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나기 위해 죽는 4월
함석헌
금년은 서울을 비롯해서 곳곳에서 부활절을 성대히 지켰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의미 있는 일입니다.
물론 20만, 30만 모이는 그 사람들이 다 분명한 생각을 가졌을 수는 없고, 또 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의 전체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이나 행동만 아니라 그 생각까지도 간섭을 하겠다고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압박, 구속, 매수, 모략을 일삼는 이 정치 밑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 방향으로 질서 있게 움직였다는 것은 큰일입니다. 알고 하는 것만이 큰일 아닙니다. 잠재의식(潜在意識)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훌륭한 데모입니다. 듣는 말에 서울시는 여러 가지로 편의를 도모해서 5·16 광장의 새벽 모임을 하게 해주었다 합니다만, 사실은 그것은 제 손으로 제게 대한 데모를 도와준 것입니다. 물론 부활절 예배는 정치 데모는 아닙니다. 그보다도 그것은 생명의 데모입니다. 이 세상에 여러 인종, 여러 군대가 있다합니다마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두 인종 두 군대가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군대와 사망의 군대입니다. 그것이 쉴새 없이 가는 곳마다에서 일마다에서 싸우는 것이 세계 역사입니다. 그 역사적 싸움에서 악독한 저 정부는 사망의 군대의 한 부대에 속해 있고 씨알은 생명의 군대에 속해 있습니다. 악은 꾀입니다. 꾀는 제 꾀에 속고 제 꾀로 망합니다. 부활절 예배를 도와줄 때 그것이 씨알을 노예로 잡아두는 정책에 도움이 될 줄 알고 했겠지만, 이긴 것은 사망의 세력이 아니고 생명의 세력입니다. 꾀는 늘 이기지만 이김으로써 결국 망하고 참은 늘 속지만 속음으로 영원히 이깁니다.
서울시나 그 뒤에 서는 정부가 몰라서, 어리석어서 제 무덤을 파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아끼지 않고 평가교수(評價敎授)를 몇백명씩 길러 두는 정부가 어리석을리가 없습니다. 잘 알면서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에 넘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지혜 아닙니다. 대지(大智)는 무지(無智)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그저 믿기만 하는, 믿는 줄도 모르게 믿는, 씨알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속습니다. 그러나 속기 때문에 이깁니다. 이김으로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짐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작은 이김은 이김으로 이기지만, 큰 이김은 짐으로써 이깁니다. 그래서 기지(其知)는 가급(可及)이나 기우(其愚)는 불가급(不可及)이라, 그 지혜는 따를 수가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으로 이긴 실례를 들랍니까? 정치한다는 놈들이 백성은 알지도 못하게 조약으로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팔리어 일본 군대의 손에 넘어갔으면서도, 농사하라는 대로 농사하고, 세금 바치라는 대로 바치고, 북만주로 가면 산다고 실어 보내는 대로 갔으니 어리석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속였던 일본군은 망했는데, 우리 씨알은 살았습니다. 왜요? 씨알답게 일본을 보는 것 아니라 하늘을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는 꾀로 그 일본의 꾀를 이겨보려 한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재주를 부려 일본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세력도 가지고 돈도 모아보려 했던 무리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 일본과 함께 다 망했습니다. 몸이 다 죽었단 말 아닙니다.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을수록 그것은 심판이요 영겁의 벌입니다. 민족의 대열에 설 수 없고, 역사의 행진에서 쫓겨났고, 인생의 행로에서까지 헤매는 자가 돼버렸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방 이후 우리는 얼마나 속았습니까? 그러나 씨알을 속인 정치가는 다 망했습니다. 그런데 속은 씨알은 살았고 이겼습니다. 이기고 또 이길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십시오. 씨알을 속이고 그것으로 이득을 보려 했던 꾀의 정치가 아닌 정치가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망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다 망해서 씨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씨알의 마음속에서 쫓겨난 곳이 지옥이요, 허망입니다. 그리고 아직 망하지 않고 기승을 부리는 듯이 뵈는 것들이 있지만 틀림없이 그 길을 가고 말 것입니다. 비폭력 투쟁이란 어리석음으로 하는 투쟁입니다. 투쟁 아닌 투쟁입니다. 인류의 앞에 서서 그 길을 누구보다도 더 분명히 보여준 간디는 그 싸움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기를 제 신발에 묻은 티끌보다도 더하게 하는 겸손자가 아니고 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꾀나 수단 책략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리석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꾀가 모자랄까봐 걱정이 아니라 너무 꾀를 쓸까봐 걱정입니다.
꽃망울이 트는 것은 봄이 왔기 때문입니다. 봄이 오지 않고는, 온실에서 하는 하나 둘을 내놓고는, 억만 꽃망울이 일시에 틀수는 없습니다. 봄이 올 줄 알고 달력을 보고 트는 것이 아닙니다. 봄바람에 저도 모르게 틉니다.
부활절 예배에 새벽길을 달리는 씨알도 저도 모르게 이미 죽은 가운데서 일어남을 어느 정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일만이 아닙니다. 기독교거나 아니거나 간에 다 같이 느끼는 역사의 부활절입니다. 그러기에 남산으로 여의도로 나갔습니다. 일제시대에 그런 일 없었습니다. 가슴속에 무엇이 일어난 것을 느낀 무리만이 광장으로 나갑니다. 가슴속이 아닙니다. 혼 속이지요. 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가슴에 느껴지지도 않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잠재의식적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본래 잠재의식적입니다. 사람은 근본에서 심리적인 존재입니다. 아는 것,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손에 건성으로 떠서 노는 신문은 이따금 지축(地軸)을 흔드는 사람이니, 역사를 만들어 내는 회합이니 하는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지축은 그렇게 흔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해서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다. 물론 사람의 일인 이상 사람의 생각이나 재주 없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역사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거기 초인간적인 것이 들어가서만 됩니다. 그 초인간적인 것이 악마적인 것이겠나 하나님적인 것이겠나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하여간 역사는 인간의 일이면서도 인간만의 일, 지식만으로 되는 일, 생각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인간이 상의 것이 결정합니다. 인간의 역사를 전에는 신화적으로 풀이했고, 근래는 경제적인 동기로 해석을 하려는 경향이 강했는데, 요새 와서 차차 심리적으로 보려 하는 경향이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인위적(人爲的)인 중에서도 가장 인위적인 전쟁조차도 그 깊은 동기는 잠재의식적인 심리에 있다는 학설이 일어나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잠재의식적인 것이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마 천백만 년의 진화과정이 관계돼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거룩한 하나님적인 것으로 작용하느냐 사악한 악마적인 것으로 작용하느냐, 말을 바꾸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느냐, 악마의 종이 되느냐는 그 믿는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 가장 두렵고 불행한 일은 정치권을 쥐는 사람이 스스로 제힘, 제 생각을 하나님 자리에 놓고 일을 하게 되는 일입니다. 똑똑할수록, 자부심이 있을수록, 의지가 강할수록 걱정 입니다. 그것을 이기는 것은 오직 절대 무사(無私)한 하나님을 믿어 철저히 어리석어지는 씨알뿐입니다.
종교라기보다도 실천 도덕을 중요하게 여겨 가르쳤던 공자가 민가사유지(民可使由之)요 불가사지지(不可使知之)라고 했던 것은 깊이 생각해볼 만한 일입니다. 흔히 이것은 우민정책이라 해서 비난하지만 그것은 공자의 깊은 뜻을 모르는 말입니다. 나라 하는데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 물었을 때 족식(足食: 먹을 것이 넉넉함), 족병(足兵: 군비를 튼튼히 함), 민신지 (民信之: 백성의 믿음)의 셋을 말했고, 부득이해 그중에서 버리고 나중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다시 물었을 때에 백성의 믿음이라고 했던 공자가 결코 국민을 그저 짐승처럼 부려먹을 생각으로, 영원한 노예로 두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유지(由之)라, 말미암는가하는 말은 그저 동물처럼 몰리고 끌려다니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절대의지의 시킴대로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나 꾀로 하는 것보다 더 어질고 더 확실한 것입니다. 정말 어진 지혜, 정말 힘있는 능력은 욕망을 근거로 하는 지식 감정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내리는 계시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데모를 하는 것은 이미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보다 더 힘있는 부활을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몇십만이 하나 된 행동을 하는데 불평, 불만 없이 될 리가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정치적 불만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았기에 정치 데모로 신경과민이 된 정부도 응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 하는데 중요한 것이 군비보다도 밥보다도 믿는데 더 있다고 하는 인간의 일이라면 정말 참 불평은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적 불평, 분노가 근본동기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지렁이에서부터 인간으로 곤두세웠고, 그 죽음을 디디고 곤두 일어서지 않고는 못 견디어하는 그 초의식적인 의지가 그들을 몰아 진화의 앞장에 서게 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부끄럼이요, 죄악인 전쟁도 그 근본 동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씨알은 불평을 가진 씨알입니다. 노한 씨알입니다. 정권에 대한 불평 아닙니다. 악에 대한 불평이요, 사망에 대한 노여움입니다. 물결이 노하는 것 아니라 바다가 노해서 물결이 일듯이, 바람이 불어서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수평(水平)을 지키기 때문에 울부짖음이 일어나듯이, 민중의 노함과 불평은 결코 대통령 자리나 저금통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 보다 큰 것이 씨알입니다. 씨알은 소유도 없고 지위도 없기 때문에 우주 전체가 그들의 소유요, 역사의 주인 자리가 그들의 지위입니다.
지난해 이래 씨알은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대기를 상당히 깊이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에서는 목마름이 곧 마심이요, 마심이 곧 목마름 입니다. 물이 바다에 가고야 말듯이, 아니, 거기에서도 만족 못해 정말 물의 근원인 하늘로 올라가고야 말듯이, 자유를 마신 마음은 절대의 자유에 가기 전은 안심할 수가 없고, 정의를 맛본 가슴은 절대 정의에 이르기 전엔 평화를 가질 수 없습니다. 부활절 예배는 그 목마름의 한 아우성입니다. 자유를 좀더! 정의를 좀더! 평화를 좀더!
현대의 인간처럼 비겁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본시 그런 것 아닙니다. 거이기(居移氣)라고, 그 환경이 그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현실주의의 잘못된 철학 속에 나서 몇백년을 온 인간은 사람이 본시 그렇게 비겁하고 무기력한 줄로 알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인종이었지, 사망의 인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죽을 몸을 쓰고 있으면서도 죽지 않는데 이르려고, 생명의 근본에 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인간 역사의 알짬은 여기 있습니다. 역사는 결국 생명과 사망의 싸움입니다. 사망에 대한 생명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 악에 대한 선의 싸움입니다. 인격의 본질은 도덕적인데 있습니다. 감정의 목적은 좋고 언짢고를 가리는데만 있는 것 아니라 선과 악을 가리는데 있습니다. 심판권을 가진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사람은 죽는 것으로,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으로, 그러기 때문에 죽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아버리게 됐습니다. 이것은 패배주의입니다. 사망에 대해 흰기를 들어버린 인간입니다. 이것은 문명의 발달 때문에 온 잘못입니다. 문명 그 자체가 잘못이랄 것은 없습니다. 될수록 고통을 덜고 쾌적하게 살아보잔 것이 잘못이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해 찾다가 그만 생명 대도(大道)에서 떨어져 곁길로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본래 모습을 알고 사망의 무리가 돼버렸습니다. 마치 인도 전설에 나오는 호랑이새끼 같습니다. 오랫동안 호랑이는 못 보고 염생이 떼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저도 염생인 줄 알고 염생이 흉내를 내어, 염생이도 호랑이도 아닌 괴물이 돼버렸습니다. 그와 같이 스스로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사망의 노예노릇을 하는 현대의 자칭 문명인은 사람도 아니요 짐승도 아닌 사이비 인간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알고 종교를 가지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종교 없는 예술, 종교 없는 문학, 종교 없는 철학, 종교 없는 정치를 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레닌 스탈린이 나오고 뭇솔리니 히틀러가 나온 것입니다. 사망의 인간을 휘몰아가는 데에 가장 알맞은 것은 전체주의, 독재주의 경찰국가일 것입니다. 지금 어느 문명국가도 다 그렇습니다만 특히 우리같이 이른바 후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후진이 무엇입니까? 후진(後進)은 후진(後塵)입니다. 약육강식의 문명에서 남이 먹고 내버리는 쓰레기를 뒤집어쓴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계의 시대악이 여기서 더 악질적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헤매는 탕자에게 아버지가 찾아오는 날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의 지나간 한 해는 생명의 아버지가 사망의 포로수용소 안에 우리를 찾아오신 날입니다. 비상조치 1호,4호, 군사재판 등등으로 우리는 지친 잠 속에서 놀라 깨듯이 생명의 아버지의 호통을 들었습니다. “이 자식아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냐?” 그리고 우리는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걸음으로 역사의 흐름으로 끌려갔고, 거기 비치는 우리 얼굴이 아버지 호랑이와 같은 것을 보고 놀랐으며 그가 억지로 입에 틀어막는 선지피 뚝뚝 흐르는 고깃덩이를 첨에는 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고 씹어보다가 그 생명 핏물이 우리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담에 우리는 이상하게도 흐르는짓눌려 있던 무엇이 복받치는 것 같아 소리를 지르고 보니 그것이 우리 귀르는똑똑히 “유신헌법 철폐하라!” “구속자 석방하라!” “언론은 자유다!” “신앙은 자유다!”였습니다. 그럴 때 우리 가슴흐르는 말이 들렸습니다. “됐다! 이제부터는,를 지자식아,를나하고 같이 저 태산준령을 달리며 사냥을 하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살아남을 체험했고 이기고 또 이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제 다시 물러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권세는 우리를 결코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석방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채 앉기도 전에 도로 잡아넣겠다 위협을 하고 교수 학생의 복교를 막기 위해 대학총장들의 사퇴를 요구하고, 고문 사실의 진상조사를 하러 온 엠네스티 대표와 미 국회의원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관광여행이라면서 강제로 연행해 갔습니다. 또『동아일보』의 용감한 기자들이 자유언론의 실천을 선언하고 나서자 그것을 막으려고 갖은 악랄한 수단을 다 쓰고 있습니다.『동아일보』가 한번 그렇게 포문을 열자 우리는 두손을 모으고 이것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 감사기도를 드렸으며, 길가의 가난한 노동자들까지도 그 주머니 구석을 털어서 응원을 했습니다. 우리만 아니라 실로 온 세계가 감격해 떠들고 응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하려고 회사와 기자들 사이를 이간시켜 종래 3월 17일 새벽 어리석은 경영주들로 하여금 기자들을 길가에 내쫓게 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군자는 참을 찾는 사람이기에 그럴 듯이 말하는 데는 속아 넘어갈 수가 있지만(可欺以方) 소인은 남을 해해서 이익을 얻자는 것들이므로 그 속을 능히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입니다. 씨알이 군자요, 벼슬아치는 소인입니다. 헌법을 날치기로 고쳐서 세계의 정의와 진리의 동지들이 만나는 길을 막아놀 때 차마 인간 양심으로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분개도 하고 그런 것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고 있는 우리 자신이 가엾어 슬퍼도 했지만, 차마 못하는(不忍人之心) 마음의 마지막 한 조각도 없는 듯한 그들에게서 또 무엇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요? 씨알 여러분, “다시 사셨네!”를 부르며 새벽하늘에 5·16 광장을 두루 밟았던 씨알 여러분,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참이 길이요 생명이 길입니다. 살자는 것, 스스로 살았다 믿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믿으면 삽니다. 믿지 않으면 이미 죽었습니다. 참을 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거짓을 하면 벌써 진 것입니다.
참에는 꾀가 없습니다. 믿음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고 참을 지키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직(愚直)입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이 죽음과 그 지혜를 이깁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죽음의 임금이 그 종들을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 그 종들도 본시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우리와 꼭 같이 호랑이 넋을 가졌습니다. 자유를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환란이 올 때에 그것을 어느 사람의 일로 알고 사람의 꾀와 힘으로 이겨보려다가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데 역우리도 이 같은 꾀에 빠져서는 아니됩니다. 사망의 임금은 간사합니다. 간사한 것은 그 밑에 흉악을 품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는 행복을 약속하고 상급을 잘 줍니다. 그는 역사를 왜곡할 줄도 알고 성현의 말을 도둑질해 양의 가죽을 쓸 줄도 압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죽음과 그 잡아먹고 남은 사람의 뼈가 있습니다.
생명의 임금은 반대로 직설적입니다.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믿으면 믿어집니다. 우리는 본시 믿으려하는 본성입니다.
이 나라는 망합니다. 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대로 바른 사람을 죽여왔고 그 때문에 나라가 망했었는데, 이제 다행히 다시 일어선 이때에도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있으니 망해 마땅합니다. 잘못된 경치 비판한다고 젊은 학도를 잡아 옥에 던지고 없는 죄를 만들어 씌우기 위해 갖은 악형을 다하며, 천하가 다 신용하는 기독교 신자들을 공산주의자라 하고 내란 음모했다고 몰아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한다고 흉계를 꾸며 신문을 없애려 하고, 양심을 양심대로 지키려 한다고 독사보다 더한 갈보를 시켜 학도의 허리를 물어 끊게 합니다.
이런 나라는 어서 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나라로 부활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지 않으면 아니되고, 죽으려면 먼저 부활을 체험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지금은 부활의 4월입니다.
씨알은 죽지 않습니다! 죽을 수 없습니다! 시인 브라우닝의 말을 빌어
이 글의 끝을 맺습니다. “우리 태양은 다시 올라오기 위해 넘어간다.”
My sun sets to rise again!
씨알의 소리 1975. 4 42호
전작집; 8- 267
전집; 8-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