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풍남동3가 102)
063-281-2790
운영시간 : [하절기 3월~10월] 09:00-19:00 / [동절기 11월~2월] 09:00-18:00
관람요금 : 어른 3,000원 / 청소년, 군인 2,000원 / 어린이 1,000원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오후2시쯤 전주 경기전에서 전북투어패스 24시간 사용을 시작했다.
경기전 가는 길에 꽃들이 너무 이쁘게 피어 있어서...
전주 경기전 앞에 하마비가 자리하고 있다.
하마비는 누구든지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적혀 있는 비석으로
조선시대에 궁궐, 종묘, 문묘, 향교 등의 문앞에 세웠다.
경기전 하마비는 광해군 6년(1614)에 경기전을 고쳐 지을 때 처음 세웠고,
철종 7년(1856)에 고쳐서 다시 세웠다.
비석의 앞면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라고 적혀 있다.
하마비는 일반적으로 사각의 받침돌과 비석 몸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경기전 하마비는 사자(혹은 해치) 암수 두 마리가 직사각형 받침돌에 세운 비석 몸체를 등으로 더받치고 있는
보기 드문 형태이며, 말에서 내리도록 안내하는 기능뿐 아니라 경기전을 수호하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건국자의 초상이며, 경기전 또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지방의 진전이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 진전(眞殿)은 어진을 봉안한 궁전을 일컫는다.
조선은 건국 후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한 것이다.
경기전 경내에는 진전 동편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가 있고,
구이 태실마을에서 옮겨온 예종대황 태실이 있다.
경기전 북편에는 전주이씨 시조를 모신 조경묘가 있으며, 그 옆으로 태조 어진과 경기전의 역사를 담은 어진박물관이 있다.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39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전주 경기전(全州 慶基殿)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외신문, 내신문, 정전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어진을 모신 전주 경기전 정전(全州 慶基殿 正殿)은 조선시대 1410년(태종 10) 창건하고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하였으며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었다.
정전은 정청과 정자각, 익랑, 월랑으로 이루어졌다.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일자집이며,
어칸 전면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첨각이 덧대어져 능침의 정자각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전의 좌우에는 2칸의 익랑과 4칸의 월랑이 마당을 위요하여 제례를 위한 엄숙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정전은 감실을 마련하여 어진을 봉안하고 제례를 지내는 공간이다.
정전 내부에는 바닥전을 깔고 제상(祭床)을 비롯한 각종 산선(繖扇)과 청개(靑蓋), 홍개(紅蓋) 등의 의장물을 진열하였다.
감실은 ‘침실(寢室)’ 또는 ‘어방(御房)’으로도 불리는데 1칸을 앞뒤로 나누어 중앙에 어진을 봉안하고
뒷공간은 물품을 수장할 수 있도록 했다.
어진 뒤에는 오봉병이 있고 앞에는 비단으로 휘장을 쳤다.
1872년(고종 9)에 어진을 새롭게 모사해 모시면서 침실의 바닥을 온돌에서 마루로 고쳤다.
경기전과 준원전의 온돌을 영희전과 같이 마루로 바꾸라는 고종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전 앞에 덧대어 있는 1칸의 첨각(정자각)은 의례시 제사에 바칠 술을 따르는 준소(樽所)가 설치되며
집례자가 서 있는 곳으로 활용된다.
경기전 정전의 건축형식은 정전과 익랑, 월랑으로 구성되어 있고,
외신문, 내신문, 정전으로 이어지는 정전 일곽의 배치형식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진전도’와 일치하고 있어
조선 초기의 진전제도를 잘 따르고 있다.
다만 정전의 모습이 능침의 침전처럼 정자각 형식이어서 진전도와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태조진전인 준원전과 목청전의 정전 모습도 경기전과 같은 형식이어서
후대에 이와 같은 정자각 형식의 정전이 일반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전 정전은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어진을 봉안한 진전건물이라는 기능과
그에 걸맞는 엄격한 격식과 품위를 갖추고 있다.
중건 후 여러 차례의 수리 등이 있었으나 공포의 세부적 수법과 구조는 17세기 초 중건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특히 외신문, 내신문, 정전으로 이어지는 배치형식과 정전과 익랑, 월랑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구성은
『국조오례의』의 ‘진전도’와 일치하고 있어 조선 초 태조진전의 건축적 구성을 볼 수 있다.
또한 진전도와 비교해 볼 때 정전의 형식이 전면에 첨각이 부설되어 정자각 형태로 변화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이다.
정전의 한가운데 감실을 두고 여기에 태조어진을 모셔놓고 있다.
청룡포를 입고 있는 전신상 어진으로 건국자의 위엄이 서려 있다.
1872년(고종 9)에 새로 모사한 어진이며, 구본은 초상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항아리에 담아 진전 북쪽에 묻었다.
태조어진을 봉안한 감실 안에는 습기와 냄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기 위해
부용향을 담은 붉은색의 향주머니를 넣어 두었다.
감실 앞쪽에 어진을 호위하는 운검 한 쌍을 세워주었으며, 정전 좌우편으로는 용선, 봉선, 홍개, 청개 등 의장물을 배치하였다.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 원본은 어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제 전주사고 쪽으로 이동한다.
전주사고 가는 길에 누워있는 매화나무를 발견했다.
수령이 100년 안팎으로 추정되는 매화나무로 모양이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해서 '와룡매'로 불린다.
전주사고(全州史庫)는 1439년(세종 21) 사헌부의 건의로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던 경기전 안에 설치되었다.
처음에 실록들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다가,
1445년 12월 서울 춘추관, 충주·전주·성주 사고에 각 1부씩 봉안하게 했다.
따라서 세종실록부터 편찬할 때마다 주자로 인쇄하여 각 사고에 1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모두 병화로 불타고 4대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았는데,
이는 안의(1529~1596)·손홍록(1537~1610)의 공이 컸다.
안의와 손홍록은 전북 정읍시 태인의 선비로 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문을 듣고,
곧 전주로 달려와 실록과 태조영정을 수호하던 경기전 참봉 오희길 등과 상의해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 804권과 태조영정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다.
다음해 7월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무사들이 번갈아가며 지켰다.
조정에서 사관을 내장산에 파견해 실록과 영정을 해주·강화도·묘향산으로 옮겼다가,
1603년 7월부터 다시 출판하여 전주사고의 실록원본과 교정본 및 새로 출판한 3부를 합해 5부를
서울 춘추관과 마니산·태백산·묘향산·오대산에 사고를 지어 봉안했는데, 전주사고의 실록원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기초적 사료이며, 우리나라 인쇄문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로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조선의 역대실록은 왕이 승하한 후에 만들어졌다.
실록편찬은 사관들이 시정기, 사초, 승정원일기 같은 기록들을 모으는 일에서 시작된다.
사관들은 그 자료를 기초로 초초(初草)를 작성, 이를 검토해 중초(中草)를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쇄대본이 되는 정초(正草)를 완성한다.
실록이 완성되면 실록편찬에 사용된 모든 자료는 기밀방지를 위해 세초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표지.크기가 다른 이유
조선전기에 제작된 실록은 모두 감색 비단을 이용하여 표지를 제작하엿으며 크기는 왕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크기는 중종실록이다.
현존하는 실록을 보면 동일한 크기인데 표지의 재질이 다른 것은
조선후기에 표지만 다시 제작해 묶었기 대문이며 내지는 조선전기의 전주사고본 실록이다.
전주사고 포쇄형지안(曝曬形止案)
포쇄형지안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588년 9월 1일 전주사고의 실록을 포쇄한 후 봉안한 실태를 기록한 책이다.
임진왜란 직전의 실록 보존 상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조선왕조실록 포쇄 포쇄(曝曬)는 책이 습기와 해충에 손상되는 것을 막고자 바람과 햇볕에 말리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봄이나 가을의 맑은 날을 택해 바람을 쐬고 햇볕에 말리는 실록 포쇄를 3년 혹은 5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했다.
포쇄는 한양에서 사관(史官)이 파견돼 매우 엄격하게 진행됐는데,
실록 포쇄 형지안에는 누가, 몇 명이 참여했는지, 어떤 과정으로 진행했는지 등 절차를 자세히 기록하도록 했다.
전주이씨 시조(始祖)인 이한(李翰)과 그 부인(婦人)의 위패(位牌)를 모셔둔 조경묘(肇慶廟)가 있는 곳이다.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은 태조의 21대조로서
신라 사공(司公: 사공은 현직위에 비한다면 건설부 장관에 해당하는 벼슬이다)이었다.
시조비始祖妃)는 경주 김씨로 신라 태종 10세손인 군윤 김은의의 딸이다.
영조 47년에 조경묘는 건립되었다.
전주 경기전은 많은 관람객들이 찾는 곳이지만 워낙 넓고 볼 곳이 많아서인지 그리 북적거리지는 않는다.
조경묘 왼쪽편으로 가면 어진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아쉽지만 어진박물관은 닫혀 있었다.
태조어진을 봉안한 국내 유일의 어진박물관
조신시대 임금의 초상화 6점(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도 전시되어 있다.
실감나는 뭘 준비 중인 것 같은데... 못봐서 아쉽다.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나무의 모습도 신기하고...
전북투어패스를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면 엄청난 비용절감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우선 이렇게 오후 점심식사를 하고나서 시작하면 중간에 식사시간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어서 일정을 짜기에 좋다.
제주투어패스나 경북투어패스를 사용해봐서 알게 된 사실은 24시간 48시간 72시간 이런 시간들이 입장시간 기준인 것이다.
24시간 이용권도 관람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을 마지막 시간에 맞춰 입장하면 26시간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 지역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장점도 있다.
경북투어패스를 할 때 경주에서 주로 사용하지만 포항에서도 사용하고 영천에서도 사용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전북투어패스도 전주에서만 사용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그래서 내일 일정을 고려해서 전주 한옥마을에서만 사용할 넉넉한 시간을 맞춰 오후2시 전북투어패스를 시작한 것이다.
우선 전주 경기전을 시작으로 루이엘모자박물관, 전주난장, 감영75카페, 완판본 문화관, 전북관광기념물100선판매관,
전주 디지털독립영화관으로 첫날 일정을 잡았고...
다음날 전주자연생태관, 전주 동물원, 한국도로공사 전주수목원 카페아르보, 김제 휘게팜, 김제 지평선시네마
이렇게 일정을 잡았다.
제주투어패스는 한곳에서 사용하면 1시간 후에 다른 곳 사용이 가능한데
경북투어패스나 전북투어패스에서는 시간 제한이 없다. 그래서 가까운 곳을 묶어서 사용하면 좋다.
여행 날씨 운이 조금 좋은 편이다.
날이 좋아서 아무데나 앉아서 쉴 수 있고 두 손이 자유로워서 좋고 개방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비가오면 실내를 찾아서 이동해야 하고... 불편하고...
하지만 또 막상 여행할 때 비가오면 또 그런대로 썩 색다른 괜찮은 경험을 하게되는건 사실이다.
그냥 여행이 좋은거지 뭐...
이제 다음 방문지인 루이엘모자박물관으로 이동한다.
전주 경기전을 나와 돌담길을 따라 얼마 걷지 않아서 만나게 된 250년 수령의 보호수 은행나무...
경기전 담장이 이 은행나무를 만나 돌아서 가는... 이래야 전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