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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세계
-마이클 하이저Michael S. Heiser-
Part 1. 가장 중요한 것들
1. 생전 처음 읽어 보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에서 분수령과 같은 지점들이 있다. 그 이후론 어떤 것도 예전 같지 않은 결정적인 전환점 말이다. 내 삶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고 그 순간이 이 책의 발화점이 되었다. 대학원 시절, 교회에서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리던 날이었다. 예배 시작 전에 나처럼 히브리어 연구 박사과정 중에 있던 친구와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가 내게 자신의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82편을 펼쳐 보이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자, 여기, 이 부분을 읽어봐. 찬찬히 보라고.” 첫 구절이 날벼락처럼 나를 강타했다.
“하나님(엘로힘)은 신들의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엘로힘)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이 짧은 한 절에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온다.
엘로힘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첫 번째 엘로힘은 무난하고도 자연스러운 용례다. 히브리어 문법을 아는 나는 두 번째 엘로힘이 복수형으로 번역되어야 함을 단박에 알아챘다.
해답을 찾기 위해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탐사하려는 땅은 복음주의자들이 아예 발 들여놓기를 주저하는 학계의 불모지임을 깨달았다.
여기서 신들(엘로힘)은 그저 인간(유대 장로들)을 가리킨다거나 그 구절이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라는 주장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둘 다 정답이 아님을 알았다. 시편 82편은 신들이 세상의 나라들을 다스리는 일에 부패했다고 고발하는 내용이다.
그 여정에 15년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 종착점이 바로 이 책이다. ~~~시편 82편은 나의 박사논문 주제가 되었고, 나는 이 논문을 통해 이스라엘 유일신 사상의 핵심과 성경 기자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대해 정말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탐구했다.
나는 여전히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고유성을 믿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영감설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좀 더 솔직해지자면, 이런 교리뿐 아니라 다른 교리들에 관해서도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은 성경 본문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
이 책에서 당신이 접할 내용은 기독교 교리라는 소중한 손수레를 통째로 뒤엎진 않더라도 지뢰밭길이 될 것이다.
2. 기본 수칙
[본문 여과 장치]
전통은 우리가 성경을 정리하기 위해 고안한 체계다. 전통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전통은 여과장치다.
[모자이크]
성경의 사실들은 조각들, 그러니까 흩어진 데이터에 불과하다. ~~~우리는 조각들로 만들어진 모자이크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성경은 신학적, 문학적 모자이크다. 모자이크의 패턴은 아주 가까이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저 무작위로 끌어다 놓은 조각 모음처럼 보인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면 놀랍게도 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각각의 조각들은 꼭 필요한 것들이다. 그 조각들 없이는 모자이크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족가의 의미는 완성된 모자이크 안에서 발견된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는, 당신의 여과장치를 제거하고 성경의 조각들을 모자이크의 일부로 바라보는 작업에 돌입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장애물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여과장치를 통해 성경을 보는 방식에서 모든 조각들이 모자이크를 형성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이행하는 데에는 몇 가지 심각한 장애물이 있다. 모두 내가 경험한 것들이다.
1)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가 성경의 실제 배경이라고 생각하도록 훈련 받았다.
성경 해석을 위한 적절한 배경은 성경 기자들이 처했던 상황이다. 즉, 성경이 생성되던 당시 상황이다.
교회 안에는 신조와 신앙고백과 교파적인 특성이라는 것으로 성경을 여과하려는 경향이 만연하다. ~~~신조는 유익하다. 신조는 주의 깊게 선별된 중요한 신학사상의 요체다. 그러나 신조는 그것이 영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성경과는 다르다. 신조는 성경 본문을 대체할 수 없다.
성경 본문은 주전 2천 년과 주후 1세기 사이에 고대 근동과 지중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결과물이다. 성경 기자들이 어떻게 사유했는지 이해하려면 당대 지적 활동의 결과물들을 추적 탐구해야 한다.
2)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역동성과 그 신학적 중요성에 무감각해진 상태다.
현대 기독교는 두 가지 심각한 맹점을 안고 있다. 첫째, 많은 기독교인들이 말로는 초자연계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은 회의론자처럼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간다.
은사주의 이외의 진영에서 초자연계에 대해 문을 닫은 듯한 경향을 보이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은사주의의 관행이 건전한 성경 주해와 거리가 있다는 의구심이다. 또 다른 원인은 기독교인 스스로도 그리 떳떳하게 여기지 못하는 부분인데, 교회가 스스로 만든 현대 합리주의 아래에서 휘청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수백 년 동안 외면해 왔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삼위일체 없는 기독교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우리는 수군거리거나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
두 번째 심각한 맹점은 은사주의 운동 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바로 체험을 성경보다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의 대 전제는 생동하는 영적 세계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에 대한 개념적 틀은 대체로 체험과 사도행전에 대한 엉뚱한 해석에 의해 형성된다.
현대 복음주의의 하위문화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체험들을 신학에서 배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도록 훈련받았다. 결과적으로 신학은 이런 체험을 중시하지 않는다.
3) 우리는 성경의 많은 내용들이 너무 이상하거나 주변적이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속단한다.
위스콘신으로 이사한 직후 우리 부부는 ~~~한 교회를 발견했다. ~~~세 번째 교회를 방문했을 때 ~~~베드로 전서 3:14~22를 설교할 차례였다. ~~~목사님은 사뭇 진지한 어조로 선포하셨다. ~~~“ 이 부분은 내용이 너무 이상해 그냥 건너뛰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지 어언 30년이 넘었지만 이에 대한 설교(시편 82편)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여기 몇 가지 예들은 제시한다.
창1:26/창3:5,22/창6:1~4/창:10~11장/창15:1/창48:15~16/출3:1~14/출23:20~23/민13:32~33/신32:8~9/신32:17/삿6장/삼상3장/삼상23:1~14/왕상22:1~23/왕하5:17~19/욥1~2장/시82,68,89/이사14:12~15/겔28:11~19/단7장/마16:13~23/요1:1~14/요10::34~35/롬8:18~24/롬15:24,28/고전2:6~13/고전5:4~5/고전6:3/고전10:18~22/갈3:19/엡6:10~12/히1~2장/벧전3:18~22/벧후1:3~4/벧후2:4~5/유5~7절/계2:26~28/계3:21.
이것은 단순한 목록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모은 것이며 이 책에서 이 모든 본문을 검토할 예정이다.
Part2. 하나님의 권속
3. 하나님의 수행단
[하나님의 가족]
성경적으로 답하자면, 창세전에는 하늘에 속한 무리, 즉 천군heavenly host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사실 그들은 창조의 목격자다. 이 점은 욥기 38:4~7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대 셈족 사회에서 ‘하나님의 아들들’(히브리어로 브네 엘로힘)이란 고위직 또는 상위의 통치권을 가진 신적 존재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천사(사자)angel(히브리어로 말라크)는 중요한 자리는 맞지만 하나님의 아들들보다 하위에 속한 메신저의 직무를 뜻하는 용어다.
고대인들은 신적 존재가 인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한 원거리에 산다고 믿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 곳은 하늘, 천상이었다.
그렇다면 맨 처음부터 하나님 곁에는 일행, 곧 다른 신적 존재들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창세전에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 대부분의 논의에선 천군의 구성원들이 누락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로 이루어진 신적 가족이 모자이크의 첫 번째 조각이다.
[하나님의 권속]
몇몇 구약 본문을 보면 천상의 영역에도 이런 통치구조가 존재한다. 아마도 이를 가장 분명하게 묘사하는 본문은 시편 82편일 것이다.
“하나님God(엘로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엘로힘)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4. 유일하신 하나님
[신적 존재들은 인간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시편 82편이 말하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에 반대하며 이 시편이 성부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다른 구성원들, 즉 성자나 성령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결국 이단적일 수 밖에 없다.
이 시편은 엘로힘으로 불리는 하나님이 다른 엘로힘들의 부패성에 대해 심판하시는 내용이다.
유대인들은 6절이 말하는 지존자의 아들들이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유대 독자들도 이 견해를 선호한다. 이 인간설은 삼위일체설만큼이나 잘못이다.
[복수형 엘로힘은 다신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많은 학자들은 시편 82편과 몇몇 구절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가 다신론 체제로 출발했다가 유일신론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믿는다. 나는 이 해석에 반대한다.
문제의 근원은 엘로힘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못 해석한 데 있다.
[엘로힘은 실재하는가?]
그들(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엘로아)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세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엘로힘).-신명기 32:17-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음란하게 숭배하던 엘로힘이 명백하게 귀신들(세딤)이라고 말한다.
[우상숭배에 대한 오해]
고대인들이 돌이나 나무의 형상 자체를 신으로 믿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성경 기자들을 오해한 것이다. 고대의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이 만든 대상에 신이 들어와 산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동상의 입을 여는 의식을 행했다. 입과 콧구멍을 여는 의식을 행하면 신의 영이 우상 안에 깃들어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시편 82편을 읽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구체적인 문제 제기를 한다. 만일 하나님에게 다른 신적 아들들이 있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묘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요1:14,18, 3:16,18, 요일4:9).
독생자라는 표현은 안타깝게도, 특히 현대인들이 듣기에 혼란을 주는 번역이다. 이 번역은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명백한 진술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아들 예수가 부재했던 때가 있다는 암시를 준다.
독생자라는 표현은 헬라어 모노게네스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출생했다는 의미의 독생자를 뜻하지 않는다. 이 혼동은 헬라어에 대한 해묵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오랜 세월 모노게네스는 모노스(유일한)와 겐나오(출생하다, 낳다)라는 두 헬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졌다. 헬라어 학자들은 훗날 모노게네스의 뒷부분이 헬라어 겐나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게노스(계층, 유형)라는 명사에서 유래한 것임을 발견했다. 게노스의 문자적 의미는 독특한 또는 고유한 이다. 여기에는 시작점이 있다는 의미에서 피조된 존재라는 식의 함의가 전혀 없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사실상 여호와와 동일시되며 하나님을 섬기는 엘로힘들과는 다른 고유한 존재이므로 모노게네스는 구약의 언어와 모순되지 않는다.
신약 성경을 보면 이 해석의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잇다. 히브리서 11:17은 이삭을 아브라함의 모노게네스라고 칭한다. 구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삭이 아브라함의 독생자 아들이 아님을 알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스마엘의 아버지였다. 모노게네스가 의미하는 바는 틀림없이 인간이 언약에 따른 약속의 아들이므로 아브라함의 아들 중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지닌 아들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고유한 아들이시며, 그 밖의 다른 어떤 아들들도 결코 예수님과 같지 않다.
5.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만물, 즉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보이는 지상 영역 모두를 다스리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두 영역 모두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창조자 또는 창조자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천상회의를 잘 모르는 이들이 쉽게 오역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많은 성경 독자들이 복수형 대명사(우리)의 의미에 대해 궁금해 한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히브리어 문법과 주해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들은 삼위일체의 해석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단서는 바로 단수로 지칭된 하나님이 천상회의에 속한 무리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에 있다.
천상회의의 다른 인원들은 인류 창조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인류 창조를 지켜볼 뿐이다.(욥38:7)
[형상 또는 형상 담지자?]
[하나님의 두 가족-권속-회의]
하나님은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행할 대표자 역할을 맡기기 위해 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엘로힘이라는 존재도 창조하셨다. 그들도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 영역에서 하나님의 대표자 역할을 맡으며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 그들은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천상회의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회의기구이자 행정부 역할을 맡는다. 결과적으로 엘로힘의 복수형은, 비록 다른 영역에 있지만 인간과 비인간을 망라하는 하나님의 가족들이 형상 담지자라는 신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성경 신학적 개념은 신구약 모두의 여러 다른 본문과 개념을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
6. 동산과 산
우리는 구약이 두 가지 형태의 권속-가족을 말하고 있으며 그 중 하나는 인간 가족이고 다른 하나는 비인간 가족임을 배웠다. 이 두 가족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대표자로 지음 받았다.
보통 창세기 2:8에 묘사된 대로 에덴을 최초의 인간이 본향으로 불렀던 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덴을 인류의 본향으로만 설명하면 에덴의 1차적 위상을 간과하게 된다.
에덴은 하나님의 지상 집이자 하나님의 거주지였다. 그리고 왕이 사는 곳은 어전회의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고대의 배경]
고대 이집트인과 메소포타미아인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상회의의 통치를 받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신들의 거처, 즉 신들이 살기도 하면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회집하는 장소는 여러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가장 흔한 것이 동산과 산이다. 구약에서 에덴은 동산과 산 이미지로 묘사된다.
[고대 우가리트]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에 인접한 고대 시리아의 도시국가 우가리트의 덜 거창한 고대 문명이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가리트 유적지는 1928년 발견된 이래로 수십 년에 걸쳐 발굴이 진행되었다. 수천 권의 토판들이 있는 도서관, 그 토판 중 대략 1,400여 개가 다른 어떤 고대어보다 성경 히브리어와 비슷한 철자로 되어 있었다.
우가리트 최고의 신은 ‘엘’ 이었다. 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 중 하나다. 엘에게는 엘의 아들들로 구성된 천상회의가 있었다. 엘의 공동 통치자는 ‘바알’이었다. 엘과 바알의 일이 겹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우가리트와 이스라엘의 지리적 근접성을 고려할 때 바알 숭배가 이스라엘에서 그토록 골칫거리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엘과 바알은 이스라엘의 여호와와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가리트의 천상회의는 최고 권세자 엘(엘은 공동 통치자인 고관 바알을 통해 대부분의 판결을 내렸다), 엘의 아들들, 그리고 메신저 역할을 하는 신들(말라킴)까지, 이렇게 삼층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엘의 회의는 어떤 산 또는 울창한 동ㅅ나에서 열렸다. ~~~신들의 회의가 열린 장소는(북쪽이라는 의미의) ‘짜파누’라는 멀리 떨어진 북쪽의 꼭대기였다.
[여호와의 거처]
히브리어 성경은 여호와의 거처와 보좌가 있는 어전회의실에 대해 동일한 표현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여호와가 계신 곳에는 업무 수행 태세를 갖춘 천상회의가 여호와를 둘러 서 있다. (비교:왕상22:13~28, 사6장). 구약의 회의기구 역시 우가리트처럼 삼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여호와가 그 정점에 계신다. 그 아래에는 하나님의 가족-권속(하나님의 아들들)이 있다. 맨 아래층은 엘로힘의 메신저인(천사로도 qsj역됨) 말라킴의 자리다. 출애굽기부터 사사기까지 계속 언급되는 텐트형 성막과 회막은 명백히 하나님이 거하시며 명을 내리는 장소에 해당한다. 여호와 역시 산(시내산이나 시온산)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시편 48:1~2을 보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북쪽 꼭대기(히브리어로 짜폰)에 위치해 있다고 되어 있다. 시온산 역시 북쪽 꼭대기(북극)에 위치한 집회의 산이었다(사14:13). 시내산에서 모세와 다른 이들은 좌정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발치의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한 길을 보았다(출24:9~10).
에덴동산도 울창하고 물이 넉넉한 거주지였다(창2:5~14). ~~~시온산이든 시내산이든, 하나님의 산은 사실상 하나님의 성전이다.
[함의]
성경에서는 신들의 거처에서 열리는 신들의 회의에 인간이 포함된다. ~~신학적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에덴이라는 장소를 단지 자신만의 영역으로 창조하신 게 아니며,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살기 원하여 만드셨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자신이 창조하신 이 새 땅에 왕국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원하셨고, 그 통치를 인류와 함께하기 원하셨다. 또한 천상회의는 여호와가 계신 곳이므로, 천상과 지상의 가족-권속은 합력하여 그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만일 타락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영화롭게 되었을 것이고 이 천상회의의 일원으로 남았을 것이다.
7. 에덴, 지상에 이 같은 곳이 없더라
[지구가 곧 에덴은 아니었다]
실제로 에덴은 지상에 있는 자그마한 땅덩어리였다. 그 입지는 지리적 표식으로 경계가 그어져 있었다(창 2:8~14).
[하나님의 선포와 협력관계]
☞ 왕상 22:16~23, 다니엘 4장. 은 천상회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8. 오직 하나님만 완전하시다.
[배경]
욥기는 기이한 책이다. ~~이야기는 천상회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천상회의 도중 사탄이 등장한다. 사탄 서열은 불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같은 계급인지, 아니면 천상회의의 하급관리로 등장하는지, 이에 대한 언어는 모호하다. ~~~낮은 신분일 가능성이 크다.
사탄은 땅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보고하는 여호와의 눈이자 귀다. 욥기 1~2장에 등장하는 사탄은 악당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긴 일에 충실할 뿐이다. 욥기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사탄을 (신약에서 마귀로 알려진) 창세기 3장의 뱀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구약에서는 창세기 3장의 뱀이라는 존재에 대해 사탄이라는 히브리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ㄴ느다. 사실 구약에서 이(사탄이라는)단어는 인칭 고유명사가 아니다.
구약에서 사탄이 정관사 없이 등장하는 사례들 역시 마귀나 뱀이라는 특정 인격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경우는 누군가에게 맞서거나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따금 파송하시는 인간 혹은 여호와의 천사를 일컫는다(예. 민 22:22~23).
[자유로운 형상 담지자들]
9. 위험과 섭리
[하나님의 선물]
왜 하나님이 이 땅의 악과 고통을 없애지 않으시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러면 모든 형상 담지자들도 없애 버려야 하므로 하나님이 그렇게 못하신다는 답은 이율배반처럼 들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말에는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에 위험부담이 따를 것을 아셨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셨다.
악이라는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경이로운 선물이다. 하나님의 결정은 사랑의 발로였다. 이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다른 대안을 고려해야 한다. 1)아예 생명을 두지 않는 것. 2) 오로지 명령에 복종하고 설계에 반응하기만 하는 생각 없는 로봇을 두는 것.
[선악을 알다]
[악과 예지]
타락은 예정되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어떻게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 되는가?
창세기에는 예지, 예정, 전지 같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
사무엘상 23:1~13을 보자.
다윗은 전지하신 하나님께 장래의 일을 알려달라고 호소한다. 전체 내용으로 볼 때, 만일 하나님이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지하셨다면 그 사건은 예정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예지 하셨을 때 그 사건이 실현된다고 해서 그 사건이 반드시 예정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을 하나님이 예지하실 수는 있지만, 그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아니다.
예지가 예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지하시고 실재로 일어난 사건은 예정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신학체계는 예지가 곧 예정을 요구한다고 전재한다.
[함의]
하나님이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발생한 모든 악한 사건들을 예지하셨다고 해서 그것을 예정하셨다고 주장할 성경적 근거는 없다. 하나님이 수 세기에 걸친 그분의 원대한 계획안에 이 모든 악한 행위들이 있을 것을 감안하셨다는 발상도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타락을 예지하셨다. 그렇다고 그 예지가 타락 사건을 야기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또한 타락에 대한 자신의 해법을 예지하셨고, 그 해법은 땅의 기초를 놓기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의 머릿속에 있었다. 하나님은 감수할 준비를 하신 상태였다. 끔찍한 위험부담이 따랐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개념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이 모든 것을 무효화하실 수 없었다.
악은 하나님이 스스로 무너뜨린 최초의 도미노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라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 변질된 r서이다. 악은 불완전한 형상 담지자들이 내린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이 유도하시거나 하나님의 예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나 다른 존재의 자유 의지적 결정으로 초래된 악을 취하여, 지금 이 땅에서 그분의 손과 발이 된 충성스런 형상 담지자들의 복종을 통해 선을 이루고 자신의 영광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실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무엇을 행하기로 선택하는가가 상황 전개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 단원 요약
첫째, 하나님에게는 신적인 가족이 있다. 이는 엘로힘들로 구성된 천상의 모임 또는 천상회의다. 이 엘로힘들은 삼위일체의 대체어가 아니며 삼위일체에 추가된 존재들도 아니다. 여호와는 엘로힘들 가운데 계시지만 다른 모든 엘로힘보다 탁월하시다. 여호와는 엘로힘들의 창조자이자 주권을 가진 주님이시다. 여호와는 고유한 위치에 계신다. 예수님은 육체를 덧입은 여호와이시므로, 예수님 역시 모든 엘로힘과 구분되면서 동시에 모든 엘로힘보다 우월하시다. 하나님은 어떤 회의 기구를 필요로 하시지 않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회의기구를 사용하신다는 점을 명백히 밝힌다. ~~엘로힘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에게는 또한 인간 가족과 행정부가 있다. 인류의 신분과 역할은 신적 가족 및 신적 행정부를 그대로 반영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천상회의 임원들과 마찬가지로 맡은 바 소임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대표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드러내는 대표자다. 하나님은 천상회의를 필요로 하시지 않ㄴ느 것처럼, 인간 역시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 다만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사용하시기로 선택하신 것뿐이다.
하늘과 땅은 구별된 영역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권속들은 공동의 종착지를 향해 협력하며 나아간다. 그 여정에서 그들이 교차하는 지점들이 성경신학의 여러 중요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에덴과 함께 하나님이 이 땅에 임하셨고, 이 땅은 그분께 순응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충성스런 엘로힘들과 나란히 일하며 지근거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는 위험부담이 따랐다. 하나님은 그 위험부담을 충분히 알고 계셨고 받아들이셨다. 인간이든 신적 존재든 불완전한 존재들의 마음과 손에 쥐어진 자유의지는 곧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권한을 버리고 자신만의 권한을 선택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슬프게도 이 역시 거듭되는 패턴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두 권속은 rdhgl 반역을 시도할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지난한 전쟁이 있게 될 r서이다. 좋은 소식은 여전히 하나님은 자신이 시작한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다하실 것이라는 점이다.
10. 낙원에서 일어난 문제
우리는 창세기의 뱀이 실제로는 동물군의 한 종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 점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구절이 성경, 특히 신약에 있다. 신약 저자들도 옛 에덴의 뱀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들이 단순한 동물군의 한 종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실체를 지칭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고후 11:3, 살전 3:5, 계 12:9). 이것이 우리가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대할 때 가져야 할 사고의 틀이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 일화가 여호와의 천상회의 안에서 불만을 품은 어떤 신적 존재가 인간 드라마에 개입한 내용임을 알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오로지 동물 뱀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 메시지를 놓치고 말 것이다.
에스겔 28장은 창세기 3장과 개념적으로 연결된 장들 중 하나다. 에스겔 28:13~14은 ‘하나님의 동산 에덴... 하나님의 성산’에 대해 묘사한다.
[에스겔 28장]
에스겔 28장은 인류 타락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으며 창세기 3장에 대한 주해도 아니다. 에스겔 28장은 하나님이 두로왕을 책망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1. 지극히 높으신 자와 비기리라
[이사야 14장]
[창세기 3장의 나하쉬]
창세기 3장의 주역은 뱀이다. 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하쉬’다. 이 단어는 평범하면서도 탄력적이다.
[하나님의 심판]
12. 신적 존재들의 범죄
동산의 타락 사건 이후 뒤따른 저주로 인해 인류의 운명은 ‘나하쉬‘의 씨seed of nachash와 얽히게 된다. 여기서 ’나하쉬‘의 씨란 문자적(실제로 인간과 신적 존재가 있다는 점에서)이기도 하고 영적(영적 반역자의 계보라는 점에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뱀과 독사의 새끼들”(마23:33)이라고 부르셨다.
[홍수의 전조: 신적 존재들의 반역]
창세기 6:1~4은 많은 독자들과 목회자들이 건너뛰고 싶어 하는 본문이다.
대체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신인가 인간인가? 네피림은 또 누구인가? 이 구절이 창세기 6:5에 묘사된 “사람의 죄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셋 족속 이론]
하나님의 아들들이 ‘셋 족속’이라는 이론은 복음주의나 다른 기독교 교회에서 가장 흔하게 가르치는 해석이며, 주후 4세기말 이래 기독교의 지배적 입장이었다. 이 접근에 의하면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아담과 하와에게서 난 아들 셋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이다(창4:25~26, 5:3~4). 즉 이 네 구절은 셋 계보의 경건한 남자들(하나님의 아들들)과 가인 계보의 불경건한 여자들(사람의 딸들)간의 금지된 통혼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결국 두 계보 중 하나에 속하며, 두 계보 모두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에게서 나왔다. 이런 식으로 성경은 경건한 자와 경건하지 않은자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가 창세기 4:26에서 셋 또는 인류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대목이다. 셋의 계보는 악의 계보로부터 구별되어 순결함을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창 6:1~4의 통혼이 이 구별됨을 지워버렸고, 홍수로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첫째, 창4:26은 오직 셋 계보의 사람들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 개념은 외부로부터 끼어들어온 것이다.
둘째,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이 견해는 네피림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셋째, 본문에는 이 일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가인의 딸들”이라는 표현이 전혀 없다.
넷째, 본문에는 특정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을 비롯해 결혼과 관련된 일체의 계명이 존재하지 않ㄴ느다.
다섯째, 창세기 6:1~4이나 성경 어디에도 셋 계보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묘사한 구절이 없다.
[신격화된 왕 이론]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격화된 인간 통치자들이다. 이 관점을 주장하는 학술 문헌을 조사해 보면, 그 근원이 다음중 하나라는 것이 드러난다. (1)시편 82:6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들”을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다음 그 해석에 비추어 창세기 6:1~4을 해석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아들들이라고 칭한 언어에 주목하여(출 4:23, 시 2:7). 이것이 왕을 신의 자손으로 여긴 고대 근동 신앙에 상응하는 본문이라고 주장한다. (3) 신격화된 인간 통치자들의 일부다처혼이 이 구절에서 정죄당한 악한 결혼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베드로전후서와 유다서]
13. 나쁜 씨
사실상 신약 저자들은 셋 족속 이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창세기 6:1~4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고대 근동 배경]
창세기 1~11장이 메소포타미아 문헌과 연결고리가 많다는 점은 복음주의 학자뿐 아니라 비복음주의 학자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정설이다. 창조 이야기, 홍수 이전 족보, 홍수, 바벨탑 사건 모두 구약보다 훨씬 오래된 메소포타미아 자료와 분명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6:1~4 역시 메소포타미아적 배경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근래까지만 해도 이런 요소가 온전히 인식되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창세기 6장을 재기술한 에녹1서와 같은 유대 문헌은 그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적 배경을 예리하게 인ㅅ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인식은 제2성전기의 유대 사상가들이 그 이야기를 신적 존재와 거인 자손들이 연루된 것으로 바르게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창세기 6:1~4은 본질적으로 논쟁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 신들에 대한 신망뿐 아니라 그 지역의 문화적 세계관에 대한 신뢰도를 흠집 내려는 문학적, 신학적 시도라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는 (동물과 인간을 구원하는 큰 배가 나오는) 홍수 대재앙을 다룬 여러 버전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에는 홍수 이전시대의 위대한 지식을 소유한 압칼루라고 불리는 현자들 무리가 등장한다. 이들 압칼루는 신적 존재였다. 많은 압칼루가 악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악한 압칼루는 메소포타미아 악마론의 요체였다. 홍수 이후 압칼루의 자손들은 혈통으로는 인간으로 불리면서도 3분의 2는 압칼루였다. 달리 말하면 압칼루는 인간 여자들과 짝을 맺어 ‘준準 신급’(quasi-devine)의 자손을 낳았다.
3분의 2가 신이라는 설명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것이 메소포타미아 영웅 길가메쉬에 대한 묘사와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설형 문자판에 대한 근래의 결정적 연구에 의하면 길가메쉬는 홍수 이전의 지식을 보유한 거인이었다. ※(압칼루, 마르둑)
[하나님의 아들들: 순찰자들, 하늘의 아들들, 거룩한 자들]
신구약 중간기에 몇몇 유대 본문에 홍수 이전 신적 존재들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에 사람들의 아들들의 수가 늘어나자 곱고 아리따운 딸들이 그들에게서 나오니 순찰자들, 곧 하늘의 아들들이 이 딸들을 보고 탐했더라. 그들이 서로에게 말했다. 오라, 우리가 사람의 딸들로부터 아내들을 취하여 우리를 위해 자식을 낳자.”
순찰자라는 단어는 아람어 ‘이르’를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 우리에게는 생소한 단어가 아니다. ~~~다니엘 4장은 여호와의 천상회의에 속한 신적 존재들인 거룩한 자들을 묘사하기 위해 순찰자라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사용한 유일한 성경구절이다. 다니엘서의 지리적 배경은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바벨론이었다.
에녹1서에서 순찰자들(하나님의 아들들)의 후손은 거인들이다(에녹1서 7장). 에녹 1서의 일부 사해 두루마리 단편에는 거인들의 이름이 일부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쉬다.
[네피림]
창세기 6:1~4을 둘러싼 큰 논란 중 하나가 네피림이라는 단어의 의미다. 우리는 메소포타미아적 배경에서 압칼루가 신적 존재였으며 인간 여자들과 짝을 맺어 거인 자손을 낳았음을 살펴보았다.
네피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 두 번 등장한다(창 6:4, 민 13:33). 두 경우 모두 칠십인역에는 ‘기가스’즉, 거인으로 번역되었다.
우리가 다룬 배경들을 감안할 때 네피림은 당연히 거인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하지만 많은 주석가들이 이 해석을 거부한다. 그들은 네피림을 ‘추락한 자들’이나 ‘~위로 추락하는 자들’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대안들은 네피림이 히브리어 동사 ‘나팔’(추락하다)에서 유래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더 중요한 대목은, 네피림을 거인이 아닌 추락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네피림이 가진 준 신급의 신분을 회피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거인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이었다고 주장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실은 추락한 자들로 번역해도 달라질 건 없다. 메소포타미아적 배경과 제2성전기 후기 유대 사상이라는 맥락 모두 네피림의 아버지들이 신적 존재이며 네피림이(어떻게 번역하든)거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창세기 6장의 전략]
창세기 6:1~4과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바벨론의 자랑거리를 참담한 범죄로, 아니 그보다 더 나쁘게 묘사하여 전 인류를 패역하게 만든 악으로 그려냈다. 창세기 6:5은 본질적으로 그 범죄의 결과를 요약한 것이다.
14. 하나님의 배정하심
[홍수에서 바벨까지]
네피림은 “용사”(깁보림)와 “유명한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문자적으로는 “이름(셈)있는 사람들”이다.
홍수 직후에는 니므롯을 “깁보르”라고 불렀다. 니므롯은 앗수르와 바벨론 문명의 선구자로 등장한다(창10:6~12).
[바벨탑]
[신명기 32장 세계관]
우리가 이전 장에서 고찰했듯, 사람들은 신들이 산 위에 산다고 생각했다. 모든 학자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성스러운 인공산 중 하나인 지구라트가 바벨탑이라고 본다. 지구라트는 신들의 거처였고 메소포타미아인이 하늘과 땅의 교차점이라고 믿었던 곳이다. 이 구조물의 특징을 보면 그 건축 목적이 신들을 땅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성경 기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 행위를 앞의 창세기 6:1~4의 신적 존재들의 범죄와 연결시킨다. 그 단락에서는 홍수에서 살아남은 준 신급의 거인이자 바벨론의 문화 영웅(압칼루)들을 “유명한 자” 또는 보다 문자적으로 “이름(셈) 있는 자들“로 그리려 한다. 바벨탑을 건축한 자들은 자기 ”이름(셈)을 내기 위하여“ 탑을 쌓고 싶어 했다.
15. 우주적 지형
[다윗의 환난]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골리앗을 물리친 후, 다윗은 상당기간 사울 왕의 맹목적인 분노를 피해 도피자 생활을 했다. 이 시절 다윗은 종종 이스라엘 경계 바깥 지역으로 도피해야 했다.
이스라엘 경계 바깥 영토는 다른 신들의 영역이다.
[흙을 구한 나아만]
[다니엘과 바울]
☞ 단원 요약
지상의 모든 곳을 에덴으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출발하자마자 좌초되었다. ‘나하쉬(뱀)는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려 했다. 나하쉬의 범죄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최초 비전은 꺽였지만, 인류까지 파멸되지는 않았다. 반역자는 하나님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역할에 개입하려 했지만 결국 죽은 자들의 주로 전락했다.
어떤 면에서 나하쉬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나무로부터 차단되었을 때 인류를 사로잡은 채 추락했다. 그 이미지에는 인간이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없다면, 인류는 사망과 사망의 군주의 합법적 차지가 된다.
생명을 주시는 자인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용서하셨다. 그들은 파멸되지 않았다. 인류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들은 아이를 출산하여 계보를 이어갈 것이고, 이로써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실현해 나갈 것이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통ㅊ치가 이 땅에(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다시 임할 것이다. 악은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지 못하고 다만 지연시킬 뿐이다. 이 은혜의 복음이라 불리는 새로운 상황은 인류에게(그들이 에덴에서 거부했던)선택을 다시 할 r서을 요구한다. 이 시점부터 하나님의 가족-회의 일원으로 영원히 거주하려면 다른 어떤 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보다 하나님께 신실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자유의지로 선택한 반역은 에덴에서 멈추지 않았다. 에덴은 시작에 불과햇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신적 존재와 인간 모두가 그랬다. 홍수 이전 범죄(창6:1~4)와 홍수 이후 범죄(창11:1~9, 신 32:8~9)가 대표적인 예이자 기준점이다. 이 범죄들은 구약 나머지 부분의 배경이 되었다.
여호와의 분깃은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여호와는 다른 열국을 흩어 내버리신 다음 하등한 신들에게 배정하셨다. 하지만 그 신들은 여호와의 종이 아닌 신적 라이벌이 되었다. 그들의 통치는 부패하였다(시82).구약의 나머지 부분은 여호와와 그 신들, 그리고 이스라엘과 열국 간의 대립구도로 이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창세기 6장의 잔류자들은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서 열국의 거민으로 살았다. 여호와의 분깃으로 택하신 땅을 둘러싼 각축전이 벌어질 것이다. 전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먼저 여호와의 분깃인 그분의 백성이 뿌리를 내려야 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관계를 시작하실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만남이 필요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경험한 그 무엇과도 같지 않으셨기에 인간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의 순수한 임재를 소화할 수 없었다. 아니, 치명적이었을 r서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죽지 않도록 보호하면서도 인간이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를 베일로 가리시는 해법을 찾으셨다. 에덴에서조차 이 베일이 필요했다. 창세기 기자는 에덴의 하나님을 동산에 거니시고, 타락한 자신의 형상 담지자들을 찾아 헤매는 인간으로 설정했다(창3:8). 이 역시 얼핏 보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패턴으로 부상할 것이다.
Part4. 여호와와 그의 분깃
16. 아브라함과 말씀
우리는 신명기 32:8~9을 통해 여호와가 열국을(천상회의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인) 하등한 엘로힘들의 다스림 아래 두셨음을 배웠다.
[아브라함의 기쁨]
아브라함 가계의 처음 뿌리에 해당하는 마지막 두 구절(창11:31~32)과 사도행전 7:2~4을 비교해 보면 여호와가 아브라함과 처음 접촉하신 것은 하란으로 가기 전이었음을 알게 된다.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
17. 보이는 여호와, 보이지 않는 여호와
예수님과 신약시대 훨씬 이전부터 구약을 꼼꼼히 읽은 독자들은 반복적으로 두 여호와가 존재한다는 개념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한 여호와는 눈에 안 보이며 하늘에 계시고, 다른 여호와는 사람을 비롯한 다양한 가시적 형태로 지상에 현현하신다는 개념 말이다. 두 여호와가 한 장면에 나란히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여호와와 천사]
창세기 22장 11절에서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고 했으니, 천사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존재다. 그러나 이 여호와의 천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곧바로 이삭을 “내게 아끼지 않았다며 아브라함을 칭찬한다. 바로 여기서 1인칭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는데,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음을 감안하면, 이 화자는 여호와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많은 학자들은 천사가 여호와의 대변인이 되어 여호와를 대신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개념은 나중에 가서, 즉 천사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이라고 발언한 구절(16절)을 통해 전달된다. 11절에는 그런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들]
창세기 26:1~5은 여호와가 이삭에게는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형체로 나타나신 장면이다.
18. 이름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불타는 떨기나무]
출애굽기 3장 2절에는 “여호와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은 또한 모세가 떨기나무를 보려고 몸을 돌이켰을 때 여호와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지켜보고 계셨고, 부르셨다고 한다. 사람의 형체를 취한 가시적인 여호와인 천사와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가 모두 이 불타는 떨기나무 장면에 등장한다.
[천사, 이름, 임재]
19. 여호와 같은자 누구이니까?
[섭리의 목소리]
20. 판 다시 짜기
에덴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은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선포에서 시작되었다. 여호와에게는 이미 신적인 아들들이 있었지만 여호와는 인간 가족을 두고자 하셨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에게 이미 형상 담지자들로 구성된 천상회의가 잇었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했다는 점을 배웠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지상회의]
21.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회의
우리는 흔히들 율법이라고 하면, 그 안에 담긴 613개의 명령 하나하나가 여호와의 관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치 율법이 죄책감을 야기하거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을 심어주기 위해 주어졌다고 생각하며 율법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성경신학에서 구원의 요체는 여호와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다.
Part5. 정복과 실패
23. 거인 문제
하나님은 하와에게 그녀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될r 것이라고 하셨다. 사실 뱀은 단순히 동물 세계의 일원이 아니라 신적 존재였다. ‘나하쉬’라는 용어의 의미가 유동적이어서 우리는 이 어휘가 이중적인(또는 삼중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육신을 입고 동거하는 것이 가능한 존재였다. 이들과 달리 에덴의 신적인 반역자는 그런 방식으로 하와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은유가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예는 신약에서 예수님 스스로 바리새인들을 뱀들이라고 부르시며(마23:33) 그 아비가 마귀라고 하셨을 때일 것이다.
[홍수 이전의 네피림]
창세기 6:4의 네피림이 홍수 당시 이 땅에 있었고 그후에도 있었다는 대목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기독교인들이 성육신을 수긍하는 이유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홍수 이후의 네피림]
민수기 13:33은 기골이 장대한 아낙 자손이 ‘네피림 후손’이라고 똑같이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24. 뱀의 자리
25. 거룩한 전쟁
Part6.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26. 산과 골짜기
27. 천상회의 앞에 서다
28. 신의 오도
29.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이
고대 근동 문명권에서 왕정은 신에 의해 수립되며, 따라서 왕은 신의 후손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의미와 구현 방식은 각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이스라엘의 경우 인간 왕은 요호와의 통치를 구현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선택되거나 입양된 자였다. 이스라엘에서 이 공적 지위를 합법적으로 부여받은 유일한 왕조가 다윗의 계보였다.
이것이 메시아임을 확인하는 작업에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의문도 남는다. 과연 메시아가 참 신, 즉 성육신한 여호와일까? 아니면(입양에 의해) 신으로 간주되는 사람일까? 예수님의 출생 당시에도 여호와가(육신을 입는 것을 포함하여)(최소한) 인간의 형체로 나타나신다는 사상은 당시 유대인의 지적 풍토에서 그리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다. 성육신은 유대인의 관념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는 다윗 계보를 이은 이스라엘의 최후 통치자가 ‘사람이 된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드러낸 대목이 있다. 이 사상은 신약, 특히 신약에 나오는 한 위력적인 장면에 의해 강화된다.
[다니엘 7장의 천상회의 모임]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7:7~9)
[구름을 타고 오는자]
우가리트 고대 문헌에서 바알 신은 ‘구름 타는 자’로 불린다. 이 묘사는 고대 근동 사회 전반에 걸쳐 신의 계급으로 여겨졌던 바알의 공식 호칭이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이든 아니든 지중해 전역의 고대인들에게 구름 타는 자는 신이었다(그 신적 위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성경 기자들은 바알이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여호와가 경배 받아 마땅한 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간혹 ‘구름 타는 자’라는 전형적인 바알 수식어를 훔쳐다가 여호와를 가리키는 수식어로 사용했다. p427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신33:26)
이렇게 함으로써 바알의 자리를 차지하고 모욕하면서, 합법적으로 하늘을 타고 세상을 살피며 통치하시는 신으로 여호와를 우뚝 세우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인자, 구름 타는 자 되신 예수]
신약 연구에서 ‘인자’라는 기술적 표현은 치열한 논쟁거리다. 많은 학자들은 인자의 의미가 ‘한 인간’이고 구약에서 선지자들에게 썼던 호칭이므로, 여기에서는 신적 위상이 부여되지 않는다고 본다. 예수님에 대해 이 표현을 썼던 대부분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러나 신약 저자가 다니엘 7:13을 인용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서는 다니엘 7장의 배경과 이 표현의 신적 속성을 웬만큼 완강하게 외면하지 않는 한 그가 신이라는 메시지를 피해 갈 수 없다.
30. 죽음을 준비하다
[왕국이 도래할 것이다]
☞ 단원 요약
이스라엘 왕조 이야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 다윗의 게릴라 전술과 사울의 추격전, 밧세바와의 충동적인 정사, 아들 솔로몬의 지혜와 아내를 축적한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사울, 다윗, 솔로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잇는데, 이는 사무엘에서부터 말라기까지 우리가 흔히 접하는 내용이 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의 책들에는 왕들의 이야기만 잇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열왕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왕정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자들의 목표는 전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신학적이었다. 그들에게는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영적 인과관계, 하나님의 진노, 에덴의 구상이 폐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여호와의 계획에 대한 것이었다.
역사서와 선지서는 성경 기자들의 초자연적 세계관의 반경 안에서 작동한다. 열국은 여전히 적대적인 이방신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스라엘과 원수 나라들과의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사사시대에는 영적, 도덕적 배교가 만연했다. 누구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정복 전쟁의 실패로 하나님의 에덴적 통치의 부활이 아닌, 개척시대 미국 서부 상황과 비슷한 무법천지가 임했다.
무정부 상태는 왕을 달라는 요구로 귀결되었다. 이는 빗나간 동기에서 비롯된 섣부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여호와는 다윗이 태어나기도 전에 마지막 사사이자 제사장이자 선지자이자 왕들을 기름 붓는 자인 사무엘의 사역을 통해 다윗의 등장을 계획하셨다. 다윗은 결국 명망을 얻었지만 사울과 다윗 사이에 동족산장이 벌어졌다. 이는 땅과 백성을 놓고 벌이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의 상징이었다. 르바임의 잔류들이 남아 있었고 언약궤와 성막은 각각 다른 장소에 있어 제사장직이 분열되었다.
결국 위기는 해소되었다. 다윗의 사람들이 골리앗의 형제들을 제거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 이후 언약궤와 성막을 통합했다(대하5:1~14).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땅은 솔로몬의 통치와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왕상4:21). 그러고 나서 솔로몬 사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조가 연이어 패망하는 가운데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여호와가 선지자들을 부르셔서 그들과의 신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의 임재와 권능을 확인시키시고 에덴적 통치를 재건하기 위한 새 언약, 새 해법을 선포하셨다. 가장 쓰라린 역설은 바벨론이 여호와의 분깃을 집어삼켰다는 것이다. 상황은 완전히 역전된 듯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실상과 다를 수 있다.
진짜 아이러니는 예레미아, 에스겔, 하박국과 같은 선지자들이 누구든지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알렸던 것처럼, 바벨론이 여호와의 도구였다는 것이다. 유다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에도 여호와는 지리적으로 제한될 수 없는 영원한 왕국을 계획하고 계셨다. 또 다른 하나님이시며 죽었다가 다시 일어난 ‘한 사람’이 그 왕국을 다스릴 것이다. 그는 죄의 저주를 뒤엎고 죽은 자의 군주가 가진 권세를 빼앗으며 에덴의 영원한 생명이 이 땅을 에워싸게 할 r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그의 정체를 감춰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이 신약신학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내러티브를 이미 임한 왕국과 아직 임하지 않은 왕국의 두 차원으로 사유했다.
Part7. 이미 임한 왕국
31.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32. 유명한 장소
35. 하나님의 아들들과 아브라함의 자손
처음부터 여호와의 의도는 온 인류가 여호와의 지산가족이 되어 여호와와 그의 천상가족과 합력하여 통치하는 r서이었다. 구약성경은 일련의 태곳적 q나역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그런 염원이 깨지는 것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원래 목표는 무산된 것이 아니라 지연됏을 뿐이었다. 바벨의 반역 사건이후 여호와는 열국을 한켠에 제쳐놓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셨다.
37. 전쟁을 의미하다.
[보이지 않는 전투원들:일반 용어]
신약에는 천사라는 용어가 대략 175회 나온다. 히브리어 대응어인 ‘말라크’처럼 이 헬라어는 메신저를 의미한다. 근본적으로 이 용어는 신적 존재가 수행하는 임무를 수행할 뿐 신적 존재의 실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2:7은 인류를 ‘천사보다 조금 낮은’존재로 묘사하는 반면, 시편 8:5의 히브리어 원문은 인류가 ‘엘로힘보다 조금 낮은’존재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원문은 인류가 ‘엘로힘보다 조금 낮은’존재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인류가 ‘하나님(엘로힘)보다 조금 낮게’ 창조되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사용하는 헬라어 역본(칠십인역)에서는 엘로힘을 복수로 해석하여 ‘앙겔로이(천사들)라고 번역했다. 이는 ’엥겔로스‘가 구약에서 엘로힘이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초자연계의 일원에 대한 일반적 묘사에 적절한 단어로 간주되었음을 알려 준다.
신약은 귀신의 기원에 대해 침묵한다. 에덴 이전의 태곳적 반역으로 인해 천사가 은혜로부터 떨어져 마귀로 전락했다는 내용의 성경 구절은 없다. (에녹1서와 같은) 성경 밖 유대 문헌에서는 귀신의 기원을 창세기 6:1~4 사건에 귀속시킨다. 이 본문들에 따르면 한 네피림이 살해당햇을 때 육체를 떠난 영이 귀신으로 간주되었다. 이 귀신들이 인간들을 괴롭히기 위해 지산을 떠돈다. 신약은 이 믿음을 드러내놓고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다시 육신을 덧입으려 시도하는 듯한) 귀신 들린 사람들이 나오는 대목을 보면 이런 사고가 언뜻 엿보이기도 한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신약에서 ‘다이몬’과 ‘다모니온’이라는 용어는 거의 늘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즉 이 용어들은 악하고 사악한 구너세들을 가리킨다. 이는 일부분 제2성ㅈ너기 유대교의 영향으로 볼 여지도 잇지만, 칠십인역의 용례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칠십인역 역자들은 이방신에 대해 ‘다이몬’이라는 단어를 한 번 사용햇다(사65:11). ‘다이모니온’은 우상(예,시 96:5[칠십인역 95:5])과 이스라엘이 섬기지 말아야 할 열국의 이방신들(예, 시 91:6[칠십인역90:6])을 가리키는 말로 아홉 번 등장한다.
기이하게도 성경에서 사탄과 귀신이 함께 언급된 구절은 딱 한 구절밖에 없다.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눅11:18). 이 구절은 사탄이 귀신을 다스리는 상위의 권세자임을 강력하게 암시하지만 모든 귀신이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지 혹은 어떻게 이런 권세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ㄴ느다. 구약에도 ‘사탄’이라는 명사는 고유명사가 아니었으며 에덴 동산의 원수에 대해서도 ‘사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따라서 구약도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용어 고찰]p550
바울의 글도 사탄과(하나님을 대적하는) 다른 신적 존재들 간의 관계를 다룸에 있어 모호한 데가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6:11~12에서 마귀의 궤계에 맞선다는 이야기를 한 직후 초자연적 원수들을 가리키는 다른 여러 용어를 열거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많은 성경 독자들이 이 방면에서 명쾌하다고 여기는 유사한 구절들은 사실 그리 명쾌하지가 않다. 가령 고린도후서 4:4에는 인류의 눈을 멀게 한(개혁 개정,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 “이 세상의 신”The god of this age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이 존재를 사탄으로 규정하지만 해당 구절이나 배경 본문에 그 이름이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 “이 세상의 신”을 사탄과 동일시하는 주장의 근거는 두 가지다. (1)여기서 쓰인 호칭이 요한복음의 “이 세상의 임금”이라는 관용구와 유사하며(요12:31, 14:39, 16:11) “이 세상의 임금”이 사탄이 아닌 다른 어떤 신적 존재라고 보긴 어렵다. (2) 말세eschaton에 사탄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들이 있다는 바울의 말 때문이다(살후 2:9~10).
“이 세상의 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r서일수도 있다. 이 구절이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믿지 않는 자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사야6:9~10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다.
사탄과 연관된 또 다른 구절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임금”에 대해 말하는 에베소서 2:2이다. 그러나 이 구절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 임금의 구체적인 이름이나 마귀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언급도 들어 있지 않다.
여기서 바울이 염두에 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창세기 3장에서 ‘땅’(땅이나 스올을 가리킬 수 있는 히브리어 ‘에레츠’)으로 내침을 당한 원래의 반역자에 대한 우리의 이전 논의를 상기하라. 그 신적 반역자를 세상의 주load of earth(처음에는 반역했다가 세상 권세를 잡은 주)로 보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 주권은 ‘공중’air(하늘)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 우주론에서 공중이라는 공간은 하나님의 권역 아래 있으며 땅의 물들 위에 있다고 간주되었다(욥22:12, 암9:6, 시29:10,148:4).
[바울과 신명기 32장 세계관]
[베드로서신과 유다서의 ‘영광스러운 자들’]
[신성한 공간과 영적 구분]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영적인 영토 전쟁을 촉발하는 것으로 그린다.그러나 우리는 이 메시지를 놓칠 때가 많다.
38.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가?
[세례, 거룩한 전쟁]
베드로전서 3:14~22은 신약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로 꼽힌다. 그러나 천상회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놓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전서의 전체 주제는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견디고 믿음 가운데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명료한 것은 고작 그 정도다. 그 외에 세례, 방주, 노아, 옥에 있는 영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가?
베드로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학자들이 ‘모형’ 또는 ‘모형론’ 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모형은 일종의 예언이다. 장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구두 예언이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이는 선지자가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공표하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이 선지자의 머리에 어떤 생각을 불어넣으신 다음 선지자가 그 생각을 발설하는 형태로 예언이 갑작스럽게 임한다.
모형은 기본적으로 ‘무언(無言)’의 예언이다. 모형은 장차 일어날 무언가의 전조가 되는 하나의 사건, 사람 혹은 제도를 말한다. 모형은 그 일이 실현될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가령 바울은 로마서 5:14에서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튀포스)이라고 말한다. 이 튀포스라는 헬라어는 종류 또는 표시나 유형을 뜻하며, 이 단어가 모형론의 어원이 된다.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담이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전조 또는 반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베드롲너서 3:14~22에서 모형론을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베드로는 창세기 6:8장의 대홍수, 특히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관련된 사건이 복음과 부활의 모형 또는 wsj조가 되었다고 본다. 베드로에게 이 사건이 세례를 통해 기억된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2:4~5에서 타락한 신적 존재들이 던져진 감옥이 ‘타르타루스’였음을 상기하라. 이 용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종종 영어로 ‘지옥’ 이나 ‘음부’로 번역되지만, 그 해석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물론 ‘타르타루스’는 문자적 지명이 아니라 영적 세계의 언어다. ‘타르타루스’는 (성경의 스올인) 지하세계의 일부였으며, 고대의 경험에 따르면 죽은 자가 매장되어 가는 곳이 땅속이었기 때문에, 땅속으로 이해되었다. 넓게 말해서 지하세계는 지옥이 아닌 사후세계, 죽은 자가 가는 장소나 영역이다. 그 장소ㄴ는 나름의 지역성을 가지고 있다. 영적 세계에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경험하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에녹1서 이야기에서 순찰자들은 선고된 형에 반발하여 성경에서 결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선지자 에녹에게(창5:21~24) 하나님께 자신들의 사정을 대변해 달라고 하소연 한다(에녹ㅅ1서6:4). 하나님은 그들의 청을 거부하셨고, 에녹은 옥에 갇힌 순찰자들을 찾아가 비보를 전해야 했다(에녹1서13:1, 14:4~5).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에녹이 범죄한 순찰자들이 있는 ‘성읍의 나쁜 구역’에 있는 영적 세계를 방문했다는 것이다.
베드로 후서 2:4, 그리고 여기서 ‘타르타루스’에 투옥되었다는 언급과 마찬가지로 베드로전서 3장을 쓸 때에도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에녹1서의 이야기가 있었다. 이는 베드로의 말을 이해하는 열쇠다.
바울이 예수님을 둘째 아담으로 여긴 것과 똑같이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둘째 에녹이었다. 에녹은 옥에 갇힌 타락한 천사들에게 내려가 그들의 운명을 전했다. 베드로전서 3:14~22에서는 예수님이 이와 동일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내려가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패배했음을 알리신다.
신약신학에서 세례는 충성서약이다. 즉, 선악이 충돌하는 우주적 전쟁에서 누가 주님 편에 섰는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세례는 타락한 천사들에게 그들이 이미 패배했음을 일깨워주는 강력한 경종이다.
[우리의 서약을 새롭게 일깨우기]
Part8. 아직 완성되지 않은 왕국
39. 최후 평결
성경의 왕국 이야기를 천상회의를 염두에 두고 가르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천상회의는 왕국 이야기가 전개되는 모든 과정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천상회의는 하나님이 그분의 명을 발표하시는 수단이다.
[에덴, 바벨, 시내산, 이스라엘: 천상회의에서의 일과 인간의 실패]
성경에 계시된 인간 드라마의 맨 첫 장면부터 여호와의 천상회의가 출연했다. ~~~여호와는 먼저 인류를 창조하겠다는 뜻을 공표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여호와는 자신의 신적 가족을 창조하실 때처럼 인류를 자신의 형상 담지자로 창조하셨고, 인류가 여호와의 일을 실행하는 데 참여하게 하셨다. 이 경우 여호와의 일이란 여호와의 영향력과 에덴의 경이를 지산의 나머지 영역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최초의 인간 형상 담지자들은 실패했다. 그 다음 여호와와 그의 천상회의가 등장한 것은 바벨 참사 때였다. 여호와가 인간 형상 담지자들의 불순종을 감찰하기 위해 내려오셨다(창11:6). 앞서 여호와는 대 홍수로부터 생존자들을 남기셨고, 그들에게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명령을 다시 주셨다(창9:11). 그러나 인류는 지상으로 퍼져나가는 대신 바벨(바벨론)로 집결했다. 인류는 여호와의 영향력과 지식을 세상에 전파하는 대신 여호와를 자신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시도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여호와는 천상회의에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고 말씀하셨고(창11:7), 실재로 그렇게 하셨다.
여호와는 또한 인류와의 협업체계를 포기하기로 작정하셨다. 사람들을 뿔뿔히 흩으신 후에, 그들의 상속권을 박탈하시고 하등한 엘로힘들의 지배 아래 두셨다(신32:8~9).
여호와는 이제 자식을 낳기에는 너무 연로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통해 자신의 민족을 창조하고자 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지산 분깃이 될 것이다(신32:9).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해 나머지 열국이 복을 받을 것이다(창12:1~3).
이스라엘의 그리 길지 않은 왕정 역사의 여러 시점에 천상회의가 이따금 모습을 언뜻 드러냈다. (사6:1~7, 겔1장, 렘1장,23:21~22). 미가야 선지자가 걷어 올린 천상의 커튼 너머로 우리는 여호와의 신적 존재들이 모여 아합의 최후를 결정하는 장면을 목격한다(왕상 22:13~28). 이스라엘은 결국 또 다시 실패할 것이다. 여호와는 그들을 징계하기 위해 바벨론으로 추방하여 유배 시킨다.
[다 잃은 것은 아니다]
천상회의는 유배 이후 우리가 앞서 살펴본 의미심장한 세 장면에서 다시 출연한다.
다니엘 선지자는 유배기간 천상회의 장면을 환상으로 목격한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옛적부터 항상 계시던 이)이 다수의 보좌들 가운데 좌정하신 모습을 본다(단7:9).신적 존재들의 어전회의가 소집되었고 그 회의의 목적은 네 짐승으로 묘사된 지상제국(단7:1~8)의 장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함이었다(단7:9!12).p589
결정이 내려졌다. 넷째 짐승이 망해야 하고 다른 짐승들이 멸망이 임할 때까지 짐승들의 지배력은 줄어들 것이다. 그 다음 둘째 여호와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신다(단7:13). 하나님은 이 신적 인물인 “인자”에게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을 다스릴 영원한 권세를 허락하신다(단7:14).즉위한 왕은 자신의 주권을 “지극히 높으신 자의 거룩한 자들”과 “지극히 높으신 자의 거룩한 자들의 백성”과 공유한다(단7:22,27). 비록 그 배경은 백성이 유배당한 곳인 바벨론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 환상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t으리하시고 인자를 통해 열국을 되차을 것임을 전하고 있다.
시편 82편의 배경은 다니엘 7장만큼 분명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편 82편의 배경을 포로기로 본다. 앞서 고찰한 것처럼 지상 열국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열국을 지배하던 하등한 엘로힘들이 쫓겨나고, 여호와의 회의로 새롭게 구성된(신적 존재로 거룩하게 된) 자상의 아들과 딸들이(하등한 엘로힘들을 대신하여) 열국을 다스릴 것이다. ~~~여호와가 자신의 소유를 되찿으실 때 신들은 “사람처럼 죽을 것”이다.(시82:6~8).
이사야 40장의 맥락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분에 변화를 일으키고자 행동에 돌입하신다. 이스라엘은 시온으로 돌아와 도래할 왕을 기다려야 한다. 그 다음 천상회의에서 한 음성이(다시금 복수형의 명령으로)외친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여호와의 지상통치는 진보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어둠의 권세들과 그 권세들 아래 종노릇하는 인류에 맞서 지경을 넓히고 있다. 이 왕국은 분명한 목표가 있다. 바로 열국을 되찿고 온 지구에 에덴을 복원시킬 R서이다. 인류는 하나님divine처럼 될 것이며 고유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 아래,(열국을 다스리던)하등한 엘로힘들을 대신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시기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있지만 그 나라는 아직 미완성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아직 온전하게 경험하지 못한 영광의 지상 장막이다. 우리는 우리의 참모습이 되어가는 과정중에 있다. 그 참모습이란 여호와의 신-인간 자녀이자 여호와의 권속-회의다.
하나님이 그 계획의 최종국면을 실행하기 위해 다시금 움직이실 때 천상회의가 또 소집될 r서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4~5장을 통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엿볼 수 있다.
[여호와의 천상회의의 장로들]
학자들은 오랫동안 요한계시록 4~6장에 기록된 요한의 환상을 천상회의 장면으로 규정했다.
40. 북방의 대적
성경의 대서사시는 천상의 형상 담지자들과 함께 하시면서도 인간 형상 담지자들을 통해 창조세계를 통치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문자적인 지리적 북방: 멸망의 전조]
고대 근동의 문명 발상지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지역 전체의 패권을 놓고 각축전을 벌였고 지중해 동쪽에 자리한 가나안은 고래들 틈에 새우처럼 끼어 있었다. 가나안과 이스라엘 민족은 북방과 남방의 외국 군대가 이동할 때마다 외침을 당했다. 강대국들은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완충지대로 삼았다.
[불길한 초자연적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북쪽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그 때문에 이 단어는 이 세상ㄱ서이 아닌 무언가를 상징하게 되었다.
바산이라는 장소가 죽은 자의 세계와 신적인 대적들의 후손이라고 여겨진 르바임과 같은 거인 족속 거민들과 연관이 있음을 주목했다. 바산은 또한 유대교 신학에서 헤르몬 산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지는 곳이다. 헤르몬 산은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패역한 아들들이 반역을 저지르기 위해 내려온 장소다. 그러나 바산 너머 더 북쪽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다른 신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바알 숭배의 중심지인 시돈, 두로, 우가리트 같은 지역이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 너머에 있었다.
[에필로그]
나는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세계를 수용했던 근대 이전 사람처럼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러자 학자로 살아온 이래로 가장 환하게 성경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1. 성경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라. 그리고 성경이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개방된 자세를 취하라.
2. 성경의 내용은 지금 우리의 맥락 속에서 말이 되든 안 되든, 당시의 그 자체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3. 성경 기자들이 해석을 위해 성경구절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이 우리 자신의 성경 해석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4.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자기 목적에 맞게 인용한 방식은 성경해석에 결정적이다.
5. 은유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어떻게 정의되는가)보다 덜 실제적이지 않다.
[Review]
"여러 신들 중에 누가 이 두 사람을 서로 싸우고 다투게 했던가? 레토와 제우스의 아들이었다, 그가 왕(아가멤논)에게 노하여 진중에 무서운 역병을 보내니 백성들이 잇달아 쓰러진 것이다. 그 까닭은 아트레우스의 아들(아가멤논)이 아폴론(제우스의 아들)의 사제 크뤼세스를 모욕했기 때문이다. 사제는 자기 딸을 구하려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몸값을 가지고, 또 손에는 멀리 쏘는 아폴론의 화환을 감아 맨 황금 홀(笏)을 들고 아카이오이족의 날랜 함선들을 찾아가 모든 아카이오이족 특히 백성들의 통솔자인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에게 간청했다.”-일리아스-
2500년 전 그리스 시대 호메로스가 쓴 소설 "일리아스"에 나오는 대목이다. 트로이전쟁에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아폴론 사제 ‘크리세스’의 딸을 빼앗은 일로 사제가 아가멤논을 찾아가 애원하자 오히려 면박을 주었다. 이 일로 하늘에 있는 신 아폴론이 노하여 그리스군에 역병을 보내어 병사들을 죽게 하고,‘ 아킬레우스’ 장군과 갈등을 일으키게 함으로 승전하던 그리스군대는 곤경에 빠진다.
오늘날 그리스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받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수많은 하늘의 신들이 인간 세상과 교통하며 세상을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모습을 그 시대 사람들처럼 실제로 받아드리지 못한다.
최초의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였으며 모세오경을 포함 총 24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BC 400년경 바벨론의 포로로부터 돌아온 유대인들이 그동안 오랜 세월을 거쳐 바빌로니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의 지역에서 낱권들로 기록된 경전들을 모아 만든 것이다. 그 후 BC 3세기 초 70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구약 성경 24권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39권으로 재편집하였다, 이를 70인 역(Septuagint)이라 부른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때,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같은 말씀이라도 당대의 사람들과는 분명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 속에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들이 있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과 하나님의 아들(창 6:2) 또 네피림(창6:4)뿐 아니라 시편 82편에서 ‘신들의 모임’은 도대체 어떤 존재들인가? 라는 것이다. 다니엘서, 이사야서와 베드로 전후서 등 이 책은 오늘날 성경에서 의문으로 남아있는 여러 말씀들을 그 시대의 시각으로 돌아가서 독자가 이해 할 수 있도록 해설하였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엘로힘'은 시편 82:1에서 “하나님 God(엘로힘) 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엘로힘)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는 대목에서 두 번 나오는 ‘엘로힘‘이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 출발한다. 첫 번째 ’엘로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복수형으로 나오는 두 번째 ‘엘로힘’은 천상의 모임 또는 천상의 회의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신적인 가족이 있다. 이는 엘로힘들로 구성된 천상의 모임 또는 천상회의다. 이 엘로힘들은 삼위일체의 대체어가 아니며 삼위일체에 추가된 존재들도 아니다. 여호와는 엘로힘들 가운데 계시지만 다른 모든 엘로힘보다 탁월하시다. 여호와는 엘로힘들의 창조자이자 주권을 가진 주님이시다.”<본문>
이러한 ‘천상의 회의체’는 창세 이전에 이미 하늘에 속해 있었으며 창조된 세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성경의 난제 대부분은 여기서 해결의 실마리가 풀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처럼 당시 세상을 지배했던 것으로 성경도 그 바탕에서 쓰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에게는 보편적일 수 있겠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상당히 낯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저자도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고유성을 믿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영감설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좀 더 솔직해지자면, 이런 교리뿐 아니라 다른 교리들에 관해서도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은 성경 본문에 기반 한 것이어야 한다. ~~~이 책에서 당신이 접할 내용은 기독교 교리라는 소중한 손수레를 통째로 뒤엎진 않더라도 지뢰밭길이 될 것이다”<본문>.
저자인 Michael S. Heiser는 미국의 성서 구약학자이자 기독교 작가이며 많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은 2015년에 “The Unseen Realm: Recovering the Supernatural Worldview of the Bible”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며 오늘날 성경 신학에서 다루지 않는 성경의 많은 난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할 수 있는지에 새로움을 준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그뿐만 아니라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와 흐름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종래의 어떤 책보다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반 평신도들이 읽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 책의 분량도 많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흥미롭지도 않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오래전 어느 목사 사모님께서 "목사님이 구약을 열심히 보시면서부터 더 믿음이 약해지신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셨던 기억도 떠올랐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각자의 심령 속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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