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3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서리 맞은 고추 잎처럼
명령은 단칼과 같이 내린다. 그래서 추상같은 명령이라고 옛날에 말했나 보다. 추상(秋霜)은 ‘가을날의 서리’를 말한다. 어려서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리가 내리는 것을 잘 아는 편이다. 10월이 되면 서리가 내린다. 아침에 무척 추워지면 솜이불 속에서 일어나기 싫어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어른들의 꾸중을 듣고 일어나 마당이라도 쓸라치면 배추와 무청 위에 하얗게 서리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 서리에 맞으면 제일 먼저 죽어나가는 것은 연한 잎을 가진 채소들이다. 고춧잎, 고구마, 호박, 콩잎 등은 새카맣게 죽어버린다. 그리고 나뭇잎은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된서리를 맞으면 곧 죽은 목숨이다. 그래서 고춧잎이나 고구마 잎, 깻잎은 서리가 내리기 전에 서둘러서 거둬들여야 한다.
라디오도 없고, 일기예보도 시원찮은 시기에 살았던 어른들은 서리가 오기 전에 거둬야 하는 채소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리가 오기 전에 잎이 죽지 않게 싱싱한 잎이나 줄기를 거둬들였다.
의사의 진단과 치료의 결정은 신속하고 명확하게 이뤄져야 한다. 정말 그 모든 것이 분명하다면 치료에 대한 명령은 단칼과 같이 내려야 하고, 사람의 생명 문제이기 때문에 추상과 같아야 한다.
나는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아야 하는 문제에 있어서 무척 망설였다. 우선 아들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결혼식이나 끝내놓고 항암치료를 하든, 수술을 하든 하겠다고 “항암치료를 한 3개월 뒤로 미루면 어떻겠습니까?”하고 질문을 했었다. 강 교수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No, 안됩니다. 지금은 1분 일초가 급합니다.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라고 강경하게 대답한다. 나는 정말 찍소리도 못하는 생쥐 꼴이 되었다. 아들은 ‘내가 쓸데없는 고집을 피운다.'고 또 싫은 소리를 한다. 그래서 내 치료는 가속도를 붙게 되었다.
암은 가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암세포가 증식할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되면 아주 엄청난 속도를 낸다고 한다. 그때 내가 항암치료를 뒤로 미뤘다면 더 어려운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때가 있다. 말기 암까지 가 놓고도 천하태평인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다가는 더 어렵고 힘들게 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결정할 일은 신속하고 정확하고 냉정하고 그 후속조치는 추상과 같아야 한다. 생명에 관한 일은 더욱 그렇다. 의사선생님이 담배를 끊어야 건강에 좋겠다고 진단하고, 끊으라고 추상과 같은 명령을 내렸으면 그 즉시 그대로 실행해야 살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누가 살아날 수 있을까? 쓸 데 없이 제가 잘 났다고 고집을 피우며 살 것인가? 자신이 할 수도 없는 일을 하겠다고 공약(公約)을 해 놓고 공약(空約)이 되는 정치가들처럼 말잔치만 늘어놓을 것인가? 하지도 못하는 약속을 주렁주렁 달고 살 것인가? 추상같은 명령을 어겼다면 누가 살겠는가? 고춧잎이나 고구마 잎처럼 서리 맞아 죽을 일만 남아있다. 가을날의 서릿발보다 더 무섭고 더 지엄하신 하느님께 거역한 사람들이 지금도 예수님을 팔아서 사기를 치며 살고 있다. 그들을 어찌 구원 받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느님께서 데려 가신다면 어떻게 내가 거부할 수 있을까? 헛된 약속이나 맹세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냥 알아서 살아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5, 20) 그리고 그 분께서 말씀하시면 “예”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죽지 않고 살아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암이란 친구와 이별하기/야고보 아저씨의 암 체험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