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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땀과 눈물로 얻은 세계최강 해병대 의장대 시범 (동영상 포함) - Performance of World No.1 ROKMC Honor Guard earned with Blood, Sweat, and Tears (included Video) ROKMC: the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 ▲ 동영상 - 해병대 의장대 시범
1953. 12. 10 해병대 의장대를 창설하여 해병대 각종 의식행사, 각군 의장행사, 9.15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및 9.28 서울수복 중앙청 국기게양 기념행사와 정부기관이나 기타 사회 단체에 해병대 의장대가 초청되어 시범을 보여 해병대 군기의 표상으로 알려져 왔다. 1955. 1. 15 제1상륙사단 창설 이후 해병대 의장대는 한국군 최초의 의장대 쇼를 개발하여, 여러가지 형태의 대형을 만들어가며 총대를 빙빙 돌리기도 하고, 공중으로 총을 집어 던지는 의장대 시범 특별 쇼프로그램으로 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모았는데 그 의장대 쇼를 위하여 군악대는 시작부터 끝까지 의장대의 변화무쌍한 동작에 맞추어 연주를 하였다.그 이후 의장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해군사관학교 원양실습훈련단에 동승하여 동남아 순회공연 등을 실시하며 해병대의 명예와 국위를 선양하였다. 1973. 10. 10 해병대 통.폐합 이후 해병대 의장대는 해체되고 제1사단 의장대를 존속 유지시켰으며, 1987. 11. 1 해병대사령부 재창설 이후 1994. 4. 4 해병대 의장대를 재창설하여 해병대 의장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 출처: 대한민국 해병대 홈페이지 해병대 역사 해병대 70년사 출처: 대한민국 해병대 홈페이지 해병대 창설기 ▶ 해병대 창설(1949.4.15.)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여건과 여·순사건의 전훈에 따라 상륙작전을 수행할 부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이어서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당시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 26명과 부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해군 13기에서 특별 모집한 해병대 병 1기생)으로 구성된 380명은 초대사령관 신현준 중령 지휘 아래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해병대 정신으로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1949년 8월 1일 장교와 부사관을 해군에서 추가로 증원받고 해군 14기 중 440명을 해병대 병 2기로 특별모집하여, 2개 대대 규모로 증편하였다. ▶ 진주 주둔(1949년 8월 ~ 12월) 해병대 김성은부대(약 1개 대대)는 1949년 8월 29일 진주로 이동하여 약 4개월 동안 진주에 주둔하면서,‘백성 없이 전투 없다’는 표어 아래 치안 확보, 민심수습, 선무공작 활동 등을 전개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온갖 노력을 경주하면서 지리산을 근거지로 진주지역 일대에 출몰하는 공비소탕작전을 실시하여 진주지역을 완전히 평정함으로써 해병대의 존재를 처음으로 국민에게 과시하였다.
▶ 창설기 교육훈련 신현준 사령관은 창설 당시 훈시를 통하여 정병 육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교육훈련 이념을 제시하였다. 첫째,‘해병대는 일치단결하여 유사시를 대비하여 교육훈련에 정진하자’, 둘째,‘민에는 양이 되고 적에는 사자가 되자’, 셋째,‘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하는 역사를 창조하자’고 하였다. 창설기에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강인한 훈련의 연속으로 ‘해병혼’과‘해병대 정신’을 주입하였으며, 그 결과 6·25전쟁시 상승불패의 해병대 전통을 수립하는 초석이 되었다. 특히 정신적, 육체적 도장으로 삼아왔던 천자봉 구보와 행군은 오늘날까지 해병대 장병들에게 긍지를 가지게 하는 훈련으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6.25전쟁기 ▶ 해병대와 6.25전쟁 해병대는 창설된 지 불과 1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장항·군산·이리지구에 투입되어 적의 남진을 지연시켰고 진동리지구 전투에서는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빛나는 영예를 차지하였으며 통영상륙 작전에서는‘귀신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얻는 등 연전연승하였다. 특히, 북괴군의 발악적인 최후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해병대는 동년 9월 15일 한반도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에 미 제1해병사단과 같이 참가하여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9월 20일부터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감행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수훈을 세웠다. 인천에서 함정으로 원산·함흥지역으로 이동, 분전하던 해병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하였고, 1951년 1·4후퇴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전을 실시할 때 북진하던 중 적의 철옹성과 같았던 도솔산과 펀치볼 일대를 공격, 이를 탈취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받고‘신인이 경탄할 공훈’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한편, 해병대는 1951년 2월부터 동·서해안 전략도서 확보 작전을 수행하여, 휴전 뒤 서해 5개 도서를 아군의 통제 하에 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2년 3월, 중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해병대는 장단(사천강)지구 전투를 1년 4개월 동안 수행하면서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을 격퇴하고 현 전선에서 휴전을 맞이하였다. 전후 정비기 ▶ 교육단 창설(1953. 2. 1.) 6·25전쟁 기간 중 교육훈련의 중요성을 절감, 독자적인 해병대의 장교, 부사관, 병을 양성하기 위하여 해병학교 및 해병훈련소를 기간으로 해병 교육단을 창설하여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식 교육훈련으로 강인한 해병을 창출하는 산실 역할을 수행하였다. ▶ 제1여단 창설(1954. 2. 1.) 제1전투단을 기간으로 제1여단을 창설하여 파주군 금촌면에 주둔하면서 상륙작전부대로서 조직을 정비하고 서부전선 및 수도권 방어 임무를 수행 하였고, 1954년 3월 17일 미 해병대 제1사단의 본국 철수로 작전지역 작전권을 인수하였다. ▶ 제1상륙사단 창설(1955. 1. 15.) 제1여단을 기간으로 제1상륙사단을 창설하여 수도권 방어 임무를 수행 하면서 상륙훈련을 실시하였고, 1959년 3월 28일에는 파주 금촌에서 포항으로 이동하여 상륙작전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1959년 3월 30일, 대통령령 제1468호에 따라 제1상륙사단으로 개칭하였다가 1973년 10월 10일, 제1해병사단으로 부대명칭이 변경되었다. 제1사단은 국가 유일의 전략기동 부대로서 완벽한 출전준비태세를 유지하다가 유사시 동·서해안에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부대로서, 북괴군 5개 군단을 고착,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해병대사령부 서울용산으로 이전(1955. 3. 26.) 1949년 4월 15일 진해에서 창설한 후 6·25전쟁이 발발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해병대사령부는 전투부대와 함께 부산 → 인천 → 서울 → 고성 → 원산 → 진해로 이동하다가 1951년 5월 20일에 부산 용두산 공원으로 이동하였다. 이렇듯 싸우면서 자라온 해병대사령부는 휴전 후 서울 용산으로 이동하여 해병대 부대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베트남 파병기 ▶ 해병대 베트남전쟁 파병 (1965. 9. 20~1972. 2. 29) 1965년 8월 13일, 정부와 국회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파병부대로 제2여단(청룡부대)을 창설하여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전투부대로는 최초로 외국 원정군으로 파월하였다. 캄란에 상륙한 청룡부대는 투이호아지구, 추라이지구, 호이안지구 전투를 수행하면서, 6년 5개월 동안 짜빈동 작전 등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 청룡부대 창설(1965. 9. 20.) 공산군의 위협에 대처하고 있는 자유 우방국으로서 공동 운명체의 사명감을 느껴 동남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는데 기여하고, 6·25전쟁 시 자유 우방 국가들의 은혜에 보답하며, 자유와 정의를 이룩한다는 사명과 의의를 가지고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에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초 해병대 1개 여단을 포함한 육군 1개 사단(-1)의 파월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경북 포항기지에서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해병 제2 여단을 창설하여 박정희 대통령 참석 아래 전 국민의 축복과 성원을 보내는 가운데 결단식을 가졌다. 제2여단은 미 수송선에 탑승하여 동년 10월 3일, 부산항을 출항하여 10월 9일, 베트남 캄란 만에 도착하였다. ▶ 제5해병여단(1966. 11. 23.) 해병대는 제1사단 제2연대를 기간으로 제2여단(청룡부대)을 편성하여 파병한 후 제1사단이 전략기동예비대로서 임무수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심각한 상태였다. 해병대 임무수행능력 보강을 위하여 5,470명의 병력이 보충되어 창설 이후 최초로 30,430명으로 증강된 병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증강된 병력으로 1966년 11월 14일, 제5연대를 신편하고 이 부대를 기간 으로 1966년 11월 23일, 새로운 전투여단인 제5여단을 창설하여 8년 동안 김포반도에서 휴전선을 지킨 제1임시여단과 1967년 1월 23일, 부대를 교대함으로써 서부전선 수도권방어력을 보강하였다. 제1임시여단은 수도권방어 임무를 마치고 제1사단으로 복귀함에 따라 제1사단 전투력이 강화되어 전략 기동예비대로서 임무 수행 능력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시련과 도약기 ▶ 해병대 사령부 해체(1973.10. 10.)
군은 유신과업 수행을 위한 군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고, 전투력 위주로 정비를 강화하여 자주국방 태세를 조속히 확립하며, 국가 자립경제 발전을 위해 경제적으로 군을 관리·운영하기 위하여 대통령 분부사항 (1973. 5.29.) 및 해병대 운영개선에 관한 국방부 훈령 제157호(1973.7.10.)에 의거, 해병대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전투부대를 제외한 해병대 사령부와 교육 및 지원부대를 해군에 통·폐합시켰다. ▶ 해병 참모부(1973. 10. 1.) 국방부 훈령 제157호에 의거하여 해군본부 내 해병참모부를 편성·운영하여 해군참모총장을 보좌하고 제2참모차장의 지시에 따라 해병대 부대의 상륙작전, 도서방어작전, 교육훈련과 교리 발전에 관한 사항을 분장하였으며, 해병대사령부 재창설시까지 해병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 관리하였다. ▶ 연평부대(1974. 9. 20.) 및 제6해병여단(1977. 1. 1.) 창설 해군본부 일반명령 제10호에 의거 1974년 3월 11일 해군 도서경비부대를 해군 도서방어부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74년 9월 20일부로 연평도를 경비하던 2중대와 우도경비소대를 통합하여 해군 도서방어부대 예하부대로 연평부대를 창설하였고, 제6해병여단 예속의 연평부대를 실질적인 지휘가 가능 하도록 1996년 1월 1일 해병대사령부 직할부대로 예속 변경하였으며, 해군 본부 일반명령 제9호에 의거 1977년 1월 1일부로 해군 도서방어부대를 해체하고 제6해병여단을 창설하였다. 제6해병여단과 연평부대는 서해 최북단 6개 전략도서를 방어하는 부대로서 적 활동을 감시하며, 경제수역 확장 및 주변 어로작업을 보장하고 있다. ▶ 제2해병훈련단 창설(1977. 1. 1.) 1977년 1월 1일 창설된 제2해병훈련단은 1987년 11월 1일 해군본부 직할에서 해병대사령부 예하로 예속변경 되었으며, 1996년 11월 1일 해병대교육 훈련단으로 개칭하여 교육부대에 적합하도록 일반형 참모형태에서 부장형 참모형태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1998년 3월 1일, 해병대사관후보생 양성과정을 해군교육사령부에서 인수하고 장교교육대를 장교교육대대로 개편하여예하에 장교 초군반 중대와 사관후보생 중대를 편성함으로써 해병대 장교 양성교육을 25년만에 해병대 주관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또한, 2002년 3월 1일부로 상륙전교육대대를 창설하고 상륙전고군반 교육과정을 해군대학으로부터 인수하였으며, 2004년 4월 1일부로 포병교육대와 수색교육대를 신편하여 현재의 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교육훈련단 현대화 필요성에 따라 2000년 8월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사업이 추진되어 명실상부한 해병대 양성·보수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제2해병사단 창설(1981. 4. 16.) 해병 제2여단은 1973년 10월 10일 국방부 훈령 제157호에 의거, 제2해병여단으로 부대명칭이 변경되었다. 1979년 4월 1일 제2포병단을 창설하고 1981년 4월 15일에 제1연대, 제5연대, 제8연대를 신편하여 1981년 4월 16일, 해군본부 일반명령 제8호에 의거 제2해병사단을 창설하였다. 제2사단은 수도권 서측 관문인 김포와 강화도(26개 부속도서 포함)를 방어하며, 유사시 연안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재창설기 ▶ 해병대사령부 재창설(1987. 11. 1.) 경제적 군 운용이라는 미명하에 해병대사령부 및 교육, 군수지원부대가 해체되어 해군에 14년간 통합 운용된 해병대는 전력관리의 문제점이 나타나 상륙작전에 관한 지휘구조를 개선할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해병대 부대를 통합 지휘할 해병대사령부를 재창설하였다. ▶ 연합해병사령부(CMFC) 창설(1992.12.1.) 한미 군사위원회 제10차 상설회의 각서 제1호(1999.10. 2.)에 따라 연합 작전을 계획하고 실시하기 위하여 연합사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연합해병 작전능력을 통합·발전시키기 위하여 창설하였다. 주요내용은 연합사의 지휘체제 하에서 선임해병사령부로 발족하고, 창설과 동시에 한국 해병대 병력을 작전통제하며, 계획된 미 해병부대들은 대한민국 도착과 동시에 연합해병사가 작전통제하고, 창설과 동시에 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이 평시 연합해병사령관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기반 조성기 ▶ 상륙지원단 창설(1994. 4. 4.) 1977년 1월 1일부로 제1해병사단 해안지원단으로 창설되었다가 1994년 4월 4일 해병대사령부 직할부대인 상륙지원단을 창설하였다. 이후 2014년 2월 4일부로 해병대 군수지원단으로 개칭되었다가 2015년 4월 6일부로 해병대 군수단으로 개칭되어 전·평시 해병대 전 부대에 대한 군수지원 전담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 해병대사령부 발안으로 이전(1994. 4. 6.) 해병대사령부는 재창설된 직후부터 해군본부 부속건물인 기지병원을 개축하여 사용하던 중 재경부대 교외 이전계획(1988. 4.15.)에 의거, 경기도 서해안으로 해병대사령부 이전을 결정하고 52개 지역을 대상으로 33회 검토하여 현 위치인 화성시 봉담읍 형제산 기슭에 사령부를 신축한 후 이전함으로써 해병대의 전통을 계승하고 미래지향적인 해병대 역사를 창조하는 요람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CMCC) 창설(2008. 2. 20.) 한·미 군사위원회 제21차 상설회의 각서(2008. 2.20.)에 따라 연합사의 연합해병 능력의 통합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창설하였다. 연합사령부에 대한 주요 변경내용은 창설과 동시에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는 지정된 한국 해병대 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지정 또는 명시된 미 해병대 부대는 한국 전구에 도착과 동시에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로부터 전구 작전통제 또는 전술통제를 받으며, 정전 시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사령관은 한국 해병대 사령관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시지휘권 전환을 위한 발전과 협조를 지원하기 위하여 향후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의 모든 연합사 연습 및 연습계획발전은 한국 해병대 주도로 실시하고, 전시 연합해병구성군사령관은 미 해병 장성이 수행하여 임무를 계획하고 시행하기 위한 본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2011. 6. 15.) 연평도 포격전(2010.11.23.) 발발 후 정보, 감시자산 및 타격수단이 강화된 강력한 서북도서 전담 방위사령부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백령도, 연평도 등 서해5도 방어를 전담하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창설하였다. 해병대사령부를 모체로 정보참모처, 작전참모처, 화력참모처와 항공지원작전본부, 해상지원 작전본부 등 창군 이래 최초로 육·해·공군 전력을 운용하는 합동참모부의 성격으로 편성된 서북도서방위사령부는 해병대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실질적인 작전사령부로서 합동작전 운용능력을 완벽하게 발휘하고 있다. ▶ 제9해병여단 창설(2015. 12. 1.) 1950년 12월 11일, 해군본부 직할부대인 해군제주기지로 창설되었고 1962년 10월 15일, 육·해·공군 및 해병대가 포함된 통합사령부가 창설되었다. 1974년 1월 28일에는 지·해상 방어 임무를 수행하도록 육·공군이 해체 되고 해병대 장성이 지휘하도록 개편되었으며, 1986년 2월 1일부로 제주 방어사령부로 개편되어 제주해역 및 주변 도서방어 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이후 ’14~’30 국방개혁 기본계획 추진으로 2014년 3월 12일, 국방부 부대 구조 개편 지시에 따라 해병대 제9여단이 창설되어 통합방위작전과 예비군 관리 및 교육훈련 임무 수행으로 남방해역 도서군 안정화에 기여하고 있다. ▶ 지휘관리개선 지휘관리 개선 공포문 1973년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된 이후 14년만인 1987년에 재창설 되었으나 지휘권 행사를 위한 법령이 개정되지 않아 여전히 재창설 이전과 같이 해군에 예속된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에 역대사령관들은 상부에 문제점을 끊임없이 제기하였고, 예비역들도 전우회를 중심으로 국회 및 청와대에 관련 법령 개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차적으로 해병대는 작전지휘체계를 보강하기 위하여 부대령 부대와는 그 위상이 다른 직제령 부대로서 해병대사령부가 해병대 부대를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8월 1일부로 공포된 법률 제4249호 국군조직법과 1990년 9월 29일 공포된 대통령령 재13113호 해병대사령부 직제령에 의해 해병대사령부는 육군의 군사령부나 해·공군의 작전사령부와는 다르게 합참 군령계선상의 작전사령부이면서 해병대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을 관장하는 군정사령부임을 보장하여 해병대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실질적인 지휘기능이 보장되지 않아 1993년도에 해병대 지휘관리 개선 연구팀을 발족하여 작전 및 부대 지휘시 문제점을 해군본부에 건의하였고, 1997년 12월 해군본부와 국방부에 해병대 지휘관리체제 개선위원회가 구성되어 1991년 1월 21일 해병대사령관이 해병대 부대를 지휘하도록 조직 및 정원에 관한 통칙, 해병대직제령, 군인사법시행령, 국방기획관리 예산 및 군수품 관리, 국방보고규정, 군무원 인사관리지침, 예비군 실무편람 등 법령 및 규정을 개정하여 미래전에 대비한 다목적 신속대응군으로서 해병대 위상을 제고하였다. 해병대는 1·2차 지휘관리 개선을 통해 일부 법률 개정의 성과를 얻었으나 여전히 예산, 전력, 예산분야 등에 관한 실질적인 지휘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전이 발생하여 해병대에 대한 국민적 여론과 국회의 요구에 의해 2011년 1월 14일, 해병대의 인사·예산권을 강화하고 해병대의 주임무를 상륙작전으로 명시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해병대 독자적 지휘권 확립 법안이 발의되었고, 2011년 4월 22일과 6월 23일 국회 국방위원회 및 국회 본회를 통과하여 2011년 7월 14일 국군조직법, 군수품관리법, 군인사법 등의 개정법률안이 공포되어 2011년 10월 15일부로 시행되어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국군조직법상 육·해·공군과 함께 국군의 한 조직으로 해병대사령관은 인사, 예산, 전력편성 등 해병대 지휘에 있어 독자적인 지휘권 행사를 법적으로 보장받아 해병대 및 해병대사령관의 위상과 권한이 통·폐합 이전의 수준 으로 강화되었다. ▶ 다목적 신속대응군
21세기를 준비하는 해병대 해병대는 소수 정예군으로서 임무와 역할이 다양하고 막중하다. 상륙작전, 지상작전, 특화거점방어, FEBA 방어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국토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인 서북도서에는 제6여단과 연평부대가, 제주도에는 기존의 제주방어사령부를 해체하고 제9여단을 창설(2016.12.1.)하여 이를 굳건히 방어하고 있다. 21세기 해병대는 현재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미래의 전장환경에 적합한 다목적 신속대응군으로서 고강도 전면전으로부터 전쟁 이외의 군사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상시 전투 준비가 완료된(Force in readines)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장차전의 양상은 해상을 통한 전력투사로 연안지역 중심의 작전이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장차전의 양상에 대비하여 해상 및 공중을 통한 입체적 상륙돌격, 연안 도시지역 작전, 초수평선 입체기동상륙작전, 전략도서 및 전략기지 방어 작전 등의 교리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