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노안당 老安堂’ 편액
석야 신 웅 순

노안당, 출처 : 한국데이터베이스 진흥원
운현궁(雲峴宮)은 대원군의 사저로 아들 고종이 출생하여 12세까지 성장한 곳으로 민비와 하례를 치룬 터이기도 하다.
구름재, 운현은 조선시대 서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고종 즉위 후 임금의 잠저라는 이유로 ‘궁’의 명칭을 받아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고종 즉위 이듬해(1864)에 노락당과 노안당이 준공되었고, 1870년에는 이로당이 완공되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쓰면서 직접 정사를 돌보았던 곳이다. 편액에는 석파 선생을 위해 썼다는 문구가 있으나 이는 추사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추사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이다. 노안당 준공은 추사가 8년 전 세상을 떠난 후의 일이다.
노안당(老安堂)의 당호 ‘노안老安’은 논어 제 5 편 공야장 ‘子曰 老者를 安之’ 구절에서 따왔다.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보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인사정책·중앙관제복구·서원철폐·복식개혁 등 나라의 주요 정책들이 논의되었다.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됐다 돌아와 은둔을 한 곳으로 대원군이 78세로 임종을 맞이한 건물이기도 하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끝내고 서원 철폐, 법률 재정비 등 개혁 정치를 실시했다. 그도 잠시. 경복궁 중건에 따른 경제적 혼란과 쇄국 정치 등의 피해로 결국 명성황후와 민씨 외척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임오군란(1882), 갑오개혁(1894) 등으로 청과 일본을 등에 업고 잠시 정권을 잡기도 했으나, 다시 외세에 밀려 불운을 되풀이하기도 했으나 끝내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대원군은 운현궁 노안당에서 조용히 난을 치기 시작했다.
굴곡진 온갖 지난 삶들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우아하게 휘어지는가 하면 포물선을 그리기도 하고 치솟는가하면 꺾여지고 다시 치솟다가 꺾여지기도 하는 난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 자체였다.
석파는 일찍이 추사의 난 그림과 예서를 본받았다. 자신의 난을 추사에게 보여주었고 추사는 석파의 난을 보고 감격하여 칭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는 석파의 화첩에 제를 써주기도 하는 등 석파의 난 그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는 추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석파는 추사의 후계자로 추사의 법을 따르면서도 스승을 뛰어넘는 별도의 일가를 이룬 19세기 난의 대가였다.
추사의 집자 편액, 노안당은 한말의 정치 일번지이기도 했지만 석파의 난의 산실이기도 했다.

석파의 묵란도. 출처:간송미술문화재단
-출처:주간한국문학신문,2016.2.3.(수)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