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3월 23일 월요일]
《 『환단고기』 [단군세기(檀君世紀)
五世 檀君 丘乙 在位十六年 》 (19)
五世 檀君 丘乙 在位十六年
壬戌元年 命築壇于太白山 遣使致祭
癸亥二年五月 蝗虫大作 遍滿田野 帝親巡田野 呑蝗而告三神 使滅之 數日盡滅
乙丑四年 始用甲子作曆
己巳八年 身毒人流漂 到東海濱
丁丑十六年 親幸藏唐京 封築三神壇 多植桓花 七月 帝南巡歷風流江到松壤 得疾尋崩 葬于大博山 牛加達門 被選於衆 入承大統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임술년 원년(B.C.2099)에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렸다
계해년 2년(B.C.2098) 5월에 메뚜기 떼가 크게 일어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단제가 친히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단제가 직접 메뚜기를 잡아 삼키고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을축년 4년(B.C.2096)에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기사년 8년(B.C. 2092)에 연독인(인도 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
정축년 16년(B.C.2084)에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여 삼신의 단을 만들고 많은 한화(桓花)를 심었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하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시니 대박산에 장사지냈다. 우가(牛加)인 달문(達門)이 무리들로부터 뽑혀서 대통을 계승하였다.
[논주] 5세 단군 구을은 단군왕검의 후손인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가 붕어하고, 양가(羊加 또는 鷄加)에서 나온 단군이다. 44년 후에 8세 단군이 된 우서한의 별명이 오사함(烏斯含)이므로 단군왕검의 아들이 없었다 하더라도 아우는 있었다. 그런데도 오가 중의 하나인 양가 출신이 단군이 된 것을 보면 오가의 힘이 단군왕검족을 압도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동북아 여러 나라는 해마다 황충 떼의 습격으로 많은 피해를 당했다. 구을단군이 직접 밭으로 가서 메뚜기를 잡아서 씹어먹은 것은 지도자다운 행동이다. 또한 이때에도 육십갑자법이 있었고, 그를 바탕으로 책력을 만들었으니 기본적인 문화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연독인(身: 몸 신, 나라이름 연 身獨人 인도사람이) 표류해온 기사를 보면 ‘到東海濱’이다. 이 동해가 지금의 동해일 수 없다. 인도에서 남해를 거쳐 동해까지 표류할 수 없다. 만주의 눈수-송화강-요하 유역이 단군조선의 영역이었으므로 이 동해는 발해만의 동쪽 바다이고 표류한 곳은 대련이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 ‘封築三神壇 多植桓花’에서 ‘환화’가 무슨 꽃인지에 대하여서 이유립은 진달래꽃이라고 했으나 무궁화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다. 환화가 ‘무궁화꽃’이란 말의 근거는 897년에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인 「사불허북국서상표」에서 신라의 국호를 '槿花鄕'(근화향)으로 지칭하여 국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한 직후부터라고 한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최치원이 신라를 '槿花鄕'(근화향)이라 부를 정도면 신라 시대에 무궁화에 대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됐다. 신라는 처음 국호가 진국(辰國)이었다. 북부여 공주 파소의 아들인 시조왕 박혁거세와 6촌민들은 고조선-북부여의 중심인 진국의 유민으로서 비록 머나먼 경주 땅에 와 살지만 옛 땅 눈강-송화강 유역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고조선-부여-진국의 국화(國花)였던 환화(桓花)-근화(槿花)-무궁화를 신라의 국화를 넘어 국명으로까지 인식하였다. 최치원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후손이다. 진국의 근원에 대한 생각이 깊었을 것이다.
이유립이 환화를 진달래꽃이라고 한 말은 진달래꽃이 너무 흔하기 때문에 국화로까지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또한 환(桓) 자는 푯말로 삼을 수 있는 크고 위엄이 있는 꽃나무를 의미한다. 나 개인으로서는 환화(桓花)가 함박꽃이 아닌가 한다. ‘환(桓)’은 ‘환하다’라는 말의 음차이다. 함박꽃은 환하게 밝은 꽃으로 순수와 평화를 상징한다. 또한 키 작은 진달래꽃나무나 가지가 많은 무궁화꽃나무보다 함박꽃나무 전체가 크고 위엄이 있다. 기원전 2000여 년 전 구을단군 시대에 신단 주위에 성스러운 꽃을 골라서 심을 정도면 우리 민족이 아득한 옛날부터 꽃을 좋아하고 아낀 사람들임이 확실하다. 그래서 2026년 현대에도 우리 민족 스스로 백의민족이라고 부르지 아니 하는가.
다음으로, 임승국은 『한단고기』의 각주에서 풍류강(風流江)을 평야 강동군 동북쪽의 비류강으로 비정하고, 송양(松壤)을 평양 강동군의 옛 이름이라고 하며, 대박산(大博山)을 북한에서 단군릉이 발견됐다고 말하는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있다고 한다. 세 곳의 지명 모두 평안도에 소재한다.
이 각주는 모두 일연이 『삼국유사』의 [고조선기]에서 지정한 범위 안이다. 즉 1908년 단군조선의 역사가 모두 평안도 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과 논리라면 단군조선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기사가 뒤죽박죽 엉망이 돼 버린다. 중국 등 다른 민족들과 겨루고 교류하고 소통한 1908년 동안의 모든 역사적 활동이 우물 안에서 맴도는 허구가 된다. 구을단군 시대부터의 고대사가 일연이 정한 범위 안이라면 조선이 망하고 일어난 북부여와 동명국, 동부여, 고구려 등 고대국가가 모두 평안도 지역이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 초기 유적들과 안시성, 요동성 등이 모두 만주에 있다. 그럼 파소 공주가 평안도 지역에서 탈출하여 동옥저로 갔다가 다시 배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갔단 말인가? 더 편한 율고를 놔두고 무엇하러 더 멀고 험한 길을 간단 말인가. 진국-신라인들이 그리워한 옛 땅이 고작 천 리밖에 안 되는 평안도란 말인가? 임승국의 이 각주는 단군조선 전체를 부정한 일연의 의도에 충실한 것으로서 이치와 사리에 안 맞는 각주가 아닐 수 없다. 북한에서 발견한 단군릉이 진짜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단군이 단군왕검은 아니고 평양 지역을 통치하던 비왕인 막조선의 어느 군장의 무덤일 수 있다.
그런데 재위 16년 한창으로 국토를 순행하던 구을단군이 송
양에서 갑자기 심한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기사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그다음의 ‘牛加達門 被
選於衆 入承大統’라는 후계 단군 승계 기사를 보면 의아한 점
이 있다.
앞의 5세 구을단군이 붕어하고 난 후에 후계자 선출 과정을 ‘被選於衆’이라 하여 ‘무리 중에서 뽑혔다“라고 한 것을 보면, 단군왕검의 직계를 제치고 오가(五加)가 서로 힘겨루기를 했고, 우가의 달문이 다섯 부족의 합의에 의해 6세 단군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추대‘나 ’옹립‘과 같은 일방적인 계승이 아니라 ’선(選)‘과 ”어중(於衆)이란 말을 보면, 무력을 동원한 치열한 전투가 아니라 다섯 부족의 대표가 모여 다수결로 단군을 선출한 것 같다. 또는 우가의 달문이 대중들을 모아놓고 은근히 강제하여 대중들이 뽑는 형식을 취했을 수도 있다. 승계 과정이 폭력이 아니라 비교적 평화적인 방법이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 ‘被選於衆’이란 구절 하나만을 보더라도 아득한 옛날 단군조선 시대에도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은 진실과 사실을 최대한 나타내는 문자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7 대 단군의 승계 과정을 보면, 태자(太子)면 태자로, 아들이면 아들로 표기하고, 태자나 아들이 아니면 그 승계 과정을 그대로 기록했다.
4세 구을단군의 승계가 무언가 원활하지 않았는데, 5세 달문단군의 승계도 원활하지 않다.
2026년 3월 23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개산팔경 박희용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