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 비유로 시작해보는 횡설수설 고백>
열 처녀 비유를 싫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한다는 메시지가 일으키는 공포심이 싫었다. 더군다나 어떤 기준에 부합하는 이와 부합하지 못하는 이들의 당락을 구분하는 천국을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강대상 앞에 선 전도사님이든, 주일학교 선생님이든, 가정예배를 드리자고 나선 고모든, 열 처녀 비유를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 속 어딘가가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비유를 들려주는 신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았고, 그래서 두려웠고, 이런 신이 묘사하는 천국은 굉장히 냉정한 장소 같았다. 어쩐지 장애를 가진 부모와 자녀인 나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던 그 냉랭함을 떠올리게 하는....... 그렇다고 성경말씀을 듣고 나서 드는 공포나 반발 같은 모호하고 두려운 마음작용을 들여다볼 용기는 없었다. 내가 아직 뭘 몰라서 그런 거라고. 언젠가는 제대로 알게 될 날이 올 거라고. 그래서 모호한 감정덩어리와 정리되지 않은 물음 같은 것은 매번 무시하거나 덮어왔다. 그렇게 없는 척 해야만, 발 딛고 있는 이 곳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늘나라에서조차.
지금에 와서 굳이 용기내어 말하자면 그렇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를 나누고 비교하는 대목부터 불편했다. 슬기롭든 미련하든 그것도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결과가 아닌가, 싶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왔다. 오랜 시간 미련한 다섯 처녀 쪽에 감정이입을 해왔을 것이다. 찬찬하지 못하고 덤벙대고, 임기응변으로 모면한 순간에 한숨 내쉬면서도 개선될 여지가 별로 없는 내 모습을 내내 싫어했다. 그래서 특히나 불안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여간 애쓰지 않으면 슬기 있는 처녀들처럼 미리 뭘 준비하고 강단있게 거절 하는 모습을 갖기 어려울 텐데, 싶기도 했을 테고. 인간미 없는(?) 모범생들과 슬기있는 처녀들은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인가, 하며 화도 내고 싶었을 것이다. 내 모습 같지 않은 모습이 되어서라도 뭘 더 준비하고 커트라인 안에 들기 위해서 안달하던 삶이 얼마나 지긋지긋했는데. 성경책에서조차 비교하고 닦달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유일한 삶의 안식처라고 여기던 곳마저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나의 불안을 최대치로 증폭시켰다. 쉬지도 않고 이곳을 꿰뚫어 보는 자이며 칼 같은 심판자여서, 미련하고 부족한 자에게는 문을 닫고 안면몰수하는 존재를 상상하기 시작하면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분이 하나님이라고? 그런 존재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매치하려고 할 때마다 혼란을 느꼈다. 나를 사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니. 속을 알 수 없는 그분을 더 이상 구체적으로 생각하기가 두려워졌다.
천국에 대한 비유는 더 이상 뜯어서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 여기의 하나님 나라를 이룩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 할 때의 그 '천국'과 '그 날과 그 때를 알 수 없는, 주님이 오실 그 날'이 말하는 '천국'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싶어서였다. 내게 떠오른 의문이 의심이 될까 두려워 성급히 생각을 마치고 단순한 일상에 매몰되기를 반복해왔다. 불경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은 그 어떤 의문도 이겨먹었다.
빨리 천국에 데려가 주세요, 하던 고모를 떠올릴 때마다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죽으면 썩을 몸이라며 온갖 고생을 자처하던 사람이었다. 저 천국에서 잘 살기만 바랄 뿐 이 땅에는 미련이 없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어떤 쾌락도 호사도 무시하는 척하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고생만 하고 살던 고모는 소원대로 작년에 천국에 갔다. 하지만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들면 불안해지기 한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없다면 우리 고모 같은 사람의 삶은 불쌍해서 어떡하나, 하는 생각 말이다. 만약에, 만약에 그렇다면, 이 책임을 도대체 누구에게 돌려야 하나, 하는 분노가 굶은 개처럼 마음 속에 늘 도사리고 있다. 아니다. 이 생각은 무엇보다 우리 엄마 때문에 갖기 시작했다.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한 점 먹을 거리라도 간절히 바라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살아 온 우리 엄마 말이다.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모든 복잡한 생각들을 없는 듯이 눌러버린 순간이 가장 편안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며 겁을 주는 존재가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고 나도 모르게 혼자서 분노하던 순간. 어쩌면 인간들이 만들어낸 말장난에 내가 속은 것 아닌가, 하고 또 혼자서 회의하던 순간. 아니다. 내가 뭘 몰라서 이런 것일 거다, 혼자서 일렁이고 혼자서 눌러온 이 모든 순간들. 규정하기 어려운 이 모든 두려움과 혼란에 짓눌리느니 무신론자로 사는 편이 합리적인 선택일 거라고 생각하게 만든 씨앗이 되었을 것이다. 대충 무마하고 대충 눙치고 대충 넘어가던 순간들 말이다. 엄두가 나지는 않지만 조금씩 대면해 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감추고 무시하고 덮어두던 것들이 내가 희미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몇 가지 질문들만은 아닐 것 같아서 말이다. 그 안에 든 다른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없는 듯이 살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이다.
마태복음 25: 1~13
1 "그런데, 하늘 나라는 이런 일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처녀 열 사람이 등불을 마련하여,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마련하였으나, 기름은 여분으로 마련하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불과 함께 통에 기름도 마련하였다.
5 신랑이 늦어지니,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7 그 때에 그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제 등불을 손질하였다.
8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 하였다.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12 그러나 그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13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1)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말씀 묵상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엄마, 고모, 은혜님 자신에 대한 사유와 질문도 성숙된 신앙인의 자세로 읽혔습니다. 덕분에 저도 성령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말씀 잘 읽었습니다.
미숙한 사람의 횡설수설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읽고 받아들여주셔서 많이많이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위축되지 않고 자꾸만 더 나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
말씀 묵상 고맙습니다. 다시한번 잘 읽어보았어요. 질문은 의심일까? 어린시절 저도 늘 가졌던 죄의식입니다. 은혜님이 기쁘게 예배드리고 공부하는 모습에서 늘 배웁니다.
낯설기만한 서울이었는데 어제는 샛별님 덕분에 '쌩~'하고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늘 함께 공부하는 교회라서 기쁩니다.
은혜님 말씀 묵상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전에서 한번 뵈었지만 일부러 시간 내어서 댓글 달아주시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일 잘 치르시고, 몸도 건강히 잘 지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