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진선이다. 나는 레즈비언이다. 한 번을 제외하고는 내 연애대상은 모두 여자였다. 남쪽 바닷가에서 태어나 20년, 서울에서 10년을 살아왔다. 아직도 그 바다에서 살고 계시는 부모님에게는 시집 안 간다며 속 썩이는 말 안 듣는 큰 딸이고, 두 살 어린 남동생에게는 의지가 되는 누나이며, 4년 째 만나고 있는 우리 언니에게는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다. 아울러 나는 퀴어여성커뮤니티 《언니네달방》을 4년째 꾸려가고 있는 운영자이기도 하다.
4년 전,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며 노력했지만, 그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사랑이 아니었고, 사랑 없이는 그 이상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었다. 나는 몹시 고민했다. 과연 나만 이럴까, 혹시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가입되어 있었던 몇몇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찾아 어렵사리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경고와 강제탈퇴였다. 레즈비언만 활동이 가능하니, 현재 남성을 만나고 있는 여자는 활동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충격이었다. 줄곧 남자를 만나다가 지금만 여자를 만나고 있으면 레즈비언인건가. 애초에 연애대상의 성별만으로 성정체성을 정의 내린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렇다면 세상의 많은 바이섹슈얼(bi-sexual:양성애자)들은 마음을 나눌 곳이 없는 걸까. 익명성을 휘두르고 가볍게 시작됐다 끝나는 관계들. 부치와 팸으로 이분되어 있는 세상에 벽장(closet gay: 주변에 같은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없음, 혹은 성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 스며들어갈 틈은 없었다.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무성애. 다양한 성정체성들은 모두 사랑을 이야기한다. 인생에서 사랑을 빼놓을 수는 없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삶은 회사생활, 가족, 친구관계, 취미 생활과 같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있다. 이 시대에 여성으로, 더군다나 퀴어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광장에 뛰어나가 이야기하기 보다는 먼저 상처받은 마음을 서로 도닥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언니네달방》이 만들어졌다.
《언니네달방》은 네이버 카페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온라인 친목 커뮤니티다. 대다수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동성애의 성적인 것만 부각시켜 변태적이거나, 단발적인 인연 찾기가 남발되어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사막 속 오아시스처럼 조용하고도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다정한 사람들이 모였다. 바이섹슈얼, 벽장 등 기존 커뮤니티에서 배척당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다. 우리는 차를 마셨고, 때로는 맥주를 마셨고, 간혹 그 중에 사랑이 싹텄다. 부모님에게도 때로는 오랜 친구에게도 말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가족처럼 끈끈해지고 있었다.
“왜 이름이 《언니네달방》이에요?”
언니들의 방에서는 왠지 모를 달달한 냄새가 난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들, 뒤죽박죽인 화장대, 신발장에 꽉 찬 구두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달동네, 낡았지만 정겨운 다세대 주택에 달세로 살고 있는 그런 언니의 방을 떠올렸다. 대다수의 우리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는 방에서, 때로는 잠 못 이룬 나머지 휘영청 떠오른 달빛을 보다가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곤 하지 않은지. 그래서 ‘달방’이다. 때때로 아는 언니의 집이던, 누구든 마음속에 한 켠 쯤 갖고 있는 그런 따뜻하고 정겨운 공간.
커뮤니티 운영 1년차, 나는 《언니네달방》이 온라인 공간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모니터 뒤로 서로를 지레짐작하며 만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거창한 건 아니지만, 모두에게 적어도 차 한 잔을 내어주고 싶었다. 그런 잠시의 휴식을, 잠깐의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공간이 필요해서 홍대를 찾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이 이미 과열된 뒤였다. 서울 땅 아래 뜻만 있고 지갑만 얇은 여자가 서 있을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도움을 선뜻 받고 싶진 않았다. 으레 도움 뒤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고, 대가는 초심을 흐리게 만들기 마련이다. 어쩌면 나는 시작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커다란 액수의 벽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까봐.
사람이 많아 사건이 많은 서울에서 중심을 잡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쓰고 싶었던 글을 쓸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마음은 여유 없이 계속 빡빡해져 왔다. 나도 모르게 나는 나를 얽매고 있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끌고 가야해서 앞으로 걸어가는 게 힘이 들었다.
그래서 부산으로 간다. 내 인생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 그 커다란 축인 《언니네달방》의 중심도 잡기 위해서. 조금 먼 곳에서 냉정하게 걸어갈 길을 고를 예정이다. 매일 아침, 바다의 짠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조금 식혀보려 한다. 어차피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니까. 뒷걸음질 역시 걸음이니까. 어쩌면 이건 도움닫기일지도 모른다.
"《언니네달방》은 성인여성만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입니다
소소하게 일상을 나누고, 진심을 다하고, 서로를 믿어주는 공간이예요
이 공간이 필요하신 분은 문을 톡톡 두드려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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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광안리쪽에서 살아볼 생각이예요.당장 내려가서 공간을 꾸리진 못하겠지만, 언젠가 또 렛세이로 좋은소식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