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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중용 제 6 강 中과 和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그랬죠.
계시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
계는 경계한다는 것이고 신은 근신한다 그말이죠.
십계명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경계하라 그말인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십계명은 여기 없고 남들이 보지 않는데서 계신할줄 알아야돼. 성서에도 예수님 말씀에도 비슷한 말슴이 있거든.
남들이 들리지 않는데서 여러분들이 남들이 듣는다. 그래서 이런 척하고 이러면 안되는거지.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은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결국은 왜 서양에서는 하나님이 너희를 굽어 보신다 그러면은 그것도 상당히 효율적으로 계신 공구의 방법이 될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것은 하나님이 밖에 계시지만 여기서는 도눈 나의 몸 그자체 누가 본다 안본다 그래서 공구하고 계신할 대상이 아니라 그말이요.
* 계신과 공구는 타자에 의해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도덕적 주체 스스로의 활동이다.
庸-0102/2 是故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시고로 군자는 계신호기소부도하며 공구호기소불문이니라
이러므로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바에도 계신(戒愼)(경계하고 삼가다)하며 그 들리지 않는 바에도 공구(恐懼)(두려워하다)하는 것이다.
庸-0103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막현호은이며 막현호미니 고로 군자는 신기독야니라(‘견’자를 ‘현’자로 읽습니다. 즉 ‘나타나다, 드러나다’의 의미)
은(隱)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미(微)보다 나타남이 없으니(숨겨진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작은 것 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
우리가 은미하다는 말이 여기서 나오거든요. 숨어있는 것처럼 잘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처럼 잘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니깐 은미한 것이 은미한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고 미세한 것이야 말로 이것이야 말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다.그러기 때문에 인간존재가 살아가면서 가장 힘써야 할 것은 그래서 군자는 홀로 있음을 삼가야 한다.
* 여기서 말하는 주제는 은미한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므로 인간은 은미한 상태에서 오히려 수신을 잘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정신
사회학자 막스 베버 1864-1920가 지음 .1904-5년에 출판. 여기서 동양사람들은 신독이 없다고 하였다.
항상 面子 즉 체면만 차리고 밖으로 보이기 위해서 미국인들이 미국에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프로테스탄트 에틱(프로테스탄트 윤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자기 삶의 직업을 vocation(직업이라는 의미와 소명 god's calling 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하나님의 소명이다
그래서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은 현세에서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항상 죽어서 천당에서 보상을 받느느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세에서는 엔조이를 안하고 미래를 위해서 금은보화를 하늘에 쌓으라 하잖아. 거기는 좀도둘고 없도 좀도 안먹는 저 하늘나라에 쌓아두라 했는데 뭐냐면 이것은 기독교 인들은 현세적 복락을 거부하고 하늘나라를 항상 기대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들은 미국에 가서 그런 삶의 자세로서 이렇게 임했기 때문에 낭비를 않하고 자본이 축적되어 갔다 그런얘기거든. 현세를 거부하니까
그런데 동양인들은 아주 현세지향적이고 현세긍정적이고 돈이 좀생기면 만나서 술먹고 놀고 기생잔치벌리고 이러면서 주지육림에서 이태백이처럼 가나다라 이러면서 사니간 현세에서 돈을 벌면 다 써버린다 이말이야. 그래서 자본이 축적 안된 것 아니냐.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태 6;20)
* 프로테스탄트들은 현세적 복락을 거부하고 내세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현세적소염(직업)은 자본의 축적으로 연결되었다.
* 자본주의의 발생을 정신사적으로 규명하는 박스 베베의 발상은 매우 나이브한 것이다. 자본의 축적은 프로테스탄트윤리보다 식민지개척으로 인한 금은 유통의 급증이나 디타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분석디는 것이 정당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자본주의가 안나오고 유독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을 보면 대개 프로테스탄트들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라느느것이 막스베버의 전제인데 이건 사실 개똥같은 논리죠.
* 최근세 비서구문명권에서 유교문명이 지배한 나라들 한국,중국,일본,대만,싱가포르에서 유독 자본주의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베버의 이론은 상식 이하의 논설이다.
* 베버는 동양사상의 내면적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말했다. 실질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예절이나 체면만이 존중되고 욕망되었다.
이 것은 그럴듯한데 자본주의를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허망한 논리죠.
동양사람들이 체면만 차리고 현세적인 복락을 위해서 산사람들이라고 하느 것은 천만의 말씀이 올씨다. 동양인들처럼 신독, 자기 홀로의 세계 하나님이 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죽어 천당이 있기때문이 아니라 항상 도덕적 주체로서 내몸에 있는 도를 내가 구현해야 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위성지학이라고 배움이라는 것은 성인이되기위해서 배우는 거요. 그러니깐 여러분들 스스로 gksksladlmeho야 하는것예요. 여기서 성인이란 配天(배천)이라 하늘과 짝하는 사람이라
* 위성지학 : 동양인들의 배움은 성인이 되기 위한 배움이다. 거것은 현세적 복락과 체면 겉치례 예절과는 거리가 멀다.
* 천하의 지극한 성인(天下至聖)은 하늘과 짝한다(配天)- 중용 31장
동양사상이라는 것은 여기 은미한 것처럼 잘드러나는 것이 없다고 하는 동양사상의 핵심이라는 것을 이해를 해야돼요. 지금 동양사상은 나의 내면의 세계를 나홀로 책임을 진다는 거예요.왜 아는 하님님의 피조물로서 내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계 천지 자연도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 자체로서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거거든요.
* 천지자연은 스스로 이루어 가는 길이요. 인간의 도는 스스로 길지워 나가는 것이다.- 중용25장
서양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창조주가 있고 하나님이 창조한 천지 대자연이라는게 있고 그것과 별개로 창세기에 보면 또다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과 신이 각각 다 분리되어 있다.
* 서양사상에서는 신과 자연과 인간은 항상 분열되어 있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인 동시에 자연의 정복자이다.
그런데 동양사상에서는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되어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항상 천명을 끊임없이 받아야되는 존재고 내몸에 있는 도를 구현해 나가야만하는 존재다.
그런데 그방식은 남이 본다고 남이 알아준다고 이루어지는게 아니란 말이죠. 그것은 내가 홀로 찿아가고 책임지는 세계라는 것이죠.
*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러워하지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겟는가? -논어 1편 1장
그래서 신독 사상이라는 것은 막스베버의 지적과는 달리 가장 내면적인 철학이다.
庸-0104/1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희노애락지미발을 위지중이오 발이개중절을 위지화니라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 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희로애락이 발(發)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 하고,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한다. )
庸-0104/2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중야자는 천하지대본야요 화야자는 천하지달도야니라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庸-0105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치중화면 천지위언하며 만물육언하니라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萬物)이 잘 생육(生 育)될 것이다.(중과 화에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이 제 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 다.)
쭉보면 연결이 되어있다.인간존재를 천지 대자연과 종교의 대상인 하나님 이런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로 인테그레이티드 홀, 나의 몸이 단순히 나의 몸으로 끝나는게아니라 천지 대자연의 모든 가능성을 집약한 존재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살어서 걸어가지만 여러분들이 살어서 걸어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내가 걸어가고 살어있다는 것은 너무도 고귀한 거거든요.
* the integrated whole ; 통합된 유기체적 전체. 나의 몸과 천지와 하느님은 유기적 전체이다. 천지합일. 마이크로 코스모스.
내 존재라는 것은 그 생명의 약동이라는 것은 인건 대단한 겁니다. 근데 내가 이렇게 살아서 움직이고 강의를 하고 있고 여러분들이 강의를 들을수 있단 것 자체가 여러분들 하나하나가 천지 대자연의 집약체 거든요.
나는 집에서 닭을 키워요. 근데 닭을 키우보면 닭에서 천지대자연의무한한 이치가 있어요.여러분들이 개는 키우잖아. 근데 개는 천날을 키워봐야 말장 헛거야.왜냐면 사람말을 잘듣잖아. 그러나 닭은 사람말을 안들어요. 사람말을 절대 안들어요.
*개는 사람말을 잘듣고 닭은 사람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닭의 행태에서 오히려 천명을 관찰하기가 더 쉬원진다.
닭은 부른다고 오지 않아.그러기 때문에 닭의 생리는 개하고는 달라.어마어마한 대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발견할수 있어요. 사람말을 안들으니까 닭이 어떻게 반응하나 하는 것을 관찰해야돼.
그런데 나는 천명지위성 이라는 것을 닭에서도 느끼거든요. 닭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개성이 있어요.
내가 닭에 전부 이름을 붙여주는데 내가 닭을 키우게 된 계기가 양평에서 훌륭한 문인의 집안인데 자기가 키우는 닭이 아주 좋은 토종닭인데 고아 잡수라고 닭을 보냈거든. 박스에 넣어서 보냈는데 이걸 여는 순간 요놈이 홀짝 날아가 버렷어. 날아가서 잡을수가 없네. 담을 넘어서 훌적 날아가버렷어.
닭을 찿을수가 잇어야지 그런데 3일뒤 이 닭이 돌아왔어.그것도 희안한 인연 아니야 어떻게 3일을 버티고 또 나한테 왔는지 말이야. 집이라고 지가 찿아왔어. 그리고 마당에서 놀아. 그래서 마당에서 뒀는데 어느날 알을 낳았어요.알을 낳고 있는데 고양이가 덮쳤어 그러니까 이 놈이 그순간에 놀래가지고 확 날랏는데 감나무로 올라가 버렸어. 그리고 옆의 측백나무로 15미터 정도를 날라서 이동했다고.
거기서 움직이지 않고 3일 (그 닭은 부동의 자세에서 아무것도 먹지 안니하고 76시간을 수행했다.)을 움직지 않고 용맹정진 하더라니깐. 그러더니 지가 비행접시처럼 마당에 내려 앉았다.그 다음엔 고양위와 담위에서 마주쳤어. 그런데 이 달기 그냥 날라서 고양이를 쪼아버리는 거야. 그니까 3일동안 용맹정진하면서 도를 통한거야.그러자 고양이가 깨갱하고 동망가더니 그다음부터는 고양이가 얼씬거리질 못해.하옇튼 영물이다
그래서 공자는 봉황이 오지 않는 것을 서러워 했거든. 그런데 나는 봉황이오는구나. 그래서 이 닭을 봉혜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鳳兮.봉혜); 나의 닭의 이름. 이 이름이 논어 미자편에는 초나라 은자 접여가 공자를 부르는 말로서 나온다.)
*子曰 鳳鳥不至 河圖不出(공자계서 말씀하셔따; 아 봉황새가 이르지 않는구나! 황하가 하도락서를 내 지 않는구나!
그래서 봉혜를 만4년을 키웠어요. 그 동안 4배를 깟어요. 그래서 그동안 내가 배우고 느낀게 너무도 많은데 보통 재미난게 아니야.
그런데 결국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나는 지렁이 하나라도 이름을 붙여서 기르면 개성이 있을거 같아 性 천명지위성의 性이있는거 같애. 닭도 하나하나가 전부 개성이 있어요. 그 성이라는 것을 규정할수없다는 거죠 . 악하다 선하다 이런식으로 규정할수 없다는 거죠.
6-4
그리고 지금은 봉혜하고 손자인 능구라는 애가 같이 알을 낳아. 능구가 9개 봉혜가 7개 알울 낳아 키웠는데 할머니인 봉혜가 워낙 쎄니까 다 꼼짝을 못하는데 그러니까 능혜의 새끼들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잘크고 능구의 새끼들은 구석에 몰려서 눈치보면서 자라더라 이말이야.사람이나 다를바 없다는 거지. 닭의 세계도 굉장한 천명의 세계라는 거죠.
* 닭의 성장과정은 끈임없이 천명을 받는 과정이다. 그들에게도 성이 있고 도가 있고 교가 있다.
닭의 관찰을 통해 인간에 관한 수많은 통찰을 얻을수 있다.
닭들도 그들의 성을 만들어 가고 그들세계에서도 교육이라는게 물론 있죠. 봉혜한테 받는 교육과 능구에게서 받는 교욱의 형태가 달라요. 그래서 애들이 딱보면 분위기가 달라요.
우리가 중용이라고 할대 중용이라는 말에 오해가 있어요. 우리가 중용을 일상생활에서 중간이라고 생각하는데 과하거나 불급하지 않는 중간상태를 말해 . 아 너는 중용을 지켜라. 밥을 과식하지 말고 중용을 지켜라. 너무 욕심을 내지말고 중용을 지켜라 .이런식으로쓴다.
* 주희는 중용2장 주에서 중용을 無過不及 而平狀之理 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공자는 중용 그자체를 무과불급의 중간상태로 규정하지 않았다.
과 불급이 없는 가운데라은 의미에서의 중용이라는 말은 동양고전에는 없어요.
중용이라는 개념은 대체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온 겁니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저서. 행복을 구구하는 목적록전 윤리관. 행복이란 아레테를 발현하는 것인데 그것은 중용을 구현하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란 무엇이냐? 비겁과 만용의 중간이다.
비겁(cowardice) ------ 용기(courage) ------- 만용(temerity)
그런식으로 중용이라는 것을 극단적 덕목의 가운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건 말이 안되죠. 예를들면 좌파와 우파의 중용은 뭐냐? 그러면 이것은 회색분자밖에 안되죠. 타협주의자고 절충주의자고 그런걸 우리가 중용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말이죠.
중용은 그런 가운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포섭한 가능성이 있는데 아직 가능성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 말하자면 희노애락이 천명지위성의 그성이 희노애비지기(자사)라고 했잖아요
그 희노애비지기가 여기서는 희노애락으로 됐고 희노애락지 미발 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우리가 중이라 했잖아요.
* 자사는 성을 희노애비의 기로 설명했기 때문에 중도 인간의 덕성 가운데가 아니라 희노애락의 미발 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니깐 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감정이 발현되기 이전의 상태가 되는거예요.
쉼게 애기해서 어린애같은 애들이죠. 어린애들은 아직 희노애락이 발현되지 않았죠.
중이라는 것은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라 희노애락이 발현되기인전의 인간의 본연의 모습.
인간의 모든 가능성의 중심점 같은데로 생각하는게 이미지 상으로 이해가 편하는다는 거야.
중은 직선상의 중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이 발현되지 않은 가능태로 있는 상태
그것을 중이라하고 그리고 발이계중절이라고 했어요
어린애가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깐 누가 옆에서 때릴라 그래도 어린애는 안피하죠. 희노애락의 감정이 아직 촉발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아간다고 할 때 중으로만 살아갈수가 없잖아. 중이라는 것은 아마도 스님이 완전한 좌선에 들어가서 그 스님이 해탈에 상태에 들어가 있을때는 중이라고 말할수 있겟죠.그 분들은 희노애락의 감정에 휘돌리지 않으니까.
그런 어떠한 상태를 중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발현되어서 화내거나 운다든가 감정의 발현이라는 것은 외계의 사물에 의해 촉발되어 나의 내면의 중이 발출된다 그말이요.발현된 감정은 인간의 주어진 상황, 절은 마디절자인데 절이라는 것은 상황에 들어맞는다는 얘기야 . 그리고 그것을 화라고 하는거야. 무슨 얘기냐하면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모든 우리의 삶의 상황이 있어요. 그 상황에 부닥칠 때 우리는 감정을 발현하지 않을수 없어. 예를 들면 상가집에 갔으면 아주 슬퍼야죠. 상가집에 가서 기뻐서 웃으면 그건 미친놈되는거지. 친구 아들 백일 잔치에 가서 엉엉울면 이거 안되는거죠
절도 자기가 처해있은 삶의 상황에 나의 감정의 발현이 들어 맞아야된단 말이요. 중이라는 것은 우리가 고녁에 맞는 것을 적중한다 그러죠 그니까 들어맞을 중 자란 말이죠.
* 節; 절도라는 의미. 삶의 모든상황을 의미한다.
중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눈 상황성에 착착 들어 맞을 때 그것을 화라고 한다.
* 화; 조화 harmony를 의미. 조화는 부조화 disharmony의 현실을 전제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화라는 것은 항상 인간의 불화 나의 존재의 이상황과의 부조화를 전제로 하고 있는거죠.
조화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그만큼 어려운 인간의 고난의 상황들을 전제로 해서 나오는 조화예요.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미묘한 상황들이 많냐 그말이야. 그러한 삶의 상황에서 항상 감정을 올바르게 발현할줄 아는 사람. 결국 우리가 정치다 우리가 이세계를 산다고 하는 것이 알고보면 이런 우리의 감저이 이 세상에 착착 들어 맞는경지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지고한 경지라고 말할수 잇어요.
* 정치의 궁극은 중용의 정치이다. 그것은 治者와 국민간의 상호적 중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목적은 반드시 이성적 인간을 만드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학 영어를 아무리 잘하는 인간을 만들어도 나라 꼴이 되는게 아니란 말이죠.
문제는 얼마나 감정적으로 세련되고 정확히 감정이 중절이 되는가 그래서 조화로운 인간이 정치를 항때 조화로운 정치를 할수 있고 그렇게 됨으로써 남북관계도 조화로운 관계가 되고 우리 민족이 조화롭게 화합되고 이렇게 될려면 우리의 감정이 순화되어 있어야지 이성적 계산만으로 만은 통일도 안되고 아무것도 안된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중용의 메시지는 21세기에 새로운 이념이라는 거죠.
이렇게 될려면 제일 먼저 인간이 바르게 교육되어야 한다 그렇게 바르게 교육하는 기준을 옛사람들은 중용으로 생각했다 이것만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