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산의 금강경 풀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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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지금까지 가르친 바대로
부처의 과보는
머무를 곳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미 조금도 얻은 바가 없다면
어째서
석가 여래께서는
연등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는가?
따라서
부처의 경지는 성취해야 되는 것이고
이미 부처의 깨달음은
이루어야 할 것이라면
어째서 그 과보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일까?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에서
아무 것도 얻은 바가 없다고
답하므로써
이런 의심을 녹여버린다.
莊嚴淨土分 第十
×××경문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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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告須菩提하사대
於意云何오
如來가 昔在然燈佛所하야
於法에 有所得不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在然燈佛所하사
於法에 實無所得이니다
×××××××××××××××××××××××××××××××××
《감산 풀이》
여기서는 궁극적으로
아무 것도 얻은 바가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수행자는 어디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듣고서
깨달음에 집착해서도 안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깨달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더라도
부처의 과보는
필시 이루는 것이 아닌가 라고
수보리는 의심을 한다.
만일
부처의 과보가
성취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리가
전수 될 수 있겄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거꾸로
수보리에게 질문을 던져서
그의 의심을 해소시키고자 한 것이다.
연등 부처님이
석가 여래에게
깨달음을 성취하리라는
수기를 주기는 했지만
단지
이 마음으로
도장을 찍은 것일뿐
실로 아무 것도 얻은 바 없다.
만일 조금이라도
얻은 바가 있다고 한다면
연등 부처님은
수기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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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집착해서는 안되고
부처의 과보도 얻는 것이 아니라면
불국토를
장엄할 필요가 없거늘
세존께서는
어째서 수보리에게
보살행을 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라고 가르쳤을까?
×××경문2××××××××××××××××××××××××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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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莊嚴佛土者는
則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다
是故로 須菩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生淸淨心이니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
《감산 풀이》
여기서는
마음을 편안히 하는 법을
곧바로 제시하고 있다.
부처의 과보는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열반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 한다면
굳이 불국토를
장엄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수보리는 마음 속으로 의심한다.
그가 이렇게 의심하는 것은
중생 구제가
사찰 건립 같이
불국토 장엄이라 생각하기 때문으로
이는 다름아니라
형상에 집착한 어리석음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세존은
보살이 과연
불국토를 장엄한 일이 있느냐
라고 수보리에게 물었다.
바로 그때
수보리는 그 의미를 깨달아,
불국토를 장엄 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므로
이를 장엄이라 한다고 답했다.
왜 그런가.
불국토는 청정한 정토淨土이거늘
어찌 정토를 7보로 장엄할 수 있겠는가?
중생이 보는 세계는
예토穢土이니
온갖 나쁜 업으로 장식되어 있고
갖가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여러 부처님이 계시는 정토는
단지 청정한 마음에 의해
모든 오염된 것이 깨끗하게 씻어진다.
오염된 업이
이처럼 소진될진댄
그곳은 저절로 청정해진다.
따라서
청정한 마음이 바로 장엄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장엄은 저 장엄과는 다르므로
"곧 장엄이 아니다" 고 지적했다.
이와 같이 본다면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은
마음 밖에서 함이 아니라
단지 자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그곳은 저절로 청정해진다.
따라서
"다만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야한다"
고 지적했다.
이 밖에 따로
장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마음이 청정해야 한다면
그 마음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수보리는 의심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진정한 마음이란
"6가지 티끌六塵에 오염되지 않은 마음"
일 따름이라고 지적했다.
그 어디에라도
집착이 남아 있는 마음은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집착하는 생각이 사라지면
청정한 마음은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응당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기 마음을 내야 한다." 고 지적했다.
3조 승찬僧璨대사도
"인연을 따르지 말고
공空의 이치에도 머무르지 말라"
(莫逐有緣 無住空忍)고 강조한 바 있다.
바로 이것이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내는 마음"
(無住生心) 이고
마음을 편안히 하는 방법으로는
이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
그러므로
6조 혜능慧能 대사는
금강경의 이 구절을 듣자마자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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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도
불국토는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장千丈이나 되는 부처님은
어디 계시는가?
이는 보신 報身 부처님이
반드시 실제로
어느 곳엔가 머무른다는 의심이다
×××경문3××××××××××××××××××××××××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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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야
譬如有人이 身如須彌山王하면
於意云何오
是身이 爲大不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佛說非身이 是名大身이니다
××××××××××××××××××××××××××××××××
《감산 풀이》
법신이란 불국토는
장엄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
수보리는 보신報身은
반드시 실제로 그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의심을 일의킨다.
만일 불국토가
장엄할 수 없다고 한다면
보신은 대관절 어디에 거쳐하냐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법신法身은 몸이 아니라는
말로 그의 의심을 무너뜨렸다.
다시 말해
"국토 아닌 국토" 非土之土 야말로
항상 고요하고 밝게 빛나고
"몸 아닌 몸" 非身之身이
바로 법신 이라는 것이다.
법신은 모양을 초월했고
불국토는 아무런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법신은
이와 같이 모양으로 볼 수 없거늘
불국토를 어찌 장엄할 수 있겠는가?
법신은
6가지 티끌六塵을 떠났고
마음의 움직임을 떠났으므로
여러 의심이 소진된다면
곧 바로 몸과 불국토가 공空해질 것이다.
마음과 대상이 모두 끊어져야
반야의 궁극 원리에
계합한다고 할 수 있으니
이에 법신이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이치가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치는 지극해지고
언어 문자는 끊어지게 된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 복이 무궁무진한 까닭에
다음에서
다른 복덕과 비교하여 말한다.
첫댓글 연등 부처님이
석가 여래에게
깨달음을 성취하리라는
수기를 주기는 했지만
단지
이 마음으로
도장을 찍은 것일뿐
실로 아무 것도 얻은 바 없다.
만일 조금이라도
얻은 바가 있다고 한다면
연등 부처님은
수기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국토는 청정한 정토淨土이거늘
어찌 정토를 7보로 장엄할 수 있겠는가?
중생이 보는 세계는
예토穢土이니
온갖 나쁜 업으로 장식되어 있고
갖가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여러 부처님이 계시는 정토는
단지 청정한 마음에 의해
모든 오염된 것이 깨끗하게 씻어진다.
오염된 업이
이처럼 소진될진댄
그곳은 저절로 청정해진다.
따라서
청정한 마음이 바로 장엄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장엄은 저 장엄과는 다르므로
"곧 장엄이 아니다" 고 지적했다.
이와 같이 본다면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은
마음 밖에서 함이 아니라
단지 자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그곳은 저절로 청정해진다.
집착하는 생각이 사라지면
청정한 마음은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응당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기 마음을 내야 한다." 고 지적했다.
3조 승찬僧璨대사도
"인연을 따르지 말고
공空의 이치에도 머무르지 말라"
(莫逐有緣 無住空忍)고 강조한 바 있다.
바로 이것이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내는 마음"
(無住生心) 이고
마음을 편안히 하는 방법으로는
이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
법신은
6가지 티끌六塵을 떠났고
마음의 움직임을 떠났으므로
여러 의심이 소진된다면
곧 바로 몸과 불국토가 공空해질 것이다.
마음과 대상이 모두 끊어져야
반야의 궁극 원리에
계합한다고 할 수 있으니
이에 법신이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이치가 드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