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실종신고 소동의 전말(顚末)
개암 김동출(프란치스코(
필자는 창원시 N 성당에 교적을 두고 있는 카톨릭신자다. 얼마 전에 [카톨릭 마산교구 제237차 남성(男性)꾸르실료( 2023.8.3~6)]에 필자가 속한 <바오로회>의 회원 '조 베드로' 형제님(나와 양띠 갑장)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 성당에서는 3주 전부터 본당의 주부(週報)에 공지하여 ‘조 베드로’ 교우를 위한 기도를 당부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울뜨레아회('꾸르실료' 과정을 이수한 '꾸르실리스따'의 모임)에서도 ‘정 베로니카 회장’을 중심으로 한시적으로 카카오톡에 단체방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조 베드로 형제님을 위하여 주님께 은총을 구하는 ‘빨랑카(영적,봉사,물질적 도움)’에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하였다.
2016년 8월에 본 과정을 이수하여 꾸르실리스타’가 된 필자는 신임회장이 카카오톡 [꾸르실리스타] 단체 톡 방에 안내한 지시대로 사도적 활동을 다하고자 맘먹고 2023 ‘남성꾸르실료’ 일정(3박 4일 과정)에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7월 3일 오후 2시 성당에 나가 조 베드로 형제의 꾸료실료 환송식에 참여하였다. 꾸르실리스타 남녀 회원들 함께 조 베드로 형제의 은총을 구하는 묵주기도를 바치고 주임 신부님의 강복과 안수기도를 지켜본 후 성전 가운데 양편으로 줄을 서서 주인공을 환송하고 교욱관까지 배웅하여 환영식 까지 참석하여 '데꼴로레스'를 외치며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조 베드로 형제의 꾸르실료 과정의 마지막 날 새벽에 행하는 ‘마냐니타’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2시 20분경에 잠든 아내와 딸을 두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금방 나온 우리 집 문이 잠시 열렸다 닫히는 것을 직감하였지만, 이 찰나의 순간이 몇 시간 뒤에 일어난 나의 실종신고의 화근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일행은 새벽 3시 10분경에 목적지 ‘마산교구가톨릭교육관’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성가대 복장으로 갈아입고 교육관 실내로 이동하였으나 나는 새벽 5시 정각에 ‘새벽 약 먹는 시간 알람’이 설정된 휴대폰을 일부러 차에다 두고 내렸다. 일찍 도착한 우리 일행은 다른 성당에서 모여든 ‘꾸르실리스타’ 들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깜깜한 새벽에 전구 촛불을 들고 한복 대열의 계단에 이어 서서 촛불을 켜고 ‘마냐니따’를 이어 부르며 감동의 그 순간을 맞이하였다. << 먼동 틉니다. 잠을 깨세요. 동녘 하늘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이 새벽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참 뒤에 우리의 주인공 ‘조 베드로’로 형제님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 앞으로 지나쳤다. 이렇게 하여 꾸르실료 선.후배가 성당에 모여 새벽 미사를 봉헌하였다. 미사를 다 마치고 마침 성가도 끝날 즈음이었다.
갑자기 미사 전례 봉사자가 마이크로 마사 석을 두리번거리면서 “남성동 성당 김 프란치스코 형제님 손들어 보세요.” 멀뚱히 일어선 나를 보고 “성당 문 앞으로 나가세요” 하는 게 아닌가. 순간, 새벽 미사에 참석한 꾸르실리스타들이 '무슨 일일까?" 웅성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당황하며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경찰관( 구산파출소) 앞으로 나갔다.
다소 긴장한 표정이 누그러진 긴급 출동한 경찰관 2명이 나를 확인하였다. 〇〇씨 아세요? 네 제 아들입니다. 아들한테서 아버지 실종신고가 들어 왔어요? 듣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님으로부터 112로 실종 신고가 들어와 휴대폰으로 위치 추적한 결과 여기(천주교마산교구, 마산카톨릭교육관)까지 찾아오게 됐다’고 말하면서 바깥으로 임의 동행해 줄 것을부탁 하였다.
나의 일정을 미처 몰랐던 딸은 남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잠든 제 엄마를 깨우기 싫어 혼자 집을 나서 평소 나서던 주변 산책길을 돌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게 되자 이웃에 사는 동생을 깨워서 나의 부재를 알렸단다. 아들은 5Km 새벽길을 달려 N 성당에서 나의 승용차를 확인하고 곧 112에 실종신고를 하였다. 112에서는 곧 위치 추적을 한 결과 [구산면 이순신로 000-000]으로 나왔단다. 112에서 나의 실종 신고를 이관받은 ‘구〇파출소’에서 아들에게 전화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결국 주소를 추적하여 출동한 경찰관이 ‘마산교구 카톨릭’교육관‘에서 새벽 미사를 끝낸 즈음에 실종된 본인을 찾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런 소동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오롯이 나의 병력 때문이었다. 남들에게는 그냥 종교행사에서 보기 힘든 사소한 일일 테지만, 평소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을 가지고 다니는 나와 우리 가족에게는 심장이식 환자인 내가 ‘심정지’ 당할지도 모르는 남모르는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8년 전인 [제000차 꾸르실료(2016.8.4~7)]를 수료한 필자는 꾸르실료 교육과정 <13.고해성사> 시간 중에 ‘백남국 지도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면서 당시 ‘나의 지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그 후 2019년 2월 초등교직에서 정년퇴직한 후 ‘하지부종下肢浮腫’으로 창원 소재 대학병원 심장 내과에 입원하여 2개월 동안 입원하였다. 당시 나의 주치의는 불치병으로 진단하여 한동안 나는 절망감 속에서 헤매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 서울 사는 딸의 주선으로 2019년 8월 초에 심장이식 수술로 유명한 서울 A병원으로 전원하게 되었다.
그곳 응급실에서 2일간 관련 병증의 정밀검사를 받은 후 8월 11일 새벽 3시에 1인실 병실에 입원하였다. 이후 심장내과 주치의 이상언 박사의 진단으로 좌심실 보조장치(LVAD)를 달고 8개월 동안 입 퇴원을 반복하였다. 되풀이되는 입원으로 잦은 섬망(譫妄) 증세와 항생제 내성균에 시달리며 심장이식 대기 환자로 병원 생활을 지속하였다. 나의 의지가 약해지고 흔들릴 때마다 꼬마 십자고상을 품고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41,10)]을 암송하면서 입원 중에는 매주 금요일에 봉성체’를 받으면서 전능하신 주님께 매달려 “전능하신 주님, 불쌍한 저의 병을 낫게 해 주십사”고 기도드렸다.
몸은 해골같이 마르고, 손톱은 망가져 약봉지도 내 손으로 찢을 수 없고, 거동조차 힘든 상태로 8개월을 기다린 즈음의 주 하느님께서는 간절한 나의 기도에 마침내 응답해 주셨다. 2020년 4월 29일 드디어 애타게 기다렸던 심장이식 수술을 받게 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하느님께서는 2016년 8월 6일 고해성사에서 바친 나의 기도 후 1,393일 만에 기적 같은 특별한 은총을 내려 주신 것이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내게 주신 기적 같은 선물은 <좋은 병원, 좋은 의사, 귀한 뇌사자의 심장을 찾아 주신 것> 이었다.
출동한 경찰관에게 내 모습 사진을 증거로 넘겨주고 뒤돌아오는 차 중에서 7년 전 무더운 여름철에 있엇던 나의 ‘꾸료실료’ 과정을 회상하였다. 그때 나는, ‘죽으면 죽어리라’ 굳은 결심으로 위중한 나의 병세를 숨기고 숨을 헐떡이면서 꾸료실료 과정에 임했다. 죽을 다해 기도하면서 <13 과정-고해성사> 시간에 당시 지도신부님이셨던 백남국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면서 ‘나의 병을 낫게 해 주십사’ 간절하게 기도드렸던 기억과 이러한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느님에 대한 기적 같은 고마움을 되새겨 보았다.
이제와 나의 실종신고의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 나의 딸과 아들은 나의 생명을 구해준 혈육의 은인이다. 동업자인 딸은 2019년 겨울방학 내내 병간호에 지쳐버린 아내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병상 옆에서 쪽 잠자며 나를 지켜 준 효성의 은혜로 최근에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최근 프랑스계 다국적 기업 [S.Electric Korea]의 직장에서 팀장으로 승진한 아들은 나의 입원 기간 중 중요한 고비 때마다 휴가를 내어 든든한 보호자로서 내 곁을 지켜 주었다. 이번 ‘나의 실종신고 소동’은 하느님께서 ‘나의 쾌유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의 고마운 은혜를 잊지 말라’고 믿음이 강한 나의 딸을 통해 전해 주신 그 깊은 뜻은 ‘점점 나태해지는 나의 신앙생활’을 경고한 ‘신앙 정신 실종신고’가 아니었나 성찰해 본 기회가 되었다.
이 기회에 서울 A 병원에서 장기간 입원해 있는 동안 필자를 보살펴 주신 의료진 선생님은 물론, 병실을 찾아 기도해 주신 ‘이성렬 요셉 신부님’과 딸의 영적 지도자이신 ‘박상록 목사님’, 우리 성당 교우 여러분, 본가와 처가의 어르신, 치명자들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 여러분, 나의 학연과 고향 친구들, 그리고 고맙고 미안한 하늘나라 계신 그분과 그분 가족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앞으로 더욱 겸손한 자세로 <끊임없이 신심을 걷고자 주님께 은총을 구하며 성실한 사도적(使徒的) 활동을 다 할 것>을 기도드린다. 무더운 이 시간에 병고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환우와 가족 여러분께서도 <어둠의 옷 벗고 광명의 갑옷을 어서 입으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수필 작가 노트>
수필이라고 쓴 것이 ‘병마를 이겨낸 어느 환자의 병상 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글을 대하시는 분께서는 특정한 종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분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병중에서 ‘견진성사까지 받은 가톨릭 신자인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항상 제 곁에 계신 주님께 매달리며 부지런히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이 글을 대하는 여러분께는 한때나마 병상에 있었던 본인과 본인 가족의 경험을 생각하며 이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20230812
첫댓글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던 그 고통을 어찌 알리오마는 가족의 입장에서는 초긴장 상태로 예민했겠어요.
소통 부재가 빚은 해프닝으로 보입니다.
앞으로는 일거수일투족을 투명하게 하여 걱정을 내려 놓도록 하셔야 하겠습니다.
가족들 얼마나 속이 탓을까요?
그러나 가족간의 사랑을 확인했으니 그냥 웃지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