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 동산
녹음이 짙어지는 싱그러운 초여름 휴일이다. 동생네와 미동산 수목원에 가기로 했다. 미동산 수목원은 다양한 자연과학생태관과 체험실, 물길을 따라 풍광을 즐기며 걷기에도 부담이 없어 자주 가는 편이다. 데크로 이어진 편안한 오솔길, 메타세콰이어가 줄지어 서 있는 그 길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등산로를 한 바퀴 돌아 내려올 때면 흐르는 땀을 식히며 상쾌한 기분에 웃음을 퍼 올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오늘은 쉬엄쉬엄 걸어도 힘들어하는 동생이 안쓰럽고 마음이 아프다. 아무래도 메타세콰이어 길까지 가는 건 무리인 것 같다. 다리를 건너 유전자 보존원 쪽으로 내려왔다. 기력도 떨어지고 먹고 싶은 것도 없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남편은 맛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경관이 좋은 찻집에 가서 쉬어가자고 했다. 신선한 채소와 구수한 된장 보리밥, 동생이 좋아하는 간장게장으로 입맛을 돋우고, 영산홍이 한창일 때 다녀왔던 찻집으로 갔다.
창이 너른 자리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며 참 좋다면서 동생 내외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과를 주문하고 담소를 나누며 편안한 분위기가 즐거움을 더한다. 걸을 수 있겠느냐고 살며시 묻는다. 당연하다는 선선한 대답이 반갑다. 산책길로 나서니, 소나무를 비롯하여 수형을 갖춘 다양한 수목들, 백자색, 청남색, 붉은색, 파란색으로 꽃을 피운 수국이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수국동산이다. 탄성이 절로 터진다. 동산 오솔길을 걷다가 쉼터에 앉아 쉬기도 하고 수국처럼 환하게 웃음꽃을 피운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지 몰랐네. 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거여!”동생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친구의 수국꽃다발 사연을 들려준다.
“40여년을 부부로 살아오면서, 시도 때도 없이 생일날 장미꽃 한 송이를 받고 싶다고 해도 들은 척도 않던 남편이 45년 만에‘여보 생일 축하해요. 꽃사발 받으시구료.’하면서, 신문지로 두툼하게 감싼 것을 불쑥 내밀며 받으라고 해서 펴 보았더니 글쎄, 사발만큼 커다란 연분홍빛 수국 다섯 송이더래. 얼마나 좋았던지 손주들과 800송이도 넘는 작은 꽃송이들을 세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대.” 생일날 800송이도 넘는 꽃다발을 받은 사람은 나 뿐일거라고 하던 소박하고 순수한‘수국꽃사랑’이야기가 재미있다. 꽃 선물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기분 좋게 한다.
수많은 송이가 모여 하나를 이루는 수국의 둥글고 풍성함과 비단으로 수를 놓은 듯 우아하고 화려한 자태는 결혼식 때 신부의 부케로도 손색이 없다. 토양과 피는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꽃색의 매력 또한 일품이다. 색깔에 따라 꽃말도 다양하다. 우아함, 진실한 사랑, 변하기 쉬운 마음, 교만 이기심이란다. 그렇지만 난 우아함과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짙푸른 잎새위로 살짝 얼굴을 내민 산수국이 산뜻하다. 꽃송이들이 별꽃으로 테를 이룬 산수국의 수수한 모습은 화목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가정을 보는 듯하다. 중심부로 오밀조밀한 꽃송이들 가장자리로 무성화꽃이 먼저 피고 참꽃이 열매를 맺었다가 떨어진 후에 헛꽃은 뒤집어져서 생을 마감한단다. 누렇게 변색 된 채로 겨울을 나며 쓸쓸히 자리를 지키는 수국의 숭고함을 난 초라하고 안쓰럽게만 생각했었다.
산수국은 사포닌, 게루마늄, 알카로이드 성분이 있어 항암이나 뇌질환, 심장질환, 항균에 탁월한 효능이 있고, 종자에서 추출한 첨가물은 설탕의 100배가 넘는 무가당 천연 감미료로 밀원이 되며, 이슬차, 감로차로 쓰인단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아름답고 신비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 흐르는 선함은 서로를 이롭게 하며 감사하게 한다. 미동산 수목원을 나서면서 무거웠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좋은 곳에 가서 잘 먹고, 좋은 꽃구경도 시켜주시고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차에서 내리면서 하는 동생 부부의 인사다.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는 건 나이가 들수록 더 간절하다. 흐뭇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보내는 남편이 오늘따라 더 푸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여보, 고마워요.”살며시 남편의 손을 잡고 마음을 전한다. 다정한 미소가 핑크빛 수국을 닮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