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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설거사와 월명암 이야기
거사의 법명은 부설(浮雪)이요,
자는 천상(天祥)이며,
속명은 진광세(陳光世)였다.
신라 진덕여왕이 즉위하던 해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 남쪽 향아(香兒)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두뇌가 명석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우쳤으며,
다른 아이들과 놀다가도
해가 지는 서쪽 하늘을 한없이 바라보기도 하였다.
때로는 숲 속에 들어가 혼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기도 하였다.
어쩌다 누가 살생하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마음을 몹시 아파하였다.
스님을 마주칠 때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그는
마침내 불국사를 찾아가 삭발을 하고
원정선사(員淨禪師)를 섬기게 되었다.
소꿉놀이를 하고
죽마(竹馬:아이들이 대나무를
가랑이에 넣고 몰고 다니는 놀이)를 타고 놀아야 할
일곱 살의 나이에 그는 이미 현묘한 도를 통하게 되었으며,
찬서리와 같은 엄한 기상과
소나무 같은 고결한 지조로 정진을 계속하여
그의 마음은 맑은 호수와 밝은 달과 같았으며,
그의 계행은 항상 구슬처럼 빛났다.
인품과 도량은 깊고도 높아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영남지방의 높은 덕망을 지닌 스님들이
모두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붕 위의 박처럼
한 곳에만 매달려 있어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널리 원로 스님을 참방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마침내 도반(道伴)인
영조(靈照), 영희(靈熙)와 더불어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들 또한 몸가짐이 바르고 성정이 깨끗하여
마음은 항상 도(道)밖에 있지 아니하였다.
행실은 말하기에 앞서 실천하였으며
탐욕이 없는 간소하고 단아한 삶을 좋아하였다.
그들은 계수나무 돛대를 건 작은 배를 띄워
남해를 돌아 두류산(頭流山:지리산)에 머물렀다.
여기서 그들은 경(經)으로는
사아함(四阿含)을 꿰어뚫었고,
논(論)으로는
오명(五明:聲明-文法 文學, 工巧明-技術 天文學,
醫方明-醫學, 因明-論理學, 內明-哲學 敎養學)을 정통하였다.
송홧가루를 먹으며 적멸(寂滅)을 관(觀)하고,
연실(蓮實)을 먹으며 도를 즐겼다.
어느덧 3년이 지나서는
천관사에 건(巾)을 걸고 머물렀으며,
다섯 해 동안의 참선을 마친 후엔 능가산(변산)에 들어왔다.
변산을 두루 둘러본 이들은
마침내 법왕봉 아래로 나아가
초가집 한 칸을 짓고서 묘적(妙寂)이라 이름하고 편액을 붙였다.
이는 선정(禪定)의 오묘한 경지에
고요히 들어간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들이 한 집에서 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며
참선하는 중에는 입을 굳게 다물어 말도 하지 않았으며,
마갈(摩竭:부처님이 수도하던 도량)에서 문을 굳게 잠그고
세속의 인연을 끊어
마침내 삼생(三生:前生, 現生, 來生)의 환몽을 없애버렸다.
학문은 이미 모든 문자를 통달하였고
계행은 구슬보다 더 빛났다.
이들은 본성을 길렀던
오도(悟道)의 시 한 편씩을 기술하였다.
영조가 맨 먼저 읊었다.
占得幽居地
좋은 곳을 가리어 그윽히 살아가니
萬松領上庵
소나무 우거진 산마루 암자였도다
入禪看不二
선정에 들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달았고
探道喜成三
도를 탐구하여 삼승을 이룸이 기쁘구나
采玉人誰到
옥은 캐어놓았건만 아는 이 누구일까
含花鳥自
꽃을 머금은 새들만 조잘대누나
肅然無外事
숙연히 세상 일에 매임이 없으니
一味法門
일미 법문에만 참구할 뿐이로다
영희가 이어서 읊었다.
雲收歡喜嶺
구름 걷힌 고개 마루는 환희에 넘치고
月入老松庵
달빛은 노송 드리운 암자로 찾아드누나
慧劍精千萬
지혜의 칼날은 천만배를 더하는데
心源湯再三
마음 근원은 재삼 용솟음치네
洞天春寂寂
깊숙한 골짜기에 봄은 적적하건만
山鳥語
산새는 이리저리 지줄대누나
咸佩無生樂
우리 모두 무생락을 지녔으니
玄關不用
현관에 참예함이 부질없어라
부설거사가 이어서 기쁜 마음으로 화답하기를
共把寂空雙去法
그대와 함께 적적한 공을 법으로 삼아
同捿雲鶴一間庵
한 간 암자에 구름과 학을 데리고 같이 살았네
已知不二歸無二
이미 둘이 아닌 것이 둘이 없음으로 돌아감을 알았으니
誰問前三與後三
전삼과 후삼을 뉘에게 물어보리오
閑看庭中花艶艶
한가로이 뜰을 바라보니 꽃들은 한창 피어났고
任聆窓外鳥
창가에 지저귀는 새소리 무심히 들려오도다
能令直入如來地
능히 여래에 땅에 들어설진대
何用區區久歷
어찌 구구하게 오랜 세월 참구하랴
이에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도량임을 생각해내고
그들은 북으로 길을 떠났다.
오대산으로 가는 길에
두릉(杜陵:만경의 옛이름.
오늘의 김제군 성덕면 고현리)의
백련지(白蓮池) 옆에 있는 구무원(仇無寃)이란
청신도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그 집 노인은 신심이 깊은 거사였다.
본디 청허한 도리를 숭상하여 간절히 도를 구하던 터라
부설 일행의 법문을 듣자
그들을 상좌에 모시고 극진히 예를 다하였다.
이는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난 다음날은
새벽부터 봄비가 흠뻑 내려 길이 진창길이 되어 나설 수가 없었다.
이들은 하는 수 없이 이곳에 더 머물게 되었다.
더구나 이 집 늙은 주인은 법을 구하는 마음이
늙어갈수록 더욱 돈독하여 법을 묻고 대답하며 밤을 지새니,
그 대답하는 말은 마치 마명보살(馬鳴菩薩)의 지혜로운 말씀과 같고
용수(龍樹)보살의 거침없이 쏟아지는 강물과 같은 설법이었다.
이러므로 사람은 물론 귀신까지 모두 기뻐하고
인근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두 기뻐하여
당파리처럼 손이 닳도록 비비고 무릎을 굽히어
귀중한 보배를 얻은 것처럼 말씀을 간직하였다.
그 주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을 묘화(妙花)라고 하였다.
태몽에 연꽃을 보고 낳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묘화는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세상에 보기 드물게 뛰어났다.
지혜로우면서도 유순하고 엄하면서도
절의와 지조가 있어 당시 어디에 견줄 수 없이 특출하였다.
비록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자랐으나
사람들은 그를 보기 드문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날 부설의 설법을 듣고 법열에 못 이겨
슬프게 우는데 쉽게 그치지 못하였다.
이는 마치 아난의 설법을 듣고 울었던 마등가와,
초나라 양왕과의 이별을 서러워하며 울던
무산(巫山)의 선녀와도 같았다.
그녀는 부설을 가까이 모시면서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맹세코 부설을 좇으려 하였다.
또한 영원히 부부가 되면 죽어도 원이 없거니와
만일 이를 이루지 못하면 목숨을 끊겠노라고 다짐을 말하였다.
묘화의 부모도 딸을 불쌍히 여겨 마지못해
부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원하옵건대 부디 이 딸을 저버리지 마시고 제도하여 주옵소서."
이렇듯 밤낮을 빌었으나 부설은 본래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나의 의지는 쇠와 돌보다도 더욱 견고하여
애욕 따위에 심취하지 않으니 어찌 여색에 미혹할 수 있겠는가.'
부설은 구무원과의 인연이
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깊이 경계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자비를 베풀어야 할 보살행을 생각할 때
죽음을 각오한 한 여인의 염원이 진실하고 간절하니
이를 저버릴 수만은 없었다.
여기에 혼인의 육례를 갖춘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부설은 연꽃이 담담하게
물위에 떠 있음을 생각하고 묘화와의 결혼을 승낙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코 애욕에 탐착한 것은 아니었다.
도우(道友)인 영희,
영조 두 스님은 서쪽의 외진 곳에서
벗을 잃고 나자 행색이 쓸쓸하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 오대산을 향해 길을 떠나면서
게송을 지어 부설에게 주었다. 영조가 먼저 읊었다.
但智成空見(부질없는 지혜는 헛된 견해를 이루어)
偏悲涉愛緣(편벽된 자비심은 애욕의 끈에 닿고 말았네)
雙行常樂矣(지와 계의 수행은 항상 즐거우니)
一道自天然(하나의 도는 절로 천연스러운 것을)
月運因雲 (구름이 달려감에 달의 운행이 있고)
風飄識幡懸(나부끼는 깃발 따라 바람결 이네)
于將如在手(장래가 이미 손에 쥐어져 있으니)
安爲色留連(편안함은 색을 지어 이어지리라)
영희가 이어 화답하였다.
一甥成臺力(대나무를 쌓아올려 누각을 이루고)
九皐翹足緣(연못 위의 날갯짓은 넉넉한 인연이로다)
修行破竹爾(수행은 대나무 쪼개듯 바로 나가고)
得道着鞭然(득도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이루네)
未免三生累(삼생에 집에 쌓인 누를 면치 못하고)
寃家一念懸(구씨 집의 인연으로 한 생각에 매여 있네)
他年甁返水(언젠가 엎지러진 물을 다시 담아)
追後足相連(먼 훗날 다시 만나 발걸음을 이어보세)
이에 부설선사가
원융(圓融)한 도의 경지에 서서
두 사람의 운에 답하여 읊었다.
悟從平等行無等(깨우침은 평등을 좇아 무등을 행하고)
覺契無緣度有緣(깨달음은 인연을 맺지 않으나 법도는 인연에 매여 있도다)
處世任眞心廣矣(진리에 몸을 맡기니 마음은 넓어지고)
在家成道體珊然(집에 머물러 도를 이루니 갈빗살이 실팍하도다)
圓珠握掌丹靑別(둥근 구슬이 손바닥에 있으니 단청이 구별되고)
明鏡當臺胡漢懸(밝은 거울이 대를 만나니 진실이 드러나도다)
認得色聲無罣得(색계를 인정하고 거리낌 없음을 얻으니)
不須山得坐長連(굳이 깊은 산골에 오래 앉아있을 일이 없으리로다)
부설이 소신을 밝히자
영조와 영희는 도우의 구도행에 결실이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부설이 솔잎차를 가득 부어 권하면서 말하였다.
"도라는 것은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흰 옷에 있지 아니하며,
번잡한 거리와
조용한 초야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모든 부처의 참뜻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있으니
우리 도반(道伴)들은 길이 참구하여
법유(法乳)를 배불리 먹고 와서 부디 나를 경책하소."
부설거사는 비록 몸은 진세(塵世)에 있으나
마음은 사물 바깥에 높이 걸어두고
초연히 삼업(三業:身, 口, 意)을 정밀하게 닦았으며,
육도(六度:六波羅密)를 널리 행하고
경전을 두루 통하여 말씀은 언제나 부처의 참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이 사방에서
서로 옷깃을 끌며 부설을 찾아 몰려들었다.
의약을 구하려는 사람들도 팔방에서 찾아들었고,
심지어 귀머거리도 부설을 뵙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마른 고목조차 모두 윤기가 흘렀다.
부설이 법을 널리 펴서 떨친지 어언 15년이 되었다.
부설과 묘화 사이에
법윤(法胤:선사의 자녀)이 둘이 있으니
사내는 등운(登雲)이고 딸은 월명(月明)이다.
이들은 모두 길몽을 꾸고 얻은 자식들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안아서
보낸 자식으로 용모와 거동이 모두 자상하고 단정하며,
높은 기상과 절개를 지녔으며,
학문을 할 적에는
마음의 본바탕에 있는 지혜로 깨우쳐 나가
그림자를 보고도 본체를 알고,
바람을 따라 소리를 알며,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달았다.
이에 삼장(三藏:經, 律, 論)의 넓은 가르침을 받았고
육경(六經:易, 詩, 書, 春秋, 禮, 樂)의
많은 문장 속에서 익혀 나갔다.
도인이 머무는 곳에는
모든 만물이 병들지 아니하고
바람과 비가 제 때를 따라 알맞게 내리어
곡식마다 풍년을 이루었다.
부설은 그 고을의 높은 덕망을 지닌
이승규와 김국보 등과 교분을 맺고
한가한 가운데 얻는 즐거움으로
늙고 젊음도 잊으면서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날마다 모여 경을 강술하고 이를 논하였다.
이는 그 옛날 혜원의 백련사를 방불케 하였으며
또한 한퇴지가 태전선사에게 가사와 장삼을 마련해 준 것과도 같았다.
마침내 부설은 세상의 번잡한 모든 일과
두 자녀를 부인 묘화에게 맡기고
따로 집 한 채를 엮어서 다시 수도에 들었다.
그는 '나의 몸의 귀중한 것을 손상시키는
겁적(劫賊)은 본래
육문(六門:眼, 耳, 鼻, 舌, 身, 意)으로 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없애고
자성을 돌이켜 진실여래하게 홀로 드러나게 함은
방편을 빌릴 것이 없다.' 하고
겉으로는 걸음을 걷지 못한다 핑계하고
일부러 병이 든 늙은이로 가장하여
미음이나 죽을 날라오게 하였다.
기력을 절제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부를 해나가며 성도하리라 결심하고
비야존자처럼 말하지 않았으며,
달마의 면벽(面壁)을 따랐다.
어느덧 기약한지 오 년이 되던 해에
빛나는 별처럼 밝게 통하였다.
그러나 다시 남은 찌꺼기를 깨끗이 하니
지혜의 봉오리는 거듭 높이 솟게 되었다.
이에 화엄법계를 두루 횡행하고
원각의 오묘한 경지에 편히 앉아서
스스로 자신이 즐길 뿐,
남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지난날에 옷깃을 함께 하던
영조와 영희 두 스님은 오랜 동안의 참구를 마치고
두루 명산을 유람할 때
인연을 따라 두릉 고을의 청신도 구씨의 집에 이르게 되었다.
옛날의 그 거사는 죽은 지 이미 오래 되므로
그간의 사정을 물어볼 사람이 없더니
문득 관을 쓰고 비녀를 꽂은 단정한 남녀를 만나
부설거사의 안부를 물으며
지난날에 벗으로 지낸 인연을 말하였다.
남녀는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부설의 두 자녀였던 것이다.
옛 벗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들은 부설은,
"이 기쁜 소식을 들으니 나의 오랜 병이 다 나아버렸구나.
기분이나 몸이 거뜬하고 편안하니 정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편히 모시어 높은 이를 대접할 음식을 마련하라.
그들은 반드시 뛰어난 도인들이요,
사물의 이치를 널리 아는 군자들이니
공손히 맞아들여 행여 그 뜻을 거스르거나 태만함이 없도록 하여라"
하고 일어나 반가이 맞이하여 옛정을 다시 폈다.
이에 부설의 마음자리가 밝고 빛나 예리하기가 송곳과도 같았다.
등운과 월명은
아버님이 도인의 법력으로 병이 나은 것이라 생각하고
온 몸을 땅에 굽히며 더욱 공경하게 되었다.
부설이 말하였다.
"세 개의 병에 물을 담아 오너라.
우리의 공부가 얼마나 익었는지를 시험하리라."하고
들보 위에 병을 매달아 놓고
각자 방망이로 병을 하나씩 후려치게 하였다.
이 때 두 사람은 모두 병과 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러나 부설이 친 병은 깨어지기는 하였으나
물은 병의 형상을 한 채 들보에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이에 부설은 두 친구에게 말하였다.
"신령스런 빛이 홀로 나타나니
마음의 티끌을 멀리 벗어버리고,
본성의 참모습이 나타나니 생멸에 얽매이지 않는다네.
무상한 몸의 환영은
삶과 죽음을 따라서 옮겨 흐르는 것이
병이 깨지는 것과 같으나
본바탕은 신령스럽고 밝아
물이 허공에 매여 있는 것과 같도다.
그대들은 두루 높은 선지식을 찾아보았고,
오랫동안 총림에서 세월을 보냈는데,
어찌하여 만물의 생멸이 무상한 것이며
다만 이의 공허한 껍데기만이
법을 지어냄을 터득치 못하였는가.
지난날 엎지러진 물을
다시 담아보자는 계(戒)는 그대로 있는데
함께 행하자는 맹세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부설은 재가 수도를 하였으나
출가 수도한 그들보다 깨달음이 깊었다.
이어서 게송을 읊으니.
目無所見無分別(눈에 보이는 바가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耳聽無聲絶是非(귀는 소리 없는 소식을 들으니 시비를 그쳤도다)
分別是非都放下(분별과 시비를 도하에 놓아버리고)
但看心佛自歸依(다만 마음의 부처를 보며 스스로 귀의하도다)
이 때 하늘에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짙게 드리우더니
신선의 아름다운 음악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부설이 단정히 앉아 생각에 잠기다
이윽고 열반에 드니 향기는 바다 밖으로까지 퍼지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
영조, 영희 두 스님은
그 덕을 그려 추모하고 관을 들어 다비식을 행하였다.
불꽃 속에 학이 춤을 추고,
빗방울은 오색이 영롱한 사리 구슬을 적시었다.
사리를 거두어 보함에 담아 묘적암의 남쪽 기슭에 부도를 세웠다.
이어서 명양(冥陽)의 법회를 베푸니
호남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도량에 모이고
원근의 선사와 강백들이 신령스런 멧부리에 바람처럼 몰려들었다.
그 때에 도문(道文), 도전(道全), 법해(法海),
법운(法雲)은 법제자들 중에서
지와 덕이 높아 세간의 사표였다.
흐르는 물결 같은 맑은 설법은 돌덩이까지도 끄덕이게 하였다.
법회가 미처 끝나기 전에
등운, 월명의 두 남매는 동시에 머리를 깎았다.
그들은 집을 지어 한 곳에 살면서
눈물을 가나무 숲에 부리고
맑은 정신은 늘 연지(蓮池)에 머물렀다.
그들은 오직 불법을 위하여 몸을 잊고서
팔장(八藏)의 깊은 뜻을 탐구하였다.
아버지와 세속에 살면서 닦았던 덕을 그리워하며,
연등속불(燃燈續佛)의 마음으로 부처의 마음을 구하였다.
그들은 부처가 눈앞에 나타나는
경지인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얻고자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구품연대(九品蓮臺)를 늘 생각하였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이들이 노경에 들자
인근 고을의 도가 유생들에게 널리 알리고
산중의 승려들을 널리 불러
열반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이제껏 닦아왔던 방편의 문을 열고자 하였다.
소문을 듣고 검은 옷을 입은 승려와
흰옷을 입은 선비들이 줄을 이어 몰려들었다.
월명각씨(月明覺氏)는
온몸이 보랏빛 구름에 휩싸여 서천을 향해 날아갔고
등운조사(登雲祖師)는
결인한 손에 푸른 구슬을 떨치며 보배로운 게송을 물흐르듯 썼다.
覺破三生夢(삼생의 헛된 꿈을 문득 깨치고 보니)
身遊九品蓮(몸은 구품 연대에 노니노라)
風潛淸智海(욕심 바람 자고나니 맑은 지혜의 바다요)
月上冷秋天(밝은 달 떠오르니 가을 하늘 쇄락해라)
輦路盈仙樂(연도에는 신선의 음악이 가득하고)
瑤池駕法船(아름다운 연못엔 법선을 띄웠네)
般若三昧熟(반야삼매의 경지가 완숙하니)
極樂舟怡然(극락의 배가 즐거웁도다)
쓰기를 마치고 용모를 단정히 하고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열반에 드니
상서로운 빛은 방안에 가득하고 기이한 향기는
일년동안 계속 되었다.
인근의 사람들이 모두 칭찬을 하니
그의 공덕은 매우 깊기만 하였다.
그의 어머니 묘화부인은
백십세를 누렸는데 죽음에 임하여
온 집안을 내놓아 사원을 삼고
이름을 부설원(浮雪院)이라 하였다.
이어 산문의 큰스님들이
그 두 자녀의 이름을 따서
암자를 지어 지금까지
등운암(登雲庵)과 월명암(月明庵)으로 내려온다.
이 글은 “반야의 언덕을 넘어서”에
2004.05.29. 12:25 오후에 올려 놓았던 글입니다.
오늘 부설거사과 월명암이 떠올라 재차 올려 봅니다.
오늘 따끈따끈한 글을 이것으로 대신 해 보려합니다.
2022년 10월 17일 오전 08:38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雲月野人 진각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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