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cafe-editor-text"><p class="cafe-editor-text"><2020.09.24.연중25주간 목요일 강론>
<루카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신약은 구약 예언의 완성입니다.
구약의 예언이란 다름아닌 구세주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예언자들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인 것이지요.
하느님이 말씀은 진리이기에 비켜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루카9,8)고 말하는데, 이는 구약의 예언인 말라3,23의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의 예언에 따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마태17,10; 마르9,11 참조)
유다교의 한 전통에서는 말라3,23을 바탕으로 엘리야를 메시아의 선구자로 봅니다. 그가 백성을 일치와 충성으로 한데 모아 메시아가 오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태17,12-23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이미 자기 백성에게 왔지만 그들에게 배척을 받은 엘리야로 소개합니다. 이제 같은 운명이 예수님과 그분의 선구자를 한데 묶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저질렀고 또 계속 저지르는 배척에 관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실 신약의 당시 유다인 사회에는 운명론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연 재해, 실명, 신체의 마비 등과 같은 것들을 전부 하느님의 형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나병 환자들을 부정한 자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격리시켰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세리, 죄인, 창녀들은 저주받은 팔자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게 했지요. 함께 밥을 먹는 것도 금기시하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전통은 세리, 죄인, 창녀들 자신들의 ‘자아상’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끝장난 인생’, ‘저주 받은 운명’, ‘지옥에 떨어질 죄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7)
첨단과학의 시대라고 하는 21세기를 사는 한국인 역시 이러한 운명론이 지배적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 사회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38)/
첫째, ‘불확실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우리는 원칙이 통하지 않고, 변화가 잦은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국인이 점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 불안정한 사회현실 때문입니다.
둘째, ‘쏟아지는 정보 속, 선택의 문제’입니다.
점보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은 낯모르는 역술인에게서 들은 내용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문화가 다원화하고 사회가 복잡해 지면서 생존경쟁이 더욱 치열해짐에 따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권위가 점차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속전속결(速戰速決)주의 코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빠른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현실이 아닌 내세에서의 행복을 보장하는 다른 종교에 비해, 점은 그 자리에서 바로 예언을 들을 수 있기에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넷째, ‘운명론(숙명론)에 대한 믿음’입니다.
사회가 아무리 다변화하더라도 우리 문화의 기본 바탕에는 동양적인 사상이 내재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동양적인 운명 사상을 믿는 것은 한국인이 점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고민을 나눌 상대의 부재(不在)’다.
어떤 학자는, 현대사회에서 인정받는 종교인, 가톨릭 신부나 불교 고승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과 역술인에게 돈을 주고 점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심리를 같은 선상에 놓기도 합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지위의 높고 낮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점 한번 안 보는 것이 점 한번 보는 것보다 더 힘든 현실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39)/
그러나 과연 이것만이 우리의 최선책일까요? 그 대답은 물론 노(No!)입니다.(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0)
원래 이 팔자(八字)라는 말은 사주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주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해 명을 예측하는 일종의 학(學)입니다, 이는 ‘한 사람이 태어난 연(年), 월(月), 일(日), 시(時)의 4개의 기둥(四柱)에 각각 두 자로 된 간지를 붙여 만든 여덟 글자(八字)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일생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요지로 하고 있습니다.(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38)
또한 동양의 시간관은 원으로 봅니다. 원은 시작과 끝이 없지요. 지금 이 시간은 과거의 어느 시간이었다는 것이지요. 끊임없이 반복되지요.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요한묵시록1,8)라고 하셨듯이, 그리스도교적인 시간은 직선입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쩌면 용수철과 같다고 할까요? 그래서 한 번도 맞이해보지 않은 시간이기에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고,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최선을 다해야하는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정해진 운명이며 지옥에 떨어질 죄인으로 여겼던 그들이 예수님를 만나서 대변신을 하게 됩니다. 창녀였으며 일곱 마귀가 들었던 마리아 막달레나도 당당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자의식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부활의 첫 번째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를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운명에서 행복한 인생의 주인공으로 변화하는 대반전을 체험하였습니다. 나병 환자가 치유되었고, 악령들린 자들이 풀려났고, 절름발이가 걷게 되었고, 벙어리가 말하게 되었고, 12년간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낫게 되었고, 그 밖에도 신나는 일들이 도처에서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대반전 드라마는 2000년 전의 박제된 사건이 아니라,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6)
어떻게 이러한 반전드라마를 우리의 삶에서 이어갈 수 있을까요?
1.성서 안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1)기도: 매일 미사책 10번 읽기, 묵상하며 예수님께 질문 또는 대화하기, 30초~1분 침묵하기.
2)정화: 생활 안에서 성서에서 만났던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대화하기.
2.매순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됩니다. 그리고 지나간 일은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1)운명이란 개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이유는, 운명이란 시간 속에 있고, 이 시간은 직선의 시간이기에 반복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얼마든지 내 자아상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듯이, 나의 운명을 내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성숙한 삶을 살면 됩니다.
그런데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은 정신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현실을 직면하고, 느끼고, 실행하는 행동은 때로는 고통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인내하고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활력이 넘치는 삶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는 수조에 갇힌 피라니아처럼 자신의 능력과 본분을 망각한 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내 머리로는 감당 못할 것 같은데.’ 이러한 말로 자신을 학습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수조 속 피라니아로 살 것인가, 자유로운 강물 속 피라니아로 살 것인가’는 나의 선택이요, 그 선택의 결과에 따른 나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그 책임을 갖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은 다름아닌 사랑의 책임입니다.
2)지나간 일 즉, 기억들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지성으로 예수성심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믿고, 내 기억으로 떠올려서 마음으로 내려놓고 주님과 일치하려는 소망으로, 의지로는 수억 수천도의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사랑자체이신 예수성심을 향해서 기억을 던집니다. 그리고 나서 내 자신도 그 안에 사라져 무아의 상태가 됩니다. 그래야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그림을 내 심상에 예수님께서 그리실 수 있습니다.
3.자아 이미지를 만듭니다.
자아 이미지 심리학의 선구자 프레스코트 레키(Prescott Lecky) 박사는 개인의 자아 이미지가 그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실험으로 입증하였습니다.
단어 시험에서 100개 중 55개의 철자가 틀려서 여러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던 학생이 다음 해에는 평균 91점을 받아 교내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 되었습니다. 학점이 나빠 학교를 그만둔 한 여학생은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전 과목 A학점을 받는 우등생이 되었던 것이지요. 시험 당국으로부터 영어를 구사할 능력이 없다고 통보를 받았던 한 소년은 다음해 문학상 시상식에서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그 학생들의 성적이 나쁜 것은 그들이 아둔하거나 기본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부적절한 자아 이미지였습니다. 그들은 우연히 시험 성적이 나쁘게 나온 사실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나는 수학적인 개념이 없어요.” “나는 천성적으로 철자에 약해요.”
한마디로 그들은 점수와 실패를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그저 “시험에 떨어졌어요”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실패자입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과목에서 낙제했어요”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낙제생이에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맥스웰 몰츠, ‘성공의 법칙’ 참조).
이렇듯이 사람은 스스로 그려놓은 자아 이미지에 따라서 반응합니다.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해닙니다.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하지 못합니다.(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3-44)
4.‘나는 운이 좋다’고 말합니다
일본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신입사원 면접 때에 반드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이에 대한 답변을 들은 후, “운이 좋았습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전부 채용했다고 합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우수’한 것보다 ‘운’을 더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나는 운이 좋습니다”라고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심층의식에는 “내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야”라고 하는 주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밑바탕에 감사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당장은 우수하게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좋은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실 “예, 운이 좋았습니다”라고 바로 그 자리에서 대답해서 채용된 사람들이 과장이 될 무렵에는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 힘입어 마스시타의 황금기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운 좋다고 생각’하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남과 똑같은 상황에서도 남보다 더 많이 감사할 줄 압니다.(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5)/
5.어떤 목표로 살 것인지 정하고 도전하십시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희아(1985~)는 두 손을 다 합쳐 손가락이 네 개이고, 무릎 아래로 다리가 없는 선천성 사지 기형의 1급 장애우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열 손가락이 다 있는 사람이 치기도 힘들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감미롭게 연주하며 국내외 장애,비장애인 모두에게 온몸으로 희망을 전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연필이라도 쥘 수 있게 하려는 부모의 바람으로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그녀 자신조차도 피아니스트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피아노 가르치던 한 선생님은 “이 아이는 피아니스트가 될 자질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월간 ‘참 소중한 당신’ 2005년 9월호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건 하느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어렸을 대부터 틈나는 대로 성경 비디오를 보여주며 함께 복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한 피아노를 치기 힘들어도 바로 그 피아노 연주를 자기의 길,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고통을 이겨내길 바랐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그녀는 어딜 가나 항상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걸 믿었고, 굳은 신앙과 피나는 노력으로 꿈을 현실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녀는 진정 신앙으로 팔자를 고친 이 시대의 아름다운 피아니스트입니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6-47)/
<Luke9,7-9>
7 Herod the tetrarch heard about all that was happening, and he was greatly perplexed because some were saying, "John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8 others were saying, "Elijah has appeared"; still others, "One of the ancient prophets has arisen."
9 But Herod said, "John I beheaded. Who then is this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kept trying to see him.
—//—
<책 소개>
2.팔자(八字)는 없다
팔자(八字) 이야기
그 말이 머리에서 뱅뱅 돌아요
필자가 청주에 강의를 갔을 때,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어느 분이 상담을 요청하였다. 일자리를 못찾고 놀고 있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하도 답답하여 처음으로 점술집을 찾아가 아들 사주팔자를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점쟁이가 하는 말이 아들 사주가 아주 안 좋다는 거예요. 하는 일마다 꼬이고 안 된대요.”
“그랬는데요?”
“그래서 제가 무슨 방법이 없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100만원만 가져오면 액운을 없애고 운이 트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거예요.”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36)/
“그래서 100만원을 갔다 줬나요?”
“집에 와서 생각하니까 그건 아닌 것 같아서 고해성사를 보고 정신차렸죠 뭐. 근데요 그 다음이 문제예요.”
“뭐가 문젠데요?”
“그 점쟁이가 해 준 말이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아들 사주가 아주 안 좋다’는 말이 머리에서 뱅뱅 돌아요.”
필자는 바로 그거다 싶었다. 사주팔자가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내 사주가 그렇다던데’ 하는 생각이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 자매를 위로하며 단단히 일러 주었다.
“자매님, 바로 그 안 좋다는 생각이 자매님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쳐서 자매님을 팔자의 굴레로 얽어매는 거예요.”
가치없고 거짓된 예언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으로 남아서 우리를 속박한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의 선천적인 운명이 좋다고 하면 교만해지고, 나쁘다거 하면 낙심하기 쉬운 법이다. 그리고 교만이나 낙심,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좋지 않다.
팔자타령
우리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팔자타령을 한다. 그 밑바탕에는 ‘사람은 팔자대로 살아간다”는 운명론이 짙게 깔려 있다.
팔자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속담은 무엇일까? 아마도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속담 아닐까? 이는 놀고 있는 개가 부럽다는 뜻으로 자신이 분주하고 고생스러울 때 쓰는 말이다.
심히 그 뜻이 무서운 속담도 있다. ‘팔자는 독에 들어가서도 못 피한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37)/
다.’ ‘이 도망 저 도망 다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 등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 속에는 다른 것은 몰라도 팔자는 어떤 방법을 써도 피하지 못한다는 체념이 깔려 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속담도 있다. ‘뒤로 오는 호랑이는 속여도 앞으로 오는 팔자는 못 속인다’ 라는 말이다. 이는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 마음대로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속담이다.
이렇듯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속담들 속에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팔자’를 만나 왔으며, 그만큼 일상에서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팔자에 얽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첨단 시대의 아이러니, ‘미래예측산업’
원래 이 팔자(八字)라는 말은 사주에서 나온 것이다. 사주는 음양오행설에 개초해 명을 예측하는 일종의 학(學)이다, 이는 ‘한 사람이 태어난 연(年), 월(月), 일(日), 시(時)의 4개의 기둥(四柱)에 각각 두 자로 된 간지를 붙여 만든 여덟 글자(八字)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일생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요지로 하고 있다.
문제는 지난 날 미신으로 여겨왔던 사주풀이를 비롯한 점술문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정보통신기술이라는 ‘새 옷’을 입고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는 점술에 열광하는가?
첨단과학의 시대라고 하는 21세기에 대체 무엇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점을 보러 가게하는 것일까?
여러 사회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38)/
첫째, ‘불확실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다.
우리는 원칙이 통하지 않고, 변화가 잦은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한국인이 점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 불안정한 사회현실 때문이다.
둘째, ‘쏟아지는 정보 속, 선택의 문제’다.
점보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은 낯모르는 역술인에게서 들은 내용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문화가 다원화하고 사회가 복잡해 지면서 생존경쟁이 더욱 치열해짐에 따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권위가 점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셋째, ‘속전속결(速戰速決)주의 코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빠른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실이 아닌 내세에서의 행복을 보장하는 다른 종교에 비해, 점은 그 자리에서 바로 예언을 들을 수 있기에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넷째, ‘운명론(숙명론)에 대한 믿음’이다.
사회가 아무리 다변화하더라도 우리 문화의 기본 바탕에는 동양적인 사상이 내재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동양적인 운명 사상을 믿는 것은 란국인이 점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마지막으로, ‘고민을 나눌 상대의 부재(不在)’다.
어떤 학자는, 현대사회에서 인정받는 종교인, 가톨릭 신부나 불교 고승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과 역술인에게 돈을 주고 점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심리를 같은 선상에 놓기도 한다.
이러한 요인들이 지위의 높고 낮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점 한번 안 보는 것이 점 한번 보는 것보다 더 힘든 현실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39)/
그러나 과연 이것만이 우리의 최선책일까? 그 대답은 물론 노(No!)이다.
팔자에 대한 직착이 팔자가 된다
과연 팔자라는게 있는가?
과연 팔자라는 게 있는가? 이 물음과 관련하여 리이위(李一宇)가 쓴 ‘세치 혀가 백만 군사보다 강하다’라는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아주 영험한 도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는데, 어느 날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수재 세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누가 과거에 합격될지 알고 싶어 도사에게 뜻을 밝힌 후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도사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그들에게 손가락 하나를 내밀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도사는 먼지 떨이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보세요, 그때 가면 자연히 알게 될 거요. 이것은 천기라서 누설할 수가 없습니다.”
세 명의 수재는 궁금했으나 그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수재가 돌아간 후에 시종이 호기심에 차서 물으니 이미 밝혔다고 말했다. 시종이 다시 물었다.
“그럼, 스승님께서 손가락 하나를 내민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한 명이 합견된단 말입니까?”
“그러니라.”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0)/
“그들 가운데 둘이 합견된다면요?”
“그럼, 하나가 합격되지 못한다는 뜻이니라.”
“그들 셋이 모두 합격되면 어떻게 하죠?”
“그때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합격된다는 뜻이니라.”
시종은 그때서야 깨닫고 나서 말했다.
“이것이 바로 ‘천기’였군요.”
사주팔자를 불신하는 시각은 조선시대 일화에도 드러난다.
성종(成宗)은 자신과 사주가 똑같은 과부가 성 안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 과부를 불러들여 살아온 인생역정을 물어보았다. 과부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 성종이 세자로 책봉되던 해에 이 여인은 어머니와 사별했고 성종이 임금으로 등극하던 해에 이 여인은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다. 따라서 성종은 자신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있던 해마다 이 여인에게는 불행한 일이 겹쳐서 지금은 밥을 빌어먹고 있는 처지임을 확인하고는 ‘못 믿을 건 사주로다’하며 개탄하였다고 한다.
피라니아의 비극
우리는 흔히 운명론에 굴복하여 체념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내 팔자이며 내 운명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난 벗어날 수가 없어!”
과연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맞는가? 이에 대해 올바른 답을 얻기 위하여 피라니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1)/
남아메리카의 강에 사는 육식어 피라니아를 수조에 넣고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고 한다. 피라니아가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수조 한쪽 끝으로 몰렸을 때, 수조의 한가운데를 투명한 유리판으로 막는다. 먹이를 먹고 반대쪽으로 헤엄처 가려던 피라니아는 끊임없이 돌진하지만 번번이 고통만을 얻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차츰 환경에 적응하게 되고, 유리판을 향해 돌진하기를 멈춘다.
몇 주일 후 유리판을 치워버려도 피라니아는 예전처럼 자유롭게 헤엄치려 하지 않는다. 수조 가운데쯤 가다가 자진해서 되돌아올 뿐이다. 만약 그들이 말을 할 줄 안다면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여기가 끝이야, 나는 여기서 더 갈 수 없어!”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2)/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수조에 갇힌 피라니아처럼 자신의 능력과 본분을 망각한 채 살아갈 때가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내 머리로는 감당 못할 것 같은데.’ 이러한 말로 자신을 학습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수조 속 피라니아로 살 것인가, 자유로운 강물 속 피라니아로 살 것인가.
자아상이 바뀌면 팔자도 바뀐다
성공과 실패는 자아 이미지에 달려 있다
자아 이미지 심리학의 선구자 프레스코트 레키(Prescott Lecky) 박사는 개인의 자아 이미지가 그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실험으로 입증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이 어떤 과목을 학습하는 데 애를 먹는 경우, 그것은 그 과목을 배우는 데 자신을 일치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을 펼쳤다. 그는 만일 학생들이 자아 이미지를 변화시키도록 유도할 수 있다면 학습 능력 또한 크게 향상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 입증되었다. 단어 시험에서 100개 중 55개의 철자가 틀려서 여러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던 학생이 다음 해에는 평균 91점을 받아 교내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 되었다. 학점이 나빠 학교를 그만둔 한 여학생은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전 과목 A학점을 받는 우등생이 되었다. 시험 당국으로부터 영어를 구사할 능력이 없다고 통보를 받았던 한 소년은 다음해 문학상 시상식에(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3)/
서 표창장을 받았다.
그 학생들의 성적이 나쁜 것은 그들이 아둔하거나 기본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부적절한 자아 이미지였다. 그들은 우연히 시험 성적이 나쁘게 나온 사실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나는 수학적인 개념이 없어요.”
“나는 천성적으로 철자에 약해요.”
한마디로 그들은 점수와 실패를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저 “시험에 떨어졌어요”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실패자입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과목에서 낙제했어요”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낙제생이에요”라고 말했던 것이다(맥스웰 몰츠, ‘성공의 법칙’ 참조).
이렇듯이 사람은 스스로 그려놓은 자아 이미지에 따라서 반응한다.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해낸다.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하지 못한다.
‘나는 운이 좋다’고 말하라
일본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신입사원 면접 때에 반드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이에 대한 답변을 들은 후, 그들 중 “아니요, 운이 좋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은 채용하지 않고, “운이 좋았습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전부 채용했다고 한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우수’한 것보다 ‘운’을 더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담은 바로 “나는 운이 좋습니다”라고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심층의식에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심층에는 “내 힘만으로(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4)/
된 것이 아니야”라고 하는 주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반드시 있다고 한다.
밑바탕에 감사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당장은 우수하게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좋은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예, 운이 좋았습니다”라고 바로 그 자리에서 대답해서 채용된 사람들이 과장이 될 무렵에는 그들의 뛰어난 능력에 힘입어 마스시타의 황금기에 돌입했다고 한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늘 감사하는 태도로 사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찾아오는 반면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늘 불평을 일삼는 태도로 사는 사람에게는 불운이 찾아온다.
성공한 사람들은 흔히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나는 상사를 잘 만났어. 나를 믿고 일을 맡겼거든. 정말 운이 좋았어.”
“부하 직원이 참 유능했어. 열심히 도와준 덕분에 목표를 달성했으니까. 운이 좋았어.”
자신을 ‘운 좋다고 생각’하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들은 남과 똑같은 상황에서도 남보다 더 많이 감사할 줄 안다.
세리, 죄인, 창녀들의 대반전
필자는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로 세리, 죄인, 창녀들의 반전을 곱는다. 당시 유다인 사회에는 운명론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자연 재해, 실명, 신체의 마비 등과 같은 것들을 전부 하느님의 형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나병 환자들을 부정한 자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격리시켰다. 그들의 눈에 세리, 죄인, 창녀들은 저주받은 팔자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게 했다. 함께 밥을 먹는 것도 금기시하였다.
이제 이러한 전통은 세리, 죄인, 창녀들 자신들의 ‘자아상’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들은 스스로를 ‘끝장난 인생’, ‘저주 받은 운명’, ‘지옥에 떨어질 죄인’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만나서 대변신을 하게 되었다. 당당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자의식을 회복하게 되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운명에서 행복한 인생의 주인공으로 변화하는 대반전을 체험하였다. 나병 환자가 치유되었고, 악령들린 자들이 풀려났고, 절름발이가 걷게 되었고, 벙어리가 말하게 되었고, 12년간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낫게 되었고, 그 밖에도 신나는 일들이 도처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대반전 드라마는 2000년 전의 박제된 사건이 아니라,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희아(1985~)는 두 손을 다 합쳐 손가락이 네 개이고, 무릎 아래로 다리가 없는 선천성 사지 기형의 1급 장애우이다. 그러나 그녀는 열 손가락이 다 있는 사람이 치기도 힘들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감미롭게 연주하며 국내외 장애,비장애인 모두에게 온몸으로 희망을 전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그녀는 연필이라도 쥘 수 있게 하려는 부모의 바람으로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그녀 자신조차도 피아니스트가 되리라고는 생(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6)/
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월간 ‘참 소중한 당신’ 2005년 9월호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건 하느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어렸을 대부터 틈나는 대로 성경 비디오를 보여주며 함께 복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또한 피아노를 치기 힘들어도 바로 그 피아노 연주를 자기의 길,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고통을 이겨내길 바랐다고 말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그녀는 어딜 가나 항상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걸 믿었고, 굳은 신앙과 피나는 노력으로 꿈을 현실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진정 신앙으로 팔자를 고친 이 시대의 아름다운 피아니스트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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