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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금식하며 간구하였더니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에스라 8장 21~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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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 후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에스라는 총 10장으로 되어 있는데, 1~6장은 1차 포로 귀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때의 중심 인물은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 제사장 예수아 였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으며 방해자들이 있었지만 귀환 후 20년 만에 성전을 완공 시켰습니다.
7~10장은 2차 포로 귀환자들의 이야기이고, 에스라 성경책 제목의 주인공인 에스라는 7장에 가서야 등장 합니다. 에스라는 2차 포로 귀환자들의 지도자 였으며, 직책은 학자(율법학자)겸 제사장 이었습니다. 에스라 6장에서 7장으로 넘어오는 기간은 시대적으로는 80년이라는 긴 간극이 있습니다. 이 80년 동안에 일어난 성경의 사건이 에스더 왕후 이야기입니다.
제가 몇 번 반복해서 말씀 드린적이 있으니, 시대적인 순서를 기억하시면서 성경을 읽으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자, 세 번에 결쳐 이루어졌던 이스라엘 포로 귀환의 지도자와 임무를 한 번 정리해 봅니다.
① 1차 포로 귀환자들의 지도자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 제사장 예수아 이며, 이들의 임무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에스라 1~6장)
② 2차 포로 귀환자들의 지도자는 학자겸 제사장인 에스라 였으며, 이들의 임무는 회개 운동을 통한 신앙 공동체의 회복이었습니다. (에스라 7~10장)
③ 3차 포로 귀환자들의 지도자는 총독 느헤미야 였으며, 이들의 임무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느 1~13장)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에스라를 고향으로 보내준 바사(페르시아)의 왕은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es I - 또는 롱기마누스 1세-Longimanus I) 라는 왕이었으며,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Xerxes 1)왕의 셋째 아들이었고, 에스더의 소생은 아니었습니다.
에스라 등, 2차 포로 귀환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경위가 나오는 장면인 7장 7~9절을 읽어 드립니다. “7. 아닥사스다 왕 제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년 다섯째 달이라 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아멘.
바사(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 제위 7년 1월 1일에 바벨론을 출발해서 5월 1일날, 즉 4달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돌아온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 남자만 1,775명 정도 였습니다. 지금이야 몇 천명 정도면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닌 것 같지만 2,500년 전의 시대상으로는 군대를 이룰 만한 많은 인원 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이 많은 포로 귀환자들을 위하여 무엇부터 할지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7장 10절을 보면,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라고 했습니다.
에스라는 오랫 시간 동안 이방 나라에서 지냈던 다신적인 풍습과 우상 숭배적인 문화를 벗어 버리고, 다시 하나님이 주신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법과 이유와 목적을 재 정립 해 나가기를 원했습니다.
한 마디로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기초 신앙교육을 기초부터 철저히 하기를 다짐 했던 것이며, 이는 자신의 독단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내용 이었습니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하면 한국 말을 잊어 버린다고 하죠. 다시 한국에 와서 정착하려면 먼저 한국 말부터 복원하는 것이 시급할 겁니다. 에스라의 생각이 딱 이런 느낌과 상황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에스라을 통해 준비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건된 성전을 중심으로 거룩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제사와, 율법과, 경건과, 기도와, 정결과, 감사 등, 예전에 누렸던 이스라엘의 영광을 모두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개인이 회복하는 것도 아니고 수 천명의 사람이 대상이기 때문에 매우 더디게 진행 될 것이며, 에스라에게나 백성들에게나 굉장히 지난한(至難, most difficult)일이 예상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다 아셨기 때문에 에스라를 중심으로 모든 포로 귀환자들이 돌아오는 과정에 앞서 아주 특별한 계기를 갖게 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남자만 천 명이 훨씬 넘었다면 남녀 노소로 계산하면 훨씬 더 많은 숫자 였을 겁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1,500km 쯤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대 이동을 하여야 했습니다. 에스라는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 오기 위하여 아하와 강가에 귀환 대상자들을 전체 소집 하였습니다.
장기간 여정을 앞두고 준비 물품이나 주의 사항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 했겠지만, 무엇 보다도 모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는 일이 중요 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먼 길을 가다가 예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했던 것 같이, 불평을 말하고, 반역을 일으키고, 우상을 만드는 자중 지란이 일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출발하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21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아멘.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서 먼저 금식을 선포 했는데, 금식 선포 이전에 15절을 보면 아화에 강가에서 삼일을 머물면서 이미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중을 돌아보니 레위인이 한 사람도 없어서 사방으로 레위인을 찾아서 데려온 일입니다. 찾아서 데려온 레위인 숫자는 38명 이었습니다.
에스라가 레위인부터 찾은 이유는,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모든 일을 성전 중심으로, 제사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시는 곳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회복 시켜 나가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성전을 지키고 헌신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불러 모으는 것을 최고의 우선 순위에 둔 것은 에스라의 식견이 얼마나 탁월한지, 그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 화목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세우시고, 부르신 자들로 인하여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다 모인 듯 하자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금식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일정기간 동안 금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왜 에스라는 갑자기 전체 인원을 모아놓고 금식하자고 선포했을까요?
타당한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반드시 찾아야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큰 일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말씀 준비하는 가운데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딱 한 가지 이유를 찾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딱 한 가지 이유만 생각하게하셨다는 것이 더 적합한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포로 귀환자들을 모으시고 금식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 앞에 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 보겠다는 것이며, 하나님께 시선과 마음을 고정 시키겠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해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리는 자세를 결코 흐트러트리지 아니하고 유지하겠다는 결단과 각오을 다지는 자세입니다.
곧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일체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이것을 먼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소한 일이 생길 때마다 사람의 말에 이리 저리 휘둘릴 것이고고, 작은 어려움만 찾아 와도 조금의 인내심도 없이 불평과 원망을 마구 쏟아 낼 것이고, 일거리들이 분배되고 맡겨지면 협력하고 헌신 하려고 하지 않고 피하고 숨으려고만 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다 제외 하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의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과 내가, 그리고 함께 하는 무리들 각자 각자가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친하지 않은데 도움을 주실리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불편한 사이인데 순종의 마음이 일어날리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불신과 불순종이 난무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신앙 공동체가 추진하고 행하려는 작은 일들, 큰 일들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대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지, 잘 연결 되어 있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이것이 해결이 안 되면 사실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무리하게 추진 해 봐야 되지도 않을뿐더러 어거지로 해 봐야 실패와 불행만 있을 뿐입니다.
왜 금식했는지 이해가 되시죠? 에스라는 함께 이동 하려는 무리들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금식이라는 준비의 단계를 선포한 것입니다.
지난 번 신명기 8장 설교에서 등 따숩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배반 할 것이라는 모세의 설교를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포로의 신세였지만 제법 등 따숩고 배부른 상황이었습니다. 타향살이었지만 나름 대로 정착하여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모세는 모든 것이 풍족 해질 때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게 될 것을 누누이 경고하면서 가르쳤습니다.
2차 포로 귀환자들도 이와 비숫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거주하고 있는 것이 편하고 안정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먼 길에서는 가장 먼저 배고픔이 닥쳐 올 겁니다. 추위와 잠자리도 많이 힘들 겁니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이겨내는 방법은 굳건한 신앙의 힘 밖에는 없습니다. 에스라와 그 무리들에게 있어서 금식 이라는 단체 행동은, 절제와, 인내와, 감사를 잃지 않게 하려는 신앙 강화 훈련 이었습니다.
에스라는 금식만 선포 한 것이 아닙니다. 금식 기간 중에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라”고 했습니다. ‘겸비’라는 단어는 겸손(humble)해 진다, 낮은 자세를 취한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낮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하나님만을 높여 드린다는 뜻인데, 정확하게는 하나님만이 모든 행사를 계획하시고, 성취하실 수 있는 유일한 전능자 되심을 선포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에 있다는 사소한 교만의 마음이 움직여도 하나님은 일절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완전하게 홀로 이루시는 전능 하신 하나님 이시며,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조금이라도 분산 되거나 축소 되는 것을 결코 묵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사전 작업을 하십니다. 그 작업이 바로 우리들의 겉 넘은 짧은 생각과 판단을 잠재우게 하는 겸비(겸손)의 작업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되면, 모든 언행 심사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 드리는 자세를 취하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취 하심을 목도하는 영광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비 한다 함은,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가운데 모든 영광과 풍성함과 평안을 누리는 복의 주인공이 되는 사전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에스라는 금식과 겸비함에 이어서, 간구하라고 선포 하였습니다. 간구는 진심으로 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환자들이 합심하여 간구하는 공동 기도 제목은 “우리(무리 전체)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가게 하소서”였습니다.
모든 귀환자들, 특히 어린 아이들이 안전하게, 건강하게, 평안하게 고향에 도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가장 최 우선의 목표였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무리들은 이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고, 겸비하고, 간구에 열심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취하고 있는 모든 자세와 간구함을 살펴 보시고 매우 흡족해 하셨을 겁니다.
이어지는 22절에서는 왜 금식하고 겸비하고 간구하여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소상하게 밝힙니다. 22절을 읽어 드립니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아멘.
에스라는 포로 귀환을 허락한 아닥사스다 왕에게 군사와 보병과 마병을 구하여 일행을 지켜 줄 것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힘을 빌려서 도움을 받으려는 행위는 안전을 보장 받기는커녕 하나님의 분노와 징계를 사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습니다. 에스라는 지난 날의 불신과 불순종의 역사를 절대로 반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너무나도 간단하고 명료 합니다. 22절의 말씀 대로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는 선(구원하심과 도우심의 은혜)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징계와 심판)를 내리십니다.
에스라와 그 무리들이 당장 불안한 마음을 없애려고 바사(페르시아) 군대를 앞세워서 든든한 마음으로 출발하려 했다면 100% 실패 했을 겁니다. 모든 자에게 선을 베풀고, 모든 자에게 진노 하신다고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세상의 모든 자들 중에 하나님을 찾는 자는 은혜 아래 거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진노 아래 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 가시는 원칙입니다.
2차 포로 귀환 대상자들은 에스라의 명철하고 탁월한 인도하에 금식하고, 겸비하고, 간구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을 입게 되어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이 없었다면 2차 포로 귀환은 이스라엘 역사에 기록 되지 못하였을 것이 분명 합니다.
이제 포로 귀환자들이 사흘 동안 함께 모여서 간구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 함께 2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아멘.
최고의 권력을 지닌 페르시아 대 제국의 왕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나아가, 하나님만 구하고, 하나님께만 간구 하였더니 응낙 하심의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장거리 이동 할 것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고, 이것 저것 준비하는 것을 일체 먼저 하지 아니하고, 가장 먼저 모든 금식하고, 겸비하고, 간구하였더니 응낙 하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떤 큰 일을 앞 두고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준비해 나가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습 해 보겠습니다. 큰 일을 앞 두고 가장 먼저 무엇을 먼저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을 금식을 선포 하는 행위로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몸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불순종의 마음을 버리고 듣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나님을 멀리하지 아니하고 가까이 있겠다고 굳게 결단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이것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모든 일의 결과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께 서려고 하지 않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으면 그 다음으로는 곧 바로 겸비(겸손)하는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의지를 떨쳐 내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과 연약함과 무지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하다고 무릎 꿇고 낮은 자세를 취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요구하고 바라는 것을 들고 하나님께 전심을 다해 간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소리를 통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얼마나 진심으로 원하는지 심정을 헤아리기 원하십니다. 간구함의 열심을 보시고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는지를 달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금식과 겸비와 간구가 진행이 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온전하게 신뢰하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성취하심을 갈망하는 마음의 진정성이 하늘에 닿을 때 드디어 응낙하심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오늘 부터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어떤 일의 계획과 진행을 위해서 머리 싸매고 답답해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듣는 마음을 가지는 것, 순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 이것부터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모두 한 마음으로 잘 출발하게되면 “응낙하심을 입었더라” 라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실 수 있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금식하고, 겸비하고, 간구하여 응낙하심을 입었던 에스라와 그 무리들이 받은 은혜를 마음으로 깊이 받아 들이시고, 범사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시고 간절히 기도에 힘써 가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셔셔, 응낙하심을 받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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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 합니다. 저희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겨 주시고, 겸비하고 간구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