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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동지라는 딜레마
이영숙 (시인ㆍ문학평론가)
칼로 자른 듯 세계의 경계가 분명하다면 어떨까. 누가 봐도 선한 것은 선하고 악한 것은 악하고, 누가 봐도 깨끗한 것은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더러우며, 누가 봐도 고귀한 것은 고귀하고 비천한 것은 비천한 세계. 보편적 가치가 불문율로 자리하는 시대나 사회가 과거에는 비교적 자주 있지 않았었나 하는 회고는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지금보다는 그때가 나았었지 하는 가늠 역시 과거를 미화해서 반추하는 인간의 흔한 습성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난세에서조차 선함과 깨끗함, 고귀함이 더욱 빛을 발해 왔음을 예술이 증명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는 인간다움을 정신적 가치의 실현으로 보는 인간의 특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전쟁과 냉전 이데올로기의 격렬한 현장이었던 우리의 역사에서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가 위세를 떨치는 한편으로 상흔과 상처가 적과 동지를 떠나 인간 자신을 향하는 것처럼.
계곡은 같은 소리로 울지 않는다
봄이어도 겨울이었을 상처들에 대해
한 잎 베어 물다 던진 풋사과같이
산 색깔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고로쇠 젖을 빨면서 봄빛 스며들기까지
그들은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
나는 이쪽, 너는 저쪽
왼손 오른손을 구별한 건 하나님의 실수다
빛이 흩어 놓은 미끼를 문 계곡, 순교의 노을이
개처럼 짖을 때, 화톳불씨 같은 별은
타닥대지 않고 사그라졌다
계곡물에 손을 넣고 온기를 풀면 닫힌 입을 뗄까
파르티잔 봄은 얼음장 같아서
동사한 입이 바위처럼 단단하다
독사에 물린 계곡은 뇌사 상태
영문 몰라 정체된 울음에 대해
얼마만 한 값을 지불해야 해빙이 될지
봄 청군, 가을 홍군 사이로
소풍 즐기는 산새 움직임이 수상하다
계곡 이쪽과 저쪽 사이
철조망 같은 냉풍이 흐르는 뱀사골
아리랑 넘는 이,
누구인가.
―전선용, 「뱀사골에서」(《우리詩》 2022년 8월)
역사의 현장이 상징적 장소가 될 때는 시간의 경과보다 상황의 조력을 더 받는다. 이태의 『남부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이 지형지물까지 적나라하게 그려냈던 “뱀사골”은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되면서 잔류 “파르티잔”(조선인민유격대)과 그들을 추격하던 군경 합동 토벌대의 격전지가 되었다. 장소에 전쟁과 이념과 비극적 현실이 아로새겨진 것이다. 그리하여 “뱀사골”의 자연 사물은 70년의 세월을 흘려보내고도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여전히 공통의 감각을 안겨준다. 굽이굽이 울음을 품지 않은 곳이 없고(“계곡은 같은 소리로 울지 않는다”), 봄이 와도 여전히 겨울인 “상처들”을 간직한 채 “산 색깔은 문드러지고 있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전원 ‘소탕’되었지만, “고로쇠 젖을 빨면서” 숨어지냈던 “파르티잔 봄”은 오고 또 오고,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그들의 “동사한 입”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바위”에 오버랩 된다. 물론 토벌대의 죽음도 없지 않았겠지만, 시인이 “파르티잔”에 주목하는 것은 “계곡 이쪽과 저쪽 사이”를 부는 바람조차 “철조망 같은 냉풍”인 세상에서 단지 “나는 이쪽, 너는 저쪽”에 속했을 뿐인 우연으로 인해 동족에 의해 사냥당하듯 죽어간 인간의 비애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왼손 오른손을 구별한 건 하나님의 실수”라고 에두르면서 좌파 인간과 우파 인간이 본디는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기 위한 것 말이다.
적과 동지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정치적인 장소를 적과 동지를 넘어서는 비정치적인 장소로 보는 것이 「뱀사골에서」라면, 다음부터는 비정치를 정치의 장으로 끊임없이 소환하는 인간에 관한 시다.
진정한 적은 내 안에 있다……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왜냐하면 그건 신비로운 말일 뿐만 아니라
바보 같은 말이기 때문에
한때는 바보처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아니다. 그 새끼는
인간도 아니야.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것만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고 말한 파시스트가 있었지.
그이는 진정한 철학자였어.
오늘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림자를 생산하고
어제를 생산하고 또 사악한
적을
나는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림자처럼 나를 미행하는 분이시여, 등 뒤의 악령이시여, 나의 아름다운
피조물이시여.
당신이 나에게 삶의 의미를 준다.
나에게 의욕을 준다.
나를 재구성한다.
당신이 그러하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창밖의 하늘을 보아요. 불안정한 대기와 함께 다가오는
구름에 가까운
저 전체주의적 크리처들을
눈앞에 보이는 것을 향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를 때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라고 야훼는 말씀하셨지.
우리가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우리를 바라보듯이
친구여, 우리는 피를 흘리며
헤어집시다. 먼 곳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기로 해요. 언젠가는 간결한
부고를 전해주어요.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심연에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이장욱, 「적」(《창작과비평》 2022년 여름)
이 시는 세 개의 명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바로는 첫째, “진정한 적은 내 안에 있다……”를 감상주의로 보면서(“그건 신비로운 말일 뿐만 아니라/ 바보 같은 말”) 시인은 적이 외부에서 생성된다(“바보처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새끼는/ 인간도 아니야.”)고 했다. 둘째,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것만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설파한 “파시스트”를 “진정한 철학자”로 추앙하면서 내게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사악한/ 적을” 생산하는 일에서 나와 우리가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때 “등 뒤의 악령”이며, “나의 아름다운/ 피조물”인 “적”은 죄 없는 피의자(“당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가 되지만, “적”을 마구 양산한 “나”를 비롯한 “우리”는 “전체주의적 크리처”가 되어 “눈앞에 보이는 것을 향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른다. 셋째,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라는 “야훼”의 “말씀”을 반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우리를 바라보듯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고 있는 “우리”는 “심연”에 비추어 서로 부끄러운 존재가 된다. “헤어집시다. ……/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심연에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라는 다짐은 그래서 실현 불가능하다. “적”인 “당신이 나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현실에서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심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는 다시 첫 번째의 명제로 회귀한다. 우리는 외부의 무수한 적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볼 때만 보인다. 이로써 시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는데 첫째 명제는 그러므로 감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적과 동지를 나누지 않으면 정치적인 것이 아니게 되는 둘째 명제는 그러므로 철학이 된다. 이런 겹층의 의미를 시인은 세 가지 명제의 문장 말미에 각각 ‘……’(말없음표)로 제시하였다.
우리는 서로를 동지라 불렀지요
이제는 웃음이 나오는 말
배가 고프면 밥그릇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보며 침묵하고
소금으로 약속의 날을 점쳐보고
풀과 벌레 울음소리로 하루를 살았죠
이제 우리는 배부른 돼지
서로를 적이라 부르죠
웃으며 악수하고
죽어간 동지를 떠올리며 고기를 먹고
사냥해온 물건들을 꺼내놓으며
어제의 굶주림에 대해 자랑을 하죠
서랍 속의 낡은 편지를 뜯어보며
가끔 눈물을 흘리고
죽어간 동지들의 유산을 내 것이라 믿고
자신을 속이기 위해 더 크게 소리치죠
내일 또 빼앗아야 할 물건들과
빼앗기지 말아야 할 탐욕으로
어제와 오늘의 시간들을 죽이며 술잔을 들죠
―김성규, 「동지」(《PoemPeople》 2022 여름 창간호)
우연이지만, 이장욱의 「적」에 대한 답가 같은 시가 김성규의 「동지」다. 동지는 어떻게 적이 되는가, 진정한 적은 누구인가, 더 나아가 동지라는 대상은 왜 “이제는 웃음이 나오는 말”이 되었는가. “배부른 돼지”가 그 답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살아 있는 옛 “동지”를 “적”으로 매도해야 “죽어간 동지들”이 남긴 “유산”을 “내 것”으로 독차지할 수 있으며, “내일 또 빼앗아야 할 물건들과/ 빼앗기지 말아야 할 탐욕”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표상하던 신념의 연대(“배가 고프면”, “소금으로”, “풀과 벌레 울음소리로 하루를 살았죠”)가 사라지고 “배부른 돼지”를 추앙하는 자본의 연대가 횡행하면서 “적”과 “동지”의 개념도 달라졌다. 보편적 가치가 사라진 곳에 각자도생의 분투가 자리 잡았다. 이제 과거의 “동지”와 현재의 동료는 “적”이 되었고, 오로지 나만이 나의 진정한 “동지”가 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지속 불가능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우리의 허약한 현재를 담보하고 있다. ‘나’와 유비 관계에 있는 세계 차원에서도 인류애보다 국익을 앞세워 과거의 동맹이 오늘의 적이 되는 사례가 목도되곤 하지 않던가. 가치를 창출하는 비정치는 저물고, 정치는 “적”을 만들어 부를 창출한다.
광장에서는 민주시민이었다가
집에서는 독재로 살았던 날들을 후회한다.
거리에서는 자유 시민이었다가
교실에서는 권위를 내세운 교사였던 날들을 부정한다.
술집에서는 좌파였다가
시장에서는 우파였던 일상을 질책한다.
머리로는 페미니스트였다가
몸으로는 가부장으로 살아온 세월이 부끄럽다.
글에서는 경계 없는 세계를 피력하면서
생활에서는 사소한 차이에도
편견과 증오를 품어온 시간을 부인한다.
내면의 민주화, 일상의 민주화 없이는
언제든 우리는 괴물이 될 수 있다.
파쇼와 싸우는 동안
파쇼의 유산을 물려받은 나를 부정한다.
―이재무, 「고백」(《실천문학》 2022년 여름호)
그러므로 “언제든 우리는 괴물이 될 수 있”는 존재로 진화하였다. 표면(“광장”, “거리”)과 이면(“집”, “교실”), 피상(“술집”)과 실상(“시장”)에서의 삶의 태도가 다르고, 관념(“머리”)과 실체(“몸”)는 괴리되었으며, 그로 인해 “글에서는 경계 없는 세계를 피력하면서도/ 생활에서는 사소한 차이에도 편견과 증오를 품어온” 이중성을 내면화하게 된 것이다. “파쇼와 싸우는 동안/ 파쇼의 유산을 물려받은 나”는 “서랍 속의 낡은 편지를 뜯어보며/ 가끔 눈물을 흘리”(「고백」)는 것으로 셀프-정화된다. 한 몸으로 두 마음을 살고, 장소와 상황, 대상에 따라 정체성을 달리하는 야누스. “인간은 대립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헤겔)고 했을 때, “후회”와 “부정”, “질책”과 “부인”이 우리의 내면을 향하는 것은 불의의 근원이 개인에게 전가되었음을 시사한다. 세계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믿음은 사소해지고 개인의 세계화는 진행 중이다. 곧 민주화의 퇴행이다. 과연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여전히 필요충분조건일까. 나아가 “내면의 민주화, 일상의 민주화”를 향한 연대는 가능할까.
풀꽃들이 아우성이다
실은, 비정규직인 그녀들이 아우성이다
여장으로 보이는 알바생 그남들이 아우성이다
실은, 아우성이 아우성이다
언젠가 역 광장에 늘어져 누운 아우성에게
맥주 서너 병과 구운 오징어를 사 들고 다가가
아우성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물론 예의는 아니었다
아우성은 비밀, 아우성은 내 것, 아우성은 홀로
아우성은 울음과 다르다
그에게 목욕과 공장의 일자리를 제안했지만
피식 웃는 아우성으로 무질렀다
동냥으로 일을 대신하는 아우성을 몰래 고변하여
시립요양원에 들어갔지만 금방 탈출하였다
아우성은 강한 개인들이라고 믿지만
풀들은 뿌리로 흙을 움켜쥐고서 만약에
뽑히면 뿌리째 흙과 함께 들린다
하늘을 뒤집어 털지 않으면 털리지 않는다
자유는 그런 자유이고, 아우성은 그런 아우성이다
남의 눈으로 보이고 흔드는 엉덩이나 키보드로 드러나는 게
아니다 결국은 딸에게 보내는
아비의 말이 그런 것이다
떨리는 심장이 심장을 만들고
흐르는 눈물이 눈물을 만든다 아우성으로
아우성을 말하는 건 언제나
젊은이를 앞세워 젊은이를 지우는
늙은 노인들의 아우성일 뿐이다
아무리 크고 오래된 풀밭에서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고 얻어먹지 않고
아침부터 다시 아침까지 잎으로 뿌리로
밟혀서 기역자로 꺾인 허리로도
자신의 자유를 자유로 지키는 것이다
―박관서,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푸른사상》 2022년 여름호)
이제 정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만 작동한다. 민생을 국시로 내거는 현실 정치에서 먹고사는 일의 즉자적 상황이 민주화라는 대자적 가치를 대놓고 소거한다. 민중은 먹고사는 일에서도, 민주주의라는 가상의 제도에서도 이중으로 소외된다. 거리로 내몰린 “비정규직인 그녀들”, “여장으로 보이는 알바생 그남들”의 “아우성”은 정규직 전환이나 시급 인상 따위의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는 것일 뿐, 노동자에 대한 예의나 존중을 요구하는 인간 고유의 기본권과는 관계가 없다. 어쩌다 그 요구가 받아들여졌을 때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편입된 그들은 “아우성”의 현장을 버린 채 부르주아를 꿈꾸는 등 사회적 신분 상승에 매진할 가능성도 있다. 그들을 대신하는 또 다른 값싼 노동력이 그 자리를 메꾸면서 하부구조의 수요와 공급은 원활하게 작동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게 이런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자면, 제도로부터 어떤 혜택도, 어떤 시혜도 거부하는 노숙자들이 진정한 자유인일 수 있다. 시스템 밖에서 시스템을 조롱(“목욕과 공장의 일자리를 제안했지만/ 피식 웃는 아우성으로 무질”르는)할 수 있는 자유가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자유는 우리의 삶 자체를 바꾸지 못한다. “아우성은 강한 개인들”이긴 하지만, “뿌리로 흙을 움켜쥐고서 만약에/ 뽑히면 뿌리째 흙과 함께 들”리는 뿌리로부터의 혁명은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적”과 “동지”라는 용어와 의미는 누더기가 되었다가 폐기된 듯하다. 연대와 투쟁의 현장을 그린 위 시에서도 그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 것은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는 딜레마에 시인이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치 불모의 이 시대, 여름이라는 한 계절에 “적”과 “동지”를 성찰한 최소 다섯 편의 시가 발표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다가온다. 인간다움이라는 정신적 가치의 실현을 탐구하고 회복하기 위해 시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내지르는 “아우성”, 혹은 집단지성이 반성적 어조로 발휘된 어떤 화두인 것만 같다.
―《우리詩》,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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