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신윤복의 혜원전신첩(간송미술관 소장)중 정변야화(井邊夜話)~>
정변야화(井邊夜話)는 '야밤에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다'라는 뜻이다.
막 머리에 똬리를 얹고 물독을 이고 떠나려 하던 참에 두레박줄을 잡고 있는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타났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오른쪽 여인이 턱을 고이고 고민에 빠졌다.
배경 바위산 가운데가 뭔가 내리 꽃이는 형상이니 여인의 심리적 충격이 제법 크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고민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그 고민의 진원지는 당연히 뒤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는 양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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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면주사, 칼을 품은 백면검객이 당신을 찾더구먼.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거야.”
죽령 고갯마루 주막에서 탁배기를 마시던 나이 지긋한 갓장수 영감이 국밥을 먹고 나가려던 경면주사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귀띔을 해줬다.
“어디서요?”
“닷새 전 옹천장에서.”
경면주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것이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니다.
한달 전쯤, 양양에서 붓장수한테도 칼을 품은 젊은이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사족을 못 폈는데, 또다시 그 말을 들으니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가 없었다.
단양으로 잡은 발길을 봉화로 돌렸다.
내성천 나루터 주막에 밤늦게 들어가 국밥을 먹고 코가 삐뚤어지도록 탁배기를 마셨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죽음과 바꿀 죄는 그것뿐이야!
그렇다면 류 대감이 보낸 자객인가?’
깜박 잠이 든 경면주사는 등에 칼을 맞고 엉금엉금 기다가 꼬꾸라지는 악몽을 꾸었다.
“으악~.”
잠에서 깨니 가위에 눌린 채로 온몸이 식은땀에 젖었다.
그는 먼 산에 부엉이 소리만 음산하게 들리는 칠흑 같은 밤, 객방 벽에 기대앉아 살아온 삼십년을 되씹어보며 한숨을 토했다.
고향 제천, 의림지가 내려다보이는 남향 큰 기와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다.
허나 아버지가 병사하고 어머니는 개가, 할머니 손에 자라다 열다섯에 소과에 합격해 대과를 눈앞에 두고 잡힐 듯 잡힐 듯 여덟번이나 낙방하고 말았다.
할머니도 저승으로 가자 산더미 같은 책을 아궁이에 처박아 한줌 재로 날려버렸다.
경면주사(鏡面朱砂)!
팔도강산을 떠돌던 그는 제물포에서 청나라 상인을 만나 차고 있던 자신의 호박(琥珀) 쌈지와 말로만 듣던 경면주사 작은 병을 바꿨다.
어려서부터 명필소리를 들었던 터라 대갓집에 들어가 수은에 붉은 경면주사 가루를 타서 비단 폭에 대주가 원하는 문장을 일필휘지로 갈겨주고는 엄청난 돈을 받았다.
여기저기 떠돌지만 장돌뱅이들과는 다르다.
여름이면 세모시 두루마기, 겨울이면 비단도포에 큰 갓을 쓰고 붓과 경면주사 병을 전대 속에 넣고 다녀 단봇짐 하나 없다.
권송이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건만 모든 사람들은 그를 경면주사라 부른다.
칠년 전, 그는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정유년 사월 초닷새, 풍산 류대감댁에서 말에서 떨어져 죽은 아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명복문을 경면주사로 써주고 나오다가 두발이 땅에 붙어버렸다.
소복을 입은 그 여인은 사람인가 선녀인가.
류대감의 청상과부 며느리 얼굴이 그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상사병으로 이어졌다.
경면주사는 영주·풍기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닷새 만에 류대감댁에 들러
“나으리, 제가 옥동곳을 어디에 흘려버려 혹시나 해서….”
“우리 집에서는 못 봤네.”
그렇게 선녀 같은 청상과부를 또 보고 안동·의성을 서성이다 저절로 발걸음이 풍산으로 가 류대감댁 주위를 돌았다.
그러다 천둥번개를 만나 상엿집에 몸을 피했다.
오월 스무하루!
꿈에도 그리던 여인이 흠뻑 비에 젖어 상엿집에 들어와 옷을 벗었으니!
경면주사는 그녀를 겁탈하고 밖으로 나와 열두어 걸음 솔숲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녀와 매부리코 영감이 옥신각신하다가 손이 미끄러져 영감 목에 은장도가 꽂혀 꼬꾸라지고 그녀는 기절했다.
경면주사는 솔숲에서 나와 기절한 그녀를 상엿집에 눕혀놓고 죽은 영감은 흙탕 계곡물에 던져서 떠내려 보냈다.
칠년전의 그 일을 하루도 되새겨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를 죽이려는 그 자객은 누구인가?
류 대감이 보낸 건가?
그녀가 보낸 건가?
아니면 매부리코 영감의 아들이 살부지수를 찾아나선 건가?
상엿집 사건 후, 경면주사는 풍산 근처에도 가지 않아 호실댁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지내왔다.
눈이 온 천지를 하얗게 덮더니 밤이 되자 언제 눈이 왔느냐는 듯 초승달이 비수처럼 감나무 가지에 걸렸다.
도담삼봉 주막 구석진 객방에 홀로 앉아 자작술을 마시고 있는데 주모가 문을 두드렸다.
“누가 찾아왔구먼요.”
경면주사는 ‘들창을 박차고 튀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온몸에 경련이 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등에 장검을 매고 패랭이를 눌러 쓴 백면검객이 성큼 들어섰다.
그가 패랭이를 벗고 머리를 풀었다.
“호실댁!”
경면주사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서방님, 절 받으시오.”
“여기 호실댁 은장도가 있소.
살인누명을 쓸까봐 내가 가져갔소.”
두사람은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칠년 전 천둥번개가 치던 상엿집에서 소첩이 서방님의 씨를 받았지요.
봉양 이모집에서 잘 크고 있습니다.”
호실댁이 경면주사를 빤히 보더니
“빼다 꽂았습니다.”
울고 웃다가 일합을 치르고 발가벗은 호실댁을 팔베개로 끌어안고 한손으로는 엉덩이를 잡은 채
“왜 남장을 하고 칼을 차고 다녔소?”
“남정네들에게 변을 당하지 않으려구요.”
“나는 도망 다니느라 혼쭐이 났소.”
두사람은 웃다가 또 일합을 치렀다.
“이게 꿈은 아니지요?”
“나를 꼬집어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