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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5670 아름다운 동행 원문보기 글쓴이: 봄편지
***간증: 1411. [역경의 열매] 김경식 <1-12> “바닷물에 던져버려라”… 지체장애아, 목사 되다
딸 다섯 둔 집 외아들로 태어나 ‘목발’… 모친 “하나님께 댈롱댈롱 매달려라”
임마누엘집 원장 김경식 목사는 지체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장애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목발 짚은 장애인들의 천사로 불린다. 국민일보DB연일 무더운 날씨가 기승을 부린다. 땅은 갈라지고 사람들은 지친다. 나 역시 이 더위에 움직이는 게 쉽지 않다. 남보다 조금 더 힘든 게 있다면 목발 2개 없이는 거동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곱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뒤 목발이 나의 발이 됐다.
내 오른손에는 항상 굳은살이 박여있고 왼팔은 틀어져 있다. 수도 없이 넘어졌다. 내 몸은 두 계절을 갖고 있다. 상체가 여름이면 하체는 겨울이다. 나는 지금 내복 하의를 입고 있다. 아내는 내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올려놓고 말한다. “에어콘이 따로 없네요.” 내 육체에는 인생이 담겨있다. 예수님과 함께한 흔적이다.
내 고향은 전남 진도군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유명해진 팽목항 근처가 우리집이었다. 딸 다섯 집안에 외아들로 태어나 장애를 얻자 당시 동네 사람들은 “병신 새끼가 났으니 그냥 바닷물에 던져버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꼭 껴안으며 말씀하셨다. “큰놈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하나님이 도우신다. 반드시 축복하신다”며 사랑해주셨다. 어머니는 나를 기르면서 한 번도 나를 좌절시키는 말씀을 한 적이 없다. 어머니는 항상 긍정적이었다. “너는 잘 될 거야.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했다.
어머니는 전라도 말로 “댈롱댈롱 매달려라” 하셨다. 간절히 붙잡고 부르짖으라는 말이다. 어머니는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애원하고 기도하면 도와주신다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밖에 도와줄 이가 없었다.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었고 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 꿈의 시작은 1983년 서울 도봉구 도봉산 기슭 안골자락이란 곳에 천막을 치고 장애인 10명과 함께 시작한 장애인 주거시설 임마누엘집이었다.
당시 임마누엘집은 천대를 받았다. 생계를 위해 나는 볼펜과 양말, 껌 장사를 했다. 오전에 볼펜을 팔러 가면 “아침부터 재수 없다”며 물을 끼얹는 사람들도 있었고 식당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냐”며 경계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버스나 택시는 서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께 ‘댈롱댈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마 1:23)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천막에서 이전하게 하셨다. 임마누엘집은 1990년 지금의 자리인 서울 송파구 거여동으로 옮긴 후 계속 확장했다.
사회복지법인 임마누엘복지재단과 애향원 등 두 개의 법인을 설립했고 경기도 포천군과 강원도 인제군 등 전국 6개 지역에 11개의 장애인 시설을 갖췄다. 단순 거주시설부터 빵을 만드는 베이커리 작업장, 장애인 운전교육원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전국에서 1000여명의 장애인들이 이 시설을 이용하고 있고 직원만 300명에 이른다.
나는 지금까지 3000번 넘게 강연을 다녔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강조하는 말이 있다. “안 된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말라.” 나는 그동안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신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싶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경식 <1> "바닷물에 던져버려라"… 지체장애아, 목사 되다
* [역경의 열매] 김경식 <2> 기어서 다닌 초등학교… 친구들 놀림에 통곡
* [역경의 열매] 김경식 <3> 재활원서 배운 수리기술로 전파사 열어
* [역경의 열매] 김경식 <4> 도박에 빠져 사업으로 번 재산 날리고 수감돼
* [역경의 열매] 김경식 <5> 도봉산 밑에 천막 치고 장애인들과 공동생활 시작
* [역경의 열매] 김경식 <6> 출판사 임시 외판원… 목사님이 사줄 때까지 찾아가
* [역경의 열매] 김경식 <7> 지방 유지인 처가 반대 뚫고 믿음의 자매와 결혼
* [역경의 열매] 김경식 <8> 건축비 부족하자 옥한흠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 [역경의 열매] 김경식 <9> 계단·문턱 없는 장애인 위한 교회 세워
* [역경의 열매] 김경식 <10> "교회 통해 장애인 인식 바꾸자"… 노회장 출마
* [역경의 열매] 김경식 <11> 목회자 자녀 등에 장학금… '그리스도 군병' 위한 양식
* [역경의 열매] 김경식 <12·끝> 기독교인부터 장애인을 형제자매로 대해주기를
약력=△1954년 전남 진도 출생 △백석신학대 졸업 △세종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역임 △1983년 ‘임마누엘집’ 개원 △사회복지법인 임마누엘복지재단·애향원 이사장 △임마누엘교회 담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역경의 열매] 김경식 <2> 기어서 다닌 초등학교… 친구들 놀림에 통곡
숲 길서 동물로 오인 총격 받기도… 기도의 힘으로 목발 짚고 일어서
김경식 목사(앞줄 가운데)가 최근 서울 송파구 양산로 임마누엘집 앞에서 직원 및 장애인 입소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임마누엘집 제공나는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황해도 장연 출신이었다. 6·25전쟁 때 피란 나와 진도에 터를 잡은 실향민이었다. 광산 김씨였던 아버지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신봉했다. 집안에서 어머니만 유일하게 예수를 믿었다.
어머니는 시집을 와서 딸만 다섯을 연거푸 낳자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괄시를 받았다. 출산 후에도 몸조리를 제대로 못했다. 아이를 낳고도 이틀 만에 몸을 추슬러 부엌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머니가 나를 낳자 할머니와 아버지는 온 동네를 다니며 자랑했다. 어머니도 한 달간 몸조리를 하며 처음으로 소고기 미역국을 드셨다.
금이야 옥이야 사랑만 받던 나는 일곱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다.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른들이 일으켜주면 주저앉아 버렸고 또 일으켜 놓으면 주저앉았다. 진도의 유명한 한의원과 침술원은 모두 다녀봤지만 허사였다. 어쩔 수 없이 두 팔과 두 다리로 엎드려 기어다녀야만 했다.
2년 후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나를 끔찍이 사랑했던 누님들도 핍박했다. 누나들은 어머니가 장사를 나가면 “이놈아 그냥 죽어라.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어머니만은 달랐다. 생선 장사를 하던 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머리에 이고 다니던 대야를 마당에 던져놓고 내 이름부터 부르셨다. “경식아, 큰놈아.”
나를 꼭 안아주시고는 당신 무릎에 앉혀놓고 기도를 드린 뒤 말씀하셨다. “경식아,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단다. 연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미련한 자를 들어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단다. 큰 꿈을 가져라. 주님은 너와 함께하신다. 너는 분명히 위대한 사람이 될 거야.”
나는 또래들보다 늦은 아홉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손과 발에 신을 신고 무릎에 가죽을 대고 2㎞나 되는 먼 길을 기어서 다녔다. 친구들은 원숭이, 어미소라 놀리며 등에 올라타고 다리를 잡아 흔들며 장난을 쳤다. 그런 날은 학교 운동장에서 통곡을 했다. 누님들 말마따나 죽는 게 나아보였다.
그때마다 “왜 비겁하게 우느냐, 소망을 갖고 살아야지” 하시던 어머니 말이 생각났고 다시 먼 길을 기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겨울에는 어머니에게 업혀서 학교에 다녔다. 등굣길이 빙판이어서 누군가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심한 몸살이 나는 바람에 혼자 등굣길에 올랐다. 털모자를 눌러쓰고 책보따리를 허리에 단단히 매고 손과 발에 신을 신고 눈길을 기어갔다. 추위와 상관없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숲이 울창한 눈길을 기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탕’ 하는 총소리가 울렸다. 다시 얼마를 움직이자 또 총소리가 났다. 총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사냥꾼이 나를 향해 총을 들고 있었다. 나를 동물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 숲엔 노루가 출몰하곤 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소리 질렀다. “저 사람이에요. 노루 아니에요.”
그러나 사냥꾼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세 번째 총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무 놀라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몽사몽 중에 음성이 들렸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네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내 소원은 목발을 짚고 걷는 것이었다.
이후 어머니와 나는 기도했다. 의사는 목발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주님만 의지했다. 기도한 지 6개월, 다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힘이 들어갔다. 나무로 목발을 만들어 연습했다. 수백번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났다.
***[역경의 열매] 김경식 <3> 재활원서 배운 수리기술로 전파사 열어
돈 벌면 장애인 쉼터 만들겠다 다짐, 사업 잘되고 돈 벌자 하나님 멀리해
김경식 목사는 주변 장애인들의 현실을 보면서 보호시설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진은 2009년 말부터 위탁운영 중인 진도군장애인종합복지관 전경. 임마누엘집 제공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림자처럼 따르던 가난은 고등학교 과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양말과 볼펜을 구입해 가가호호 방문하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팔았다.
하루는 버스터미널 대합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 3시쯤 잠에서 깼는데 장애인과 불량배들이 만취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봤다. 그들은 속이 아프다며 바닥을 뒹굴었고 나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다가가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특수한 선교사명을 달라고 기도를 시작한 것이다.
이 기도는 어느 날 한 장애인 가정을 방문하면서 구체화됐다. 휠체어를 타고 있던 그는 누군가 밀어줘야 움직일 수 있는 중증장애인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아들을 돌볼 수 있지만 죽고 나면 누가 돌보겠어”하며 딱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언젠가는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 보호가 필요한 장애인들을 돌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
고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한 나는 기술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부산의 한 재활원에서 시계와 TV 수리기술을 배웠다. 열심히 해서 돈을 벌면 소외되고 멸시받는 사람들을 모아 육신과 영혼의 쉼터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준비한 끝에 1976년 나는 고향 진도에 전파사를 개업했다. 당시엔 진도에서도 일부 동네에만 전기가 보급됐다. 이듬해가 되자 진도 전체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러자 사람들이 가전제품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전파사엔 제품이 부족했고 자본도 없어 더 들여올 수도 없었다. 나는 주님께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했다.
그 무렵 4㎞ 떨어진 곳에서 조합을 운영하는 한 조합장이 자신의 녹음기를 가져와 고쳐달라고 했다. 딱 보니 일제 녹음기였다. 당시 내 기술과 경험으로는 힘들었다. 순간 기도했다. ‘하나님, 이 비싼 녹음기를 수리 못하면 무슨 창피입니까. 지혜를 주세요.’ 신기하게도 수리가 잘 됐다. 조합장은 만족했고 자기 조합의 가전제품을 가져다 팔아보라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결제는 연말까지 하면 된다는 말까지 하면서.
나는 뛸 듯 기뻤다. 기도가 응답되는 게 보였다. 사업은 번창했고 광주의 삼성대리점까지 담보 없이 물건을 공급해줬다. 사업은 날이 갈수록 호황을 누렸다. 나는 기도와 감사생활, 성수주일 등 신앙생활도 충실히 했다. 전파사를 개업한 지 3년 만에 큰 점포를 얻었고 기사 3명에 경리사원까지 두게 됐다.
돈이 생기자 지역 사람들도 나를 다르게 봤다. 모두가 사장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우했다. 지역 유지들은 수시로 모임을 열었다. 그 모임에 가면 소위 잘 나가는 사장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사업을 위해 참석했다. 자주 가서 어울리다보니 한두 잔씩 술을 마시게 됐다. 내 안에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 잔쯤은 괜찮아’하며 점점 기준이 무너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주일에도 일을 하게 됐다. 나는 교회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가게로 달려갔다. 나중엔 십일조 헌금도 아까웠다.
어머니는 이런 내 모습에 “하나님이 축복하셨는데, 너는 네 맘대로 산단 말이냐”하며 탄식하셨다. 나는 그때마다 “괜찮아요, 어머니”하고 답했다. 장애인 재활시설을 세우겠다는 꿈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역경의 열매] 김경식 <4> 도박에 빠져 사업으로 번 재산 날리고 수감돼
빌려준 돈 받으려 도박장 갔다 수렁에… 출소 후 고향 떠나 노숙하며 구걸
김경식 목사(오른쪽)가 1982년 서울 도봉산 밑에 문을 연 임마누엘집에서 장애인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임마누엘집 제공어느 날 비석공장을 하는 친구 형님이 200만원을 빌려갔다. 몇 달이 지나도 이자를 주지 않아 찾아갔더니 도박판에서 모두 날렸다며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는 내게 “200만원만 더 빌려주면 돈 100만원을 더 얹어주겠다”며 통사정을 했다. 큰 판이 벌어지니까 한몫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어쩔 수 없이 조합에서 200만원을 인출했다.
이번엔 직접 확인하고 싶어 형을 따라 도박장에 갔다. 나는 옆에서 그 형이 돈을 따도록 기도까지 했다. 오랜만에 하는 기도였다. 하지만 웃돈까지 얹어주기는커녕 200만원도 몽땅 털렸다. 잃어버린 400만원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그대로 집에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숨을 고른 뒤 그 자리에서 1할 이자로 또 다시 200만원을 빌렸다. 그리고 판돈 50만원을 걸고 화투 노름 중 하나인 ‘도리짓고땡’을 했다. 새벽녘쯤 나는 400만원을 땄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익이 나야했다. 나는 판돈이 모두 내 것인 양 착각한 채 아침이 밝을 때까지 계속했다. 순간 모든 돈이 날아갔다.
눈앞이 하얘졌다. 나는 도박에서 잃은 돈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도박판을 전전했다. 그로부터 8개월, 잘되던 사업에서 벌었던 재산을 모두 까먹었다. 1982년 4월에는 도박사건에 연루돼 12명의 도박꾼들과 함께 경찰에 검거됐다.
유치장에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있는데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는 성경과 찬송을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경식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나님께 자복하고 돌아와.”
나는 일주일을 유치장에서 보내고 목포교도소로 이감됐다. 감방은 살벌했다. 감방장은 나를 보자마자 주먹부터 날렸다. 구타를 당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찾았다. “주님….” 마음대로 살던 날들이 영화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울며 회개했다. 8개월 후인 그해 12월 27일 출소했다. 교도소 앞에 어머니가 서계셨다. 나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어머니에게 “다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목포발 용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고향으로 갈 수는 없었다. 부끄러웠다.
수감생활로 내 하반신은 더 힘이 없어졌다. 용산역 계단을 휘청거리며 내딛었고 빙판길에 나뒹굴었다. 대합실에서 앉아 언 다리를 손으로 부비며 밤을 샜다. 속은 비어 쓰리고 아팠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주님, 따뜻한 방에서 잠 좀 자게 해주세요.’ 눈을 뜨니 한 중년신사가 다가와 “여기 있지 말고 지하철을 타면 스팀이 들어오니 거기서 몸을 녹이라”며 혀를 찼다.
나는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수원과 청량리 사이를 왕복하며 잠을 청했다. 허기로 잠에서 깨니 안양역이었다. 무작정 걸었다.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머니엔 돈이 없었다. 겨울바람은 귓불이 떨어져 나갈 듯 몰아쳤다. 구걸이라도 해야 했다. 대궐 같이 생긴 집의 초인종부터 눌렀다.
“지나는 사람인데 밥 한 술만 주세요.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침부터 거지 놈이 남의 집 벨을 누르네. 재수 없게.” 그러기를 수차례, 어느 집이었다. “젊은 사람이 몸까지 불편하구먼. 어서 들어와요.” 주인집 아저씨는 밥을 먹고 목욕까지 하고 가라 했다. 너무 고마운 분이었다. 집을 나서자 아저씨는 차비까지 손에 쥐어줬다. 나는 그 돈으로 다시 용산역까지 갔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나는 쥐엄열매를 먹던 탕자였다.
***[역경의 열매] 김경식 <5> 도봉산 밑에 천막 치고 장애인들과 공동생활 시작
볼펜·양말·껌 팔아 식구들 10명 부양… 먼저 팔던 이들 “다신 오지 말라” 구타
김경식 목사는 1983년 천막을 치고 임마누엘집을 세웠다. 김 목사(왼쪽 뒤편 안경 쓴 이)와 장애인들 모습. 임마누엘집 제공날씨가 풀리고 봄기운이 솟아나자 이제는 정말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고교 시절 볼펜과 양말을 판매해 본 경험을 살려 다시 일을 시작했다. 물건을 외상으로 구입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팔았다. 가는 곳마다 인정이 넘쳐 물건을 많이 팔았다. 웃돈을 얹어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렇게 5개월 동안 한 푼 두 푼 모았더니 100만원이 넘었다. 천금보다 값진 이 돈으로 나는 꿈꿨던 계획을 실행했다. 서울 도봉산 밑 안골부락에 허름한 집을 얻어 그 옆에 천막을 치고 장애인 10명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장애인들은 내가 노숙하며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지체와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서울역과 용산역, 청계천 등지에서 노숙하면서 추위를 피하고 먹을 곳을 찾던 사람들이었다. 1983년 2월 10일 임마누엘집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는 매일 아침 예배로 하루를 시작했다. 뜨겁게 기도하며 하나님께 의지했다. 도봉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서웠다. 임마누엘집 식구들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흘렀다. 서로 콧물을 닦아주느라 웃기도 했다.
예배를 마치면 나는 볼펜과 양말, 껌을 팔러 나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열 식구가 먹고 살기는 힘들었다. 누군가 버스 세일이 괜찮다 해서 버스터미널을 찾아갔다. 처음엔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학창 시절 교내 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탄 적도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그리고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말했다. “명랑한 여행을 준비하시는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 볼펜이 왔습니다. 5개를 500원에 드립니다.” 막힘없이 이야기를 했다. 호응도 컸다. 10분 만에 30여개가 팔렸다. 장사가 잘될 때는 하루 10만원까지도 벌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원래 마장동 버스터미널에서 터를 잡고 물건을 팔던 사람들이었다. 하루는 나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더니 물건과 돈을 빼앗았다. 그리고 초주검이 되도록 때린 뒤 진흙탕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들은 “또 다시 장사 나오면 그땐 죽여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며칠을 앓아 누워야했다. 식구들도 분통을 터뜨리며 함께 울었다. 일주일을 방 안에서만 지냈다. 살아갈 희망도 꺾였고 하나님마저 야속했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요, 저 권속들은 어쩌라고 이런 변을 당해야 하는가’하는 원망이 나왔다.
천막 앞 예배처소에 나가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다. 시편 50편 15절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씀을 부여잡고 다시 일어났다.
이후 칼빈신학교에 다니는 전도사님 한 분을 알게 됐는데 그로부터 기독문화사라는 출판사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들었다. 곧장 찾아가 사장님에게 외판사원으로 써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의욕은 좋지만 그동안 목발 짚고 다니면서 책 파는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장님은 단번에 거절했다. 나는 임마누엘집의 취지를 설명하고 사원으로 써달라고 다시 통사정을 했다. 결국 각서를 쓰고 사원이 됐다.
***[역경의 열매] 김경식 <6> 출판사 임시 외판원… 목사님이 사줄 때까지 찾아가
계단에서 떨어져 다리 골절 등 고난… 옥한흠·김삼환 목사님 등 만나 용기
김경식 목사(가운데)와 임마누엘집 식구들이 1986년 서울 거여동으로 거처를 옮긴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임마누엘집 제공출판사에 입사해 책을 팔러 다녔다. 당시 나는 정식 사원으로 입사한 게 아니었다. 임시직이었다. 그래서 활동비는 없었다. 정사원은 교통비 1000원에 식사비 1000원을 받으며 세일을 다녔지만 나는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다녔다.
주로 교회를 찾아다니며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한 건의 주문도 받아내지 못했다. 교회 세일은 담임목사님을 만나야 책을 홍보하고 판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담임목사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지 않았고 몇 번이고 다시 찾았다. 규모가 큰 교회는 사찰 집사들이 뛰어나왔다.
“아니, 방금 전에도 왔는데 왜 또 오는 거야. 그만 오라고.” 어느 날은 500원짜리 동전을 주면서 다시는 오지 말라 하기도 했다. 이런 수모를 겪을 때면 외판이고 선교 사업이고 뭐고 전부 그만두고 싶었다. 서러움이 북받쳐 길을 가다 말고 화장실에 들어가 울기도 많이 했다.
그렇게 외판 세일 4개월이 지났다. 실적은 바닥이었다. 회사에서는 장애인인 내가 얼마나 버티겠냐는 식으로 봤다. 사람들은 수군댔고 사장은 장애인이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약이 올라 이를 더 악물었다.
어느 여름 날, 땀은 비오듯 흘렀고 손바닥은 갈라졌다. 갈라진 손바닥 사이로 핏방울이 빨래 짜듯 나왔다. 서울 서대문의 한 교회에 갔는데 4층 계단을 오르다 그만 굴러 떨어졌다. 오른쪽 다리는 골절됐고 그날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오른쪽 손바닥은 옹이가 박혀 마치 예수님의 못자국을 연상케 했다. 나는 그 자국을 보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했다.
당시 찾아갔던 교회는 무수히 많다. 기억나는 목사님은 4명이다. 사랑의교회에도 많이 찾아갔다. 나는 옥한흠 목사님이 책을 사줄 때까지 몇 번이고 갔다. 낮에는 만나기가 어려워 새벽기도 시간을 이용했다. 밤새 교회 문 앞에 앉아 기다리다가 만났다. 옥 목사님은 그런 나의 끈기를 봤고 결국 만나주셨다. 나를 무척 좋아했다. 새벽교회 이승영 목사님도 은인이다. 그는 책을 많이 구입해 주었고 동료 목회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생각난다. 교회 초창기 시절 찾아갔는데 “내가 책 살 형편은 안 되고 라면이나 한 그릇 먹고 가라”고 하셨다. 김 목사님은 내가 라면에 밥을 말아 허겁지겁 먹는 걸 보더니 “어려우면 찾아와. 내가 도와줄게”라고 했다. 갈보리교회 박조준 목사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박 목사님은 나 때문에 교회에 장애인 부서를 만들었다. 이들 목사님은 긍휼함이 많았다.
나는 세일 방법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방문했던 교회나 사무실, 성도 가정에 편지를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전략은 적중했다. 실적이 오르기 시작해 당시 37명 외판사원 중 1등을 했다. 1985년 성과를 인정받아 영업과장으로 승진했다. 고난과 멸시, 천대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인내하며 최선을 다했던 결과였다. 임마누엘집 식구들도 한마음으로 기뻐해 주었다.
사장은 나를 뷔페식당에 초대해 내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했다. 그는 내가 회사로 처음 찾아간 날 면전에서 “장애인 세일즈맨은 써본 일이 없다. 꺼져”라고 했던 장본인이었다. 세일 성공담이 알려지면서 다른 기독 출판사들은 나를 스카우트 하려고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회사를 떠나지 않았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동안 겪은 서러움을 봐란 듯 만회하고 싶었다.
***[역경의 열매] 김경식 <7> 지방 유지인 처가 반대 뚫고 믿음의 자매와 결혼
아내, 결혼 전 장인에게 끌려갔다 돌아와… 4년 후 TV 출연 계기로 결혼 인정 받아
김경식 임마누엘집 목사가 1984년 10월 송정중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장인 장모의 반대로 처가에서는 막내 처제만 결혼식에 참석했다. 임마누엘집 제공출판사 영업과장으로 승진하고 1년 뒤 임마누엘집은 이사를 했다. 도봉산 자락에서 벗어나 서울 송파구 거여동의 한 무허가 건물에 월세로 입주했다. 비만 와도 빗물이 뚝뚝 떨어져 잠 못 이루던 도봉산 천막집을 생각하면 거여동 집은 호텔방처럼 아늑했다. 임마누엘집 가족도 늘어났다. 빨래와 식사준비를 할 사람이 없어 어려움이 더해갔다. 당시 내 나이 29세. 결혼할 때도 됐고 임마누엘집을 함께 이끌어갈 동반자도 필요했다. 나는 그때부터 배필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는 사이 ‘신앙계’ 잡지에서 내 성공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결혼이 급하니 간증문도 게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내 사연이 소개되자 자매들의 편지가 쇄도했다. 호기심과 동정심, 격려가 담긴 내용이 많았다.
나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매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30번 넘게 맞선을 봤다. 일생을 함께 할 반려자이기에 신중해야 했다. 그 중 19번째 자매가 마음에 다가왔다. 나이는 좀 어렸지만 겸손했고 세상 때가 전혀 묻지 않았다.
“자매님, 저와 믿음의 식구들을 위해 사랑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까.” “네, 사람이 한번 태어나 보람 있게 살다 가야할 것 같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욱 그래야겠지요.”
나는 그래도 반신반의했다. 자매의 가정은 부유한 집안으로 좋은 직장까지 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 해도 그 헌신의 결심을 믿을 수 없었다. 자매의 집안에서 알면 반대가 심할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모았고 결혼 날짜를 잡았다.
장인 장모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예상대로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장인은 “당장 가자”며 자매를 데려가 버렸다.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이튿날 자매가 임마누엘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놀라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자매 집안은 서울 쌍문동에 큰 집을 갖고 있었고 경남 진주에 전답과 과수원을 가진 유지였다. 온 가족이 동원돼 자매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1984년 10월 1일 송정중앙교회에서 박호훈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엔 막내 처제만 유일하게 참석했다. 당시 막내처제는 결혼 비용 80만원을 빌려주기도 했다. 처제는 서울에서 언니와 함께 살았는데 6개월간 나와 언니의 만남을 지켜봤다. 그래서 우리의 진심을 알아줬다. 막내처제는 장인 장모에게도 “형부는 몸만 불편할 뿐이다. 좋은 사람”이라며 변호했다.
나는 당시 결혼을 반대하는 장모에게 사위 셋 중 제일 효도하는 사위가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지랄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중에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장모님 팔순 잔치를 해드렸다. 사위 셋은 모두 임마누엘집 소속 사회복지재단에서 일했고 큰 동서는 지난해 퇴직했다.
장인 장모가 결혼을 인정한 것은 결혼으로부터 4년이 지나서였다. 88년 KBS 방송 ‘코뿔소 만세’라는 인간 드라마에 내가 출연하면서다. 방송이 나간 후 장인어른은 새벽 3시에 전화를 하셨다. 첫마디가 “김 서방, 이제는 허락하겠네”였다. 나는 처음엔 누군지도 모르고 “누구십니까” 했더니 “누구긴 누구야 연순이 애비야” 하셨다.
장모님은 양복을 해 입으라며 20만원을 주셨다. 그 돈으로 양복을 구입해 아직도 입고 다닌다. 예수 안에 있으면 축복과 부요함이 넘친다. 장애의 몸을 갖고 있어도 절대 좌절하지 말라.
***[역경의 열매] 김경식 <8> 건축비 부족하자 옥한흠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방송 출연 후 후원과 강연비 모아 땅 구입, 보내주신 돈으로 1990년 임마누엘집 완공
김경식 목사는 결혼식을 올리고 곧바로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4년 후 충남 부여로 떠난 가족여행 모습. 임마누엘집 제공결혼식 이듬해 나는 백석신학대에 입학했다. 임마누엘집 식구들과 예배를 드리면서 신학의 필요를 절감했다. 목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 나는 초등학교까지 기어 다니면서 “예수 믿어야 천당 간다”고 전도했다. 친구들은 나를 놀리면서도 ‘목사’라고 불렀다. 그때부터 목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아내도 내가 목회자로 살아가길 바랐다.
낮에는 외판 세일을 계속했고 밤에는 신학공부를 했다. 아침 일찍 나가면 밤 11시가 넘어 귀가했다. 아내는 그때까지 임마누엘집의 가사 일에 전념했다. 전신마비 장애인들의 목욕과 용변처리, 빨래, 사무행정 등 온갖 일을 도맡았다. 꿈같은 신혼생활 대신 매일 매일 지친 몸으로 끙끙 앓았다.
이런 가운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1985년 개장한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배추와 무 등 야채를 주워왔다. 당시 가락시장엔 지방에서 야채를 싣고 온 차들이 많았다. 짐을 부려놓으면서 떨어진 야채가 많았는데 그걸 모았다.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내가 야채를 주우러 다니자 상인들은 물었다. “아니, 젊은 새댁이 왜 야채를 줍고 다녀?” 아내는 “장애인을 모시고 산다”며 형편을 얘기했다. 그러자 시장 상인들이 딱하다며 야채를 그냥 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갖은 양념 재료까지 얻어왔다. 아내가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85년 5월 아들 바울이가 태어났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잘생긴 아기였다. 진도에 계시던 어머니는 손자 소식에 춤을 덩실덩실 추셨다 한다. 아내는 몸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출산 이틀 만에 집안일을 돌봤다.
당시 임마누엘집에는 지체장애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학생 등 40여명이 모여 살았다. 학생 15명은 부모가 장애인이어서 학교 진학을 못해 우리가 돈을 모아 공부를 시켰다. 정신이 온전하고 생활력이 있는 분들은 결혼을 시키며 자립을 도왔다. 식구들 중에 30년 동안 전신마비로 살아왔던 형제가 생각난다. 강동윤 형제다. 그는 죽어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임마누엘집에서 살다가 하늘나라로 가겠다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곤 했다.
그는 임마누엘집에 오기 전 아무 곳도 자신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고 한다. 행복하게 살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식구가 된 지 5년 만에 주님 품으로 떠났다. 욕창이 악화된 데다 대장암까지 겹쳤다. “저는 천국 갑니다”하며 평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식구들이 늘어나고 셋방살이를 하면서 눈치 보는 일도 많아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큰집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88년 논픽션 드라마로 방송을 탄 후 나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전국에서 집회 요청이 쇄도했고 후원의 손길도 이어졌다. 나는 한 달에 20차례 넘게 간증집회를 나갔다. 그렇게 강연하고 책을 팔자 돈이 모아졌고 지금의 임마누엘집 땅 660㎡(200평)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축할 돈은 부족했다.
그때 하나님은 돕는 천사를 보내셨다.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이었다. 옥 목사님은 어느 날 전화를 하더니 “외환은행에 가봐” 하셨다. 은행에 갔더니 수표를 줬다. 300만원이었다. 나는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를 시작으로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해 건축비용이 마련됐다. 90년 11월 3일 지상 5층, 지하 1층의 건물을 지었다. 임마누엘집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된 날이었다. 우리는 93년 사회복지법인 허가를 받았다. 강원도 인제, 경기도 이천과 포천, 전남 진도 등에 복지관을 세우며 시설을 확장했다.
***[역경의 열매] 김경식 <9> 계단·문턱 없는 장애인 위한 교회 세워
은둔하던 장애인 하나둘씩 교회 출석, 목사 안수 후 직업재활교육사업 시작
김경식 목사와 장애인들이 1999년 2월 북한 금강산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 가운데 목발 짚은 이가 김 목사. 임마누엘집 제공나는 신학 공부를 마치고 1989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교회는 안수 받기 1년 전 강도사 시절에 세웠다. 나는 한국교회가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갖추지 못해 장애인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뼛속까지 느끼며 살았다. 새로 세운 임마누엘교회는 계단이나 문턱을 없앴다. 장애인들 중엔 교회에 가고 싶어도 교회 시설이 불편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애인에게 최적화된 교회를 시작하자 지역사회에 숨어살던 장애인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장애인을 위한 사업도 시작했다. 무의탁 장애인을 위한 직업재활교육이었다. 침술과 목각, 공예 등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지적장애인과 지체장애인 등이 대부분이었는데 목각과 침술 교육을 받은 장애인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아예 사업체를 차리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임마누엘집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비장애인 여성들과도 곧잘 결혼했다. 나와 아내의 결혼 사례가 주변 장애인에게 ‘전염’됐던 것 같다.
우리는 지역사회를 소중히 여겼다. 매년 설과 추석 명절을 앞두고 소외된 장애인 가정과 독거노인을 초청해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쌀도 나눴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큰 사랑을 받았기에 갚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런 가운데 93년 4월 나는 뜻하지 않게 상을 받았다. 장애인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한 공로를 인정받아 39세 나이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한 것이다. 7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장애인이 된 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했고 10년 동안 외판원 생활을 하며 생존의 싸움터에 나가 장애인 복지를 위해 살았다는 이유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출판사 외판 일을 96년까지 했다. 그 후엔 임마누엘집 사역에 몰입했다. 그해 9월 장애인복지시설인 애향원도 개원했다. 애향원은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지적장애인들에게 기초생활교육과 상담, 재활치료, 학습지도, 사회적응훈련 등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었다. 지금은 복지재단으로 등록돼 있다.
임마누엘집의 활동 중에서 잊을 수 없던 기억은 99년 초 장애인들과 함께 금강산 여행을 간 것이다. 한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지원을 받아 12명의 장애인이 3박 4일간 참가했다.
여행에는 지체 장애인과 지적 장애인들이 따라갔다. 이들은 구룡폭포와 만물상 등 금강산 절경을 눈에 담았고 북한 사람들의 생활상도 목격했다. 나 역시 천혜의 자연에 압도됐다. 진도 바닷가에만 살다가 가공되지 않은 웅장한 절벽과 기암괴석을 보니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황해도가 고향인 부모님 생각도 났다. 그래서인지 북한 사람들을 봐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지체장애인들은 산 정상까지 가지 못했다. 그래도 ‘북한 땅을 밟아본 게 어디냐’며 기뻐했다. 나 역시 산을 오르다 중간쯤에서 멈추고 바닥에 앉아버렸다. 순간 기도하고 싶어서 “북한 땅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소서”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북한 안내원이 “동무, 지금 뭐합네까”하며 놀라서 달려오기도 했다.
북한쪽 안내원들은 전체적으로 장애인들의 여행에 놀라워했다. 그들은 “이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어떻게 왔느냐”며 한마디씩 했다. 그들의 행색이 아직까지 기억난다. 검정고무신에 초라한 바지, 무표정한 얼굴들. 그들은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를 향해 “또 오시라요”하며 못내 아쉬운 듯 작별을 고했다.
***[역경의 열매] 김경식 <10> “교회 통해 장애인 인식 바꾸자”… 노회장 출마
예장대신 송파노회 80여 교회 대표자 돼… 2000여 장애인 목회자들에 희망 됐으면
김경식 목사는 2007년 총회 산하 노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장애인 인식 개선에 힘썼다. 사진은 한 집회에서 설교하고 있는 김 목사. 임마누엘집 제공나는 장애를 가진 목사로서 우리 교단의 노회도 섬길 수 있었다. 2007년 4월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정통(현 예장대신) 67차 송파노회에서 만장일치 박수로 노회장에 당선됐다. 2006년에는 노회원 과반의 추대를 받아 부노회장이 됐다. 경쟁 상대와 표차는 딱 한 표였다.
송파노회는 산하에 80여 교회가 있으며 200여명의 목회자와 장로들이 회원으로 소속돼 있었다. 그런 노회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노회장으로서 나는 무엇보다 우리 노회의 교회들만이라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 변화와 시설 개선을 이룰 수 있도록 힘썼다.
사실 장애인에 대한 교회의 인식 개선은 목회자들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사들이 장애인을 보는 인식이 바뀌면 성도들의 생각도 바뀐다. 그래야 장애인 성도들이 직분을 맡게 되고 성가대도 맡고 헌금위원도 할 수 있다. 장애인도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 아닌가.
내가 노회장이 돼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목사 안수를 받은 지 16년째 되던 해였다. 한국교회 안에 장애를 가진 목회자가 2000여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우리들이 나서지 않으면 교회의 장애인 인식은 달라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도하며 궁리한 끝에 노회장이 돼 노회에 속한 교회만이라도 바꿔보자 생각했다. 일단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노회장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됐다. 2000여명의 장애인 목회자들에게도 똑같은 꿈을 갖게 하고 싶었다.
송파노회 소속 80여 교회 중에는 장애인 편의시설이 있는 곳이 한곳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노회장으로 취임한 뒤 한 달이 지나자 일련의 변화들이 생겼다. 계단을 뜯어내고 엘리베이터와 리프트를 설치하겠다는 목회자들이 나왔다. 어떤 목회자는 내가 목발을 짚고 강단에 올라 의자에 앉아 설교하는 걸 보더니 강대상 계단을 없애고 램프를 만들었다. 또 휠체어를 탄 신자들이 앞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예배당 맨 앞자리에 설치된 나무 파티션을 제거했다.
노회에도 변화가 있었다. 세 가지가 달라졌다. 우선 노회 목사들의 지정석이 없어졌다. 그 전까지는 노회에 가면 목사들의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상석이 있고 중석, 말석이 있었다. 같은 목사끼리 모이면서도 무슨 자리가 있나 싶어 아예 흩어버렸다. 그 방법은 내가 말석에 앉는 것이었다. 일단 노회장이 말석에 앉자 사람들이 처음엔 우왕좌왕하다가 차츰 섞였다.
식사자리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무임목사나 미자립교회 목사들은 자기들끼리 앉았고, 노회장을 지낸 목사들은 또 그들끼리 식사를 했다. 교세나 친분, 나이별로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나는 이 모습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년 동안 이 자리 저 자리로 다니면서 목사님들과 밥을 먹었다. 미자립교회 목사님들과는 15번 정도 밥을 함께 먹었다. 사실 횟수까지 세진 않아서 몇 차례인지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노회장을 마쳤을 때, 나와 밥을 같이 먹었던 목사님들이 알려줬다. 나는 몰랐는데 그분들은 밥 먹은 숫자까지 세고 기억했다.
셋째는 노회 안에 목회자 사모들을 위로하는 잔치가 없었다. 그래서 위로잔치를 하면서 여행도 떠났다. 베트남으로 부부동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사모님들이 많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역경의 열매] 김경식 <11> 목회자 자녀 등에 장학금… ‘그리스도 군병’ 위한 양식
매년 교도소 방문해 간식과 예배… 재소자 “열심히 살겠습니다” 약속
임마누엘집 원장 김경식 목사가 지난 2월 장학금 전달식에서 한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건네고 있다. 임마누엘집 제공임마누엘집이 초창기부터 이어오고 있는 사업 중 하나는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가정이나 목회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일이다. 도봉산 자락에 있을 때부터 나는 장애인 가정 아이들을 돌보면서 그들을 교육했다. 장애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비장애인들이 많다. 그런데 부모가 몸이 불편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살게 된다. 우리는 천막 가옥에서 15명의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거여동으로 이사한 1987년 3월부터는 연중 사업으로 정례화해 매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한번은 영세 목회자인 최은총(가명) 목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아들인 영우(가명)가 장학금 수혜자로 선정된 것에 감사하는 내용이었다. 최 목사는 사모가 암 치료를 받고 있었고 개척 목회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장학금을 받게 돼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영우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면서 “꿈을 품고 도전하라”고 말했다. 장학금 전달에서 나는 길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불편한 몸으로 살아온 나를 봐라” “여러분들도 못할 게 없다” “예수 안에서는 능치 못할 게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고난을 이겨내는 그리스도의 군병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임마누엘집이 매년 펼치는 사업 중에는 교도소 방문도 있다. 장애인 복지재단에서 무슨 교도소냐고 궁금해 할 분들도 계시겠다. 교도소 방문은 나의 어두운 과거와 관련이 있다. 젊었을 때 도박 사건에 연루돼 6개월간 목포교도소에서 감방 생활을 해봤던 경험 때문이다. 그때 재소자들이 참 어렵게 생활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죄값을 치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4년 전부터 나는 1년에 서너 차례씩 경기도 여주의 소망교도소에 간다. 임마누엘집 식구들도 같이 가서 재소자들을 위로하고 빵을 후원한다. 복지재단 산하 포천의 빵공장에서 만든 빵이다. 잔뜩 싸가지고 간다. 풍물놀이도 하고 예배도 드린다.
예배에서는 항상 내 간증을 들려준다. 그런데 재소자들은 내가 목발을 짚고 나오는 것부터 유심히 살펴본다. 그리곤 이야기에 빠져든다. 예배 참석자 300명 중 250명은 눈물을 흘린다. 예배가 끝나면 재소자 중 일부는 한마디씩 한다. “출소하고 나가면 열심히 살겠습니다.”
실제로 출소한 형제들 중에는 나 때문에 변했다는 사람이 여럿이다. 그동안 20명이 넘는 출소자들이 임마누엘집을 찾아왔다. 이들이 찾아오는 것은 나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다. 나는 교도소 집회를 가면 꼭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일종의 광고인데 임마누엘집과 교회의 주소,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여러분 서울 지하철 5호선을 타고 거여역에서 내려 5번이나 6번 출구로 나와서 70m만 걸어오세요” 한다. 그러면 재소자들은 이를 기억했다가 찾아오는 것이다. 이들이 오면 나는 교통비를 챙겨주고 점심이나 저녁을 사준다. 찾아온 그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교도소에 있을 때 많은 목사님들이 찾아왔지만 김 목사님 같은 분은 처음 봤어요. 목발 짚고 힘겹게 강단 올라가 말씀 전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9월 방문이 기다리고 있다. 벌써부터 설렌다.
***[역경의 열매] 김경식 <12·끝> 기독교인부터 장애인을 형제자매로 대해주기를
장애인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들… 장애인 양로시설 설립 등 새 꿈 품어
김경식 목사가 지난해 12월 서울 송파구 양산로 임마누엘집 앞에서 장애인 식구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임마누엘집 제공임마누엘집은 오는 24일부터 경기도 포천으로 여름수련회를 떠난다. 매년 떠나는 수련회다. 장애인 가족과 직원, 봉사자 100여명이 함께한다. 답답한 시설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물놀이도 하며 친교의 시간을 갖는다. 장애인들은 수련회를 통해 서로 부대끼면서 사회적응 훈련을 한다. 수련회에 다녀오면 자존감이 훨씬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에겐 두 가지 꿈이 있다. 우선 장애노인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장애인 양로시설을 세우고 싶다. 장애인 노령화에 따라 장애노인만을 위한 요양시설이 필요한 것이다. 아직까지 국내에 장애노인을 위한 전문 시설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장애노인들은 대부분 일반 장애인 시설에서 함께 거주한다. 어린이부터 노령의 어른까지 같은 시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노인은 거동 자체가 어려워 나이에 맞는 특별한 돌봄이 필요하다.
장애노인들 중에는 비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양로원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돌봄 프로그램이나 인식, 시설 등이 달라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 양로원에서는 노인들이 나들이나 여행을 하면서 외부 접촉을 하는 프로그램이 많은데 장애노인은 움직일 수가 없어 외출 자체가 어렵다. 장애인으로 사는 것도 서러운데 거동이 불편해 맘대로 가지도 못하는 것이다. 인지 가능한 장애노인은 소외감마저 느낀다.
장애노인으로 살던 박모 집사가 생각난다. 그는 임마누엘집에서 젊은 장애인과 생활하면서 어려움을 느껴 비장애인 양로시설로 갔다. 6개월 만에 연락이 왔다. “목사님, 다시 임마누엘집으로 가고 싶어요.”
그는 비장애노인 속에 살면서 어려웠다고 한다. 나는 박 집사 사례를 보면서 장애노인을 위한 전문 요양시설을 꿈꾸게 됐다. 국내 장애노인은 전체 장애인의 7∼10%를 차지한다. 장애인의 또 다른 사각지대인 셈이다.
또 한 가지 소망은 지적장애인을 위한 복지타운을 세우는 것이다. 타운 안에서 지적장애인들이 논밭이나 과수원, 작업장 등을 운영하면서 자립하고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지적장애인들은 지능만 조금 떨어질 뿐, 말도 잘하고 손발 사용도 자유롭다. 이들이 서로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면 좋겠다.
국내 장애인 가운데 선천적 장애인은 5%에 불과하다. 95%는 후천적 장애인이다. 요즘엔 교통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된 사람들이 가장 많고 노동현장에서 다친 사람이 그 다음으로 많다. 중풍이나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장애가 발생하기도 한다. 등록 장애인만 500만명에 육박한다. 비등록 장애인까지 합치면 국내 장애인은 700만명에 가깝다.
장애인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소외돼선 안 된다. 장애인들의 열등의식은 비장애인보다 10배는 더 높다고 한다. 부디 교회와 기독교인부터라도 장애인을 형제자매로 대해주길 바란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돌이켜보면 그저 감사한 시간이었다. 주님께서 내게 찾아오셔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혹시 힘든 일이 있으신가. 주님을 붙잡으시라. 하나님은 절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신다(02-407-0067·im21.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