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자 칼빈은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위대한 신앙인의 전기나 자서전을 읽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을 가장 잘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은 그가 쓴 글을 읽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기 또는 자서전 그러면 벌써 부정적인 생각이 나지요? 자화자찬하는 책이 아니냐? 자기의 잘 한 것들을 열거하는 교만의 소치가 아니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그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원래 전기에는 일반성과 특수성이 종합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성장과정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전기 속에는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눈물과 역경과 고난을 어떻게 헤치고 똑 같은 연약함을 가진 인간으로써 그걸 어떻게 극복하고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을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한 몸부림, 고민, 결단, 그런 것들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지요. 그의 철학, 그의 인생관이 나타나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면 과히 실수하지 않을 수 있는 책은 어느 사람의 전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요즘에는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자기 P.R. 하느라고 책을 만들어서 자서전식으로 내는데 그런 것 말고 특별히 신앙인들의 전기를 읽으면 영혼이 살찌게 되는 역사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바라다본다는 것은 소중한 것이거든요. 화가로 말하자면 가장 어려운 그림이 두 말할 것이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화상은 대가가 아니고서는 손도 못 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자신의 내면의 모습과 인생을 한 장에 다 집어넣어야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자기의 고민이 들어있고, 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몸부림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는 화가의 그림 중에서 자화상을 제일 먼저 보고 가능하면 그것을 보고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왜 자화상 이야기를 하냐면 오늘 본문이 바로 전도서 자체가 그렇습니다마는 솔로몬의 자화상이다 그런 말입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관찰자의 형식을 빌어 왔습니다마는 구구절절이 자기 모습이요, 자기 인생관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솔로몬 같이 호기심이 많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해요. 보세요, 솔로몬이 얼마나 인생을 알기 위해 몸부림을 쳤는가? 하면, 지식을 통해서 인생을 알아보려고 했고, 쾌락을 통해서도 알아보려 했고, 그리고 다 안다고 생각해서 책도 많이 썼습니다마는, 그럴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깊이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한 평생 산다는 게 무어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 그 이름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누구든지 인생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엔가 어느 정도는 불가지론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가지론이란 인생의 궁극적 진리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은 어느 정도 아무리 연구를 해도 신비의 베일 속에 싸여있다는 그러한 고백이 바로 물가지론입니다. 그러니까 이 알 수 없는 문을 두드리고 연구하고 알려고 했고 그리고 솔로몬은 겨우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 그가 깨달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소중한 책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인생에는 솔로몬이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이해하지 못 할 일이 참 많다. 그렇게 말을 하지요. 소위 생의 불가지론적 요소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 못할 일들이 있더라 그것을 오늘 본문에 세 가지로 뽑아 놓았습니다. 1절을 한번 보십시다.
“내가 해 아래서 한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아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즉,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큰 일들, 그러나 대답하기 힘든 일들이 참 많다는 말입니다. 그 일들이 무어냐? 2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다 받았다는 것이지요. 돈도 많고 명예도 얻었고 남부러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다 가진 것 같아요. 나 행복할까? 그렇게 하고 안을 들여 다 보았더니 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보니까 누리지를 못하더라는 말입니다. 돈은 벌었는데 써보지도 못하고 꽁 꽁 ..쌓아 놓았다가 그냥 인생을 끝내더란 말이죠. 명예도 마찬가지. 많이 얻었으나 하나도 못 누리고 가는 사람이 있더라. 참 저렇게 될 것을 무엇 하려 이루었나? 그러한 질문이 생기는 일이 많더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 그렇다면 너무 인생이 짧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좀 오래 살면 어떨까? 또 외로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자식이 많으면 인생은 좀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자 에게 3절은 꼭 좋은 말입니다.
“사람이 비록 일 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 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자녀를 백 명이나 낳고 오손도손 살며, 오래 살면서 행복해 보려고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는 말이죠. 자식을 한 둘 낳은 것이 아니라 백 명. 첫아들은 고위관리를 만들고 둘째는 사업가 만들고 셋째는 군인 만들고 넷째는... 아무튼 요소 요소에 다 박아놓고 멋진 인생을 오래 살며 한번 누려보자고 그렇게 결심을 했는데 그 인생 참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만큼 허무하게 끝났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장사도 못 지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자녀를 많이 낳지만 마음 둘 곳 없어서 방황하다가 객사를 한 것인지 아니면 자살을 해서 파묻지 않은 것인지 아마도 본문이 암시한 바는 자녀를 많이 낳고 효도를 받고 만수무강하려고 했는데 제대로 장례도 안 치른 것입니다. 왜요? 자식끼리 서로 싸우느라고 진정한 의미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하냐?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 낙태된 자가 훨씬 나을 뻔했다. 왜? 4절과 5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이 덮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 함이라”
낙태된 자는 평안이나 있지 고통이나 안 당하지 자녀 백 명 키운다고 애써 고생은 죽게 해놓고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하고 꼴깍하고 가더라. 저렇게 되려면 무엇 때문에 키웠나? 그러한 질문이 생기더라 그럼 어떻게 하면 더 만족스러울까? 6절에 말하지 않습니까?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자녀를 백 낳고 오래오래 산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이건 고역일 뿐이지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장수도 좋은 환경 속에 장수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그런 이야기가 전설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어느 마을에 노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었는데 한 사람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불로초를 발견했습니다. 여기 불로초가 있다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모두들 모여들어 전부다 한 뿌리씩 캐먹었습니다. 모두다 불로초를 먹었으니, 그 마을에 죽음이 끝나고 아무도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집에서 초상이 나게 되었답니다. 왜 그런고 하고 봤더니 다른 집에서도 또 초상이 났습니다. 이상하다. 불로초 먹었는데 왜 죽는 일이 생길까? 하고 봤더니만 하나 둘 자살을 하더랍니다. 왜 자살을 할까? 알아봤더니만 인생이 지겨워서, 저 영감쟁이하고는 더 이상 못살겠어, 늙어 죽지도 않으니 어떡하면 좋습니까? 백년 천년 살 수 없잖아요? 살아도 화목하게 살아야 그게 장수가 복된 것이지요. 고생만 하며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장수하는 것이 천년을 살아도 복되지 않다. 저런 사람은 왜 저렇게 오래 살아야 되는가? 그런 질문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이 부족해서 그럴까? 무식해서 그럴까? 그럼 많이 배우면 좀 나을까? 8절 한번 읽읍시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많이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저렇게만 배워놓으면 부러울 게 없겠는데.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 지혜가 우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왜? 늙고 나니까 초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나 박사 학위가 열 개씩이나 있는 총장이나 미련해지기는 마찬가지고, 어리석어지기는 마찬가지더라. 똑 같더라. 대단한 것 같아도 아무 것도 아니더라. 이 세 가지에게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에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 있잖아요 기대가 싹 허물어지는 그러한 때가 있단 말이죠. 그렇다고 돈이 허무하다고 돈을 안 벌 수도 없고, 오래 사는 것이 허무하다고 일찍 죽을 수도 없잖아요. 자식 낳아서 별 볼일 없다고 해서 자식도 안 나을 수 없고 ,그렇다고 안 배울 수도 없어요. 하긴 해야 되겠는데 해 보았으나 별 것 아닙니다. 여기서 진정한 의미의 딜레마를 느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이냐? 왜 인생에는 이렇게 이해 못 할 일들이 많으냐? 왜 이렇게 원치 않는 일들이 자꾸 생겨나는 것이냐? 그것도 아무에게도 차별이 없이 권세 있는 자나 부요한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누구에게든지 인생의 불청객이 다가 오더라는 것입니다. 바라는 소원대로 되지 않고 기대했던 바가 다 무너지는 때가 있더라 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불청객의 문제를 오늘 본문은 다루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기대한 바가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불청객의 내용이 각각 다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질병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인제 건강하기만 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요. 이 가정은 그런데 살만하니까 병이 덜컥 들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여름에 수해가 난 것일 수도 있고 지진이 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 일만 없다면 이제 행복은 보장되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오히려 땅이 흔들리고 비가 많이 와서 좋은 것이 다 날아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죽음일 수도 있지요. 불청객이란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뭐든지 다 해 보겠는데, 나를 오라고 부르실 때가 있고요, 때로는 엄청난 금전적 손실 이것이 불청객일 수도 있습니다. 이 돈만 손해 보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거에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꼭 됐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해야 내 계획대로 되었을 것인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어요 자기 기대가 무너지고 깨어질 때 사람들은 답답해 하고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큰 것을 꿈 꾸었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그렇게 일찍 데려가시려면 주지나 말지. 그런 마음이 안 들겠습니까? 왜 살만하니까 건강을 거두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다 날려 버릴 돈 무엇 때문에 벌게 해 주었습니까? 그런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하나님 이건 내가 꿈꾸고 바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내게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그 절규가 있겠지요.
그러한 절규에 대한 대답이 9절에 나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이 구절의 피상적인 의미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도 없던 것보다 낫다 날려버릴 재물 무엇 하려고 주셨습니까? 솔로몬의 대답입니다. 무슨 소리야 그 동안에 있었던 것만 해도 좋지 없었던 것보다 낫다 그런 이야기지요. 피상적인 의미로 보자면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으로 보자면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공상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내 손안에 있는 새 한 마리가 숲 속에 있는 새 두 마리보다 낫다. 내게 있는 것이 소중하다 지금. 다시 말하면 잃어버린 지나 가버린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공상보다 지금 내게 있는 초라한 이 모습 이 대로가 더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대가 깨어질 때, 아니에요 이럴 수는 없어요 하면서 붙잡고 늘어지면서 과거에 집착하는 동안에 나에게 더 많은 손해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손안에 있는 이것 이것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꿈꾼다고 해서 인생이 변하겠습니까? 안 변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불청객은 올 것이고 그 사실에 대하여 수용하라 그런 얘기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하는 말입니다.
제가 솔로몬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거기서 결론을 하나 얻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말한대로 솔로몬이야말로 전부 받은 사람입니다. 부요함도 받았고 존귀함도 받았고 자식도 받았고 아내도 받았고 지혜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일생을 잘 보세요. 하나는 못 받았습니다. 누리는 행복은 못 받았어요. 그는 돈에서 결국 행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 물질의 귀중함을 알게 될 때 그는 가난해졌습니다. 아내와 자식을 많이 갖고 낳아 길러 보았습니다만, 제대로 난 자녀 하나 없었고 자녀를 통하여 기쁨 한번 누려보지 못 했습니다. 지혜도 엄청나게 가져보았지만 지혜 때문에 행복해지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끝없는 연구와 호기심은 그를 피곤하고 지치게만 했습니다. 가졌다고 최고가 아닌 것 같습니다. 솔로몬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누리는 복이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랍니다. 여러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그가 마침내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10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세 가지를 말합니다.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노라"
이름이 칭한바 되었다. 이름을 지어준다. 이 말은 다스리고 지배하고 장악한다는 뜻입니다. 질병이라고 하는 이름 또 불행한 사건 혹은 예측하지 못한 일들. 그런 것들이 다 칭한 바 되었다는 마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다스리고 장악하고 통치하신다. 지금 내가 볼 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안 들거든요. 그러나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그 사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졌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렸습니다. 무질서하고 혼돈 된 것 같고 있을 수 없는 일 같지만, 네가 볼 때 하나님 앞에서는 다 이름이 칭 한 바 된 그의 역사와 섭리 속에 있는 사건이더라 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무엇인지 이미 안 바 되었나니." 하나님은 사람이 누군지 정확하게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인데 사람이 무엇이냐? 흙입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뺏겼다 잃어버렸다 하는데 잃어버리기는 뭘 잃어버렸습니까? 뺏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져온 것이 하나도 없는데요. 아무 것도 가져온 것이 없는 인생인줄 하나님은 아시고 계시고 비록 자기에게 작은 권세가 있을지라도 인생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계십니다. 당신이십니다. 여러분 인간이 인생을 다스립니까? 절대로 못 다스립니다. 또한 사람에게 정말로 무엇이 귀한지 하나님은 아시고 계십니다. 나는 나를 모릅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인지 이미 안바 되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람이 다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무엇입니까?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가 없느니라" 여기서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지요 . 하나님이 왜 강합니까? 당신의 뜻과 섭리 데로 온 역사와 인생을 다스리는 분이요. 그러므로 강한 분이요. 그러므로 다툴 수가 없습니다. 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고 모든 것을 그 이름을 칭하신 분이기 때문에 너무도 강한 그분과는 도무지 다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이 생길 때 말합니다. 하나님과 논쟁하려 하고 항의하려 하고 질문합니다마는 하나님은 강해요. 우리가 붙든다고 우리가 마구 잡아 흔든다고 해서 하나님이 흔들리지 않으세요. 하나님 설명해 주세요. 하지만 하나님이 설명해주는 것 보셨습니까? 욥이 인생의 그 신비 속에서 절규할 때 "하나님, 하나님, 왜 나한테 이러십니까?" 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에게 설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아! 너 아느냐? 왜 하늘에서 비가 오는지 아느냐? 왜 낙타가 사막에서 오래 사는지 아느냐? 하마가 어떻게 새끼를 배는지 아느냐? 새들이 어떻게 그렇게 먼 길을 날아서 철새가 운행하는지 너는 아느냐? 그렇게 물었지요 강하신 하나님 그 앞에서 누가 다투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강하신 하나님 앞에서 11절과 같이 다투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헛 된 것을 더 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헛된 많은 일 하나님이 있네 없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보다 강해요. 그래서 그런 말이 있잖아요. 하늘을 향해서 침을 밷어라. 그 침은 네 얼굴로 떨어진다. 이렇게 논쟁을 하고 강한 자와 다투게 되면, 그 사건을 통하여 내게 주는 교훈 조차 받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 눈에 보이는 이 지상적이고 수평적인 여기에, 이 사건에 내 관심을 다 기울이게 되면 수직적인 것이 하나도 안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말합니다. 하나님과 다툴 수 없다. 자기가 왕이었습니다마는 이 운명의 힘, 예측하지 못한 사건들에 대하여 그도 나름대로 발버둥 쳐보지 않았겠습니까? 왜 이러냐 고 묻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하여 누가 그 섭리를 알겠느냐? 강한 자와 다툴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한 자와 다툴 수 없다. 이 하나님의 다스림 그리고 하나님이 이유를 가지고 계시고 권리를 가지고 계시고 결과를 가지고 계신다는 이 주권에 대하여 그가 비로소 인정을 합니다.
인정을 하고 보니까 12절같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 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강한 자와 어찌 다툴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다스림과 운행하심에 복종하고 났더니만 마음속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초조한 것도 많았고 불평도 많았습니다. 내 마음은 한 백 살쯤 살고 싶습니다. 아니 이 백 살쯤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만 하나님은 55세가 되었는데 오라고 부르세요. 거기에 대해서 얼마나 하고싶은 말이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강한 자와 다툴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나니까, 빨리 가는 것이 좋은지 어떻게 알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 이번에는 꼭 합격을 해야 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하지만 내년에 과를 바꾸어서 합격하는 것이 더 좋은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어떤 청년이 제발 하나님 저 아름다운 저 아가씨와 꼭 결혼하게 해달라고 그러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남자가 될 것이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0 년 후. 주여! 저 여자 만난 것이 제 인생에서는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저 여자 때문에 제 인생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제발 이제 난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럴 수 있을 지 누가 알겠는가? 하는 얘깁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의 강하심이 다스림을 인정하고 나니까 수용할 여지가 생겨나더라는 말입니다. 어떤게 좋은지 정말 누가 알겠느냐? 내가 내 생각에 잡혀서 아니다! 라고 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방법이 더 나은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수용하게 됩니다. 우린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되는대로 막 살아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은 계획도 세워야 되겠고 치밀하게 노력도 해야 되겠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성을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그렇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기어코, 주여! 아니 되옵나이다. 이렇게 발버둥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따라오라고 하시고 네가 누군지 안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에스 루이스라는 분이 이렇게 멋있는 글을 썼습니다
"당신의 인생의 문이 갑자기 당신 앞에서 꽝! 하고 닫히고, 그 안에서 빗장 거는 소리가 딸깍 들릴 때, 그리고 나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당신은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기서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침묵은 더욱 무거워지기 때문에."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주여! 저는 이제 당신이 왜 아무 대답도 안 하시는지 압니다. 당신 자신이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앞에서는 문제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달리 어떤 대답이 족하겠습니까? 말 말. 말은 오직 다른 말과 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잘 나가던 인생 문이 탁 닫히고 속에서 빗장 거는 소리가 찰칵 들릴 때 고요한 침묵이 흐를 때 우리는 이문 열어달라고 소리를 칠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손만 부셔집니다. 그 침묵 앞에서 당신이 돌아서는 것이 좋다.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대답이 없으세요? 그러나 압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이 대답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는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 앞에서 아무리 말을 많이 해봤자, 그 말에 내가 빠질 뿐이라는 것을 ..이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론 스미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에는 종종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이상한 사역자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사역자가 나타나서 나와 씨름하며 나를 부러뜨린다. 그리고 엄청난 것을 이루어낸다. 인생에는 왜 이런 혹독한 싸움이 있을까요? 대답은 많겠습니다만 하나만 예를 든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때로 이상한 사역자가 있고 불청객이 있는 법이랍니다. 그 때에 어떻게 이겨야 하는 지를 본문은 가르쳐 줍니다. 편안히 받아 들이라. 이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흔히 우리는 내 꿈이 깨질 때 나는 실패했다 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신 나는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단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Ambition, 또 하나는 Vision. 두 말은 다릅니다. Ambition이란 내 욕심에서 기초한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내가 꼭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고 내 꿈과 계획과 야망입니다. 이것은 때로 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Vision은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하시기를 원하시는 당신의 소원입니다. 이 Vision은 깨지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Ambition 이 깨져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뜻, Vision 은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계획이 깨졌다고 해서 내 엠비션이 무너졌다고 해서 내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저는 항상 기도할 때 잊어버리지 않고 꼭 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판단, 이 소원은 나의 엠비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비젼입니까? 구분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래서 나의 엠비션은 항상 깨지고 하나님의 비젼 만 세워주세요 이 엠비션과 비젼이 합쳐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건 최고의 인생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 때는 우리의 야망이 깨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더 차원 높은 날 향한 비젼은 오늘도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인정할 때에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생의 각 단계 단계마다 벌 때는 버는 데에 또 성장할 때는 성장할 때 데로 나름대로의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을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의 기쁨을 극대화해서 즐기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즐겁게 의미 있게 살아라. 그러나 인생에 불청객이 왔을 때 거기에 대하여 좌절하고 절망하고 과거에 붙들려서 인생 망치는 사람 되지 말아라.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면 대용품에 만족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기대에 붙들린 사람은 과거를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환상 속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에 매여서 사는 사람이 있고요, 환상 속에 붙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월트 디즈니의 세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꿈의 세계가 아닙니다. 환타지의 월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도피 행위 중에 하나가 마약이고 술이고 향락입니다. 이런데 빠지지 말고 현시를 직시해라.
내 계획은 깨져가지만 나를 향해 세워져 가는 하나님의 비젼이 무엇인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지금 남은 이 작은 것을 극대화 할 때에 내 생을 복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업적을 거창하게 측정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각도에서 화려한 것을 찾을 것도 아닙니다. 저 사람 사장 되었으니 나는 회장 되어야지 성공한 것이다라고 할 필요 없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있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가 되어가고 있는가? 나는 비젼에 붙들리고 있는가? 그것을 묻는 그러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게서 깨어진 것 그것에 대하여 미련 갖고 거기에 집착하여 오늘을 불행하게 보내는 일 없도록, 내가 최선은 다 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손에 맡기고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것 그 속에서 하나님의 비젼을 찾아야 되다는 것을 생각합시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솔로몬은 인생이 무엇인가를 깊이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다 모르는 부분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알 수 없는 인생의 이 섭리 속에 어떻게 적용해 나가야 할 것인가? 그는 무수히 몸부림 치고 노력했습니다마는 마침내 그는 고백하기를 모든 것은 그 이름이 칭한 바 되고 사람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아시며 그는 강하시니 그와 능히 다툴 수가 없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때로 우리인생에 원하지 않는 불청객들이 일어나고 또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좌절 거기에 대한 분노 거기에 대한 원망 거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늘을 잃어버리는 일이 결단코 있지 않기를 은혜 내려 주시기를 간구하옵나이다.
때로 우리에게 이상한 사역자가 나타나기도 하고 계획한 것이 좌절되기도 합니다마는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내 야심은 깨어지나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꿈은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며, 그 비젼을 찾고 그 비젼을 향하여 걸어 갈 수 있는 참 은혜에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그 때 그 때 주어지는 삶의 기쁨을 누리며,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맡기면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