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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자전거 기행 ②] 북부 : 하노이에서 후에까지
아! 이놈의 건망증, 배낭을 길에 두고 오다
7시쯤 출발에 나서니 어제 내리던 보슬비는 더욱 굵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도로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자전거가 잔뜩 뒤엉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속을 가까스로 뚫고 1번 국도로 들어섰다. 1번 국도 역시 출근하는 인파들로 뒤덮여있으며 밤새 내린 비로 도로엔 물이 고여 있어 도로 표면이 보이지 않았다. 위험을 감수하며 정신없이 물을 헤치며 달렸다.
한 시간 쯤 달려 하노이 시내를 빠져 나왔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아직 문을 열지 않는 가게 처마 밑에 쉬었다. 모두 물속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흠뻑 젖어 있고 자전거도 엉망이 되었다. 잠시 쉬고는 다시 달렸다. 한참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등이 허전함을 느꼈다. 그 순간 바로 자전거를 돌려 온 길을 향해 다시 돌아갔다. 잠시 쉴 때 배낭을 잊고 두고 온 것이다. 가끔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또 다시 그 건망증이 도진 것이다. 배낭에는 여권을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뒤따라오던 사람이 가져오겠지 했으나 그들도 남겨진 배낭을 보지 못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전 속력으로 달렸다. 한참을 달려도 쉬었던 장소가 나타나지 않는다. 혹시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쉴 때 눈여겨보았던 주변 장소가 멀리 눈에 들어온다. 거기엔 노란색이 선명한 내 배낭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순간 기쁨과 함께 다리에 쥐가 났다. 넘어질듯 말듯 경색된 다리를 뻗으며 내려섰다.
닫혀 있었던 가게 문은 열려 있고 누군가 가방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무어라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 내 지갑과 휴대전화를 갖고 나온다. 지갑을 열고 속에 있는 돈을 보여주면서 지갑과 휴대전화를 나에게 준다. 지갑에서 없어진 것은 없었다. 배낭을 보니 배낭을 연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아직도 의문이다. 어떻게 지갑과 휴대전화가 배낭 밖으로 나와 있었는지......
무어라 말하는데 몸짓을 보니 누가 가져갈까봐 지켜보고 있었다는 같다. 너무 고마워 한국서 환전해온 100만동(한국 돈 7만원 정도)을 모두 주었다. 그는 내 지갑 안의 만원권을 갖고 싶다는 표현을 하기에 만원을 꺼내 주었더니 아주 좋아했다.
되돌아가는 동안 맥이 완전히 풀렸다. 확인해 보니 10여 km를 전속력으로 달렸던 것이다. 장거리여행을 할 때는 무릎에 힘을 가능한 주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서는 안 된다. 아니나 다를까 한 쪽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제 막 여행을 시작했는데 벌써 무릎 통증이 오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새옹지마
비가 와서 속도는 떨어지고, 두고 온 배낭을 찾기 위해 시간이 지체되고, 펑크도 자주 나서 계속 늦어졌다. 결국 계획에 없던 야간주행을 하게 되었다. 어두운 밤 빗속을 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숙소를 찾기 위해 타인 호아(Thanh Hoa)까지는 가야했다.
타인 호아성의 타인 호아에 다다르니 고가도로가 나왔다. 양쪽 무릎이 너무도 아파 경사가 완만함에도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고가도로 아래로 가는 길도 있을 것 같아 들어섰으나 잘못된 길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되돌아 나오다 보니 ‘나응이(nha nghi 민박, 여관)’라는 간판 불빛이 보였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이럴 때 ‘새옹지마’라는 표현을 쓰지...
첫날이 가장 긴 여행으로 원래 계획은 150km 정도였다. 그러나 두고 온 배낭을 찾기 위해 되돌아갔다 온 것까지 합하니 170km가 되었다. 하루에 그것도 빗속을 170km나 달린다는 것은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매우 무리한 일이었다. 한쪽 무릎의 통증이 양쪽 모두로 퍼졌다. 3층에 있는 방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명나라를 물리친 레 왕조의 시조 레 러이 황제
비에 젖은 옷과 신발은 아침이 되어도 마르지 않았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 보았자 또 젖을 것이 뻔해서 축축한 옷과 신발을 다시 걸쳤다. 그 찜찜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조금 달리고 나니 그러한 느낌이 모두 가셔졌다.
인파를 따라 타인 호아 도심으로 들어가니 넓은 공원이 나오고 가운데 큰 동상이 서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레 러이(Le Loi) 황제이다.
공원 근처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니 이른 아침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아침과 함께 베트남 커피를 주문했다. 베트남 커피는 연유를 담고 있는 잔 위에 작은 구멍이 촘촘히 뚫린 조그마한 컵을 올려놓고 커피 가루를 그 속에 넣은 후 뜨거운 물을 부우면 아래에 떨어진다. 이것을 섞어서 얼음이 담긴 유리잔에 부어 냉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데 맛과 향이 아주 좋다. 일부 까페에선 이 커피를 화이트 커피(white coffee)라 적어 놓았다. 베트남에서 커피를 많이 생산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듯 전국 곳곳에 까페가 매우 많이 보인다.
패트병 조각으로 찢어진 타이어 응급조치
어제와 오늘에 걸쳐 펑크가 자주 낳다. 튜브를 갈기 위해 바퀴를 뺄라치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기 일처럼 봐주려한다. 간섭이 지나치다 할까 아니면 정이 많다고 할까? 아무튼 그들은 자전거와 오토바이 정비에 대해서는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한 번은 타이어 옆면이 찢어져 고민하고 있을 때 보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자기 집에서 타이어를 갖고 와 대본다. 크기가 다르자 자기의 오토바이에 우리 바퀴를 싣고 어디론가 갔다. 잠시 후 다시 오더니 크기가 맞는 타이어가 없었는지 그냥 갖고 왔다. 훼손된 타이어가 뒷바퀴에 있던 것을 알고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앞 타이어와 뒷 타이어를 바꾸라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앞바퀴보다 뒷바퀴에 하중에 더 많이 걸리므로 훼손된 타이어를 앞바퀴로 옮긴 것이다.
튜브가 타이어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비닐을 이용해 튜브를 감싸고 임시방편으로 수리를 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튜브가 타이어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 때 번득이는 생각! 버려진 패트병을 잘라 찢어진 타이어 안에 대고 튜브를 넣었다. 효과 만점이었다.
아픈 다리로 인해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응에안(Nghe An)성의 디엔 차우(Dien Chau)에서 멈추었다. 제법 큰 마을이었다. 작고 깨끗한 호텔을 찾아 들어서니 또 비가 오기 시작했다.
기도소리와 수탉 울음소리 그리고 개 짖는 소리의 화음
잠결에 종소리와 기도소리가 들려 잠이 깼다. 밖에 나와 보니 비가 제법 굵게 내린다. 시간은 새벽 4시쯤 되었다. 바로 호텔 뒤에 있는 성당에서 종소리와 함께 기도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다. 천주교에서 하루 세 번하는 삼종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예전에는 근처 성당에서 새벽 6시와 12시 그리고 저녁 6시이면 성당 종을 울리고 삼종기도 하는 것을 많이 봤기에 그 추억에 잠시 잠겼다.
성경을 읽는 소리인지 기도소리인지 처음엔 은은히 들리는 것이 옛 기억을 살리는 것처럼 운치 있었으나 문제는 그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새벽의 수탉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질세라 동네 개들도 함께 짖어댄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기도소리와 수탉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가 어울려 환상적인 화음이 울려 퍼진다. 완전히 잠을 설쳤다. 기도 소리는 한 시간이 넘어서야 그쳤다.
자전거와 짐을 맡기고 호치민 생가로
응에안성의 성도 빈(Vinh)에 도착하였다. 빈에서 서쪽으로 20km 지점에 호치민 생가가 있다. 거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여건은 전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베트남까지 와서 위대한 영웅 호치민의 생가를 가보지 않는 것도 매우 후회할 만한 일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면 되지만 문제는 자전거와 짐이었다. 궁리하다 보니 자전거 가게가 보인다. 찢어진 타이어도 갈아야 되므로 들렸더니 마침 주인이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우리는 그 가게에 자전거와 짐을 맡기고 불러준 택시를 타고 생가가 있는 캄 리엔(Cam Lien)으로 갔다.
생가는 매우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호치민이 나고 자란 외가로 초가집이 몇 채 있고 아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호치민은 몸과 마음을 모두 조국 베트남의 통일에 헌신한 세계적인 지도자이다. 전쟁 중에 사망하지만 그가 남긴 “당과 인민의 단결”은 결국 베트남을 통일에 이르게 한다.
자전거 주차비를 내다
도로가에 근사한 식당이 있어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식당 앞에서 자전거에 내리니 마치 주차 편의를 봐주는 사람이 오는 것처럼 한 젊은이가 다가온다. 식당 벽에 주차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식당에서 나온 줄 알고 식당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려다 안에서 보이길래 바깥벽에 기대 놓았다. 그런데 웬 번호가 적힌 딱지를 준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이들이 주차비를 달라고 한다. 그것도 한 대당 2만동씩 8만동을. 8만동이면 식당에서 먹는 맥주가 8병 값이다. 하도 어이없었으나 젊은 것들이 그래도 돈 좀 벌겠다고 나선 것 같아 반을 깍아 4만동을 주었다. 반 강제적이었으나 아무튼 생전 처음으로 자전거 주차비를 냈다.
손빨래하는 세탁 서비스
하틴(Ha Tinh)과 꽝빈(Quang Binh)성의 성도 동호이(Dong Hoi)를 지나 17도선 군사분계선에 이르니 매우 커다란 기념탑 같은 건물이 있고 베트남 국기가 높이 솟아 있다. 도로 건너편에는 옛 모습의 집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각 방에는 전쟁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 벤허이(Ben Hai) 강이 흐르고 강물 위로 미군의 폭격에 의해서 여러 번 끊긴 히에르엉(Hien Luong 다리가 놓여있다.
동하(Dongha) 전 7km 지점에서 점심을 하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오늘 머무를 도시는 거의 다 왔고 시간은 충분해 비 그치기를 오래 기다렸으나 영 그칠 기색이 없다. 비에 젖은 채로 호텔로 들어섰다. 일찍 도착해서 다행히 세탁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세탁기에 돌릴 줄 알았으나 전부 손빨래하는 것을 보았다. 아직 세탁기가 보급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건조기도 없다. 다음 날 세탁물을 받았을 때 조금 눅눅했지만 그래도 말리려고 애쓴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경쟁하듯 울려대는 경음기 소리
베트남의 소음은 대단하다. 거리에서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경음기를 울려댄다. 처음엔 적응하기 매우 어려웠으나 경음기 소리가 나를 보호해준다는 생각을 하니 참을 만했다. 뒤에서나 앞에서나 경음기가 울리면 갓길로 내려간다. 자동차는 우릴 보호하듯이 간격을 두고 옆으로 비켜간다.
1번 국도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는 물론이고 우마차를 포함해 온갖 교통수단이 다 사용한다. 주 도로는 왕복 2차선이고 중앙보호벽은 물론 노란 중앙선조차 대도시 외엔 보질 못했다. 주 도로 양 옆에는 폭이 좀 좁은 갓길이 꼭 있다. 대부분 자전거와 작은 오토바이는 이 길을 사용한다. 자동차가 이 길을 침범하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듣던 바와 달리 1번 국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안전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안전했다.
역주행, 무질서 속의 질서
베트남의 환경은 타이완과 너무 비슷했다. 도로 양옆에 있는 2, 3층 건물이 뒤로 길쭉한 것이나, 오토바이가 물결을 이루며 달리는 것. 그러나 대만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역주행이 베트남은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다. 왕복 2차선인 도로에서 자주 두 대의 차가 앞에서 나란히 온다. 심지어는 세 대의 차가 나란히 오며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것을 자주 보았다.
갓길에서의 역주행은 마치 법으로 허용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다. 베트남에서 차량은 우측통행을 한다. 그러나 갓길에서 마주치면 자연스레 좌측통행을 하여 비켜간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 할까 나름대로 질서가 있어 그나마 사고를 줄일 수 있는 것 같다.
환전 사기를 당하다
꽝찌(Quang Tri)성의 성도 동하는 군사분계선 안에 있는 땅굴 관광의 중심이 되는 도시이다. 숙박한 호텔 앞에 개인 환전소가 있어 환전하였다. 이상하게 환전하는데 바로 앞에서 주지 않고 돈만 받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한참 있다 내려오는데 지폐를 다양하게 섞어서 준다. 분명 앞에서 셀 때는 맞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일부 사기당한 것을 알았다. 10만원권에 5만원을 섞어준 것이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며 북부를 벗어나 중부에 있는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웬(Nguyen) 왕조의 수도 후에(Hue)에 입성하였다. 후에에 들어서자 젊은 아가씨 둘이 ‘한국인이죠’하며 반가워한다. 둘이서 북부에서 남부까지 관광버스로 일주하는 중이란다. 하노이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보는 한국인이라 매우 반가웠다. 마침 배도 고팠는데 바나나를 한 다발 사더니 일부 건네준다.
프랑스는 1885년 청나라와 2차 톈진조약을 맺고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는다. 이후 남부를 코친차이나로 바꾸고 직접 통치하였으나 중부는 안남으로 바꾸고 보호국으로 삼아 당시 응웬 왕조가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후에는 이 왕조의 수도로 높은 담과 성이 거의 훼손되지 않았고, 황궁 둘레에 쳐진 해자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조선도 비록 일본이 강점했을지라도 왕조가 망하지 않고 자치권이나마 행하였다면, 옛 모습의 한양을 많이 유지하고 있어 오늘과 같은 모습의 서울이 아니었을텐데 하는 회한이 든다.
처음으로 세차비 주고 자전거를 닦다
황궁을 뒤로 하고 후옹(Huong) 강을 건너 신도시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외국인이 많이 보였고 간판이나 메뉴도 영어로 된 것이 많다. 호텔에서는 영어가 통했다. 호텔에 들어가기 전 너무도 지저분한 자전거를 닦기 위해 세차장을 찾았다.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세차해 주는 곳에서 쾌히 우리 것도 해 주었다. 처음으로 자전거 세차하고 값을 지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