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하늘이 회색빛 구름으로 덮여있다.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가 참 좋다. 이런 날이면 역마살 든 사람처럼 하염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지난여름 유럽을 다녀온 이후부터 여행에 대한 끝없는 갈망대신 지금 여기를 즐기는 여유로 바뀌었다. 역마살이 달팽이 살로 바뀌었는지 그냥 우산 쓰고 주위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하다.
여름방학을 하루 앞둔 저녁이다. 무척 설레고 기쁘다. 내일 종업식을 하고 가족들과 강릉으로 가기로 했다. 특히 이제 막 말을 배우고 있는 귀여운 외손녀와 함께 하는 여행이다. 가족여행이 끝나면 연이어 2박3일 제주도 연수가 기다린다. 제주도 연수 후 열흘쯤 출근한 후에는 12일간 유럽여행을 간다. 지금 마음은 한껏 부풀어 기쁨이 가득하다. 들뜬 마음으로 선약한 모임에 갔다. 저녁식사를 하고 찻집으로 가다 푹 꺼진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휘청 발목이 꺾인다. '뚜뚝'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온몸을 관통하는 아픔에 저절로 비명이 나온다.
다리를 끌고 겨우 집에 와서 잠을 청하지만 아픔이 계속된다. 지금 문을 연 곳은 종합병원 응급실 뿐일텐데. 억지로 참고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비몽사몽 겨우 아침을 맞았다. 출근을 미루고 절뚝거리며 정형외과를 찾았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하더니 발 뼈가 부러져서 빨리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해야 된단다.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만 있으니 너무 갑갑하고 답답하다. 오래전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외손녀와의 가족여행과 제주도 연수를 못 가게 되어 너무 속이 상한다. 또 유럽여행도 포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의사선생님께 유럽여행이 가능한지 물어보니 많이 걷지 않으면 가능하다고 한다. 누워있는 내내 갈등이다. 같이 가기로 한 집사람과 처형과 동서는 내가 가지 않으면 안 간다고 한다. 무조건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옳지 잘됐구나!’ 처형과 동서 핑계를 대고 유럽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집을 이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달팽이처럼 목발을 짚고 해외여행을 시작했다. 9시간의 비행 후 두바이공항에 내리니 40도의 뜨거운 열기가 후끈 다가온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 버즈칼리파에 올라가보고 세계 최대 쇼핑몰 두바이몰에서 쇼핑을 하였다. 목발을 짚고 2시간 이상을 다니니 다리가 너무 아프다. 그런데 세계 최대 쇼핑몰에 아무리 찾아도 쉴만한 벤치가 없다. 커피숍이나 식당을 들어가지 않고는 쉴 수 없는 곳이었다. 정말 너무 돈만 밝히는 세계최대 쇼핑몰이다. 휠체어를 빌릴 곳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세계 최대로 큰 쇼핑몰보다 세계에서 제일 안락하고 쾌적한 쇼핑몰이라면 정말 많은 쇼핑객들이 몰릴 텐데. 석유로 벼락부자가 된 졸부나라의 한계인 것 같다. 시원한 에어컨이 돌아가는 관광버스를 타고 가며 밖을 내다보니 내리쬐는 40도가 넘는 땡볕아래 건설공사를 하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보인다. 갑자기 10년 넘게 중동 뜨거운 사막에서 건설공사 인부로 일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들 속에서 보인다. 눈물이 핑 돈다.
다음날 8시간 30분의 비행 후에 북아프리카 모로코에 도착하였다. 모로코 페즈의 9,400여개나 되는 미로같은 골목은 영화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본 골목과 비슷하였다. 계속 소매치기 조심하라는 가이드의 말에 목발을 짚으며 어깨에 맨 가방까지 신경을 쓰느라 아기자기한 골목 풍경들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페즈 골목 안에 있는 옛 전통방법대로 가죽을 염색하는 곳을 방문했다. 내리쬐는 40도의 땡볕과 동물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을 하는 배설물 구덩이 속에서 인부들이 가죽 염색을 하고 있다. 목까지 올라오는 고무 작업복을 입고 잠시도 맡기 힘든 악취를 맡으며 피 같은 땀을 흘리며 오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죽들을 위로 올리고 있다. 저들은 무엇 때문에 저 지옥 같은 곳에서 일을 할까. 아마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이리라. 악취로 진동하는 가죽염색 구덩이 속에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2년 넘게 사막 수로 공사를 하며 꼬박꼬박 피 같은 돈을 부쳐주던 아버지가 보인다.
모로코 탕헤르 항구에서 일박을 하고 지중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으로 건너왔다.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지중해 바다, 론다의 아찔한 절벽 위에 세워진 하얀 집들과 최초의 투우장, 누에보 다리,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이 영화 속의 장면처럼 지나간다. 그라나다 대성당 앞에서 바이올린을 손으로 뜯으며 노래하는 청년의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듣는데 불현듯 관절염과 치매로 누워있는 엄마가 떠오른다. 갖은 고생만 하다 떠나신 아버지, 지금은 거동도 힘든 엄마와 국내여행 한 번 제대로 못한 후회가 지금에야 썰물처럼 밀려든다.
4시간 넘게 목발을 짚으며 돌아다니다 호텔에 쓰러지듯 자고 이튿날 알함브라 궁전에 갔다. 알함브라 궁전의 여름별궁 아키세아 중정 정원의 48개 분수의 물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환상적이었다. 여기 물소리를 들으며 프란시스코 타레가 아름다운 기타연주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했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았다. 분수 옆 나무그늘 벤치에 앉아 늘 귓등으로만 듣던 아버지의 고생담과 어머니의 끝없는 옛이야기를 왜 이제야 간절히 듣고 싶어질까.
세비야 대성당을 들어서니 웅장한 성당 중앙에 4명의 왕이 둘러 맨 콜럼버스 관이 공중에 붕 떠있다.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여 스페인의 부를 가져오게 한 콜럼버스의 위상이 느껴진다. 세비야 대성당에 비하면 초라하기 까지 한 작은 톨레도 산토토메 성당을 들어섰다. 성당 왼쪽 입구에 걸려있는 엘그레코가 그린 벽화 '오르가스백작의 매장'이 콜럼버스 관이 주는 느낌과는 다른 감동을 준다.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다가 죽은 오르가스 백작이 묻히는 무덤 위에 펼쳐진 천국의 모습은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너머의 희망을 제시해주는 듯하다. 나는 콜럼버스처럼 위대한 업적은 못 남길 망정 오르가스 백작처럼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돕고 사랑한다면 천국으로 초대받을 수 있을까. 작년에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천국으로 들어갔을까.
설악산을 닮은 듯한 1229m 몬세라트산 중턱에 위치한 몬세라트수도원을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갔다. 마침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소년 성가대이자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손꼽히는 ‘에스콜라니아 합창단’의 합창이 있다고 하여 목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갔지만 이미 성당 출입문은 닫혔다. 할 수 없이 수도원 성당 뒤 쪽으로 돌아 나오는데 아름다운 소년합창단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니 참배객들이 ‘검은 성모상’의 손을 만지며 기도하고 나오는 출구였다. 합창단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노랫소리라도 들으려고 출구 앞에서 소년합창단 합창을 들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순례객들이 2시간 이상을 줄서서 기다려야만 잠시 검은 성모상께 기도하는데 경비원이 나를 검은 성모상으로 바로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목발을 짚고 소년합창단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 동양인이 참 기특해 보였나보다. 검은 성모상의 오른쪽 손에 들려진 지구본을 잡고 기도하였다. '성모님! 우리아들 빨리 장가를 가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해주소서.' 더 이상 오래 기도하면 나를 안내해준 경비원이 2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는 참배객들에게 욕 먹을까봐 얼른 내려왔다. 병고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아들을 위해 제일 먼저 기도하는 나도 역시 내리 사랑의 법칙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가보다. 한 달에 한 번 안부전화도 제대로 하지 않는 아들 녀석도 나처럼 뒤늦은 후회를 하겠지. 휑하니 가슴 속에서 바람이 분다.
올해 들어 벌써 7번째 태풍이 우리나라에 올라오고 있다. 바람이 강해지고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다. 비바람에 맞춰 나무들이 춤을 추고 노래한다. 이런 날은 꼭 어디론가 달리고픈 역마 한마리가 가슴 속에서 꿈틀대는데 전혀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단지 예쁜 달팽이 한마리가 꼼지락꼼지락 느껴진다. 지금 여기는 뭔가 답답하고 호기심도 생기지 않는 곳이었다. 행복은 언제나 저기 저 산 너머 어딘가 아니면 아주 머나먼 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보니 그 곳에도 행복이 없었다. 행복은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자연 속에 있음을 뒤늦게나마 발견한다. 계속 틈만 나면 머나먼 곳을 그리워하던 말 한 마리가 예쁜 달팽이로 바뀌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산책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는 예쁜 달팽이 한 마리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잘 읽었습니다. 기행수필 또는 여행기라고 해야 겠지요. 이 글에는 이 두 가지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나쁜 글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기행기 대신에 기행수필 쪽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행 중에 보았던 하나의 장면을 나와 연관시켜서 집중적으로 표현합니다. 같은 내용이 길어지면 독자는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기행기의 약점입니다. 이 글에도 표현하는 대상은 다를지라도 표현 기법에는 같은 방식이 반복함으로 그런 느낌을 주네요. 이번 대구일보 문화체험기도 문화유산과 나의 인생이랄까. 나와 관계있는 어떤 것을 연결시키는 글에 점수를 많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첫댓글 부족한 글을 올렸습니다.
선생님들의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기행수필 또는 여행기라고 해야 겠지요. 이 글에는 이 두 가지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나쁜 글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기행기 대신에 기행수필 쪽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행 중에 보았던 하나의 장면을 나와 연관시켜서 집중적으로 표현합니다. 같은 내용이 길어지면 독자는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기행기의 약점입니다. 이 글에도 표현하는 대상은 다를지라도 표현 기법에는 같은 방식이 반복함으로 그런 느낌을 주네요. 이번 대구일보 문화체험기도 문화유산과 나의 인생이랄까. 나와 관계있는 어떤 것을 연결시키는 글에 점수를 많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