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북성포구 안벽의 미 해병 영웅
월미도를 손쉽게 확보해서 인천시로 가는 접근로를 연 미 해병은 다음 만조가 차오르는 저녁 5시 30분, 인천시 중심부 양 측면 해안들에 쇄도했다. 인천역, 차이나타운의 정면 해안인 만석동 북성포구 해안과 인천 항만의 우측 외곽 용현동 해안이다. 미 해군과 해병대는 만석동 북성포구 해안은 레드 비치라고 명명했고 용현동 해안은 블루 비치라고 명명했다.
9월 15일 저녁 레드 비치[북성포구 해안]로 발진하는 상륙용 주정[LCVP].
상륙용 주정들은 종대로 발진해서 돌격 직전 횡대로 전개한다.
두 해안으로 상륙하는 부대는 월미도에 상륙한 부대가 단 1개 대대였으나 인천시라는 대형 목표 제압을 위해서 편성한 훨씬 더 큰 대부대였다.
레드 비치[북성포구]에는 레이먼드 머레이 중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 1사단 5연대에서 월미도에 미리 상륙한 태플릿 중령의 3대대를 제외한 1대대와 2대대가 상륙했고 블루 비치[용현동 해안]에는 태평양 전쟁의 전설적인 맹장 루이스 체스티 풀러 대령의 미 해병 1사단 1연대가 상륙했다.
양 해안에 쇄도하는 상륙용 주정들과 전망대 고지[인천 자유공원]에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이탈하는 콜세어기가 보인다.
아래 원안은 뒤에 소개하는 묘지 고지.
월미도 공격과 같이 상륙전 무려 세 시간이나 치열한 준비 사격이 있었다.
북한군의 포대가 몰려있고 양 해안을 감제(瞰制)할 수 있는 전망대 고지[인천 자유공원]에 화력이 집중되었다. 인구 밀집 지역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던 네이팜탄이 이곳에 집중투하된 것을 검은 연기로써 알 수가 있다.
한국전쟁에서 네이팜탄은 적 섬멸 공훈 일등의 항공무기이기도 하였지만 그 타격 면적이 넓고 화재를 일으키는 겔[Gel] 상태의 불덩이 파편을 주변에 비산시켜 무고한 민간인들에게도 가장 피해를 많이 준 증오의 폭탄이기도 하다.
이 준비 포/폭격에는 로켓 발사함들이 참가해서 수천 발의 로켓탄이 발사되었다. 준비 포격 후 상륙용 주정[LCVP]들이 바다를 가르고 목표 해안으로 돌진해갔다.
이미 준비 사격과 네이팜탄 투하로 만석동 쪽에서 일어난 화재로 해상은 연기로 뒤덮여 해안 목표 감지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날 폭 500미터의 레드 비치를 향해 발진했던 7-8척의 상륙정대는 무려 23차에 달한다.
레드 비치로 향하는 상륙용 주정들과 상공에 만석동 일대에서 날아온 연기가 보인다.
인천 상륙작전의 한 특징이 있다면 태평양 전쟁에서 강한 일본군이 지키는 해안에 상륙하는 공격 부대가 수륙양용 장갑차[Amtrac]가 선두에서 서서 공격했던 것과 달리 수륙양용 장갑차[Amtrac]가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용현동 해안에 상륙한 풀러 대령의 1연대의 일부 병력을 해상 수송했을 따름이다.
더 자세히 조사해보니 북성포 해안은 안벽의 부두가 있어서 수륙양용 장갑차[Amtrac]가 오르기가 불가능했었고 월미도는 상륙 후 기동 공간이 좁아서 수륙양용 장갑차[Amtrac]가 필요 없었던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미 해병 1연대가 상륙 돌격했던 블루 비치의 용현동은 과거 넓은 염전이 있었으며 염전 남쪽은 개펄이지만 평탄해서 상륙 후에 내륙으로 기동 공간에 넓어 수륙양륙 장갑차[Amtrac]는 1연대에 할당되었다.
블루 비치[용현동]로 달려가는 미 해병 1연대의 수륙 양용 장갑차[Amtrac]와 상륙용 주정들
인천 상륙 작전 최초로 기동한 수륙양용 장갑차[Amtrac]는 미 해병대가 아니라 미 육군이 보유한 것이었다. 한국 전선에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단 1주 남짓 기간에 준비를 갖추고 출동해야만 했던 미 해병 1사단의 1전차 대대는 조종수가 태부족해서 수륙 양용 전차 조종수들로 보충했기 때문에 충분한 수륙양용 장갑차를 가져올 수가 없었다.
블루 비치 상륙 제1파의 선두에 섰던 육군 소속 수륙양용 장갑차[Amtrac]는 18량이었다.
블루 비치로 가는 육군 보유의 수륙양용 장갑차[Amtrac]
지금 인천 상륙작전의 재현 행사나 기념 조형물에서와 같이 수륙양용 장갑차[Amtrac]가 심벌로 등장하는 것은 좀 그렇다.
인천 상륙 작전에 등장했던 수륙양용 전차[Amtrac]가 정작 맹활약을 한 곳은 바다가 아니라 한강이었다.
미 해병 5연대 3대대[태플릿 중령의 월미도 상륙부대]가 행주산성에서 북한군 1대대가 쏴대는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무릅쓰고 도강을 할 수 있던 것은 이들 수륙양용 장갑차[Amtrac]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수륙양용 장갑차[Amtrac]는 행주산성 점령 북한군에게 50구경의 기관총 사격을 하고 배후를 차단할 듯이 측면 돌파를 해서 북한군이 모두 도주하게 했었다.
수륙양용 장갑차[Amtrac]는 9월 23일 영등포 방어선을 격파한 미 해병 1연대와 한국 해병 2대대가 마포 나루를 도강해서 서울 중심부로 공격할 때도 기여 했고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가 반포에서 서빙고로 도강해서 남산을 점령할 때도 기여 했었다.
미국이 독일로 진격할 때 수륙 양용 장갑차[Amtrac]를 대서양에서 기차 수송해 가져와 라인강을 도하했던 사실을 빼놓고는 강에서 수륙 양용 장갑차[Amtrac]가 대활약을 한 중요 사례는 서울 수복작전이 유일하다.
행주 나루를 건너는 수륙 양용 장갑차[Amtrac].
뱃사공들이 자기 재산인 나룻배가 파손될까봐 걱정스럽게 지키고 있다.
미 해병 5연대의 첫날 목표는 인천 시내로 진격해 폭 1마일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북성포구 부두에 최초로 도착한 중대는 해병 1대대의 두 개 중대였다. 좌측의 A 중대와 우측의 B중대였다.
좌측에 상륙했던 A중대의 1소대가 적의 벙커를 조우해서 격전을 하는 동안 2소대가 묘지 고지로 뛰어 올라가 공격했다. 그렇게 심한 폭격과 포격을 했는데도 열댓 명의 북한군 육전대[해병대] 박격포 부대 열댓 명이 살아남아서 손을 들고 항복했다.
북성포구 해안 오른쪽에 후속 상륙했던 E중대가 6시 45분, 전망대 고지의 북쪽 영국 영사관 고지를 점령했다.
이어서 상륙한 C중대에게 중요한 전망대 고지 북쪽의 절반, 그리고 D중대에게 남쪽의 절반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중요한 고지 점령에 무선 두절로 혼란이 있었다. 연락 두절로 B중대가 전망대 고지 정상에 도착했다. 시각은 20시였다.
혼란 속에 F중대가 전망대 고지 남쪽 아래 도착해서 고지로 올라가다가 중턱의 북한군 벙커와 조우해서 전투를 벌여서 북한군을 패주시켰다.
선두에서 북성포구 부두로 오르는 해병이 로페즈 중위
월미도와 같이 북한군이 부두에 교통호를 구축해놓은 북성포구 해안에 상륙한 미 해병 5연대 1대대에서 미국 최고 무공훈장[한국 태극훈장에 해당하는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 받은 해병소대장이 나타났다.
그는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로서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집안 아들로 태어나 아나폴리스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제작해서 상륙용 주정에 설치했던 사다리를 타고 북성포구 해안 안벽에 오르는 그의 사진은 인천 상륙작전의 아이콘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제2파로 상륙해서 좌측 묘지 고지의 방향으로 진격하던 중에 북한군 벙커에서 사격을 받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투척하려던 순간에 적탄에 오른쪽 팔과 오른쪽 가슴을 맞아 쓰러지며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중상을 입은 몸으로 이미 안전핀을 뺀 수류탄을 집어 던지려 했으나 그럴 힘이 없었다. 로페즈 중위는 수류탄이 그냥 터지면 옆 소대원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고 판단하고 수류탄을 안고 자폭해버렸다.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
1965년 월남 파병 훈련에서 부하가 떨어뜨린 수류탄을 안고 자폭한 강재구 소령과 비슷한 영웅이 인천 상륙 작전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로페즈 중위의 전사 후에 미 해병들은 해변의 묘지 고지를 공격했다.
그렇게 폭격을 했는데도 수십 명의 북한 육전대원들이 고지의 진지에서 전개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저항을 예상했으나 폭격에 얼이 빠진 이들은 해병들이 공격해오자 모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저녁 7시쯤 비가 내리는 중에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미 해병들은 북한군과 격전을 벌여 계속 밀어내고 저녁 10시경 중요한 전망대 고지를 점령했다.
위의 원 안에 묘지 고지로 짐작되는 곳과 아래 원 안에 전망대 고지가 있다.
묘지 고지 확인을 위해 방문했으나 길을 잘못 들어 그냥 돌아왔는데 추후에 다시 방문해서 촬영한 사진을 올리겠다.
인천 남동쪽 현 용현동 남쪽에 상륙한 루이스 풀러 대령의 미 해병 1연대는 인천 시가지로 공격해 들어가지 않고 동쪽으로 진격해가서 20시, 경인 가도를 감제하는 117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어서 상륙 지점의 남쪽으로도 진격하여 233고지도 점령하여 인천 남서쪽에 넓은 교두보를 확보했다.
사단장 스미스 소장과 연대장 머레이 중령이 상륙해서 지휘소를 차리고 지휘권을 해군의 시어즈 대령으로부터 인계받았다.
해병들은 비에 흠씬 젖은 몸으로 추위에 떨며 당연히 있을 듯했던 북한군의 야습에 대비했으나 그날 밤에 북한군의 역습은 없었다.
그날 밤 인천의 전투 상황도를 보면 인천은 삼등분되어 시가지 북서쪽 부분은 북성포구 해안, 레드 비치로 상륙한 미 해병 5연대가 점령했고 그 가운데 항만 바로 뒤의 인천 중심 시가지가 북한군이 장악하고 있고 그 오른쪽 남동쪽 삼분지 일은 용현동 블루 비치에 상륙했던 루이스 풀러 대령의 미 해병 1연대가 점령한 상황이었다.
레드 비치의 확보가 거의 굳어지자 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바로 앞에 기차 철로가 있는 것에 유의.
LST가 하역한 군수품은 바로 화차에 적재되어 부평으로 수송되었다.
북한군은 중요한 전술적 요지인 전망대 고지를 빼앗기고,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병력을 양분해서 양쪽 미 해병들을 향해 배치한 취약한 방어 상황이 되었으니 사실상 인천 방어 전투는 불가능했다.
더구나 유일한 탈출 통로인 경인 가도가 차단되기 일보 직전이니 그냥 불가능해 보이는 방어를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날 밤부터 인천의 북한군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상륙용주정[LCVP]조타수들은 숨은 전공자들이었다. 훈장 수여 중.
9월 16일은 날씨가 맑았다.
아침 6시경, 한국 해병대가 상륙해서 인천시내 소탕전에 가세했다.
인천 시가지에서 수색을 하는 한국 해병대
16일 오후 늦게 미 해병대는 인천 부평의 에스컴 시티[Ascom City]까지 진격해서 이 지역을 확보했다. 이 에스컴 시티는 해방 후 미군이 한국에 진주하면서 일본군의 조병창[소총제작]을 인수하여 병참기지로 발전시킨 것이다. 아주 대형 병참기지였다.
인천의 부두에 하륙된 군수 물자들은 인천역에 방치된 기관차와 화차들을 이용해서 이곳의 대형 창고로 운반되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16일 부평의 에스컴 씨티의 점령으로 인천은 완전히 확보되고 서울로 진격하는 최종 순간만 남아있게 되었다.
에스컴 씨티 - 일부는 캠프 마켓으로 바뀌어 오랫동안 유지되었었다.
현재는 미군이 한국에 반환하여 시민 방문이 가능한 곳이 되었다.
[출처] 인천 북성포구 안벽의 미 해병 영웅|작성자 동고동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