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민담* 하인츠 뢸뢰케**
야콥 그림(Jacob Grimm)과 빌헬름 그림(Wilhelm Grimm)이 1807년부터 수집하고 1812/15년에 처음 출판한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 Kinder- und Hausmärchen, KHM>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가장 많이 알려지고 출판되고 번역된 독일어 책이다. 그림 동화집은 그것을 읽으며 성장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향을 끼쳤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전 세계의 모든 예술 분야에 마찬가지로 큰 영향을 끼쳤다. (개작 시나 창작동화 등의 문학; 동화오페라, 발레 등의 음악; 삽화, 그림, 기념비, 동화의 숲 등의 조형예술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고대의 신화 혹은 신화의 구조가 이 동화들 속에 보존되거나 삽입되어 있는지, 있다면 어떤 것인지를 연구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림 형제도 이미 이것을 핵심문제로 취급했다. 그들은 구전된 전통 동화와 전설에서만 게르만 신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이 신화의 기록된 전승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게르만 신화들을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완전히 뿌리째 없애버리려 했다.
“우리의 동화는 순수 독일적인 신화를 곳곳에 간직하고 있다”고 그림형제는 그들 동화의 서문에 쓰고 있다. 그러나 동화에 대한 주해서를 보면, 이러한 전통을 많이 찾아내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브륀힐트(Brünnhilde) 신화를 <가시장미 [잠자는 공주] Dornröschen> 동화에서, 죽은 자들의 여신인 헬(Hel)의 신화를 <홀레 부인 Frau Holle> 동화에서 찾아낸 정도이다. 그림 형제 이후의 동화연구가나 신화연구가들은 이러한 측면을 지나치게 부풀렸다. 그들은 정말로 모든 동화, 민요 혹은 동요에서 게르만 신화, 심지어 인도․게르만 신화의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지지를 얻지 못하고 1945년 이후로 연구사에서 - 지나치게 - 급격히 위축되었다. 신화가 구전되어 전승되었다는 이론은 급작스레, 그리고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후 30년이 지나고서야 “우리 동화 안의 고대신화”라는 주제로 그리스에서 열린 국제 동화학술대회부터 그림 형제의 입장이 신중하게 재검토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러한 주제와 문제에 아무 거리낌없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강연에서는 몇 가지 예를 가지고 그러한 시도를 할 것이다. 그림 형제의 동화 3편을 소개하고, 거기에서 고대 그리스․로마, 유대․기독교, 그리고 켈트․게르만 신화의 흔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그림동화 제47번
<향나무 Von dem Machandelboom>에 담긴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
이 동화는 유명한 낭만주의 화가인 필립 오토 룽에(Phillip Otto Runge)가 1806년에 기록하였고 1808년 아힘 폰 아르님(Achim von Arnim)의 <은자(隱者)들을 위한 신문 Zeitung für Einsiedler>에 발표되었다가 1812년에 그림동화집에 담겨 출판되었다. 어떤 계모가 미워하는 의붓아들을 죽이고 딸 마를레니헨(Marleenichen, 막달레나 Magdalena)을 공범으로 몬 다음, 시체를 요리해 아무 것도 모르는 아버지에게 먹으라고 준다. 아버지는 계속 아들에 대하여 묻지만, 그 사이 전부 다 먹어버리고 뼈를 뒤로 던진다. 마를레니헨은 고운 헝겊에 이 뼈들을 모아 향나무(노간주나무) 아래에 묻는다. 그때 안개와 불길이 일어나고 거기에서 새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이 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운명을 노래로 알린다. “우리 엄마는 나를 죽였네, 우리 아빠는 나를 먹었네. 우리 누이가 뼈를 향나무 아래에 묻었네. 나는 이제 예쁜 새가 되었네”. 그는 맷돌에 노래로 마법을 걸어 계모에게 던진다. 계모가 죽자, 이 새는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변한다. 괴테는 이 동화와 노래를 1770년 슈트라스부르크(Straßburg)에서 알게 된 것 같다. 그는 이를 <초고 파우스트 Urfaust>(1774)의 감방 장면에 삽입했고, <파우스트> 제1부에도 같은 위치에 넣었다. 1774년의 한 편지에서 괴테는 동화의 마지막 모티브 “하늘에서 떨어진 맷돌 Mühlstein, der vom Himmel fiel”을 인용하고 있다.
이 텍스트의 신화적 특징과 관련해서 이제까지 나온 주해들은 확연히 눈에 띠는, 중요한 공통점 하나를 항상 지적한다. 여기에서 신화사전을 인용해본다.
- “펠롭스(Pelops)는 탄탈로스(Tantalos) 왕의 아들로 니오베(Niobe)의 남자형제이다. 그의 아버지는 펠롭스를 칼로 조각조각 잘라 요리하여 신들에게 먹으라고 내놓았다. 신들은 이 속임수를 알아채고 음식을 건드리지 않았는데, 오로지 데메테르(Demeter)만 어깨 한 쪽을 먹었다. 제우스는 헤르메스(Hermes)에게 그 조각들을 다시 단지에 담으라고 명령했고, 클로토(Klotho)는 소년이 다시 살아 나오게 했다. 없어진 어깨는 데메테르가 상아로 만들어 채워 넣었다. 펠롭스는 후에 아르트레우스(Artreus)의 아비가 되어 결국 아트리덴족의 조상이 되었다. 아가멤논과 오레스트에 이르기까지 아트리덴족은 탄탈로스의 악행 때문에 신들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사실상 기본 모티브는 비교해 볼 만하다. 펠롭스에게도 여동생이 있다. 그러나 공통점보다는 차이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이 여동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리스 신화에서는 어미가 아니라 아비가 아들을 살해하여 요리한다. 또한 아비 스스로가 아들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신들에게 먹으라고 내놓는다. 소생할 때의 재료도 뼈가 아니라 살덩어리들이며, 특히 심각한 것은 새로 변한다는 말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관하여 다른 그리스 신화인 오비드의 <변신 Metamorphosen> 4장에서 해명을 얻을 수 있다.
“테레우스(Tereus) 왕은 다울리스(Daulis) 왕국의 왕인데, 그의 부인 프로크네(Prokne)의 여동생인 필로멜라(Philomela)를 강간하고 그녀가 누설하지 못하도록 혀를 잘라버린다. 그러나 필로멜라는 손수 짠 옷감의 그림으로 언니에게 범죄사실을 알리고, 둘이 같이 복수한다. 프로크네는 자신의 아들 이티스(Itys)를 죽여 아버지 테레우스의 식사로 내놓는다.” 이때 ‘오로지 아비만 먹을 수 있고 먹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 데서 룽에의 텍스트와 일치한다. 테레우스 또한 이 끔직한 식사 도중에 그의 아들에 대하여 계속 묻는다.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뒤늦게 알고 테레우스는 칼을 빼어 그 잔인한 자매를 뒤쫓는다. 테레우스는 오디새라는 나쁜 새로 변하고, 프로크네는 끝없이 울며 하소연하는 나이팅게일로, 필로멜라는 더듬거리며 지저귀는 제비로 변한다. 다른 신화는 이티스가 공작새로 변하였다고 전한다. 로마 신화에서는 각기 변한 모습이 뒤바뀌었다. 필로멜라가 하소연하는 나이팅게일이 되고, 프로크네가 (혀가 없어) 똑똑 끊어가며 지저귀는 제비가 된 것이다.
우선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원인설화(기원전설)이다. 왜 나이팅게일이 한탄을 하고 제비가 지저귀며, 왜 오디새는 이 새들을 뒤쫓는지, 왜 (테레우스의 왕국인) 고대의 다울리스에서는 제비가 찾아와 깃들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모두 여기에서 설명된다. 동시에 애니미즘의 세계관이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르면 영혼은 죽지 않으며 (동화에서는 잠시) 다른 생명체로 변할 뿐이다. 이러한 변신의 전제조건은 아들이 아비에게로 회귀하는 것이고, 그래서 아비는 자기 혼자만 이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고집한다. 또한 불이 제시되고 거기에서 새가 날아 나오는 것은 잘 알려진, 자신을 태워 그 재로부터 다시 소생한다는 불사조 피닉스의 신화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통찰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으니, 그것은 개별적인 동화 화소(話素)들이 신화의 근저를 이루는가, 아니면 동화가 신화에서 발전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테레우스의 신화에는 여동생이 뼈를 모아 땅에 묻는다는 화소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의 신화에서 아주 오래된 모티브로 간직되어 있어서, 전사한 오빠를 여동생이 명령에 거역하며 장사 지내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까지 이른다. 그 밖에도 룽에의 동화 제목인 <마를레니헨>은 비록 세속화되었어도 성서를 시사한다. 예수가 마포에 싸여 매장될 때와 부활할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행한 역할을 암시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녀는 라자로의 여동생과 동일 인물로 간주되기도 했는데, 이 여자 역시 예수의 매장과 부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스 신화는 라틴어 판본들로 계승되고, 그 형태로 800년에서 1800년까지 유럽 학교의 추천교재가 되었다. 고등교육을 받는 모든 학생은 베르길리우스의 목가 6번에 있는 다음 라틴어 시행을 외워야 했다. - “아우트 우트 무타토스 테레이 ... (그가 테레우스의 변모한 사지에 대하여 이야기했으니, 어떤 식사를 그에게, 어떤 선물을 그에게 필로멜라가 마련해 주었는지, 얼마나 급작스럽게 그가 고독에 빠져들었는지, 어떤 날개로 이 불행한 자가 조금 전까지 그의 집이었던 왕궁을 떠나 날아올랐는지.)”
학생들은 방학 때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은전을 바라고 이 시행을 여러 집 앞에서 낭독하였다. 그들은 관심을 끌기 위하여 가지에 앉은 새 모양을 헝겊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시행을 말하게 했다. 이로써 어느새 우리는 새에 관한 괴테 내지 룽에의 변모한 운문에 이르렀다. 이러한 보고 듣는 체험에서 동화본이 나왔고, 여기에서 시행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의심할 바 없이 향나무 동화는 그 핵심에 아주 오래된 고대 신화를 담고 있다. 이는 그 계보까지도 중세의 학생들을 통해 증명할 수 있기에 더욱 분명하다. 더불어 이 텍스트가 오랜 기간 전승되는 동안 성서의 모티브들이 편입된 것도 당연하다. 몸이 되살아난다는 이교적 애니미즘은 여동생의 이름과 이 인물의 기능에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독교적 사고와 연결된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증인은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또한 맷돌 모티브도 신약성서에서 온 것이다. 예수는 어린아이에게 죄를 범하는 자는 맷돌을 달아 바다에 던져야 한다고 저주한다. 의붓아들을 살해하는 계모도 이러한 벌을 받아 마땅하기에 맷돌에 맞아 죽는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유럽 동화에서는 고대 신화를 결코 순수한 형태로 만날 수 없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2000년의 기독교 세계관은 계속 그 흔적을 남겨왔고, 이러한 점에서 동화는 지속적인 융합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2. 그림동화 제29번
유대․기독교 신화 <황금 머리카락>
매우 기교적으로 서술되는 이 동화는 그림 형제의 단골 기고가인 도로테아 피만(Dorothea Viehmann)에 의해 전해졌다. 피만 부인은 친가의 본명이 피에송(Pierson)이었고, 프랑스에서 헤센으로 이주한 위그노 가정의 후손으로서 프랑스의 동화전통을 잘 알고 있었다.
가난한 부부에게 운 좋은 아이가 태어난다. 다시 말해, 출산 시에 죽을 뻔했던 아이가 목숨을 부지한다. 예언에 따르면 이 사내아이는 열 네 살에 공주와 결혼하게 되어 있다. 왕은 이를 막으려고 아이를 사서 통에 넣어 강물에 던진다. 물방앗간 하인이 이 통을 건져 올리고, 신앙심 깊은 방앗간 부부가 아이를 키운다. 소년이 열 네 살이 되었을 때, 왕은 자기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고 사형시키라는 편지를 써서 봉인한 다음 소년에게 직접 왕궁으로 가져가게 한다. 그는 숲에서 길을 잃고 어떤 조그마한 오두막에 피신하는데, 그러나 여기에도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곳은 강도들의 소굴로, 그들은 집에 들어오는 사람을 모조리 죽인다. 그러나 노파가 아이를 위해 간청한다. 강도들은 그를 살려주고 편지를 뜯어본 뒤 내용을 바꿔 쓴다. 소년이 왕궁에 도착하면 그를 공주와 결혼시키라는 것이다. 예언이 실현된다. 왕은 달갑지 않은 사위에게 임무를 주어 지옥의 악마에게 보낸다. 기독교 관념에 따르면 다시는 못 돌아올 저승으로 보내는 것이다. 뱃사공이 강을 건네주어 소년은 지옥으로 들어간다. 악마의 할머니의 도움으로 그는 문제를 풀고 무사히 돌아온다.
(결혼까지의) 동화 첫 부분은 경탄할 만큼 일관성 있게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에게 행운과 불행이 숨막힐 정도로 교차한다. 탄생 = 행운, 양막(pileus naturalis: 행운의 막)에 의한 생명의 위험 = 불행; 왕이 그를 산 것 = 행운, 왕에 의한 살해 시도 = 불행; 구조 = 행운, (민속문학에서 보통 악인인) 물방앗간 주인에 의한 구조 = 불행; 물방앗간 주인의 신앙심 = 행운, 왕의 유리한 지시 = 행운, 숲 속의 방황 = 불행; 오두막의 발견 = 행운, 강도의 소굴 = 불행; 노파의 착한 심성과 결혼 = 이중․삼중의 행운 = 해피엔드.
이 구조에는 유대․기독교 신화에서 유래한, 성서와 의미가 일치하는 모티브가 보기 드물게 많이 얽혀 있다. 달갑지 않은 왕위계승자를 죽이려는 왕은 베들레헴에 어린이 살해를 명령한 성서의 헤롯왕에 상응한다. 아이의 살해 시도 자체는 갈대 바구니에 담겨 물에 던져지는 모세의 탄생 및 유년기 이야기의 모방이다. 모세도, 동화의 주인공도 다 같이 나중에는 적대자의 딸에게 안착한다. 동화의 주인공이 구조된 뒤 사라지는 것은 예수의 유년시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집트 피난에서 돌아온 어린 예수가 12 내지 14년 동안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예수에 관해서는 동화 주인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온갖 덕목을 갖추며 자랐다고 이야기될 뿐이다. 신약성서 역시 사원에서 경전을 해석하는 열 두 살 짜리 소년 예수를 비로소 다시 등장시킨다. 사형선고가 담긴 편지도 소위 우리아(Uria)의 편지라 할 수 있다. 다윗 왕은 지참인 자신을 죽음으로 몰기 위해 이 편지를 보낸다. 성서의 영향은 문체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으니 factum est autem”라는 상투어는 이 동화를 포함하여 피만 부인이 전한 동화에서 눈에 띄게 자주 나온다. 경건한 위그노 신도인 피만 부인은 일요일마다 예배에서 복음서 강연을 들었는데, 그때 이 문구가 그녀의 뇌리에 새겨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옥의 저주를 의도한 것 역시 기독교의 내세신화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고대의 신화소가 삽입되어 있다. 저승으로 가는 강에서 사람을 건네주는 뱃사공은 고대 그리스의 죽음의 뱃사공 카론(Charon)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다. 강물은 저승의 강(스틱스, 레테, 아케론)과 동일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소년이 지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이 점에서 소녀가 천국에서 지상으로 돌아오는 그림동화 3번 <성모 마리아의 아이 Marienkind>와 비교 가능하다.) 저승에서 빠져 나오는 것 - 이것은 하데스(Hades)로부터 돌아오는 헤라클레스와 그의 귀향 길에서의 영웅적 행위와 정확히 일치한다 - 은 실제로 더 이상 기독교 신화와 관련이 없고 민속동화의 장르적 특성에 해당한다. 민속동화에서는 주인공이 결코 죽지 않으며, 따라서 영원히 저승세계에 머물지도 않는다. 피만 부인은 고도로 기교적인 이 텍스트를 아마 프랑스 원전에서 얻었겠으나, 그 출처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동화에서 우리는 다시금 혼합적 특징들을 볼 수 있다. 전적으로 성서에 제시된 화소 안에 고대 신화의 상념들이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3. 그림동화 제89번: 켈트․게르만 신화 <거위 치는 소녀>
그림형제가 가장 애착을 보인 우리 주제의 영역을 논증하기 위해, 이미 잘 알려진 <가시장미[잠자는 공주] Dornröschen>나 <홀레 부인 Frau Holle> 동화 대신에 아직 이런 관점에서 연구되지 않은 동화 한 편을 오늘 다루기로 한다.
우선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의 몇몇 특징들을 간략히 재현해 본다. 이 이야기는 중세에 유럽 전역에서 늘 반복하여 서술되었고 마침내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최종 형식에 도달했다. 이졸데(Isolde)라는 이름의 고대 아일랜드 여왕이 같은 이름을 가진 딸을 마르케(Marke) 왕과 결혼시키려고 시녀 브랑게네(Brangäne)를 딸려 코른발(Cornwall, 영: 콘월)에 있는 왕궁으로 보낸다. 나이든 여왕은 마술을 부릴 줄 알아서, 딸에게 사랑의 묘약을 들려 보낸다. 이것은 딸의 신랑이 될 왕이 나이가 많은 점을 고려할 때 타당한 일로 보인다. 젊은 이졸데는 콘월로 가다가 실수로 왕의 구혼사절인 트리스탄과 함께 사랑의 묘약을 마신다. 두 사람은 서로 억누를 길 없는 악마적 사랑에 빠진다. 이졸데가 순결을 잃은 것을 신랑 마르케에게 감추려고 시녀 브랑게네가 신방의 컴컴한 잠자리에 눕혀진다. 다음날 아침에 이 시녀는 이졸데와 역할을 바꾼다. 켈트어문학과 독문학은 이 이야기의 기원을 켈트 요정전설에서 찾아냈다. 게르만어로 이스발다(Iswalda)라고 불리는 어느 요정이 드뤼스탄(Drystan)이라는 켈트어 이름을 가진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에겐 브리타뉴어로 브랑게네(Brangäne)라는 이름의 시녀가 있다. 여기에서 이 전설을 알고 있던 문화권이 드러난다. 게르만, 켈트, 브리타뉴 문화권이 그것이다. 바롤(Barol)의 고대 프랑스 음유 서사시에서 이 전설이 다뤄졌고, 이를 토대로 토마스 폰 브리타니에(Thomas von Britanje)가 1170년경에 역시 고대 프랑스어로 초기 궁정서사시를 창작했다. 단편(斷片)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이 작품은 영국에서 최근에 새로운 부분들이 발견되어 적지 아니 보완될 수 있었다. 아일하르트 폰 오베르게(Eilhart von Oberge)의 1160년 작 <트리스탄 Tristan>, 그리고 특히 1210년경에 나왔다가 후에 몇몇 시인들에 의해 완성 또는 재창작된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Gottfried von Straßburg)의 유명한 미완성 서사시도 이 판본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러한 텍스트 증빙자료들에 언급하는 것은 트리스탄 이야기의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전승을 논증하기 위해서이다. <거위 치는 소녀> 동화가 적어도 세부 내용에서 이 전통에 속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노련하게 구성된 이 동화를 그림형제에게 들려준 도로테아 피만은 앞서 밝힌 대로 본래 성이 피에송이었고, 프랑스 위그노의 후손으로서 프랑스의 문학전통을 웬만큼 알고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예를 들어 이미 일찍이 확인된 바롤이나 토마스의 전통, 그밖에 저 유명한 크레티앙 드 트로와(Chretien de Troyes)의 사례가 그것이다. 다만, 후자의 <트리스탄> 판본은 소실되었다.
그림동화에 나오는 나이든 여왕은 마술을 부릴 줄 알아서, 신랑을 찾아가는 딸이 마법의 도움을 받게 하려고 말하는 핏방울과 말할 줄 아는 말을 내어준다. 특히 시녀 하나를 딸려보낸다. 이 시녀가 - 트리스탄 이야기에서 이졸데 대신 브랑게네가 그러듯이 - 공주 대신 왕자의 신방에 든다. 그러나 브랑게네가 여주인 이졸데에게 계속 충성하는 반면, 중세 후기의 하인리히 카우프링어(Heinrich Kaufringer)의 작품에서는 이 모티브가 그림동화와 비교할 만한 형태를 보인다. 여기에서 시녀는 자신에게 맡겨졌던 신부 역할을 계속하려 한다. - “그녀 자신이 왕비가 되려 했네 / 이것은 공주에게 고통이었네.” 그림동화의 여주인공에게도 역시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고대 트리스탄 이야기에서 아일랜드 왕궁에는 주로 여성 주인공들만 등장한다. 왕비와 공주, 그리고 시녀가 그들이다. 콘월의 궁에서는 늙은 왕 마르케, 젊은 기사 트리스탄, 트리스탄에게 적대적인 늙은 신하 멜로트가 그렇듯이 주로 남성 주인공들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그림동화의 삼인조인 늙은 왕, 왕자, 목동에 전적으로 상응한다. 바그너는 <트리스탄> 오페라 제1막에서 이졸데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노래하게 한다. - “어머니, 바다와 폭풍을 다스릴 힘을 누구에게 주셨나요?” 이것은 그림동화와 트리스탄 전통을 잇는 또 하나의 가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거위 치는 소녀는 초원에서 바람과 약간 이야기를 나누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은 폭풍에게 명령을 내릴 마력의 흔적이다. 이러한 유사점들이 우연이 아니라면, 동화의 연대에 관한 추정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것은 중세 초기의 켈트 전승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는 경외할 만한 연대이다.
늙은 왕 또한 경탄을 자아내는 인물인데, 그림동화에 나오는 지배자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므로 좀더 자세히 소개해 보겠다. 바로 이 동화는 늙은 왕 중심의 이야기이고, 왕자는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 인물에 머문다. 왕자가 아무 생각 없이 기쁘게 시녀를 신부로 맞이하는 반면,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 “늙은 왕이 창가에서 보니, 그 여자가 정원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곧 왕자의 방으로 들어가 신부를 보고, 데리고 온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늙은 왕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미 위에서 관찰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인물들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예감한다. 그는 이야기 말미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이러한 점에서 요컨대 [서사문학의] 대규모 형식을 선도한다. 퀴르트헨(Kürdchen)이 자기 밑에 배치된 거위 치는 소녀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 불평하자, 그 말을 들은 왕은 동화에서 흔히 있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부 믿거나 전부 부인하지 않고 모든 사실을 다음 날 직접 조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계몽된 의식을 가진 왕이라 할 수 있다. 보잘것없는 하인의 안위에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그는 전혀 왕답지 않게 도시의 성문에 몸을 숨기고 거위 치는 소녀와 말의 머리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듣는다. 그 다음에는 거위 방목장의 덤불 뒤에 숨어 퀴르트헨과 거위 소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그녀가 황금 머리카락을 빗는 것에서부터 바람을 불러내는 것, 그리고 퀴르트헨의 반복되는 체념까지 듣는다. 바람이 불어 모자가 날아가자, 퀴르트헨은 이를 쫓아가느라 소녀의 아름다운, 갖고 싶은 머리카락을 또 다시 얻지 못한 것이다. 늙은 왕은 퀴르트헨이 비난하는 거위 치는 소녀를 정식으로 불러 심문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한 그녀의 발설금지 서약을 재치 있게 피해간다. 모든 일을 난로에 대고 털어놓으라고 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왕이 눈에 띄지 않게 그녀의 고백을 들으려고 연통 끝에 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어 그는 소녀와 그녀의 문제를 받아들여 침착하고 신속하게 모든 일을 해결한다. 결혼한 왕자 부부가 갈라서고, 시녀가 벌을 받고, 공주는 마침내 왕자와 결혼한다.
동화에서는 늙은 왕의 인물과 기능이 중세의 트리스탄 전승본의 주인공 모형에 비해 엄청나게 변했고, 이로써 그를 그림동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왕의 역으로 만들었다.
여타 동화에서는 하나만 있어도 주인공의 행복을 위하여 충분히 위력을 발휘하는 여러 가지 마법 수단이나 능력(핏방울, 말, 바람과 이야기하는 능력)이, 이 동화에서는 주인공에게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고 단지 이를 위한 전제조건만 제공한다. 첫째, 공주가 갈증을 못 참을 뿐만 아니라 시냇물을 직접 퍼 마심으로써 특히 중세의 관행으로 그녀의 신분과 신분의 명예에 명백히 배치되는 행동을 하는데, 이에 핏방울이 공주의 잘못된 행동을 즉각 확인하여 따끔하게 비판한다. - “네 어머니가 이걸 아신다면!” 둘째, 팔라다(Falada)라는 이름의 말이 “오, 거기 가시는 처녀 공주님!”하고 소녀에게 날마다 두 번씩 그녀가 왕가 출신임을 상기시킨다. 셋째, 돌풍을 일으키는 공주 자신의 기술이다. 공주는 매일 거위 방목장에서 이 기술을 부리는데, 그것은 유일하게 남은 왕실 혈통의 표시인 황금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그와 동시에 퀴르트헨의 충동과 아마도 공주 자신의 충동까지도 끊임없이 새로이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마술의 도구들은 그녀가 왕가 출신이라는 기억을 보존하고 이전의 실수를 고치는 뜻에서 자신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어쨌든 그런 만큼의 기능을 발휘한다.
이미 밝혔듯이, 늙은 왕은 그녀를 도착 순간부터 높은 위치에서 관찰한다. 그녀의 속죄가 한계에 이르자, 그가 나서서 공주를 시험한다. 그는 공주를 설득하여 난로에 대고 모든 것을 고백하게 한다. 여기에서 난로는 명백히 반종교개혁이 고안하여 그 성사(聖事) 의식에서 관철시킨 참회소 또는 고해소에 해당한다. 공주는 참회 행위를 통하여 면죄에 필요한 다섯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 이것은 B로 시작하는 5개 단어, 즉 숙고(Bedenken), 회개(Bereuen), 고백(Bekennen), 속죄(Büßen), 개선(Bessern)이다. 공주는 곰곰이 생각한다. (이른바 비교적 현대적인 동화 인물로서 그녀는 오래 전에 강요에 못 이겨 했던 서약을 기억하고, 심지어 거기에 매여 있다고 느낀다.) 공주는 핏방울과 말이 내뱉던 말을 새겨보고 처음으로 뉘우치며 이렇게 말한다. - “어머니가 이걸 아신다면!” 그녀는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하녀의 일을 함으로써 속죄했고, 그로써 개선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늙은 왕은 그녀를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본래 악행을 저지른 여자를 벌하고, 뉘우치는 죄인을 미리 예비된 영광의 자리로 안내하여 아들과 결혼시킨다. 이것은 성서와 교회가 늘 밝혀온, 그리스도적 영혼과 신랑 그리스도의 결합에 해당하는 형상이다.
도로테아 피만이 전한 <거위 소녀> 동화에서 우리는 기독교적으로 변형 및 완성된 이야기를 본다. 소재의 전통에서 이 과정은 여러 근거로 보아 반종교개혁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동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 기독교인의 운명을 묘사한다. 그것은 높은 곳에 이르도록 선택되었지만 처음에는 그러한 지위로의 선택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 이하로 떨어지고,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는 법도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통스러운 참회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복귀 가능성을 열어놓고 항상 충동을 억제함으로써 자신을 입증하며, 마침내 늙은 왕이 그를 마치 신약성서의 비유에 나오는 탕아처럼 자비롭게 맞아 높여 준다.
늙은 왕은 그러니까 전능한 신의 역할을 담당한다. (외모에서도 그는 흔히 회화와 조각에서 묘사하는 하느님의 형상 그대로 왕관을 쓰고 수염이 있다.)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이면서도 인간에게 자유를, 그것도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를 자유까지 허락하며, 그런 다음에도 회개를 강요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자발적으로 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이 점에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위에서 듣는 것의 의미가 밝혀진다. 또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를 시험하는 데에서 비로소 신의 역할이 드러난다.
유일신적 세계관 및 세계해석이 지배하는 시기에는 참신한 민속동화가 창안될 여지가 없다는 말이 맞는다면, 우리는 그림 형제에게 전해진 <거위 치는 소녀> 판본의 성립시기가 상대적으로 가장 최근이라고 보아야 한다.
<향나무>에서 <거위 소녀>까지, 고대의 테레우스 신화에서 17세기 카톨릭의 반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동화에는 신화 및 신화소의 증거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다. 그림동화는 그러나 그 자체가 현대의 신화가 되었고 세계문학에 편입되었으며, 세계문학에서 재료를 가져다 쓰면서 동시에 세계문학에 중요하고도 광범위한 기여를 하고 있다.
(번역: 최윤영*, 임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