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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신년스페셜 [최인호의 다큐로망 해신 장보고[(4)대해를 넘어]
방송일: 2003112 조회수 : 451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1. 호암 미술관
/// 몇년전 나는 대영제국의 박물관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미이라를 본 적이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미이라 옆에는 그녀가 평소 아끼던 물건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빗이었다
빗. 모든 여인들이 가장 아끼는 화장 도구인 빗.
지금 생각하면 호암 미술관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사용하던 빗보다 더 아름다운 신라의 빗을 보았던 것은 행운
이었다
이 빗은 8세기에서 10세기 통일 신라시대의 것으로서 장보고 시대때의 유물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빗이 바다 거북의 등껍질인 대모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바다 거북 등껍질인 대모는 예나 지금이나 안경테와 빗과 같은 장식품을 만드는데 쓰이는 최고의 재료.
그렇다면 대모로 만든 이 아름다운 빗으로 머리를 빗었던 신라의 여인은 누구였을까
이렇게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인들의 해양 루트 탐사의 출발은 신라 여인의 빗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2.
/// 신라여인이 쓰던 빗의 재료인 바다 거북은 우리나라 근해에서는 잡히지 않는다
적도 부근의 열대 및 아열대 바다에서만 사는 바다거북의 등껍질. 그것이 바로 대모인 것이다
그렇다면 1200년전에 이미 바다 거북의 등껍질이 적도부근에서 신라까지 흘러들어 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3.
///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삼국사기를 뒤져보았다
바다 거북의 등껍질인 대모가 삼국사기에도 나오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있었다.
한번은 여인들이 사용하는 장식용 빗으로 나오고 있고, 또 한번은 귀족들이 사용하던 수레의 장식품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했던 흥덕대왕이 834년 대모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외래품의 진귀한 것만을 좋아하여 풍속이 파괴되는데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흥덕대왕은 대모뿐 아니라 진귀한 외래품의 사용을 금지하였는데 그 목록은 '에머랄드, 자단, 침향,
공작 꼬리털'과 같은 것이었다
이는 모두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파키스탄은 물론 러시아의 타쉬켄트 지역등 머나먼 외국의 특산물이었다
4. 석가탑
/// 해체된 석가탑에서 나온 것은 다라니경만이 아니었다.
탑신 속에서 비단에 쌓인 유향이 나온 것이었다.
유향.
이는 아라비아 반도 남단에서만 나오는 특산물로 특히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때 사용하는 향료다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유향을 소중하게 여겼는가는 2000년전 아기예수가 태어났을 때 동방에서 온 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황금과 몰약 그리고 유향을 예물로 바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아라비아에서 온 현인들 유향은 2000년전부터 아라비아에서 나오던 특산물이었던
것이다
석가탑에서 출토된 유향과 호암 미술관에서 봤던 바다 거북의 등껍질로 만든 머리 빗.
두 유물은 내게 또다른 역사 탐험을 떠나는 신호탄이 되었다
5. 신안 배
/// 1975년 9월, 전남 신안군 방축리 앞바다에서 청자 매병등 6점의 유물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신안 해저
유물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발굴은 전체 길이 26m, 폭 7m로 밝혀진 목선의 인양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 배 중국의 영파항을 떠나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으로 추정되며 그 당시의 목선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6. 자료실
/// 이 배에서 출토된 유물은 약 이만이천점으로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역시 도자기
중국의 대표적인 상품인 도자기뿐 아니라 도자기를 포장했던 나무 상자까지 원형그대로 나온 것이다
또한 특이한 물품들 예를들어 양귀비가 좋아했다는 남방산 여지 열매 그리고 향신료 중에 하나인 후추까지
다량으로 출토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유물들 중에는 자단목 일천점이 함께 인양되었다 내가 목포 해양 박물관을 찾은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7. 자단목
///왜냐하면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자단목이야말로 흥덕대왕이 법령으로 사용을 금지했던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8. 헬기 장도
///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목선은 중국의 영파항을 떠나 남해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던 원나라의 무역선
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배가 인양됬던 서남해안의 바닷길은 바로 그 전시기, 장보고의 주무대가
아니었던가
일찍이 맹자는 말했다 "길은 가까운데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먼 데서 길을 구한다"
신라와 당을 잇는 바닷길은 장보고 이전에는 오늘날의 당진인 당은포를 출발하여 중국 산동으로 가는 북방
항로뿐이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새로운 뱃길을 열었으니 그것이 신안선의 항로였던 한국의 서남해안과
중국의 영파를 잇는 길인 것이다
청해진.
장보고는 바로 청해진을 중심으로 새로운 남해 항로를 개척했으며 이것이 바로 무역의 길이 되었다
장보고가 개척한 무역의 길을 통해 대모와 유향 그리고 자단목도 신라로 흘러 들어왔을 것이다
9. 배
///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무역선이 과연 장보고가 개척한 뱃길을 따라 운행하였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그 바다길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10. 비금도
/// 신안선이 통과 했던 뱃길.
당나라 시절 최고의 무역항이었던 영파에 이르는 첫 경유지는 비금도다 그렇다면 비금도에는 과연 장보고에
관한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비금도에는 장보고에 관한 유적이 아니라 그와 거의 동시대 사람인 최치원의 유적이 남아 있었다
(사이)
최치원의 호인 고운을 따서 이름지은 샘터에는 아직도 맑은 물이 샘솟고 있다
(사이)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신라의 장삿배가 이 바다를 지나 당나라로 갈 때면 마치 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잇닿아 있었다고 표현하였으며 최치원은 이런 신라의 장삿배에 편승해 당나라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이)
흑산도.
바로 이미자가 불러 유명해진 '흑산도 아가씨'의 고향이다
흑산도에는 이곳이 통일신라시절 무역항으로 얼마나 번영을 누리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인
남아 있다
상라산성은 통일 신라시대때 쌓은 성으로 장보고의 해양 번영 시대때 무역항으로서 흑산도의 중요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 상라산성 아래에는 절터가 하나 있다
석등 하나와 석탑하나만 남아 있을 뿐 아무 흔적도 없는 이 절터는 그러나 흑산도가 장보고 남해 루트의 중요한
거점임을 증명하고 있다
절터에는 아직도 깨어진 기왓장들과 연꽃 무늬의 파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절터에서 아주 중요한 유물이 한 점 발견되었다 바로 이 절의 이름이 새겨진 명문 기와
그 기와에는 '무심사 선원' 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신라불교에 선종이 들어온 것은 바로 장보고 시절. 장보고는 선종을 강력히 후원했던 종교 개혁가였던 것이다
(사이)
나는 흑산도의 산마루에 있는 봉수대에 올라가 보았다
송나라 사신이었던 서긍이 고려를 방문할 때 이곳 흑산도를 경유했다는 사실이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다
서긍은 흑산도에 봉수대가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산마루에 봉화를 피워 왕성에 알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봉수대가 있는 산정상에서 바라 본 바다는 물안개가 자욱히 덮혀 있었다
나는 마침내 알 수 있었다
신안선의 뱃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장보고의 유적을 통해 이 뱃길이야말로 청해진에서 당나라 최고의
무역항 영파에 이르는 장보고 무역 루트였던 것이다
11. 영파시
/// 당나라 시절 최대 무역항이었던 영파
이곳은 장보고가 개척한 남방 항로의 종착점이다
공원에는 장사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나는 상인들과 그 이별을 슬퍼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새겨진 조각상들이
있었다 이곳이 상인들의 고향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이)
영파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의 교역에 아주 중요한 거점임을 알려주는 유적이 시내에 남아있다
고려관
이름 그대로 고려 때 이곳에 들렸던 상인이나 사신들이 머물던 공공 건물 이곳에는 한눈에 보아도 우리 선조들이
쓰던 것임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아직도 남아 전하고 있다
(사이)
그보다도 내가 흥미를 더 느꼈던 것은 거대한 도자기 시장이 강변에서 열리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이곳이 도자기의 집산지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당나라 시절에도 주력 수출 상품이었던 월주 자기는 바로 이곳에서 장보고가 지휘하는 신라 선단에 의해 남해
항로를 따라 신라로 일본으로 그리고 동남아로까지 퍼져 나갔을 것이다
12. 다리 위
/// 중국 당나라의 중요한 사서인 '당회요'에는 이곳 망해진 즉 영파가 일찍부터 신라로 가는 원양 선박의
중요한 출발 항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월주자기를 가득 실은 장보고 선단의 배들이 쉼없이 드나들던 항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곳에서 전혀 뜻밖에 장보고가 개척한 남해 항로의 더욱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
13. 뱃길
/// 그것은 영파에서 가까운 보타도란 섬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얻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보타도는 이곳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중국불교의 4대 성지 중의 하나다
관음신앙의 본산답게 바닷가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서 있었다
가벼운 맘으로 여행을 떠났던 나는 이곳 보타도에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4. 호텔 방
/// 그것은 숙소였던 호텔방에서 뜨거운 중국차를 마시며 이곳에서 발간되는 지방신문을 펼친데서 비롯되었다
신문에는 '보타도 신라초'란 기사가 큰 글자로 실려 있었다 온통 중국식 한자로 그 뜻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신라초, 즉 '신라라는 이름을 가진 암초' 가 이곳 보타도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신라라는 이름을 발견한 순간 나는 일본에서 전설적인 무사 신라사부로를 발견했던 것처럼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래서 신라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바닷가로 나가 보았다
15. 바다 배
/// 나를 안내한 연구소 소장은 신라초는 바다 한가운데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한 척 빌리기로 했다
소장은 자신도 신라초라는 이름만 들었을뿐 직접 배를 타고 현장에 가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황해. 이름 그대로 누런 흙탕물이 넘실거리는 바다 한복판에는 온통 암초로 이루어진 작은 섬 하나가 떠 있었다
그 섬의 이름이 바로 신라초였던 것이다
내가 신라초로 다가가자 작은 바위섬에 앉아 있던 철새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온통 사나운 암초로 이루어진 바위섬이라 좀처럼 배를 댈 수 없어 두 바퀴를 돌고 나서야 간신히 배를 접안
하고 상륙할 수 있었다
(사이)
신라초는 영파항구에서 출항하는 배가 반드시 거칠 수 밖에 없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지 않고서는 바다로 나갈 수도 들어 올 수도 없는 바로 그 길목에 신라초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
원장의 말은 몹시 흥미로웠다 이곳을 오가는 많은 배들이 이 암초에 부딪쳤는데 특히 신라배들이 가장 많이
좌초했으므로 이름을 신라초라 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나는 비로소 신라초의 유래를 알 수 있었다
(사이)
원장의 말대로 해상왕 장보고의 신라 선단은 이 뱃길을 통해 가장 많이 드나들었으므로 자연 신라배는 가장
많이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초는 청해진을 출발한 배가 비금도를 거쳐 흑산도를 지나 영파에 이르는 남해 항로가 장보고가
개척한 바닷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열쇠였던 것이다
16. 이슬람 사원
/// 당나라 최고의 무역도시였던 양주에는 이슬람인들의 묘지가 남아있다
이슬람 상인들의 묘지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슬람 상인들의 왕래가 그만큼 빈번했음을 뜻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 무렵 양주에는 이슬람 상인들 뿐 아니라 페르시아 인도네시아의 상인들도 많이 살고 있어
이들의 거주지를 파사장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사이)
내게 설명했던 안내인도 이슬람 상인의 후예 양주의 뒷골목에는 아직도 이슬람 사원이 남아 있을 만큼
이슬람인들의 후예가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
(사이)
나는 텅빈 이슬람 사원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흥덕대왕이 사용을 금지했던 바다거북의 등껍질인 대모와 자단목 그리고 석가탑에서 발겨된 유향 등은
이곳 양주에 살고 있던 아리비아 상인들이 가져온 외래품이 아니었을까
(사이)
이를 증명하듯 양주에 도독이 있던 당성 박물관에도 이슬람에서 건너온 도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당성 박물관의 2층은 놀랍게도 최치원의 기념관이다
최치원은 857년년에 태어나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한 후 이곳 양주에서 오랫동안 벼슬을 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특히 황소의 난때 격문을 지어 온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해동 제일의 문장가였다
/ 그의 문장을 집대성한 문집 계원필경에는 그 무렵 이곳 양주에서 신라상인이 교역했던 물품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7. 애니메이션
/// 그렇다.
흥덕대왕이 법령을 내려 금지했던 사치품 대모, 자단목, 에메랄드 침향과 같은 외래품들은 신라상인들이 직접
그곳에 가서 사온 것이 아니라 이곳 양주에 살고 있었던 이슬람 상인들이 가지고 온 물건을 구입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 벌써 이처럼 중계무역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이 중계 무역을 지휘했던 사람이 바로 장보고. 장보고는 중계 무역을 통해 아라비아의 외래품을 독점해
신라는 물론 일본에까지 수출했던 국제 무역상이었던 것이다
18. 이슬람사원에서 비행기까지 이어서
/// 중국 남쪽 홍콩에서 가까운 복권성 청주시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이슬람 유적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유적의 이름은 청정사.
이름만 들으면 불교 사찰 같지만 이슬람 사원이다
지금은 무너져 돌기둥만 남아 있는 사원에는 코란의 경문을 적어놓은 석판과 돌무덤이 남아있는데
황폐한 사원을 바라 본 순간 나는 문득 신라 여인이 사용했던 대모 빗과 석가탑에서 출토된 유향,
그리고 자단목이 어떻게 극동의 신라에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 비밀 루트를 밝히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나는 즉시 이를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 찾아간 나라는 인도네시아. 바로 자단목의 원산지다
19.
///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 제일의 역사도시다 열대 우림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일대는 울창한 밀림이
형성되어 있어 목재 생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내가 찾아간 제재소에서도 밀림에서 채취해온 나무들을 날카로운 톱으로 재단하고 있었다
이목재소의 여주인은 내게 자단 나무의 원목을 보여주었다
(사이)
나는 그곳에서 목포 해양 박물관 창고에서 본 자단목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밀림 속에서 자생하고 있는 자단 나무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현지인과 함께 밀림 속을 헤매고 다녔다 너무 더디 자라서 이제는 심는 사람이 없다는 여주인의
말처럼 자단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현지인은 내게 긴 막대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다 밀림 속에는 맹독의 독사가 있으므로 반드시 숲을 헤맬 때에는
막대기로 나무 줄기를 때려 딱딱 소리를 내라는 것이었다
자단 나무를 인도네시아 말로 소노크린이라고 부른다 앞장서서 걷던 현지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한 나무를 가리키며 소릴 질렀다 '소노크린'
나는 마침내 밀림 속에서 자단 나무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자단목의 줄기를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20. 교수의 집
///족자카르타의 가자마다 대학의 교수 조코의 응접실에 있는 탁자와 의자도 모두 자단으로 만든 가구들이었다
(사이)
지금까지 나는 청해진을 시발점으로 장보고가 개척했던 해상 루트를 따라 중국의 영파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 루트는 다시 인도네시아 그리고 조코 교수의 말처럼 인도양을 지나 아라비아 반도의 소하르까지
연결된다 이 광대한 바닷길을 학자들은 해양 실크로드라고 부르고 있다
21. 피라미드에서 도서관까지 연결
/// 세계 불가사의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이집트의 피라미드 내가 이집트를 찾은 것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관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이집트를 찾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인도네시아나 아라비아와 같은 먼 이국의 상품들이
신라로 수입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이들 나라로부터 수입만을 하고 있었을까 어차피 무역이란 물건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교환 행위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슬람세계에서도 신라의 물품을 수입하지는 않았을까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국립 박물관(도서관?)을 찾은 것은 그런 의혹을 풀기 위함이었다
(사이)
그런데 나는 카이로의 국립 도서관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신라에 관해 기록해 놓은
1200년전의 귀중한 책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분 쿠르다 지바가 쓴 '제 도로 및 제 왕국지'란 귀중한 자료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쓴 학자는 820년에 태어나 912년에 죽었음으로 바로 장보고와 동시대를 살았던 아랍 최고의 지리
학자였다
이 책에는 신라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었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동쪽에 있는 신라라는 나라는 황금이 많이 나는 살기 좋은 나라로 많은 이슬람 사람들이 개종을 하고
그곳에 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사실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랍 세계에서 신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많은 물품을 수입하고 있다고 정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이)
그뿐인가 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 자료실에는 더욱 놀라운 자료가 숨어있었다
그것은 알 이드리시가 쓴 '천해횡단갈망자의 산책'이란 특이한 이름의 책이었다
그 책 속에는 12세기 무렵의 세계 지도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 지도에는 '신라'라는 나라의 이름이 분명히 명기되어 있는 것이다
'신라'라는 이름을 세계 지도 속에서 발견한 순간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질식감을 느꼈다
그렇다.
아랍 민족들은 중국 동쪽에 있는 황금의 나라 신라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22. 배 그림
/// 이 무렵 아랍 세계는 큰 변혁을 맞고 있었다 그것은 광할한 사막을 무대로 낙타를 몰며 살고 있었던 유목
민족이던 이슬람인들이 바다를 발견한 것이었다
바다를 발견한 그들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해양 민족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의 오만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양에 면한 국가들이 해양으로 나가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탈바꿈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배였다
오만이 해양민족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성능이 좋은 배를 만드는 조선술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넓은 인도양을 헤쳐 나가는 항해술 또한 탁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점들이 이슬람 민족을 세계적인 상인 집단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라비아 상인이 탄생한 것은 이러한 해양 혁명기를 거친 후였던 것이다
23. 시장
/// 이슬람 상인
이들은 탁월한 항해술로 전세계로 뻗어 나갔다
그리하여 든든한 금융과 신용을 바탕으로 가장 인정받는 이슬람 상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 상인들에게도 물건을 사고 파는 독특한 공간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자르.
곧 시장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시장 문화가 발달한 곳이 이슬람 세계인데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오만의 재래 시장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재래 시장을 걷고 있던 나는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는 작은 화로 속에서 무엇인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무엇이냐고 묻자 소년은 푸랭크인센스라고
대답해 주었다 푸랭크인센스. 바로 유향 석가탑의 탑신 속에서 발견된 그 유향인 것이다
(사이)
그렇다
나는 우연히 오만에서 유향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장 한곳에는 유향만을 파는 상점들이 따로 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이 유향을 파는 상점들의
주인들이 대부분 두 눈만을 내놓고 온 몸을 아랍 특유의 검은 옷으로 감싼 여인들이었다
24. 자동차
/// 오만의 재래 시장에서 유향을 발견한 나는 오만이 유향의 특산지임을 알게 되었다
유향은 오만 남부의 고원지대 살라라의 특산물. 이곳은 사막 국가인 오만에서도 비교적 강수량이 많아
제법 나무도 있고 푸른 초원도 있지만 역시 사막임에는 틀림없는 휴양도시였다
유향나무 역시 점점 멸종되어 가고 있어 지금은 보호수로 지정되어 엄중한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사이)
25. 유향나무
/// 건조한 사막임으로 수백년 된 나무라야 키가 2-3m 밖에 되지 않는 외소한 유향나무들은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모습이었다
그 유향나무 밑에서 노인 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낫을 들어 말라비틀어진 가지를 이리저리
껍질을 벗겨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사이)
그러자 껍질이 벗겨진 나무의 피부에서 흰 진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지라 불리는 유향나무의 진액이었다
그리고 노인은 서툰 영어로 설명해주었다 이 나무의 소유주인기도 한 노인은 매일매일 나무의 껍질을 벗겨
수액이 나오도록 상처를 낸다는 것이다
그런 후 이삼일이 지나면 이 흰 수액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데 그것이 바로 유향이라는 것이었다
노인은 내게 낫을 넘겨주고 직접 해보라고 권했다
나도 노인의 작업을 흉내내어 나무 껍질을 벗겨보았다 서투른 내 작업에도 금방 나무 표면에서는 흰 수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내가 셋이라는 노인과 나는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 나무 그늘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노인은 자신이 채취한 유향의 냄새를 맡아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유향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독특한 냄새였다
석가탑에서 출토된 유향에서도 이런 냄새가 났을까
(사이)
유향나무 숲이 있는 언덕 아래로
멀리 한 떼의 대상들이 낙타를 몰고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카라반들이었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낙타에 가득 짐을 싣고 푸른 초원을 찾아 사막에서 사막으로
유목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낙타도 이미 고려 초에 거란인들이 우리나라에 몰고 왔다는 재밌는 일화가 떠올랐다
이때 낙타를 사육하는 방법을 몰랐던 조정에서는 쉰 네마리나 되는 낙타를 만부교 다리 아래 묶어 놓아
굶어 죽게 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유향 뿐 아니라 사막의 동물인 낙타도 이미 천년전에 우리나라에 직접 들어왔던 것이다
26. 밤 바닷가
/// 마침내 석가탑에서 출토된 유향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였던 바다거북의 등껍질인
대모로 만든 아름다운 머리 빗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수르의 밤바다로 나가보았다
울퉁불퉁한 사막의 밤길을 달려 푸른 거북의 산란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은 깊은 밤이었다
캄캄한 바닷가에는 흰 파도의 포말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알을 낳기 위해 모래사장으로 올라오는 거북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들은 신발을 벗었다
모래에 들어있는 인 성분이 걸어가는 충격에 의해서 부서지기 때문인지 우리들의 맨발에서는 푸른 인광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둠이 눈에 익자 모래사장 곳곳에서 두 개의 선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산란을 하기 위해서 올라온
거북의 발자국이었다
안내원의 말대로 모래사장 위에는 푸른 바다거북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작은 불빛이라도 보이면 신경이 예민해진 바다거북이 그대로 방향을 바꿔 바다 속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우리는 촬영하는데 필요한 조명조차 함부로 켤 수 없었다
(사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알을 낳느라 모래를 앞발로 끊임없이 헤치고 있는 거북을 발견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산란터를 마련하느라 부지런히 모래를 파헤쳐 웅덩이를 확보한 바다거북은
이번에는 뒷발로 알을 낳을 수 있는 보다 작은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안내원은 운이 좋으면 거북이 알 낳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귀뜸해 주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산통을 시작하는 거북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바다거북이 알을 낳기 시작했다
산란의 고통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어미 거북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막 쏟아지는 알 주위에서는 갓 태어난 거북이 새끼 한 마리가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 새끼 거북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모래 언덕을 필사적으로 기어올랐다
산란을 마친 어미 거북은 천천히 바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는 새끼 거북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어미와 새끼 거북의 모습은 말 그대로 생명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바다거북의 등껍질인 대모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은 바다에서 30년을 자라다가 200kg이 넘는 어른이
되었을 때 자기가 태어난 바닷가 고향을 찾아와 이렇게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거북들을 그렇게 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누가 저 바다를 춤추게 하고
누가 저 거북들에게 신비의 생명을 주고 있는가
장보고 추적을 위해 30만 km의 대 장정을 떠났던 2년여의 긴 여정 속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장면은
오만 바닷가에서 본 거북이 알을 낳는 바로 그 장면이었다
27. 뉴스 필름
/// 나는 마침내 석가탑에서 나온 유향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유향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가를 밝힐 수 있었다
흥덕대왕이 금령을 내렸던 대모와 자단목의 정체도 밝힐 수 있었다
28. 경주
/// 그 어렵고도 긴 여정을 끝내고 돌아와 다시 본 통일 신라의 왕도 경주의 모습은 내가 봐왔던 경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신라를 아시아의 동쪽에 위치한 작은 국가로 생각해 왔다
그리고 신라와 국제적으로 교역을 맺은 국가는 중국과 일본으로 한정되었다는 소극적 역사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200년전 벌써 신라인들의 물품이 이집트를 비롯해 전 이슬람 국가로 수출되었다는 사실을 이집트
국립 도서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뿐인가 많은 이슬람 상인들이 황금의 나라 신라에 정착해 살았다는
기록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처용 설화였다
28. 처용설화와 원성왕릉
/// 처용가는 신라의 향가 중 가장 유명한 노래인데
어느 날 처용랑이 밝은 경주의 달밤에
밤늦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춤추며 물러갔다는 처용랑이 부르는 노래다
(사이)
처용랑이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동경 밝은 달에 밤늦게 노닐다가 돌아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둘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기 것을 어찌하리오''
부정한 현장을 보고도 춤을 추는 처용의 모습에 감동한 역신이
앞으로 처용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물러가겠다고 약속했다는 설화 속의 처용랑을 많은 학자들은
아라비아에서 온 상인으로 보고 있다
이집트의 도서관에서 확인했던 황금의 나라 신라가 좋아서 정착했던 바로 그 아라비아 상인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30. 석인
/// 처용랑이 아라비아 상인임에 틀림없다는 증거는 흥덕왕의 할아버지였던 원성왕의 무덤을 지키는 두 명의
석인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머리에 두른 터번과 턱수염 오똑한 콧날의 모습은 전혀 우리민족의 모습이 아닌 서역인의 모습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흥덕왕릉을 지키는 석인에서도 발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처용랑은 아라비아에서 건너온 상인인 것이다
31. 청해진
/// 나는 대모와 유향, 자단목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이곳 청해진을 출발해 중국의 영파 더 나아가 인도네시아,
이집트, 오만을 잇는 해양실크로드를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장보고가 이끄는 신라선단이 당시 전 세계 무역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서양의 격언이 있듯이 장보고는 '모든 길은 청해진으로 통한다'는 신화를 만들었다
이는 모두 장보고가 개척하여 만든 바다의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테네인도 아니고 그리스인도 아니고 세계의 시민이다"
마찬가지로 장보고는 청해진인도 아니며 신라인도 아닌 위대한 세계의 시민이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장보고는 말한다 그대들은 나아가라
나아가서 땅에도 길을 만들고 하늘과 바다에도 길을 만들어 모든 길이 한국으로 통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라
(그리하여 나 장보고와 같은 위대한 세계 시민이 되어라)
(그것이 위대한 세계 시민이 되는 길이다) 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