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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99
2월8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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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교육학>
돈보스코 성인께서 창립하신 살레시오회가 막 태동의 몸부림을 치던 초창기 때의 일입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생활하셨던 최초의 공동체였던 토리노의 첫 오라토리오가 너무 커져서 분가(分家)가 필요했습니다.
그 첫 공동체인 미라벨라의 원장으로 루아(현재 福者) 신부를 파견하시면서 돈보스코는 한 가지 당부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루아 신부, 내 자네에게 한 가지만 당부하겠네.
다른 무엇에 앞서 회원들과 아이들이 자네를 사랑하도록 만들어보게. 결국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뿐이라네.”
돈보스코 성인이 창안하신 예방교육 역시 ‘사랑의 교육학’이었습니다. 교육자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아이들로부터 사랑받는 교육자가 되는 것이란 진리를 돈보스코는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목숨이 붙어있는 한 평생 되풀이해야 할 노력은 결핍된 사랑의 보완입니다.
결국 사랑만이 전부입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젊음도, 성공도, 명예도, 재물도, 그러나 사랑만은 영원히 우리 앞에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된다면 우리가 실천한 사랑으로 구원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사랑이라고 다 똑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쪽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랑한다고 발버둥치지만 저쪽에서는 거의 죽음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릇된 사랑, 왜곡된 사랑, 사랑 아닌 사랑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사랑 중에 한 가지가 편애입니다. 성장기에 있는 자녀들에게 간식을 줄 때, 한 아이에게는 활짝 웃으면서 막대사탕 5개를 주고, 다른 아이에게는 인상을 팍 쓰면서 막대사탕 1개만 한번 줘보십시오.
한 아이는 하루에 열 번 정도 꼭 안아주고, 다른 아이는 하루에 열 번 정도 뒤통수를 쥐어박아 보십시오.
단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갖은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겠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떠안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돈보스코의 말씀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하십시오.”
참 사랑은 느끼는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눈빛으로, 분위기로, 다정다감한 말투로, 결국 온 몸과 마음으로, 삶 전체로 알게 되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에 굶주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이분은 그간의 다른 지도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르구나. 이분의 마음은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구나.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죽기까지 따라다녀야 할 참 목자로구나.”
이런 마음에서 군중들은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얼마나 집요하게 따라다녔던지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의 쉴 틈도 없었습니다.
잠깐만이라도 쉬기 위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이동했더니, 그래서 이제야 잠시나마 눈 좀 붙일 수 있겠구나, 했었는데, 군중들은 육로를 통해 전속력으로 달려와 벌써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참으로 고된 여정이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너무나 행복하고 흐뭇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을 준만큼 그 사랑을 아는 백성들, 내가 어딜 가든 줄기차게 쫓아다니는 백성들, 어떻게 해서든 내 도움을 한번 받으려고 기를 쓰는 백성들, 내 손 한번 잡아보려고 줄을 서는 백성들, 어떻게 해서든 내 곁에 머무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는 백성들...
참 사랑을 실천한 착한 목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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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몰랐다.”는 핑계는 나를 계속 무식하게 만든다>
1962년 2월 10일, 여수 남국민학교 졸업식에서 일어날 일이라고 합니다. 졸업식장에서 회색 스웨터에 까만 낡은 바지를 입은 중년부인이 노력상을 받았습니다. 그 부인이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자 장내는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했고 졸업하는 그 부인의 딸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노력상을 받은 어머니와 딸은 세 채밖에 집이 없는 외딴 섬에 살았습니다. 주민이라고는 겨우 20명뿐인 이 섬에서는 제일 가까운 여수에 볼 일이 있어도 섬사람들이 직접 만든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여덟 살이 되자 남편에게 딸을 육지에서 공부시키자는 말을 어렵게 꺼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20리나 되는 뱃길을 어떻게 다닐 수가 있겠느냐며 반대했습니다. 당시 그 섬에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 섬이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굽히지 않고 딸을 남편 몰래 육지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로부터 6년,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20리나 되는 험한 물결을 가로지르며 손수 노를 저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섬으로 돌아와 밭일을 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배를 타고 딸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딸도 울고 그 어머니도 울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육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두려워 울었고 어머니는 딸을 데리러 가는 길이 늦어 딸이 애처로워 죽는 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울었습니다.
시계도 없는 섬에서 매일 시간을 맞춰 딸을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에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6년을 하루같이 오간 뱃길이 무려 3만 3천리나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졸업생과 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의 감격스러운 울음으로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떤 잘못을 했을 때 “몰랐어요!”란 핑계를 많이 댑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꼭 핑계가 될 수없는 이유는 알려고만 하면 다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알면 지켜야 하니까 그게 싫어서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에 “몰랐어요!”의 핑계가 더 적용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몰랐다는 핑계는 이렇게 계속 자신의 무지를 정당화하며 참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피곤한 상태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도 나오는데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끝까지 쫓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귀찮아하시지 않고 진리를 갈구하는 그들을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은 피곤하니 당신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어제 서울 모 성당에서 저의 책을 일 년 동안 전 신자들이 영적독서를 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해서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특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날씨도 추워졌고 더구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신자들이 적게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 8시가 되자 강의를 듣기 위해 거의 교중미사 수준으로 신자들이 성당을 채웠습니다. 저도 그분들을 보며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배우고 싶어 하는 열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인 저도 그럴진대 하느님께서야 당신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는 이가 얼마나 짠해 보이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진리를 알고 싶은 우리의 열망입니다. 그 열망만 있다면 사람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분명 알 수 있었던 것들이기에 몰랐다고만 핑계를 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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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30-34 :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면 가르치는 사도들의 수고와 배우는 사람들의 열성이 만들어낸 그 당시의 커다란 행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행복이 오늘날에도 다시 돌아온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말씀의 봉사자들이 제 몸을 돌볼 겨를조차 없이 신자들과 청중에 둘러싸여 지내는 그런 행복을 말한다. 사제들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때는 신자들이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때이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절),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성당에 와서 성체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이때에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나눔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영적인 갈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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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의 소임을 맡으면서 개인적으로 중점을 두는 사항이 있습니다.
‘공동체성’입니다. 공동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더 나아가 사목적으로도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바로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이시며,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시키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공동체성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오늘 복음은 우리가 공동체성을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잘 보여 줍니다. 복음 선포의 일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몹시 피곤하였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이 절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곳으로 배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로로 달려가 예수님과 제자들보다도 먼저 그곳에 다다르자 예수님께서는 쉬는 것을 포기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휴식할 시간을 달라고 군중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하실 수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동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틀에 갇혀 있지 않고, ‘너’에게로 건너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가엾은 마음이 들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배 속’, ‘내장’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가엾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에 자신의 속이 뒤틀릴 정도의 감정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커다란 고통보다도 가시에 찔린 자기 손톱에 신경이 가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나’에서 ‘너’에게로 건너갈 때 우리의 공동체성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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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사랑의 참된 의미>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모여 왔습니다.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시며 바라보십니다. 제자들의 얼굴과 눈에 담겨 있는 지난 시간이 그대로 주님의 마음에 다가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고단했을까?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고 포근히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분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그러나 가엾은 백성들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한 군중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의 배를 채워 주셨습니다.
제자들과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사랑의 힘이 기적을 만들며 세상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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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병로 라파엘 신부님]
<생명이신 주님 없이>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사명을 받아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자신들이 한 일들을 예수님께 보고하자, 예수께서 “이제 따로 외딴 곳으로 가 좀 쉬라”는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다.
그들이 있는 곳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는 번잡하고 분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따스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이 종국에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우리의 완성을 향한 여정에 있는 것들이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파견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 일들이 일단락되어 다음으로 넘어갈 때, 아니면 그 일을 하면서라도 잠시 쉬어가야 한다. 그 쉼은 우리에게 활력과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소중한 것이다.
무지하고 어리석고 욕심 많은 우리는 그 쉼마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소모하고 있지 않은지 항상 성찰해 봐야 한다.
그 쉼 안에 주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자리하고 있을진대…. 생명이신 주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인간의 교만은 얼마나 섬뜩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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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가 쉬어야 할 안식처>
사람은 일만 하고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우리는 언제 어디서 쉬어야 합니까? 휴가, 잠자리. 공동휴게실.
자기 방에 고요히 앉아 묵상 기도시간입니다. 육체적 휴식보다 정신적 휴식이 필요합니다. 정신적 휴식처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다고 합니다. 바로 주님은 그들의 마음에 휴식처를 찾아보셨습니다.
마음은 사람 안에 어디에 있습니까? 성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고 정서, 의지, 지성적 힘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 양심은 아니지만 양심을 담아두는 그릇 같으며 마음 안에 개인의 특성이 결정되며 하느님은 이 마음 안에 새로운 생각, 느낌을 불어 넣어 인간성을 변화 시키려고 은밀히 활동하시는 곳입니다.
에제키엘 36/ 24-28.을 참고하면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명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을 따르고 나의 법규를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육체가 마음의 중심이고 결정적 생명의 기관이 됩니다. 육체는 음식을 먹으므로 원기를 회복하고 즐겁게 됩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악인이 없다.'란 말도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의 마음속을 알 길이 없으나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본능적 활동은 정신적 영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서와 관계. 마음은 감수성과 감동에 따라 활동 한다. 기분이 좋으면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나쁘면 마음이 불편하다.
시편 27 "그러나 하느님에게 희망을 둔 사람은 마음이 굳세고 깨끗한 자가 된다. 주님께서는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 하랴?"로 시작해서 14절에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끗끗 하여라. 주님께 바라라” 사람이 살려면 고통, 기쁨, 걱정, 번뇌, 미움, 연민, 사랑에 의해 움직인다.
성아오스딩 “ 주님에게 이르기까지 불안 하나이다.”
이성과의 관계, 마음은 지성과 이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음이 지닌 지성은 들으므로 이루지고 마음은 지식과 기억의 보고이다.
못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들은 바가 없다“ 마음은 모든 지혜가 머무르는 자리다. 사람은 마음 안에서 삶에 대한 깊은 묵상이 일어난다.
의지와의 관계, 마음은 의지와 도덕적 삶의 중심이다. 마음은 이해의 기관이며 동시에 의지적기관이다.
마음이 헌신적으로 하느님에게 순종하지만 반대로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악한 생각이 나오는 원천도 된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나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이는 양심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명령이라며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원동력은 마음의 자용이다. 즉 마음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결정한다. 절망의 관계, 열등의 관계, 교만한 관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관계이다. 사람, 사랑,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며 진, 선, 미의 근원이 되어 모든 이들의 안식처가 됩니다.
신약의 관점, 마음은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종교 생활의 근거이며 도덕적 해위를 결정하는 곳이다. 열정이 나오는 곳이다.
요한, 16/6 주님이 떠난다하니 “너희 마음이 근심이 가득 찼다” 사도행전 2/26 주님 앞에 있는 사람은 “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루카 21/14 나희는 명심하여 < 마음에 새기어들어라.>
바오로사도는 로마서 12,2 마음이란 전 인격을 말하십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마음이란 의지와 의식과 지성과 자유를 구비한 인격의 원천이며 결단을 내리는 곳 하느님이 신비롭게 작용하는 곳이다.
로마서 2/15 율법보다 먼저 “율법이 요구한 행위가 자기들의 마음에 쓰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새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 되었습니다. 우리의 안식처는 바로 주님의 깊은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 안에 자신의 쉼터를 발견하고 그 안에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느끼도록 기도합니다.
< 오늘 강론은 수도원 월 피정을 위하여 준비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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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한 천사입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성령의 잉태를 예고했습니다. 요셉에게 나타나서 성령의 뜻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웃 종교인 이슬람에서도 가브리엘 천사는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함마드에게 나타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무함마드가 승천할 때 함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때 하느님의 뜻을 전한 천사도 가브리엘이었습니다. BTS(방탄소년단)가 세계의 무대에서 인정받는 것이 기분 좋은 것처럼, 영화 기생충이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이 기분 좋은 것처럼 저의 세례명이 이웃종교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거라 생각하니 감사할 일입니다. 신문을 홍보하는 일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거라 생각하니 소중한 일입니다. 짚신장수와 우산장수의 어머니는 비가 오면 짚신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짚신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으면 우산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우산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비가와도 좋습니다. 우산장수 아들이 우산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아도 좋습니다. 짚신장수 아들이 짚신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동양의 현인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들보나 기둥 재목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는 데에는 소용없다. 그것은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데에는 고양이만 못하다. 그것은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는 벼룩을 잡고 터럭 끝도 볼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뜨고도 큰 산조차 보지 못한다. 그것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게는 큰 울림을 주었던 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쓰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재주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본성이 있습니다. 그 쓰임과, 재주, 본성이 다를 뿐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아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성공, 권력, 재물, 명예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솔로몬은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청을 들어주셨고, 부와 명예를 덤으로 주셨습니다. 저의 쓰임, 재주, 본성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싶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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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쉼>
마르코 6,30-34 (‘오천 명을 먹이시다’ 전반부)
그때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쉼>
쉼이란
멀리하지 않고
안는 것
안기는 이는
안는 이
품 안에서 쉬고
안는 이는
안기는 이
품 밖에서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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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느님의 위로를…>
가끔 피정 중에 어느 고운님과 이런 면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치매에 걸려서 가족을 힘들게 한 어머니를 미워하고, 때로는 어머니가 죽기를 바란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어떤 훈화와 보속을 주어겠습니까?
1) 말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욕을 하면서 먼저 주먹질을 해댑니다.
2) 대죄이니 고해성사를 줄 수도 없고, 하느님도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니, 성당에 나오지 말라고 합니다.
3) 어머니에게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더 잘해드려야 합니다.
4) 많이 지친 것 같으니 쉬라고 합니다.
저는 그 고운님에게 4번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합니다.
☞ 그리고 피정 중에 면담했던 고운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피정하는 고운님들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어떤 고운님들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에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서 화를 낼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환자를 간호하고 수발을 드는 사람을 야단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머니를 미워하고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고백하면서 스스로 속으로 ‘불효자식이야!’ ‘난 죽일 ○이야!’ 하고 괴로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괴로움이 반복되면서 그 사람 마음 안에 ‘연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친 사람에게 야단해서는 안 되고, ‘지치지 말라고, 쉬엄 쉬엄하라. 그리고 좀 쉬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쉴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 억지로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던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도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사도들의 몸과 마음이 지쳤습니다. 많은 일과 사람들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친 사도들이 밝은 빛을 볼 수 없을까 봐,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까 봐, 그리고 하느님이 계심을 믿지 못할까 봐요.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지친 고운님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그래야만 고운님들이 치유와 회복하는 은총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는 가끔 피정하면 ‘생명의 말씀’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여러 차례하고, 그리고 성무 일도를 겸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아팠을 때 돌보는 힘의 원천은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피정 중에 정말 중요한 시간은 오랫동안 고해성사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해성사는 어렵고 혼란스럽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웠을 때 정말 견딜 힘을 받았을 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닫혀있던 마음들이 고해성사를 통하여 마음이 열리고, 열린 만큼 위로와 아픈 기억들이 씻겨지는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순간마다 고운님들이 살아온 인생의 모든 발자국이 더 큰 은총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희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지친 고운님들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특히 현실은 쉬라 해도 말처럼 쉬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다들 모두 나가면 고운님들 혼자 모든 일을 뒤 집어쓴 경우가 많았지요. (토닥토닥)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었습니까? 위로의 말이라도 전합니다.
“참 고생 많이 하셨네요. 우리 고운님들!!”
저 두레박 사제도 기도와 미사 중에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며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외딴곳으로 가서
* 내 백성이 그들에게 몸을 돌려...
‘내 백성...’이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돌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브’라는 말은 ‘스스로 어디로 향하다.’라는 의미입니다.(예레미야서 15장 19절. 참조) 따라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많은 자들이 악인의 평안함을 보고서 하느님을 버리고 악인들에게로 향함을 의미합니다.(시편 49편 15절. 참조)
* 저들의 말을 물마시듯 들이켜네...
여기서 ‘말...’은 ‘잔에 가득한 물’이라는 말로 악인들의 부패가 차고 넘칠 정도로 극에 달하였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욥기 15장 16절. 참조) 그러므로 ‘악인들에게로 몸을 돌린 백성들이’ 그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들이켰다는 것은 이들이 악인들의 행위가 마치 생명수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행동을 열심히 따라했음을 의미합니다.
♧♧ 시편 73편 11절…
"그들은 말하네. “하느님이 어찌 알 리 있으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어찌 알아채리오?”
* 하느님이 어찌 알 리 있으며...
이 구절은...악인들의 교만은 결국 하느님을 부인하는 불경스러운 상황에 까지 다다르게 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악인들의 교만이 극에 달할 경우 그들은 자신이 하느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 그분의 피조물인 것조차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시편 10편 4절. 참조)
*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어찌 알아채리오?
‘지극히 높으신 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욘’이란 말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온 누리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하느님의 이름(신명 神名)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느님의 절대 주권을 부인하며 초월자이신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심을 부인하는 악인들의 행위를 묘사한 것입니다.(욥기 22장 12-13절. 참조) 그러나 하느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시는 가운데 모든 인간을 지켜보고 계시니, 악인들은 어떠한 죄악도 하느님 앞에서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시편 121편 4-8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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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시골의 작은 본당에서 사목하는 동창 신부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이었기에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식사 때가 되어서 동창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나가서 식사라도 하자. 이 근처 맛집이 있니?”
그런데 동창 신부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없어.”
“아니 왜 없어?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맛집이 없으려고?”
“맛집은 다 서울에 있지. 실력 있는 사람이 시골에서 장사하겠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시골이라 사람이 없어 소비가 많지 않을 테니 당연히 특색있는 맛집이 있을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함께 간 집은 아주 허름한 가게였습니다. 메뉴판도 없었습니다. 그날 준비된 재료로만 만들어서 파는 백반집이었습니다. 가게는 깔끔하지 않았고 사람을 끌 만한 특색도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친구와 함께 한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한 자리는 어떤 음식을 차려 놓아도 맛집 수준으로 올려놓습니다. 세상 사람은 맛집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방송에서도 맛집 소개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혼자 외롭게 먹는 음식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큰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전교 여행은 너무나도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이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가도 어떻게든 쫓아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자기들의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피곤하다고 사람들을 외면하는 예수님이 아니셨습니다.
사람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따르기 위해 온 힘을 쏟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사람을 먼저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자신만을 먼저 바라보면서 그들을 오히려 하나의 무거운 짐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늘 사람이 먼저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역시 사람이 먼저라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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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떤 자리에 있나요?>
1990년대 초반에 아르바이트로 밭농사를 도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김매기’, 바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온종일 잡초를 뽑았는데, 다음날이 되면 그 자리에 또 다른 잡초가 나오더군요.
너무 지루하고 힘들어서 “잡초를 그냥 놔두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더니, 잡초를 뽑아줘야 농작물이 잘 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잡초를 뽑다가 쑥을 보았습니다. 쑥은 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쑥은 그냥 놔둘까요?”라고 했더니, 여기서 키우는 농작물 외에는 다 잡초니까 뽑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밀밭에 벼가 나고 있으면 이 벼가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고 있으면 이 밀 역시 잡초라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어떤 장소에 나느냐에 따라 필요 없는 잡초가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지금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귀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잡초처럼 쓸데없는 존재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내 존재를 귀하게 만들어 줄 장소에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주님 안입니다. 세상의 것에만 관심을 두고 세상 것만 좋아한다면 내 존재는 보잘것없게 됩니다. 지금 어떤 자리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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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봉헌의 여정>
-사랑의 봉헌,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
오늘 우리는 수도서원 25주년을 맞이하는 아홉 분 수녀님들의 은경축 미사를 봉헌합니다. 최효경 수녀, 정아빌라 수녀, 구요한 보스코 수녀, 이루카 수녀, 고가우디아 수녀, 이베리타스 수녀, 안테라 수녀, 신은혜 수녀, 채요셉 수녀, 아홉 분의 명단을 받아보는 순간, 참 아름답게 반짝이는 봉헌의 별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은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시도 생각이 났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며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며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모두가 되고 싶다”-1998.12.25
참으로 사랑하는 분의 ‘늘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은, 참으로 사랑하는 분의 ‘늘 모두가 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근원적 봉헌의 욕구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봉헌의 꽃’이요,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봉헌의 별’이요, 날마다 새롭게 샘솟는 ‘봉헌의 샘’이요, 날마다 새롭게 타오르는 ‘봉헌의 불’같은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봉헌은 우리 수도자의 존재이유입니다. 흡사 우리의 봉헌을 새로이 하는 오늘 은경축날이 봉헌 축일 처럼 생각됩니다. 얼마전 봉헌 축일에 여러 사제분들의 강론을 접하면서 참으로 아쉽게 느껴졌던 점이 있습니다. 바로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이란 말마디를 찾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아름다운 말마디는 없습니다. 어제 강론은 ‘찬미’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만 오늘 강론은 ‘봉헌’에 대한 묵상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기에 찬미의 아름다움이듯,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은총의 동의어입니다. 하느님 주신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 하고 정화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우리 수도자의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제 요즘 화두는 ‘아름다움’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떠나고 싶은 것은 봉헌의 삶을 사는 우리 수도자 모두의 근원적 소망일 것입니다. 말 그대로 ‘참 아름다운 봉헌의 여정’을 살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여정’은 제 강론에 참 많이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여정과 관련하여 늘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내 삶의 여정을 하루로 압축한다면, 일년사계一年四季, 내 삶의 여정을 일년 사계절로 압축한다면 어느 지점에 와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봉헌의 여정이 깊어갈수록 영혼의 아름다움도 더욱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참 아름다운 봉헌의 여정을,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을 살 수 있을까요? 다음 네 사항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첫째, 회상하십시오.
은혜로웠던, 행복했던 기억을,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회상할 때 아름답습니다. 회상은, 기억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기억을 잃으면 미래를 파괴한다고 교황님은 강조하셨습니다. 아름다운 기억이, 회상이 없이는 미래도 없습니다. 바로 오늘 1독서 이사야서 말씀대로 우리의 은혜로웠던 과거를 자주 회상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자애로운 업적을, 주님께서 찬양받으실 업적을 회상하리라. 주님께서 당신 자비에 따라 당신 크신 자애에 따라 나에게 베푸신 그 모든 것을, 그 모든 선업을 회상하리라. 주님은 모든 곤경 가운데 나에게 구원자가 되어 주셨다. 사자나 천사가 아니라 당신의 얼굴로 나를 구해 내셨다. 당신의 사랑과 동정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다. 지난 세월 모든 날에 나를 들어 업어 주셨다.”
얼마나 감동스런 주님의 은혜인지요. 참 아름답고 고마운 이런 주님께 사랑의 봉헌으로, 봉헌의 기쁨으로 살아갈 때 참 아름다운 봉헌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둘째, 감사하십시오.
감사할 때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회상할 때 저절로 감사입니다. 감사와 더불어 기쁨의 찬미요 마음의 순수와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체험은 그대로 우리의 감사 체험의 고백이 될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철부지 같은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영혼에서 샘솟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는 그대로 예수님의 기도이자 우리 봉헌 수도자들의 기도입니다.
셋째, 사랑하십시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감사할 때 저절로 샘솟는 사랑의 찬미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봉헌의 여정은 그대로 사랑의 여정입니다. 사랑만 하려해도 턱없이 짧은 인생입니다. 사랑의 부재로 창궐하는 공포, 불안, 두려움, 혐오, 배제, 증오 등 온갖 부정적 해로운 영적 바이러스들입니다. 바로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표현이 요즘 유행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사랑이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절대적 사랑의 일치를 보여주는 아버지와 아드님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다음 말마디가 바로 우리와 아버지와의 일치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바로 아드님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를 깊이 알게 해 주십니다. 하여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봉헌의 여정은 그대로 사랑의 여정이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버지와 사랑의 일치도 깊어가니 비로소 무지로 부터의 해방이요 참된 자유인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악이자 병이자 죄인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아버지와 참나를 깊이 알아가는 아버지와 사랑의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넷째, 배우십시오.
배울 때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평생 수도원의 배움터에서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학인平生學人들입니다. 참으로 배울 때 온유와 겸손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할 때 평생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배우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배움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 초보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사랑을 지닐 때 수도자입니다. 사랑도, 정결도, 가난도, 회개도, 정주도, 순종도, 겸손도, 침묵도, 섬김 등 모든 수행 덕목도 날마다 새롭게 배워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예수님을 닮아 온유와 겸손이요, 안식의 은총입니다. 예수님 친히 우리의 안식처가, 피신처가, 정주처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점차 우리의 불편한 멍에는 당신의 편한 멍에로 우리의 무거운 짐은 당신의 가벼운 짐으로 바꿔주십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 모두 참 아름다운 봉헌의 여정에 불림받고 있습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를 1.회상하면서, 2.감사하면서, 3.사랑하면서, 4.배우면서, 봉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참 아름다운 삶에 아름다운 죽음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봉헌에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름다운 봉헌의 행복을 노래한 다음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봉헌의 하루이옵니다
주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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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 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 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카 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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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말씀들로 표현된 하나의 본질을 만납니다. 그 본질은 바로 사랑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첫 선교 여행을 떠났던 열두 제자가 이제 막 돌아와 스승님 주변에 모여듭니다. 피로도 잊은 채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보고"(마르 6,30)하며 그간의 희로애락을 나눕니다. 흥분이 좀 가라앉자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피곤한 기색을 읽으십니다. 하느님 일의 마무리는 세상 창조 때 그러셨듯이 "안식"이어야 합니다.
"따로"
이 분리는 제자들을 일과 관계와 성과주의로부터 떼어놓습니다.
"외딴곳"
이 매혹적인 장소는 제자들을 하느님과 친밀히 머물게 합니다.
"쉬어라."
이 쉼의 권고는 예수님의 짠한 연민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제자들이 휴식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게 하고, 그간의 일을 하느님과 잘 정리하도록 도와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그런데 웬걸!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따라잡습니다. 뒤쫓아오다가 아예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기다립니다. "외딴곳"이 마치 "장터"처럼 되어버립니다.
"가엾은 마음"
예수님은 군중을 보시며 "오죽하면"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셨을 것 같습니다. 한눈에도 보이는 그들의 절박함,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시달리는 병고, 더러운 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굶주림과 죄의식...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에수님 일행의 목적지였던 "외딴곳"은 복음 선포의 현장으로 바뀌고 제자들의 쉼은 수포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계획을 바꾸신 것은 그분이 우유부단하거나 목적의식이 희박해서가 아닙니다. 애초에 목적이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하신 여정이 군중에 대한 사랑으로 옮아가며 확장된 것입니다. 사랑에서 출발한 여정은 사랑을 향하기에 중간에 방향을 바꾸어도 여전히 사랑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복음 내용이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의 시간보다 일에 매몰되고 성과 중심으로 흐르는 일부의 민낯을 합리화하지 않습니다. 안식은 창조 이야기에 드러나듯 하느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당신 무릎 앞으로 오다 말고, 군중에 대한 연민의 사랑으로 잠시 지체한 시간을 충분히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더 그리워하고 더 설레고 더 흐뭇히 당신 차례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솔로몬 임금과 하느님 사이에 오간 다감하고 친밀한 대화를 들려줍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지 물으시는 하느님께 솔로몬이 답합니다. 솔로몬은 자기를 들어 높일 부와 명성과 얕은 지력이 아니라 오로지 백성을 공정하고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청한 것입니다. 그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 줌으로써 하느님을 위로해 드리고 백성을 평안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흡족하게 해드리려 합니다.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1열왕 3,12)
그가 청한 분별력에 하느님께서는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청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시겠다고 하시네요. 솔로몬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아닌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백성의 기쁨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듣는 마음, 분별, 지혜, 가엾은 마음, 가르침..."
이 모두는 사랑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따로, 외딴곳, 쉼"
이 또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개인 소명을 "지금 여기" 삶 안에서 실현하는 여정에서 이러한 사랑의 다른 표현들을 적절히 조화롭게 구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건너뛰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지만, 각자에게 조금 더 강세가 붙는 개별적 은사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주님께서 오늘 새로이 벗님에게 물으십니다. 중심 잘 잡고, 방향도 잘 잡고, 존재 저 깊이에서 우러나는 답을 한번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안위에만 코를 박고 사는 삶이 아니라면 무엇이 되었건 사랑의 다른 표현이리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더 잘 아실 것이니 우리의 청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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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청소년이 이상주의를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이 지지를 받지 못하면
청소년이 이상주의를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이 지지를 받지 못하면 뇌세포가 죽고 깊은 좌절을 경험 정서적 건강을 위한 의미의 중요성은 중년기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조지프 칠턴 피어스에 따르면 이상주의와 관련한 뇌의 급격한 성장은 초기 청소년기에 일어난다. 따라서 발달 단계적으로 청소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이상주의를 격려해 줄 어른들이 의미 있는 삶의 본보기이다. 이상주의를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이 지지를 받지 못하면 수백만 개의 뇌세포가 죽고 청소년은 깊은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 교육 제도는 청소년에게 이상주의를 격려하기 보다 서로 경쟁하고 타인의 희생을 기반으로 이익을 얻는 경제제도를 수용하도록 부추긴다. 이 제도는 개인의 특별한 존재 방식을 향상시키기보다 미친 듯이 일하는 것을 격려하고 증진시킨다.
피어스는 10대 폭력의 급속한 확산은 그들 앞에 닥친 어른들의 세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그로 인하여 뇌 발달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0대 폭력의 확산은 그들의 이상주의가 좌절됨으로써 발생한 직접적인 결과라는 그의 말에 우리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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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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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창세기>에서 울려오는 울림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울려오는 울림을 듣게 됩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군중들에게는 그들을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여기시고, 마치 환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양들을 먼저 돌보십니다. 그들을 측은히 보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목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라 있었던 것은 바로 진리였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참된 진리이신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참된 목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참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 예수님의 양인가?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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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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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리더의 역할>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은 사람의 심경을
너무나 잘 파악하십니다.
함께 움직이고 뒷바라지 하는
제자들의 노고를 파악하고 누가 지쳤는지
회복할 기회를 주십니다.
외딴곳으로 가서 쉬라고 하시는 말씀은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을 듬뿍 담은 표현
리더의 역할과
리더의 마인드가 어떠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달려있죠.
예수님은 참다운 리더로서
다정하고 부드러우며
때로는 스승이며 친구같고
때로는 단호하고 차가우며
고독과 멸시를 견디고
때로는 모든걸 감수하는
희생하는 리더입니다.
리더가 빛을 발할때는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깊이 기도하며 발견하고
함께하는 구성원들에게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여
목표를 향한 달음질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때입니다.
"리더는 매진할때와 멈출 때,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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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 34)
희망의 봄이
되시는 목자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생명을
사랑하시고
생명을
나누어주시는
목자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함께 길을 걷고
함께 밤을 새우시는
목자가 계십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마음 아파하시는
목자를 만납니다.
우리 삶을 비추어
주시는 목자가
계십니다.
그 목자는
희망의 빛이
되어주십니다.
말 없이
우리자신을
받아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긴 시간을
뜨겁게
기다려주시고
아프게
사랑하여 주시는
목자께서 삶다운
삶이 사랑임을
가르쳐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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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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