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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긴 사랑과 우리의 짧은 생각
2022년 8월 10일 / 요나서 4:1-11
사실은 ‘나는 이렇게 설교를 준비한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려고 했다. 여러 목사님의 좋은 글들에 한 가지를 추가하여 설교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설교를 준비하다가 막힐 때, 하나님께 그 이유를 가르쳐 주실 때까지 구하고 찾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과는 달리 본문을 통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는 책망(?)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긴 사랑과 우리의 짧은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다.
잠 16:32 / 쉽사리 화내지 않는 이는 용사보다 더 낫고, 하나님의 긴 사랑과 우리의 짧은 생각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이는 성을 빼앗는 장군보다 더 낫다.
용사는 힘이 있는 사람이다. 힘으로 남을 정복하는 사람이다. 용사는 영웅이다. 세상은 영웅을 좋아한다. 알렉산더나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들은 사람들의 칭송과 부러움을 받는다. 사람이 한번 살아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말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화를 잘 안 내는 것과 마음을 다스는 게 뭐 그리 중요할까? 오히려 성을 빼앗고 영웅처럼 사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화를 잘 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린다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을 빼앗으면 사람들이 알아주고 환호를 보낸다. 이 땅에서 성공한 믿는 이들에게는 주목하되 자신을 절제하는 신앙에는 그다지 주목하지도 않거니와 별 관심도 주지 않는다.
■ 오늘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 (큰 바위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수님을 닮는 사람 / 주홍글씨로 유명한 미국 작가인 너새니얼 호손이 1850년 발표한 단편 소설. 미국에 있는 작은 마을. 이곳에는 큰 바위 얼굴이라 불리는 거대한 얼굴 모양의 바위산이 있다. 이 마을에 사는 평범한 주인공인 어니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이 바위산을 보고 자랐으며, 어머니로부터 언젠가 저 바위산과 닮은 얼굴의 위대한 인물이 등장할 것이라는 전설을 굳게 믿고 어린 시절부터 청년, 장년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살면서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데 네 명을 만나게 된다. / 어니스트가 소년기에 만난 첫 번째 인물은 개더골드(Gather Gold, 금을 긁어모으다)라는 별명의 재력가이다. 영악하고 탐욕스러운 인상에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전을 던져주는 모습을 보고 어니스트는 스캐터 코퍼(Scatter Copper, 동전을 뿌리는 자)가 어울릴 거라 생각을 했다. 실망한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 얼굴은 ‘실망하지 마라, 그는 반드시 나타난다!’라고 말해주는 거 같아서 다시 용기를 낸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개더골드는 망해서 초라하게 몰락했고, 비참하게 객사한다. 이는 수전노(守錢奴)를 뜻한다. / 세월이 흘러 청년 어니스트는 마을 내에서 목수로 지내면서 일을 돕고 있었는데, 그가 만난 두 번째 인물은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Old Blood And Thunder, 유혈 낭자한 노인)라는 유명한 장군이었다. 어니스트는 그에게서 강한 의지와 힘은 볼 수 있었지만, 자애로움과 지혜는 볼 수 없었음을 깨닫고 실망을 한다. 하지만 큰 바위 얼굴은 ‘실망하지 말라. 언젠가 때는 다시 올 것이다.’라며 말없이 위로한다. 이는 전쟁 (戰爭狂)을 뜻한다. / 다시 세월이 흘러서 장년 어니스트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며 목수로 일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가 만난 세 번째 인물은 올드 스토니 피즈(Old Stony Phiz, 늙은 바위 얼굴)라는 성공한 정치가였다. 어니스트는 그가 큰 바위 얼굴처럼 당당하고 힘찬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에게서 큰바위 얼굴의 장엄함이나 위풍, 신과 같은 위대한 사랑과 같은 표정보다는 권력과 명예욕에 찌든 인상이 가득함을 알고 또 다시 실망한다. 큰 바위 얼굴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니 용기를 가지거라.’라며 말을 하는 듯하다. 이는 정치꾼(政治꾼)을 뜻한다. / 세월은 덧없이 계속 흘러갔다. 이제 어니스트의 머리에도 하얀 서리가 내렸다. 이마에는 점잖게 주름살이 생기고, 두 뺨에도 고랑이 파였다. 그는 정말 늙은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냥 나이만 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무성한 백발보다 풍부하게 지혜로운 생각이 들어 있었다. 이마와 뺨의 주름살 역시 그동안 인생의 항로를 여행하며 겪은 시련을 통해 얻은 지혜가 깃들여 있었다. 어니스트는 이제 이름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명예를 찾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따라다니는 명예가 그를 찾아왔다. 그가 살고 있는 그 산골짜기를 넘어 그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노년기에 접어든 어니스트는 목수일을 자녀들에게 맡긴 뒤 목수 일에서 은퇴하고, 사람들을 깨우치는 설교가가 되었다. 어니스트가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을 그 무렵,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로 새로운 시인 한 사람 이곳에 나타났다. 그 역시 이 골짜기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그 고장을 멀리 떠나 일생의 태반을 시끄러운 도시 속에서 살면서도 거기서 꿈같이 아름다운 음률을 쏟아 놓고 있었다. 그곳 출신인 유명한 시인의 시를 보고 감탄하며 큰 바위 얼굴을 보며 ‘이 사람이야말로 당신을 닮은 거 아닌가요?’라고 외치는데, 얼굴은 미소짓는 거 같지만 대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시인을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던 어니스트는 이 사람이 그 시인임을 알게 되고 얼굴이 큰 바위와 달라서 실망한다. / 하지만 시인은 그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한다. 시인 본인도 시를 쓰며 훌륭한 이상을 꿈꿨지만, 빈약하고 천한 현실 속에서 살기를 택하게 되고, 항상 신념을 지키지는 못한 채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왔음을 인정한다. 두 사람은 친하게 지냈다. / 어니스트의 설교를 들기 위해 많은 사람이 온 것을 보고 시인은 어니스트가 곧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인물임을 알게 된다. 놀란 시인이 사람들에게 “보시오! 어니스트 씨가 저 바위 얼굴이랑 비슷하지 않은가요!”라고 외치자 사람들이 비로소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났음을 알고 놀랐다. / 정작 어니스트 본인은 자신보다 더욱 훌륭한 인물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일 것이라고 말하며 그런 사람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차분하게 말을 끝내며 내려온다. 그리고 큰 바위 얼굴은 어니스트의 말처럼 말없이 어니스트가 그리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성경에서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히 12:2 /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 성을 빼앗은 것은 남을 정복하는 것이지만 화를 잘 내지 않는 것은 자신을 정복하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먼저 성도들의 마음에 임한다(심령천국).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마음을 먼저 다스려야 한다. 화를 내면 다툼이 생기기 쉽다. 화를 내면 죄를 짓기 쉽다. 그래서 화를 잘 내는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어렵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내 안에 이런 것들이 있어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쉽게 빼앗겨 버린다. 눈에 보이는 성을 빼앗는 것도 귀한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은 더욱 가치있는 일로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자에게 주신다.
우선 몇 가지 말씀으로 서론과 결론을 대신한다.
▶ 누가복음 9:51-56에 있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는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동네에 방을 구하러 미리 심부름꾼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돌아왔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 마을 사람들이 일행들을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거절 아니 심한 욕지거리를 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냥 거절했다면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태워 버릴까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
왜 예수님이 꾸짖으셨을까? 제자들 특히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네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눅 9:1-2, 5 / … 모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온 것을 사방에 알리고 병자를 고치라고 그들을 내보내시며 5) 너희가 동네에 들어갔을 때 그 동네 사람들이 너희가 전하는 말을 듣지 않거든 그곳을 떠나라. 떠나면서 그들을 경고하는 표로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려라)을 과시나 하려는 듯 열왕기하 1:2-17에 나오는 엘리야가 된 것처럼 “선생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태워 버릴까요?”라고 흉내를 내었을 것이다.
열왕기하 1:2-17에서 하시야 왕이 즉각 특공대장 한 사람과 그의 부하 50명을 보내 엘리야를 붙잡아 오게 하는데, 그들이 어느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엘리야를 찾았다. 특공대장이 그곳에 앉아 있는 예언자에게로 다가가서는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장 내려갑시다! 어명입니다!’하고 말하였다. 이때 엘리야가 이렇게 대응하였다. ‘내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삼켜 버릴 것이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특공대장과 그의 부하 50명을 태워 버렸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엘리야처럼 자기네들도 하늘을 명하여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런 요청을 한 것이다.
우리는 왜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부했는지를 나름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9:51-56에서 누구보다 예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왜 거절했는가를 살펴보자. 평소 같았으면 자기들을 향해 오신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했을 것이다. 복음도 전해주시고, 기적을 통해 많은 병자도 고쳐주셨고, 유대인들과는 달리 자기네들을 멸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다는 것 때문에 영접하지 않았다. 성경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정황으로 그 이유를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인데, 예수님이 머물 수 있도록 준비하러 왔노라’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때 제자들이 뭐라고 대답했을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라고 했겠는가? 단언컨대 제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누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눅 9:22 /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그러나 제자 중 누구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귀담아듣고 마음에 새긴 사람이 없었다. 그랬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투기까지 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이 십자가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큰 영광을 얻기 위해서 가시는 길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들어간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느냐?’고 묻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뭐라고 대답했을지 나름대로 짐작이 된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 올라가신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오직 그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제자들의 짧은 생각이 드러나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한 것 같다.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다고 하였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부했을까? 서로 모시려고 했을 것이다. 하룻밤 묵고 가시되 아침 식사도 잘 대접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A급은 아닐지라도 B급의 신앙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C급이라고 되었을 것이다.
▶ 마태복음 26:47-54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 제자에게 많은 교훈을 주며, 왜 예수님이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9-30)라고 하셨는지를 알려주시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마치신 후 제자들을 깨우시자 이때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보낸 칼과 몽둥이를 든 무리가 함께 왔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붙잡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 하나가 대제사장 종의 귀를 칼로 쳤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며 제자들에게 충고하셨다. 우리도 명심해야 할 말씀이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더 넘는 천사들을 보내어 우리를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나 만일 내가 그렇게 한다면 이미 이 일이 일어나리라고 한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이 당시에 있었던 일들은 귀가 잘려나갔다가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말고를 통하여 널리 전파되었을 것이며, 멀지 않아 말고도 예수님을 믿는 성실한 성도가 되었을 것이다.
결론을 먼저 드린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원하셨던 일이 무엇인가?
창 12:1-3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3) 네게 복 빌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복을 내리리라. 네게 저주를 퍼붓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저주를 퍼부으리라. 무릇 땅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복의 근원(根源)으로 만들려고 하셨다. 이러한 사명은 아브라함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주어진 사명이었다.
출 19:4-6 / `내가 애굽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또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어떻게 내게로 데리고 왔는지 너희는 다 보았다. 5) 온 누리가 다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뭇 민족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되리라. 6) 너희야말로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드시 일러주어라.'
사도들을 비롯하여 성령을 받은 믿음의 형제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요 20:21-23 /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그러고 나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 23) 만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만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눅 24:47-49 / 그리고 내게 돌아오는 사람은 모두 죄를 용서받는다는 이 구원의 도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48) 너희는 이 예언들이 이루어진 것을 목격한 증인들이다. 49) 이제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러니 너희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성령이 오셔서 하늘의 능력을 채워 주실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행 1:6-9 /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을 때에 사도들이 물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때가 언제인가는 아버지께서 정해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긴 사랑과 우리의 짧은 생각>이란 제목으로 본론을 장식하려고 한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어 살펴보면서 이기적이고, 불순종하고, 냉정한 요나의 생각과 마음과는 정반대인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셨다.
➊ 니느웨 성읍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용서와 긍휼이셨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1:2). 다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욘 3:2). 요나서 마지막에서는 이렇게 말씀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 하나님께서는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 성읍을 향해 처음부터 용서와 긍휼의 마음을 품고 계셨다.
니느웨는 앗수르 대국의 수도였는데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준 악독한 원수의 나라였다. 심지어 니느웨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그들을 죽인 다음 그들의 가죽을 벗겨서 니느웨 성벽에 진열해 놓았다고 한다. 앗수르는 그 당시 가장 악독하고 무자비한 나라였다. 하나님까지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하셨다(욘 1:2). 요사이 말로 하면 앗수르는 가장 악독한 ‘악의 축’이었다.
그럴지라도 ‘악의 축’이었던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성읍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저주와 심판 이전에 불쌍히 여기시며 아끼시는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셨다.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생각과 마음이셨다. 그래서 요나에게 거듭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욘 3:2)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➋ 이기적이고 불순종하고 냉정한 선지자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도 자비와 긍휼의 생각과 마음이셨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요나는 자격이 없는 선지자였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전할 자격이 없는 무자격 선지자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을 선지자로 선택하시고 그를 니느웨로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자격이 없음을 모르셔서 실수로 그를 선택하신 것은 아니셨다. 다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셨다. 사실 요나는 요나서가 증거이듯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이기적이고, 불순종하고, 냉정하여 선지자로서 큰 일을 맡길 귀한 선지자는 아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하나님의 특사와 선지자로 부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딤전 1:12-15 / 그리스도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나님의 분부를 거역하고 불순종하면서 니느웨 대신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를 그대로 내 버려두시지도 않고, 큰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으신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다.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끄집어내신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으며, 그를 억지로라도 니느웨로 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에게 화를 내면서 대드는 요나 선지자에게 호소적인 말씀을 하신 것조차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다.
욘 4:10-11 / 그때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수고도 하지 않았고 네가 키우지도 않았고 그저 하룻밤 사이에 나타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저 박넝쿨 한 포기에 대하여서도 슬퍼하고 있다. 11) 그렇다면 좌우를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 이상이나 있고 수많은 가축들이 있는 저 큰 도성 니느웨에 대해 어찌 내가 슬퍼하지 않겠느냐?”
2. 요나의 생각과 마음은 불만과 증오와 분노였다.
요나는 하나님과 니느웨 성읍에 대해서 불만과 증오와 분노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요나에게 임했을 때, 요나는 불만을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쳤다.
욘 1:3 /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서 4장에 보면 요나의 생각과 마음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니느웨 성읍에 대해서 불만과 증오와 분노로 가득했다. 니느웨 성읍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한 처사에 대해서 항의를 하면서 ‘죽고 싶다’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욘 4:1-3 /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들을 변경시키시자 요나가 잔뜩 화가 났다. 2) 그는 주께 불평하는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주님! 제가 고향 땅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주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시요 노를 더디 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그 악한 백성을 멸망시키려고 세웠던 계획을 쉽게 취소하시리라는 것을 제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그러니 이제 주님, 제발 저를 죽이십시오. 제가 그들에게 전해 준 일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바에야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니느웨 성읍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당연히 기뻐해야 했는데, 요나는 오히려 싫어하고 분노했다.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니느웨 성읍에 대한 요나의 생각과 마음은 불만과 증오, 분노로 가득한 반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용서와 자비, 긍휼은 없었다.
선지자라면 기본적으로 자신도 죄인임을 알고, 니느웨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위해 간구하는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데 요나는 거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자신은 니느웨 사람에 비하면 완벽하고 의롭다고 생각했기에 도도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에게 항변까지 했다.
3. 모세가 화를 낸 것과 요나를 비교하면서
민수기 20:1-13을 묵상하면서 가데스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교훈이 얻었으면 한다.
민 20:1-13 / 그해 정월 이스라엘 온 공동체는 신 광야로 옮겨 오랫동안 가데스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미리암이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묻혔다. 2) 그들이 진을 친 곳에는 물이 없었다. 그러자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대들면서 3) 이렇게 항의하였다. `우리 이스라엘 형제들이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죽을 때 차라리 우리도 함께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소! 4) 당신들은 어째서 여호와를 모시고 사는 이 무리를 광야로 이끌어 내어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게 하는거요? 5) 어쩌자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렇게 험악한 광야까지 끌고 나왔단 말이오? 이 거친 광야에서는 농사 지을 곳도 없고, 무화과 포도도 석류도 자라지 못하오. 더구나 마실 물마저 없지 않소!' 6) 모세와 아론이 무리를 떠나 만남의 장막문 앞에 이르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 앞에 찬란하게 빛났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계약궤 앞에 둔 지팡이를 들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온 백성을 불러모아라. 그런 다음 그들이 보고 있는 데에서 바위를 향하여 물이 터지라고 명령하여라. 그러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물을 너희 온 무리와 가축까지도 마시도록 하여라.' 9)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세가 가서 지팡이를 가져왔다. 10) 모세와 아론은 바위 앞에 온 공동체를 모아 놓았다. 모세가 입을 열었다. `이 반항하는 무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내가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 11) 그가 지팡이를 든 손을 쳐들어 바위를 두 번 내리치자 물이 콸콸 솟구쳐 나왔다. 온 무리와 가축들이 바위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마셨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나를 굳건히 믿지 아니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거룩한 힘을 드러내지 못하였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이 무리를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13)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불평을 하였기 때문에 `불평하다'라는 뜻으로 므리바라고 불렀지만 여호와께서는 물이 터져 나오게 함으로써 당신이 거룩하시고 힘이 있으신 분임을 드러내신 곳이기도 하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의 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약 1:20)고 하였다. 모세는 백성들을 향해, ‘너희 반역자들아’(민 20:10)라고 외쳤다.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던 목자요, 그들을 위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던 모세의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말이 나왔다. 모세의 분노는 백성들로 인한 것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요,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은 장면이다. 그러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인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는지?(요 1:29)
사 53:7 / 그는 학대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그 고통을 다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고 털 깎는 자 앞에 선 어미 양처럼 입 한번 열지 않고 모든 고난을 다 참았다.
4.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이 어떠한지..
요나서가 주는 큰 교훈 몇 가지를 생각한다.
➊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제사장이나 레위처럼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모른 척하면서 지나치지 말고 멸시 천대를 받아온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와 넘치는 긍휼을 베풀어야 했을 것이다(눅 10:25-37). 사랑하는 못한 죄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이다.
➋ 선지자뿐만이 아니라 성도에게는 세상을 향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 만일 이를 준행하지 않았을 때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에게 무섭게 책망하신 것과 같은 책망(이 악하고 게으른 놈아! 네가 나를 그런 매정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면 너는 적어도 내 돈을 이자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겨 두어 내가 이자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여봐라, 이자가 가진 돈을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더 많이 받아서 풍족하게 될 것이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이 쓸모없는 인간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이 들려올 것이다(마 25:26-30).
➌ 우리들도 다 요나와 같이 잘 믿는다고 하지만 이기적인 짧은 생각이 너무 많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우리는 모두 요나와 같다. 솔직히 우리는 이기적인 면에서 요나와 같고, 불순종하는 것도 요나와 같다. 무정하고 냉정한 것, 증오하고 분노하는 것도 요나와 같다.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에는 자비도 긍휼도 없다. 그러니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모른 척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성경을 조금 안다고 ‘말씀 말씀’하면서 남을 정죄하며 판단하는 데에 급급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마 6:33)를 강조하신 것이 아닌가...
4.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후의 일을 우리는 알지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요나에게 답을 제시하고 싶다.
눅 13:1-5 / [회개하지 않으면] 이 무렵 예수께서는 갈릴리 출신의 유대 사람 몇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다가 빌라도에게 학살되었다는 말을 들으셨다. 2)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서 그 같은 일을 당하였겠느냐? 3) 아니다. 너희도 너희 악한 길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4) 실로암 탑이 무너졌을 때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은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그들이 예루살렘에 살던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었기 때문이냐? 5)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쓰러질 것이다.‘
예수님께 찾아와 보고한 사람들은 빌라도의 칼에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지은 죄가 많아 그렇게 끔찍한 죽음을 당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웃의 죽음과 슬픔을 죄의 대가로 해석하여 그들을 정죄하고 은근히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세우려는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예수님은 아셨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을 추가로 언급하셨다. 빌라도의 칼에 처참하게 죽임당한 사람이나 공사장에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망하리라고 하시며 속히 회개의 열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충고하셨다(눅 13:6-9).
빌라도의 칼에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을 이야기로 삼는 자신들 역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가엾은 존재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제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며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바로 포도원에 심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라는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서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을 것이다.
우리 또한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비유를 듣고 있던 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정죄할까 두렵다. 우리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포도원의 무화과나무들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를 몇 번이나 하시는데, 아직도 죄의 심각함을 모르고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해하실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사도 바울이 권면한 빌립보서 2장으로 설교를 마친다.
마 5:38-48 / 또 모세의 율법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눈을 상하게 하였거든 자기 눈도 상하게 하라. 만일 남의 이를 부러뜨렸거든 자기 이도 부러뜨리라'라고 하였다. 39)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43) 또 모세의 율법에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이 있다.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46)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미덕이 되겠느냐?(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47) 만일 너희가 너희 이웃들과만 가까이 지낸다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는 하고 있다. 48) 그러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
빌 2:1-11 /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격려해 줄 마음 가짐이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나를 도울 마음이 우러날 만큼 나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가 함께 성령을 받았고 주님 안에서 형제가 되어 있다는 참다운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애정이 있고 동정심이 있습니까? 2)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마음을 열어 화합하십시오. 한마음과 한생각과 한목적을 가지고 함께 일하여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십시오. 3) 자기 본위가 되거나 남에게 과장된 행동을 하지 말고 겸손하게 남을 존중해 주십시오. 4)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지 말고 남에게도 눈을 돌려 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5)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으십시오. 6)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7)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8)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9)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