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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내면의 기슭
생강나무
생강나무 잎을 문지르면 생강냄새가 난다
이른 봄 산수유보다 한 뼘 먼저 꽃을 피운다
산수유보다 한 움큼 더 꽃피운다
지나가던 바람이 내 가슴을 문지른다
화근내 진동을 한다
지난 겨울 아궁이보다 한 겹 더 어두운
아니 한 길 더 깊은 그을음 냄새가 난다
장작
골동품 가득한 토속음식점에 갔다
마당 가에 놓인 소쿠리 비에 젖고 있었다
처마 밑 동개동개 쌓은 장작
다 젖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내 마음을 호박넝쿨이 둥글게 말아 올렸다
반쯤 젖은 장작 어깨 위로 둥근 호박잎
쫘악 몸 펼쳐 젖고 있었다
대신 젖는다는 것은
대신 아파한다는 것이다
아픔도 그리움의 모자를 쓰고 익으면
몸 속 깊은 향이 배여난다며
전골찌개 뚜껑 들썩이며 익어가고 있었다
寧國寺에서
천태산 오르는 굽은 산길은
삼신바위에 얽어 놓은 인간의 욕망
그 화려한 채색만큼 가파르다
제멋대로 뿜어진 색들이 목마름을 적시겠지만
정신의 사막에 핀 꽃은
얼룩얼룩 백지를 갉아먹기도 한다
천 년의 은행나무가 데리고 노는 것은
햇살보다 낮은 몸짓의 물소리다
때때로 물소리는 모여 크게 울지만
은행나무 높이를 넘지 않는다
빛 바랜 탱화를 보면
그늘과 햇살이 함께 노닌 흔적이 있다
강은 없다
가슴 한 기슭을 강에 빠뜨린 그는
배롱나무 붉은 꽃잎 지는 것만 보아도
강이 깊다는 것을 안다
배롱나무 일시에 각혈하며 기진 할 때
그가 본 것은 뒤척이는 강의 허벅지다
반야사 두리기둥 갈라진 틈새들이
강의 허벅지에 보태어져 물살을 이룰 때
처마 밑 단청이 쓰다듬는 물빛은
반야사보다 피멍든 꽃잎에 먼저 스민다
강이 범람할 듯
저녁연기 낮게 스멀거린다
가슴 한 기슭을 강물에 빠뜨린
그가 오기 전 반야사에는
배롱나무 두 그루만 있었다
강은 없다
길
밤에 책 읽고 오전에 늦잠을 자고
오후엔 등산을 했다
같은 무늬의 등산복을 입은 노부부를 만났고
나뭇잎 사이로
햇살들이 일정한 무늬로 부서졌다
길이 편안하다는 것은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
눈치 빠른 청설모가 내 발걸음을 읽는다
이 고요한 발걸음에도
꿩의 날개는 푸드득 숲을 찢는다
사방에 사막에서 만난 모래폭풍이 둘러싼다
소리 없는 울부짖음이 오래된 듯 귀에 익었다
애절함을 끌고 간다면
허공이라도 길이 됨을 알겠다
2부
탑에 기대어 살며…….
탑이 거느린 것들
온종일 탑 곁을 서성거린 소나무
등 돌려 노을에 몸을 기댄다
일그러지는 금성산의 붉은 능선이
탑과 소나무를 삼킨다
관솔옹이 패인 몸에
대책 없이 상처가 도진 것도 그 때다
소나무 굽은 허리와 밤하늘 별들이
상처 대신 어둠을 털어 낸다
옅은 새벽안개로 위장한 석탑을 내려놓는다
아무 일 없었던 듯 탑은 마을을 흔들어 깨우고
마을이 다시 길을 깨우고
길은 탑에 포개어 진다
탑이 거느린 것들은 언제나 탑에 겹쳐진다
겹쳐지지 못하는 것들이
탑이 솟은 이유를 궁금해 한다
숲실마을
구름은 금성산을 넘어
곧장 내달리지만
나는 산허리를 굽이굽이 멀리멀리 돌아
숲실마을 산수유꽃 만나러 간다
그리움은 구름을 닮았고
발길은 진창의 삶을 닮았다
산수유나무 표층의 버짐은
올해도 낫지 않아 부르튼 살가죽이 들떠 가렵다
내가 올 때를 기다려 힘껏 꽃 피워
노랗게 숨기려 했겠지만 또 들키고 말았다
못 본 척, 내일 오마 돌아서지만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
양지못 닮은 에움길 돌아돌아 오다가
나 또한 젖어, 아파, 가초롬 말리다 보면
훌쩍 한숨이 보태져 길어지겠지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움이 편자를 가느라 늦게 당도한 게.......
김장배추
약국 출입문 앞에 김노인이 배추를 쌓아올린다. 허락도 받지 않고, 눈치도 보지 않고, 허물 벗는 매미같이 배추를 편안히 내려쌓는다 족히 30포기는 넘겠다
조금은 미안했을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게 싱긋 웃긴 했다 나의 짜증이 그 미소와 불편하게 부딪치며 삐걱 소리를 냈지만 김노인의 경운기 소리가 이내 삼켜 버린다 시골 촌부의 검게 탄 얼굴이 염치없이 번들거린다 저렇게 남의 입구를 막아버릴 요량치곤 길잡이 성운인 양 거만하다
그가 마침내 유리문을 밀치며 얼굴을 들이민다 미안하다는 말을 이제야 할 모양이다 마지못해 받아줘야 할까 아니면 단단히 일러 다음을 대비해야 할까 망설임은 탑리오층석탑 높이로 이미 쌓였다
약사양반, 김장 안 했지? 이거면 될 거야!
빠른 뒷모습이 남긴 정적을 애써 붙들고 버텼지만, 소금 한 줌 치지 않은 내 부끄러움이 가파르게 숨죽는다 목젖쯤에서는 벌써 깊게 익어 맵다
소통
늙은 친정엄마와 함께 딸이 약국에 들어선다
약 안 먹겠다는 노모에게
엄마, 약 그렇게 묵기 싫으마. 그만 죽어뿌라, 그게 편타~~
내가 양지바른 데 잘 묻어 주께~~
天氣의 창을 여닫는
장엄한 소리에 약국문틀이 움칫 흔들렸는데,
노모의 대답,
간결한 섬광처럼 틈을 메운다
망할 년!
그러고는 히죽히죽 웃는다
딸도 흐트러진 노모의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따라 히죽댄다
완벽한 소통!
내가 우주에게 꿈꿔온……
이분연
장날 시골약국은 식전부터 소란하다
경상도에서 고함소리는 반가울 때 입는 정장옷차림이다
버스시간 급해~, 내 약 먼저 줘~, 외치는 할머니의 목청은
명절 갓 쪄낸 가래떡처럼 찰지다
그러기에 쏟아지는 눈총은 아예 파장의 채솟값보다 헐하다
현명하게 처방전을 미리 맡겨두고
장터 한 바퀴 돌아 고등어 한 손 쥐고 온 봉화댁은
오리무중인 자기 약의 행선지를 묻고 또 묻는다.
못 들은 척, 새치기 지은 처방약 들고 이분연씨~ 하고 부른다.
없다!
또 부른다. 이분여~언씨~
묵묵부답!
이분연 할매~ 어디 갔능교?
짜증나고 민망스러워 주섬주섬 조제실로 돌아서는데
느긋이 앉아있던 한밤홍씨 할매가 목소릴 높인다
여기 이뿐년이 어디 있노?
다 쭈굴랑 할망구들이지!
한바탕 팝콘 같은 웃음꽃이 성긴 약장 틈새를 단번에 채운다
3부
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잠결1
창밖 비 오는 소리
별이 떨어지나 했다
너의 발자국인 것을....
잠결2
왔다
갔구나
서둘러 빗소리를 당겨 둘둘 말아 베고
애써 다시 눈을 감는다.
살풋 기다렸다
너무 먼
발자국 소리
잠결3
어둠의 겉에서 내부로 건너는
짧은 순간 눈이 떠졌다
날 부르는 소리 분명 들렸는데……
밤만 어둡다
잠결4
잠의 새발 격자무늬
사이 들락거리는 달빛
무의식의 작은 올
비집고 들락거리는
근무력증
끌고 온 굽은 길의 흙먼지들
제부도에서
아낙들이 제부도의 검은 갯벌에
오브제로 점점이 박히면
제법 그림은 완성된 듯 보이지만,
흙빛을 따르든 물빛을 따르든 거친 숨결은
여전히 갯벌 깊은 곳에서 부화 중이다
귀를 닮은 갯구멍이 엿듣는
갯내음의 무늬는 점점 회색빛에 가까워졌다
아니. 마음이 심해처럼 검어져 겹쳐진 탓이다
어쨌든 제부도의 개흙이 밤새워 서럽게 운 것을
기억하는 뻘의 넓이는 수평선을 따라 가버렸다
이런 갯가에 오래도록 서 있다는 건
귓속에 은폐된 검은 그림자가 웅성거려
개펄에 선뜻 들어 설 수 없다는 허기 같은 것인데
저기 저 물새 몇 마리 거침없이 쫑쫑 걸어 들어간다
오, 길 떠난 아이가 돌아 왔구나!
착각하며 덤벙 들어서고 싶은 바다에
노을이 조심도 없이
제멋대로
붉디붉게 먼저 담긴다
4부
길을 따라서.
실크로드
내가 탄 비행기를 좇아, 두 시간이나 따라오던 길고 긴, 모래평원의 일렁이던 슬픔 말입니까. 바람에 늙어버린 주름살 같은, 끝없는 모래 구릉 사이 엎드린 징그러운 고요 말입니까. 세상의 또 다른 한 쪽이라 믿고 싶은, 듬성듬성 피어오른 검버섯 같은 풀밭이름 말입니까. 삼백오십 리나 떨어져 있는, 돈황과 돈황역 사이 기막힌 거리 말입니까. 모래폭풍이 하늘을 덮으면, 뻗은 팔의 손가락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아득한 간격 말입니까. 오직 마음에서만 무성한 숲과 호수 말입니까.
아, 사막 말입니까.
눈을 감고 봐야지요.
인도, 좁은 음악원
시신을 태우는 갠지스강에 노을이 발을 담근다
여인들은 그 노을을 비벼 저녁을 짓고
저녁만큼이나 작은 등불은
화장터 뒷골목 좁은 방에 웅크린다
생을 더듬다 지친 나그네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자궁 속처럼 함께 웅크려 앉는다
樂士는 생을 설명하는 대신,
지그시 눈을 감고 타블라*를 두드린다
백발의 늙은 뮤지션이 시타르*를 끌어안고
갠지스에 얹히는 노을 같은 깊은 음률을 찾아 얹을 때까지
하루모디움* 음계는 이미 몽롱하여
슬픈 음색의 가락이 방을 가득 채웠다 풀어놓았다
시체 타는 냄새 진동하는 갠지스강 화장터 뒷골목
그래, 도망치듯 서둘러 빠져나오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음악이 살피는 것은 결국 생을 관통하는 강물소리였던 것
엿들은 갠지스강이 이제야 편안하다
*타블라: 인도 전통 타악기
*시타르: 인도 전통 현악기
*하루모디움: 인도의 아코디언 같은 풍금악기
라싸 가는 길
포탈라궁이 끌어당기는 고도 3650m
맨살의 길은 유혹적이지만
일그러진 폐의 꽈리들은 가까이 눈사태의 징조를 예감한다
위로하듯 갑자기 나무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세 명의 순례자들이
땅바닥에 붙다시피 하늘하늘
그 음계는 히말라야를 닮아 높아졌다 낮아지고
손바닥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판을 덧대어
딱!딱! 맞부딪치며 내려와 엎드려
꽃처럼 몸 펼쳐
영혼의 그림자보다 길게 팔 뻗어
대지를 끌어안는 열세 명의 오체투지 성자들
율동의 무늬가 음표로 기억되기도 전에
같은 무늬로 돋을새김한 설산의 어깨
이미 눈에 박혀 제법 듀엣화음을 낳는다
고개를 흔들며 신은 너무 가혹하다 울먹이는 그,
어깨를 툭 치며 제법 근엄하게 달랬지
몸으로 경전을 읽는 중이잖아!
그러나 지실 마음벽에 비친 그림자는
나무나비라 이름 붙일만한 열세 마리 나비
우주의 바닥을 껴안고 하늘거리는 춤
오체투지가 진정 간절한 무거움이라 치자
솔직히 나비의 저 몸짓이 아니고서야 어찌 들어 올리겠는가
아굴라초원
1
말이 풀을 뜯는 소리가 사각사각 초원을 달랜다.
사방 지평선이 말 무릎 아래 일렬로 둥글게 손잡고 줄설 때까지
칭얼대는 세상을 핥는 초원의 혀는 늘 이슬에 젖었으리라.
나는 나의 세상을 달래지 못하고
자주 혓바늘이 돋아
상처 난 핫도그 같은 혓바닥을 통째 삼켜버리곤 했다
2
바람이 낮게 풀밭 위를 스친다.
유목민의 집은 초원의 젖가슴마냥 봉곳하다
바람이 읽어낼 유일한 성감대지만
멈춘 채 좁은 문틈에 귀를 서랍처럼 밀어 넣는다.
게르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높고 청량한 노랫소리 때문이다
3
노을이 발목보다 낮게 신발을 내려놓을 때도
몽골소녀 똘회낭의 가늘고 높은 고음은 홀로 우뚝하니 탑이다
4
자욱한 별자리, 하늘거울에 비친 풀밭의 음표들이다
블라디보스톡
-수리중-
러시아 비밀문서 공개로 우리의 역사가 수리 중이듯,
*최재형의 생가는 지금 수리 중이다
조선의 노비와 기생의 자식에서 러시아로 건너와 거대한 부호로 수리되었고, 청년 안중근이 찾아와 거사를 위한 도움을 청할 때, 그는 또 한 번 크게 수리된다. 일그러진 조국의 수리를 위해 건넨 M1900형 브라우닝 권총, 그 총성과 함께 무너진 안의사 부인과 아이들의 삶을 또한 맡아 수리했다
생가에 오늘따라 빗방울이 듣다 말다 하더니,
마침 하늘도 수리를 마치고
햇살이 걸어 나와 반짝 칭얼댄다
*최재형 : 살기 힘들어 가족과 함께 조선을 떠났지만 러시아에서 크게 사업가로 성공한 최재형은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깨닫고 항일독립운동에 전재산을 사용하였으며,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맞서 재러한인독립군부대 사단장으로 싸우다 1920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첫댓글 신청합니다
길 낭송하겠습니다
김병철-
잠결1,2,3,4
낭송신청합니다
김지선-
제부도에서
낭송신청합니다
장작 신청합니다
김순희
탑이 거느린것들 신청합니다
이정아 전임회장님 탑 신청하셨습니다
이상화선생님 '소통' 신청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