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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眞我) ― ‘참나’에 대한 이해>
'진아(眞我)', ‘참나’란 초기경전에는 나오지 않은 말이다.
대승불교에서 생산된 용어로 그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열반사덕(涅槃四德)의 하나로서 열반의 체(體)가 변하지 않고 진실하며,
그 작용이 자유자재하므로 ‘아(我)’라 한 것을 말한다. 즉, 열반사덕인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에서
‘아(我)’는 망상에 집착하는 아집(我執)의 나[가아(假我)]를 버린 참나(진아)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선 여기서 논의하는 ‘진아’는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의 ‘아(我)’를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은
가아(假我)인 에고(ego)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가아인 에고가 주인노릇 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진아인 양심이 한 번씩 작동할 때마다 가아를 자신으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반성하기도 하고 새롭게
결심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의 진아는 아트만(atman) 계열이 아닌 도덕적인 개념으로서의 아(我)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아인 에고가 주인인 상태이기 때문에 그때뿐이다. 찰나에 가아로 돌아서버린다.
여기 ‘상락아정(常樂我淨)’에 관련해서 하신 부처님 말씀이 있다. 아(我)와 무아(無我)에 대한 부처님 말씀이다.
'나'라고 하는 것을 손가락이나 겨자씨처럼 실체적인 것으로 알기 때문에 무아라고 한다. 그렇다고 진정한 '나'가 없음은 아니다. 사법인(四法印)에서는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가르치던 부처님이 열반의 특징을 나타내는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는 왜 다시 '나'를 가르치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법인(四法印)---최초에는 일체개고(一切皆苦)⋅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의
세 가지를 가리켰으나, 후에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에게 여쭌다.
부처님께서는 전에 “모든 사물은 실체적인 ‘나’가 없으니 이것을 배워서 ‘나’에 대한 관념을 버려라.
‘나’라는 생각을 버리면 교만심이 없어지고 교만심이 없어지면 곧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다시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누리시는데 그 중에 ‘아(我)’라는 것이 바로 나에 대한 관념이
아닙니까? 어떻게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와 진정한 ‘나’가 있다는 아(我)를 동시에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옛날에는 무아(無我)를 가르치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즈음에는 다시 ‘나’라는 관념을 열반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누린다고 하시니, ‘나’가 없다는 것과 '나'가 있다는 정반대의 말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겠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을 직접 들어보자.
“네가 중요한 것을 물었다. 내가 이제 비유로써 너에게 일러 주리라.
어느 나라의 국왕 밑에 한 엉터리 의사가 있었는데, 그 의사는 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느니라. 그 의사는 누가
아프다고 하면 병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으므로 무조건 우유로 만든 약을 썼느니라. 그 의사가 병을 진찰한다고 해도 다른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의사는 아무 병에나 우유약을 쓰기 때문이니라. 그 나라의 왕도 그 의사의 약 쓰는 법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러던 중 한 지혜로운 양의가 왕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새 의사는 모든 병에 우유로 된 약을 똑 같이 쓰는 것은 옳지 않음을 설명했느니라. 왕이 들어보니 새 의사의 말이 옳은 것은 같아, 왕은 먼저 의사를 파면하고 새 의사를 채용함과 동시에 전국에 엉터리 의사가 조제한 우유로 된 약을 모두 폐기하도록 명령했느니라.
새 의사는 그 후로 가지가지 좋은 약을 조제해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느니라. 그런데 어느 때 국왕이 병이 들어, 국왕의 병세를 진찰해 본 새 의사는 이 병은 우유로 만든 약을 써야 된다고 국왕에게 말했느니라.
국왕은 어이가 없었느니라. 새 의사 자신이 엉터리 의사의 조제법으로 만든 우유약은 잘못 됐으니 모두 폐기해야 한다고 말해놓고 이제 와서 왕 자신이 병이 들었는데 다시 우유로 만든 약을 써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느니라.
"네가 미쳤느냐, 정신이 빠졌느냐? 아니면 나를 속이거나 놀리는 것이냐? 그전에는 우유로 만든 약을 쓰면 안 된다고 하더니 우유로 만든 약이라야 나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
"국왕이시여, 벌레가 나뭇잎을 파먹다가 글자의 형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벌레는 그 것이 글자인 줄을 모릅니다. 대왕이시여, 그전 의사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병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저 우유로 만든 약만 먹게 해 그 약이 듣는지, 아니 듣는지도 몰랐습니다. 벌레가 자신이 파놓은 글자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우유로 쓰는 약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독약도 되고 양약도 됩니다. 지금 대왕의 병에는 이 우유로 만든 약이 필요합니다.
왕은 새 의사의 말대로 우유로 조제한 약을 먹고 병이 나았느니라.
비구들아 모든 엉터리 의원을 항복받고 중생을 조복해 무아의 도리를 설했느니라.
범부의 마음과 외도의 마음이 만드는 '나'는 벌레가 만드는 글자와 같아서 아무 의미가 없는 까닭이니라.
나는 저 어진 의원이 우유가 해가 될 때와 약이 될 때를 알아서 우유를 쓰는 것과 같이 ‘나’라는 아(我)가 해가
될 때와 이익이 될 때를 알아서 '나'를 설하는 것이니라. 범부와 외도는 '나'라고 하는 것을 손가락이나 겨자씨
처럼 실체적인 것으로 알기 때문에 내가 무아(無我)라고 했느니라. 그러나 진정한 '나'가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만일 깨달음의 법(法)으로서 진실로 상주하고 자재불변(自在不變) 해 있다면 이것은 ‘나’라고 이름 할 것이니라.
범부가 알고 있는 나(我)는 탐욕 등 오욕칠정에 쌓여 있어 이는 거짓 나(我)라서 무아(無我)임을 가르치고,
탐욕 등 오욕칠정을 다 버린 텅 빈 마음으로 도통해 열반에 들게 되면 참나(眞我)를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극히 영리한 인간은 그 마음을 냄에 달콤한 에고(ego)에 길들여진 마음 상태를 고양시켜 그 가아(假我)인 에고가 주인노릇 하게 해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이야 고통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자기에게 필요한 욕심을 마음껏 채우는 것이 삶의 보람이고, 그것을 잘 하는 일이라 여긴다.
『따라서 진아란 망상(내 생각)에 집착하는(我執) 가아를 버리는 수행의 길이며,
곧 열반은 번뇌의 더러움을 벗어나 청정한 자아를 얻음을 말한다.
‘가짜 나’는 과거(전생)로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알음알이, 지식, 고정관념)을 내 것으로 삼고, 이것을 통해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기적)이다. 이 가아는 진아가 알음알이, 지식, 고정관념, 업(業) 등의 옷을 입은 것이다. ‘진짜 나’는 옷을 입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양(相)이 없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가짜 나’는 그동안 배우고 익힌 것(業)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으므로 사람마다 서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자기 자신(진짜 나)이라고 착각한다.
결국 ‘진아’와 ‘가아’는 몸은 한 몸이지만 작용만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서로 분리될 수가 없으며,
‘가아’의 모습도 ‘진아’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아’를 인식하지 못하고 ‘가아’가 행한 모든 행위, ― 가아의 작용은 자아의식[이기적인 아집(我執)]이
개임됨으로써 삶의 찌꺼기[업(業)]가 돼서 남게 되고, 그 업은 윤회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진아(도덕적인)’의 작용으로 한 행위는 자아의식[아상(我相), 무명(無明)]과 취착(取着)을 여읜 상태에서 모두를 이익 되게 한 행위이므로 행하기는 했으나 행한 바가 없는 행이어서 삶의 찌꺼기가 전혀 남지 않기 때문에 윤회가 없다. 이것은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았으나 그 자취가 남지 않는 것과 같다.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는 늘 함께하면서 가아를 통해 진아(참나)가 작용을 하기 때문에 가아가 하는 모든 것은 진아(참나)의 다른 모습이다. 따라서 가아가 원리를 깨닫지 못해 망념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진아(참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가아가 원리를 깨닫는 수행을 통해 지혜를 얻으면 지혜를 얻은 만큼 비례해서 지혜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깨달음의 대상은 명상(삼매)을 통해 ‘진아(참나)’를 만나고 늘 진아와 함께하는 것(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체득함으로써 진아(참나)가 늘 지혜롭게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삼매에 들었다 할지라도 지혜가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수행은 잘못된 수행이다.』 ― 해산
그리고 평생을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부처님도 마지막에 참나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자등명(自燈明) 자귀의(自歸依)」의 유언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자(自)’는 자아(自我)를 말하는데, 그 자아를 말씀하실 때, 때 묻고 비뚤어진 자아를 말씀하셨겠는가. 때 묻지 않고 진실한 자아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참나’를 말하는 것이다. 그 ‘참나’를 믿고 의지하는 말이다. 엉뚱한 남을 믿어서 속지 말고, 진정한 나야 말로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확장한 것이 ‘참 나’인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법등명(法燈明) 법귀의(法歸依)」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법(法)’은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참으로 부처님께서는 자기가 없는 세상에서 제자들이 엉뚱한 것에 귀가 솔깃해서, ― 속아서 외도들의 꼬임에 넘어갈 가봐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누누이 가르친 진실, 진리, 진여를 놓지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확장한 것이 진아요, 진여불성인 것이다.
따라서 진아를 인식론적인 ‘참 자아의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아(自我)란 생각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의식의 덩어리, 환상의 덩어리에 불과한 의식은 허망한 그림자와 같다.
그런데 우리는 오온(五蘊)을 ‘나’라고 믿고, 온 인생을 그곳에 다 쏟아 붇는다. 이는 잘못된 자아의식, 이기적인 자아의식이며, 탐욕, 분노, 고집, 집착, 그리고 자기중심적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고정관념 또는 아상(我相, atta)이라 한다.
그런데 아상(我相)이든, 이에 대립되는 무아(無我)이든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인식론적인 의식으로 파악할 경우,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바꿀 수가 있다.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다. 수행을 통해 의식을 바꾸어버리면, 해탈하게 된다는 말이다. 해탈한 그 맑고 청정한 의식은 영원하다. 이 영원한 의식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요,
참 자아의식(참나)이다.
『이제 참나와 참마음을 어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 substance) 또는 속성들의 존재 기반이 되는 어떤 기체(基體 substratum)로 간주하기를 그만둘 때가 됐다. 독립적 존재로서의 실체는 불교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과학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상식에 의해 봐도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는 그런 독립적 존재자는 없다.
특히 현대 양자물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대상이 소립자들로 돼있고 각 소립자들도 에너지와 다른 소립자들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음은 오늘날의 상식이다.
존재자는 기체가 없는 속성들의 집합으로 이해되며, 나아가 각 속성들도 다른 속성들과의 관계로부터만,
즉 연기의 관점에서만 그 존재가 이해된다.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이나 브라흐만(brahman), 또 서양종교의 영혼(soul)과 같은 실체 또는 기체의 존재를 신앙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연기로 존재세계를 이해하는 불교나 21세기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실체나 기체의 존재로 더 이상 이야기할 수가 없다. 따라서 불성, 여래장, 진아(참나) 등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다만 유명론적(唯名論的)으로만 존재할 뿐이라고 이해해야 연기론에 걸리지 않는다.
‘참나’와 ‘참마음’의 개념에 실재성(reality)을 부과해서 참나와 참마음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실체화 또는
실체화(reification)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오류는 선문의 가르침을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
및 비판불교론자들의 논점에 취약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참나와 참마음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즉 이차 지시어(二次指示語)로서만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참나와 참마음을 해석하면 참나와 참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체성을 인정할 필요가 없고, 또 아트만이나 영혼이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실재성을 부여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 가리키는 다양한 의식의 상태들은 모두 연기에 의해 생멸하며 자성(自性)이 없이 공(空)하기 때문에, 선문(禪門)의 참나와 참마음에 대한 가르침이 불교의 다른 학파들 안에도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라는 개념은, 그것에서 실체성이나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제거하기만 하면, 대승과 선불교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더 효과적으로 전해 줄 수 있는 좋은 방편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형이상학적 교리에 있어서도 대승과 선문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불성과 여래장,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 모두 붓다의 무아(無我)와 연기(緣起) 및 공(空)의 가르침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거듭 말하지만,
불성, 여래장 및 참나와 참마음을 실체(實體)나 형이상학적 실재(實在)로 보면 안 되고,
단지 개념이나 이름으로만 봐야 한다.
또한 남전(南傳)불교와 북전(北傳)불교를 모두 붓다의 일관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해석이 원효
이래 한국 불교의 이상으로 여겨져 온 회통불교(會通佛敎)를 구현하는데 일조(一助)할 것으로 기대한다.
결론은 이렇다. 불셩, 여래장, 참나, 참마음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즉 이차 지시어로서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겠다.』― 홍창성
※이차 지시어(second-order designator)란---고유한 대상을 직접 지칭하는 일차 지시어(first-order designator)와 달리 집합에서 어떤 대상을 간접적으로 지시해 주는 것을 이차(二次) 지시어라고 한다. 예컨대, 포도, 사과, 딸기와 같은 단어는 고유한 대상을 직접 지시하는 일차 지시어이다. 이와 달리 ‘과일’이라는 단어는 포도나 사과, 딸기를 간접적으로 지시한다. 이러한 단어를 이차 지시어나 이차 개념(second-order concepts)이라 한다.
일차 개념이 지시하는 포도는 존재하는 사물 즉 존재자이다. 포도와 일치하는 실재의 존재자가 있다.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다. 하지만 ‘과일’과 같은 이차 지시어는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즉, 이름뿐이다. 이것이 유명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