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이식으로 혈액형 바뀐 그녀,
성격도 변했을까?
백혈병에 걸린 환자 이야기다.
그녀는 10년 전 대학을 졸업할 즈음,
몹시 피곤하고 어지러워 병원 진료를 받았다.
혈액검사에서 모양이 이상한 백혈구가 대거 발견됐다.
적혈구·백혈구 등을 생산하는 골수에 돌연변이가 생긴 것이다.
골수의 혈구 생산 라인이 불량품만 잔뜩 내놓았다.
비정상적 백혈구가 쏟아져 나와 온몸을 공격했다.
정상 백혈구는 되레 모자라니 세균 감염에 무방비 상태가 됐다.
근본적 치료를 위해서는 골수 생산 라인을 새것으로 바꾸는
골수이식을 받아야 했다.
유전자형이 맞는 골수 기증자를 찾다 보니,
혈액형이 다른 사람이 적임자로 정해졌다.
그녀의 혈액형은 O형이고, 기증자는 B형이었다.
의료진은 그녀의 골수를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로 완전히 비우고,
기증자의 골수를 깔았다.
자동차로 치면 소나타 생산 라인을 없애고,
그랜저 라인이 깔린 격이다.
이식된 골수는 그녀의 등골뼈와 엉덩이뼈에 자리 잡아
B형의 새 혈구 세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처음 2~3개월은 그녀의 핏속에 자신의 O형과
기증자의 B형 적혈구가 공존했다.
그러다 모두 B형으로 교체됐다.
골수이식 후 혈액형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식된 골수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징표다.
다행히 그녀는 골수이식으로 백혈병에서 벗어나,
원래 성격과 본래 성향의 일상을 살고 있다.
그저 20년 정도를 혈액형 O형으로 살았고,
그 후 10년을 B형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혈액 전문의들은 이처럼 골수이식으로 혈액형이 바뀌어도
성격이 바뀌는 경우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을 보면, 너무나 당연하듯
혈액형을 가지고 사람 성격을 분류한다.
A형은 내성적이고, B형은 이기적이며,
AB형은 속을 알 수 없고, O형은 외향적이라는 식이다.
그래서 나온 우스개가 A·B·AB·O형 등 4명이 함께 밥 먹는 이야기다.
"AB형이 갑자기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면,
O형이 궁금함을 못 참고 AB형을 쫓아 나간다.
B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밥을 먹고,
A형은 B형에게 '쟤네, 나 때문에 나간 거야?' 하고 걱정돼서 묻는다."
이런 걸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 많다.
혈액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01년이다.
오스트리아 과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가 A·B·O 혈액형이 있고,
이들에게 서로 융합되지 않는 항원·항체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수혈에 혁신이 일어났고, 그는 노벨 의학상을 받았다.
혈액형은 사람의 9번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에 따라 결정된다.
적혈구에는 고유의 당분 성분이 달라붙어 있는데,
그 구조에 따라 혈액형이 정해진다.
동물에게도 세균에도 혈액형은 있다.
혈액형 분포는 인종과 지역마다 다른데,
한국에는 A형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O, B, AB형 순으로 있다.
대략 3:3:3:1 비율이다.
일본은 A형 비율이 더 높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순서는 비슷하다.
서양인은 O형과 A형이 압도적으로 많다.
사람의 혈액형이 다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다양한 종류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로부터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혈액형을 가지게 됐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혈액형에 따라 특정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잘 견디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아직 정립된 연구 결과는 아니다.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이를 믿는 의학자도 없으며,
성격은 뇌의 기질적 요인과 자라온 환경, 교육 과정에서 결정되지
혈액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혈액형 성격론'은 일본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일본의 한 방송 작가가 쓴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이 인기를 끌면서 퍼져 나갔다.
그것이 우리나라로 넘어왔다.
혈액형 미신을 믿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 정도다.
일부 방송에서는 그것이 마치 정설인 양 다룬다.
그 사람의 성향으로 보아 자기가 예상한 혈액형이 맞으면
그럴 줄 알았다며 손뼉을 치고 무릎을 친다.
이는 일종의 버넘 효과다.
누군가가 '당신은 냉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이 많아서 부탁을 거절 못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면
다들 맞는다고 긍정하게 된다.
일반적 성향을 두고 "맞아! 딱 내 얘기네" 하고 받아들이는 현상이다.
혈액형 성격 분류도 그 짝이다.
이를 두고 한 외국 기자는 일본 작가에게 세뇌된 한국인이라고 했다.
이력서에 혈액형을 쓰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지 싶다.
골수이식으로 혈액형이 바뀐 사람은 어림잡아 3000명 정도 추산되는데,
이들은 무슨 혈액형을 써 넣어야 한단 말인가.
이제 '혈액형 성격론'은 그저 재미로 하는 놀이로 그쳐야 한다.
과학적·통계적 근거를 가진 혈액학이나 심리학이 아니다.
혈액형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타입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꼭 B형 혈액형이 그렇게 주장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긴 있다.
-조선일보 김철중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