하여 이사야는‘담당했다, 짊어졌다.’고 한다. 그가 우리의 모든 사정, 모든 형편을 친히 짊어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이런 모든 것들을 짊어지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를 치료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의 질고를 담당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병을 친히 담당해 버렸다는 말은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가 나를 완전히 담당해서 우리 병을 가져가 버렸고, 우리의 질고를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둥병 상태, 중풍병 상태, 열병인 상태를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문둥병과 중풍병과 열병이 해결되어 다시는 걸릴 필요가 없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이 종의 모습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어떻게 하면 문둥병에 안 걸리는가? 그것은 이 종 안에서만 안 걸린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 중풍병자, 열병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을 고칠 수가 있었다.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이 사람 안에서만 영원히 그런 병이 없는 것이다.
왜 유대교는 종교가 되었는가? 왜 문둥병 종교가 되어 버렸는가? 바로 연한 순 같은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중풍병에 걸렸던가? 그것은 종의 자리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창세기로 돌아가서 보면 왜 인생의 고통이 왔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왜 먹었는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하고 사탄이 속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고통이 왔다. 문둥병이 온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리를 거역했다. 흙으로 지음 받고 인생으로 지음 받아서 동산 안에 둔 우리의 위치를 합당하게 여기지 않아서 이탈했고, 그 위치를 감사히 여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모든 질고는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이미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를 떠난 데서부터다.
1) 우리의 십자가를 친히 담당하심
우리는 흙으로 정해졌다. 그 흙의 자리를 떠나면 중풍병이 생긴다. 우리는 사람으로 정해졌다. 그래서 사람의 자리를 떠나면 중풍병이 생긴다. 예수님이 이것을 친히 담당했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흙이면 흙, 사람이면 사람, 하나님이 정해주신 운명을 담당함으로써, 감사히 받음으로써 중풍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역한 우리를 그가 친히 담당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와 상관이 없게 된다. 그 자신이 우리의 연약한 운명을, 흙으로서의 운명을, 사람으로서의 운명을 십자가를 통해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이 질고가 떠나가게 되었다.
마태가 말한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문둥병 상태에 있는 우리의 인생을 영원히 치료할 수 있느냐, 즉 담당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마태는 예수께서 이것을 담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친히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고 우리의 약한 것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문둥병을 담당했고, 중풍병을 담당했고, 열병을 친히 담당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가 내 병을 담당하는가? 그 운명이 내 병을 담당한다. 그 운명 안에서 우리도 영원히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하고 시험한 것이다. 이 시험은 예수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전 인류에 관한 문제다. 사탄은 모든 사람에게 와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하고 있다. 이 문제는 예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인류의 문제, 모든 인간의 문제이다. 이것은 사탄과 인간과의 문제다.
여기에서 예수 자신이 담당하지 않으면 우리가 패하고 만다. 예수가 담당하시면 우리는 해방되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께서 담당하는가? 그는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담당하셨다. “나는 사람이고, 인생이고, 흙이다. 나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자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와 똑같은 운명을 가지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 없는 수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못한다는 사실은 천사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그가 그것을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분을 보면서 우리도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자신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만 살아야 하는 우리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고 개의치 아니하셨다 하는 말이 있다.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십자가를 친히 담당하셨다는 뜻이다. 그가 만일 이것을 부끄럽게 여겼다면 우리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그가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의 운명을 가지고 그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의 운명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2)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으로 나가심
사람이 왜 중풍병, 문둥병, 열병에 걸렸는가? 이 모든 인생의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사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생긴 것이다. 천사가 와서 “너는 선악도 모르냐? 너는 생명나무만 먹고서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한다는 말이냐? 너는 바보구나. 너는 로봇이구나. 너는 기계에 불과하구나.” 이렇게 조롱을 한다. 아담은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 그 운명을 짊어지지 않으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예수께도 마찬가지로 천사가 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만들어 먹을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명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너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것이 아니냐? 나도 너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겠다.”고 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어거든 뛰어내려 봐라. 그러면 우리도 믿겠다.” 심지어는 옆에서 같이 십자가를 지고 있는 죄인까지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라. 그래서 너와 우리를 구원해라.”고 조롱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최대의 수치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도 못하냐? 그것도 못하는 것이 하나님 아들이냐?’는 말이다. 그것을 예수께서 담당하지 않았다면, 만일 능력이 있어서 담당하지 않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었다면, ‘예수님은 참 굉장한 분이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질고를 담당할 수는 없다. 그가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문둥병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에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영문 밖으로 나간 것과 같이 우리도 부끄러움 없이 영문 밖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부끄러움을 담당했으니까 우리는 부끄럽지 않다. 내 운명을 대신해서 부끄러움을 당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 내 운명에 부끄러움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2. 천사 앞에 부끄러운 우리의 위치를 담당하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담당해야 될 그 부끄러움을 대신해서 담당하셨다. 우리는 중풍병에 걸릴 수밖에 없고 문둥병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부끄러웠기 때문에 걸린 것이다. 동산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위치가 떳떳하고 당연했다면, 왜 선악과를 먹었겠는가? 우리의 위치가 떳떳하지 못하고 당연하지 못했기 때문에 먹은 것이다.
왜 사탄에게 유혹을 당했는가? 내 위치가 떳떳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니까 유혹을 받은 것이다. 내가 감사하고 만족한 위치에 있을 때는 유혹 받을 필요가 절대로 없다. ‘나는 왜 인생일까? 나는 왜 흙으로 지어졌을까? 저 영물인 천사는 자유자재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통달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지어놓았는가?’
이 문제가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자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 부끄러움을 예수님이 담당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이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이가 이 부끄러움을 담당해 주신다면, 우리는 부끄러움이 없어지게 될 것이 아닌가. 제자들은 결국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높이 되신 것을 알았다. 이렇게 높이 되신 분이 이런 부끄러움을 친히 아무렇지 않게 담당하시더라는 것이다. 우리도 용기를 얻어서 이것이 부끄러움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천사보다 인생이 더 귀하구나.’ 그것을 우리가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못해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천사가 아니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 말하기를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히2:9)”라고 하듯, 우리가 천사보다 잠깐 동안 못하다는 것이다.
동산 안에 있을 때 아담이 천사보다 못하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 못하게 하심을 인하여 존귀와 영광으로 관 쓰신 예수를 봤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분명히 세상에 계실 때 천사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인 것이다.
그가 십자가를 통과해서 부활할 때까지 잠깐 동안 천사보다 조금 못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참으로 영광스럽고 존귀하다는 것이다.
3. 우리의 질고와 연약함을 담당하심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을 통해서 천사까지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다. 천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이냐? 사람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천사는 육신 없이 영만 있는 존재인데, 어떻게 육신을 가진 자가 영만 있는 자를 다스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만고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천사를 다스리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인생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천사를 부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천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서 해방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천사와 같이 될 것인가 하는 데서 해방되는 것이다. 인생이 더 고귀한 자리에 있고 인생이 천사를 지배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의 대표자이다. 모든 인류의 대표자인 것이다. 연한 순 같고 볼모양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우리가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결국 천사를 지배하고 세상을 통치할 하나님의 아들이고 후사라는 것이다. 이 사람이 마태복음을 쓴 사람에게 비춰온 것이다.
예수께로부터 고침 받은 사람은 그가 바로 이사야가 말하던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타인보다 더 상했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더 상하여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라게 할 것이다.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으리라 하셨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운명의 질고를 짊어진 사람이다. 우리 인생의 약한 부분을 담당하신 분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려 하다가 결국 실패하게 된다. 선악과를 먹은 후에 아담은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무화과 잎으로 자기 부끄러움을 가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 너더러 부끄럽다 하더냐? 아무에게도 내가 너를 부끄럽다 하지 않았다. 누구 때문에 부끄러웠느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절대로 아니다. 종교생활을 해보면 ‘나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 왜 나는 이런 추한 생각을 갖게 될까?’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천사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다.
이것은 본능적인 수치이다. 이 수치를 예수께서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이 수치 때문에 문둥병이 생겼고, 중풍병이 생겼고, 이 수치 때문에 열병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존귀함을 알기 전에는, 즉 우리의 질고와 우리의 약함을 담당하신 그분의 운명을 알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해방될 사람이 없다. 천사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드러나야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4. 나를 지으신 자 앞에 서 있으면 자유함
누가 나를 하늘로 끌어올리겠느냐? 누가 나를 땅으로 끌어내리겠느냐? 왜 이 말을 하겠는가? 그것은 자신이 천사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지으신 자 앞에 서 있으면 자유하고, 천사 앞에 서 있으면 부끄럽다. 사탄 앞에, 세상 앞에 서 있으면, 부끄러운 자로 발견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있으면 부끄럽지 않은 자로 발견된다.
지으신 자는 그 지은 자를 온전하게 지어놓았다. 지은 자와 지음 받은 자는 서로 부끄러울 일이 없다. 그러나 다른 자와 만나면 부끄러워진다. 아버지 앞에 있으면 우리는 영원히 부끄럽지 않다. 이 부끄러움이 없어져야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받으려고 애쓰거나 더 높아지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며 남이 자기를 무시해도 무시 당하지 않을 것이다.
창조된 모든 것의 위치는 변경시킬 수 없다. 변경되지 않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 흙인 나를 흙이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부끄러운가! 오히려 흙인 나를 금이라 하면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렇게 명백하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으면 내 실재가 드러난다. 요동치 않는 성이 되고 진동치 않는 내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나 자체가 바로 복이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자리를 거역하고, 항거하기 때문에 자꾸 열병이 나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동쪽으로 가도록 정해놨는데 서쪽으로 가려고 발버둥 치려는 것과 같다. 서쪽으로 가려니 열이 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고통은 열병과 같은 병이다.
그러면 이 병이 어떻게 완전히 치료가 되는가? 어떤 사람이 신유의 은사를 받아서 병을 고침 받고 왔다면 육신의 병은 고침 받았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인생의 근원적인 병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이고, 영원히 이 병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태는 8장에서 육신의 병 고침이나 신유의 은사를 말하지 않고, “우리의 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신 분” “우리의 질고를 친히 담당하신 분”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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