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은 왜 만복사 저포기를 썼을까?
사라져 버린 거대한사찰 남원의 고려대찰 만복사 이야기
"기린산 동쪽에 5층의 불전이 있고 서쪽에는 2층의 불전이 있다.그안에는 35척의 동불이 있다.고려 문종때 창건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만복사기록이다.
"소나무와 계수나무 짙은 그늘 드리우고
절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 달빛속에 가득하다.
으름덩굴과 칡덩굴덮인 오솔길은
사람들에게 부귀를 묻지않네."
조선 초기의 문신 강희맹이 만복사를 참배하고 남긴시이다.
만복사는 조선중기까지 수백명의 승려들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대사찰이었다.수백명 승려가 시주탁발을 나갔다가 기러기처럼 한줄로 천천히 걸어서 만복사로 돌아가는 장면은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이란 주제로 남원8경의 하나였다.
만복사 주변에는 도공들이 집단을 이루고 도예촌을 형성하였다.뛰어난 도예기술을 지닌 그들은 왜군들에게 끌려가 일본의 도자기산업을 일으키는데 큰역할을 한다.
심수관가의 15대조상 심당길이 만복사 사하촌 도공이었다.
고려초기에 창건되어 대가람을 이루었던 만복사는 정유재란때 왜군들의 방화로 전소되었다.그뒤로 재건되지 못하고 만복사지 절터에 석조유물 몇점만 남아 있다.
보물 30호 만복사지 오층석탑.
보물 31호 석불대좌.
보물 32호 당간지주.
보물 43호 석불입상등의 유물들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찬란했던 만복사의 사격을 짐작할수 있게 해준다.
조선 숙종때 간행된 남원읍지에 만복사 기록이 있다.
만복사내에는 대웅전.약사전.장륙전.영산전.보응전.범종각.천불전.나한전.명부전의 불전이 있었으나 정유재란의 병화에 불타 잿더미가 된 뒤에 사찰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다음은 연려실기술의 만복사관련기록이다.
오시에 칠전에서 큰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는데 포소리가 천지에 울렸다.서문앞에 있던 왜적은 만복사의 사천왕상을 수레에 싣고 와서 성밖에 돌려 보이니 대군이 더욱 놀랐다.
남원의 대사찰 만복사는 정유재란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다음은 난중잡록의 기록이다.
10월 명나라 군사가 오수역으로 나아가 남원성을 탐색하다가 향교의 뒷산에서 말을 쉬고 있었다.그때 곡성의 왜적 30여명이 소와 말을 몰고 만복사의 동철 오백나한을 녹인 구리쇠를 싣고 감으로 명나라군사는 뒤쫒아가 4명을 베어 죽였다.
이기록을 통해 만복사에는 사천왕도 있었고 오백나한이 소조상이나 목조가 아닌 동불로 제작된 나한상이었음을 알수있다.
오층불전에는 35척 (11.06미터)높이의 동불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만복사지의 오층불전은 요나라때 건축된 응현목탑으로 불리는 63미터 높이의 불궁사 석가탑 형태였을 것이다.
조선초기 문신 김종직이 고려대찰 만복사에 와서 남긴 기록이다.
일천가호 바람연기 자욱한 옛고룡에
구름위에 솟은 상찰 단청도 찬란하여라.
만억을 들여 재목구하고 극도로 장엄했으니
끝내 이 고을 보호한 공은 찾기가 힘들구나.
만복사는 실상사처럼 호국비보사찰이며 국립사찰 성격으로 장엄한 가람으로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만복사에 향올리고 돌아오던 길이던가
가만히 저포를 던지니 그 소원을 누가 맺어 주었나
꽃피는 봄날 가을 달밤에
그지없는 이 원한을
임이 주신 한잔술로 저근덧 녹여보세.
조선의 최고 천재시인 김시습은 자신의 신세에 빗대어 만복사 저포기를 썼다.
만복사 아래 마을에 사는 노총각 양생과 처녀귀신과의 사랑이야기가 이어진다.
사진 1번 만복사지 보물 석불입상
사진 2번 만복사지 오층석탑
사진 3번 만복사지 석불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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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대원사ㅡ석현장
김시습은 왜 만복사 저포기를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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