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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증후군
2026.08.08
사람들이 모이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자식들만 잘되면 더 바랄 것이 없지.”
나 역시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에는 자식이 태어나면 건강하기만을 바라고, 조금 자라면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학교를 졸업하면 좋은 직장을 얻기를 바란다.
직장을 얻으면 승진하기를 바라고, 결혼할 나이가 되면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부모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제 저 아이는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겠구나.’
그 순간 부모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그토록 잘되기를 바라던 자식이 잘될수록 부모의 곁에서는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다.
어릴 때는 하루 종일 부모를 따라다니던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친구가 생기고,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면 부모에게서 차지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내가 평생 잘되기만을 바라던 그 아이가 이제는 나보다 자기 가정을 더 먼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섭섭한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다.
자식에게 자기 가정이 생겼다는 것은 부모의 품을 떠났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한 사람의 독립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부모라면 머리로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잘난 자식은 나라가 데려가고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잘 키운 자식은 나라에서 데려가고, 돈 잘 버는 자식은 사돈네가 데려가고, 못난 자식은 평생 부모 곁에 남는다.”
조금 더 익살스럽게 바꾸어 말하면,
“잘난 자식은 세상이 데려가고, 돈 많은 자식은 처가가 데려가고, 빚 많은 자식은 부모가 품는다.”
웃자고 하는 말 같지만 그 안에는 부모의 묘한 운명이 들어 있다.
공무원이 되어 높은 자리에 올라간 자식은 나라의 일을 하느라 바쁘다.
사업을 크게 하는 자식은 돈을 벌고 사람을 만나느라 바쁘다.
전문직으로 성공한 자식은 자기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밤낮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결혼한 자식에게는 또 하나의 가족이 생긴다.
배우자가 있고, 처가와 시댁이 있고, 아이들이 있다.
부모에게 아무리 고마운 마음이 있어도 하루 24시간을 쪼개어 살다 보면 부모를 찾아뵐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그래서 부모에게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아이가 잘되라고 평생 애썼는데, 정작 잘되고 나니 나와 함께할 시간은 더 없어졌구나.’
하지만 그것을 원망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부모가 원했던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랐고, 독립하기를 바랐고, 자기 가정을 이루기를 바랐으니 말이다.
부모의 사랑에는 이런 역설이 있다.
자식을 품에 안기 위해 키우지만, 잘 키울수록 품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못난 자식은 왜 더 애틋한가
그렇다고 모든 자식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자식은 직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어떤 자식은 사업에 실패하고, 어떤 자식은 빚을 지기도 한다.
어떤 자식은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어떤 자식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럴 때 부모의 마음은 이상해진다.
남의 자식이라면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지나칠 일인데, 내 자식의 일이 되면 가슴이 아프다.
잘생기고 공부 잘하고 돈 잘 버는 자식에게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앞서지만, 못난 자식에게는 불쌍한 마음이 먼저 생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성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연봉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사회적 지위로 평가하지 못한다.
남들은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부모에게는 여전히 자식이다.
빚이 많아도 자식이고, 직장이 없어도 자식이고, 남보다 뒤처져도 자식이다.
아마 부모의 사랑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사람의 값을 성취로 매기지만 부모는 존재 자체로 자식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못난 자식 하나가 부모의 마음을 가장 오래 붙잡기도 한다.
잘난 자식은 세상을 향해 걸어가지만, 상처받은 자식은 부모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잘생긴 나무는 모두 베어가고
옛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산에 나무가 많으면 곧고 잘생긴 나무부터 베어간다.
재목이 좋기 때문이다.
집을 짓는 사람도 좋은 나무를 찾고, 가구를 만드는 사람도 곧고 튼튼한 나무를 찾는다.
그러다 보면 산에는 이상하게 생긴 나무들이 남는다.
휘어진 나무, 뒤틀린 나무, 쓸모없어 보이는 나무들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나무들이 산을 지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곧은 나무는 먼저 베어가고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
사람 사는 세상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다.
젊고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사회가 먼저 데려간다.
좋은 회사가 데려가고, 나라가 데려가고, 시장이 데려가고, 새로운 가정이 데려간다.
부모 곁에는 오히려 세상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한 자식이 남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식이 반드시 가치 없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나무의 가치는 곧은 정도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듯, 사람의 가치도 돈이나 직위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세상에 이름을 남긴 사람만 귀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곁을 지켜준 사람도 귀하고,
부모의 전화를 받아준 사람도 귀하고,
아픈 부모의 병원에 함께 가준 사람도 귀하고,
명절에 빈손으로 찾아와도 웃으며 앉아 밥 한 끼 같이 먹어준 자식도 귀하다.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작고 평범한 것들이 커다란 의미가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집이 너무 조용해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 집은 시끄러웠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났고,
밥 달라는 소리가 났고,
형제끼리 싸우는 소리가 났고,
텔레비전 소리가 났고,
친구들이 몰려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났다.
부모는 그 소란 속에서 살았다.
때로는 지겨웠고 때로는 귀찮았다.
‘언제쯤 이놈들이 조용해질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조용해지고 나니 이상하다.
너무 조용하다.
아이들이 독립하고 집을 떠난 뒤 거실에 앉아 있으면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린다.
방 하나는 비어 있고,
책상 하나는 그대로 남아 있고,
옷장 한쪽에는 오래된 옷이 걸려 있다.
벽에 걸린 사진 속에서는 온 가족이 웃고 있는데 현실의 집에는 두 사람만 앉아 있다.
그때 사람은 비로소 깨닫는다.
그때는 소란스러운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행복의 소리였구나.
이것이 흔히 말하는 ‘빈 둥지 증후군’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부르고 싶다.
‘빈집의 기억’이라고.
집이 빈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이 빠져나간 것이다.
빈집에는 사람이 살아도 빈집이다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고령 인구는 늘어나고 젊은 세대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예전에는 한 집에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일이 흔했다.
조부모가 있고, 부모가 있고, 아이들이 있었다.
집 안에는 늘 누군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부 둘만 사는 집이 늘었고, 한 사람이 혼자 사는 집도 많아졌다.
자식들은 도시로 떠나고,
직장을 찾아 떠나고,
결혼을 하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부모가 사는 오래된 집에는 두 사람만 남는다.
그러다 배우자마저 먼저 떠나면 한 사람만 남는다.
그때부터 집은 더욱 커진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사람이 줄어들수록 집은 넓어진다.
예전에는 네 식구가 좁다고 느꼈던 집이,
두 사람이 살면 넓고,
한 사람이 살면 지나치게 넓어진다.
방은 많은데 대화할 사람은 없다.
냉장고는 있는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
식탁은 있는데 마주 앉을 사람이 없다.
전화기는 있는데 전화할 사람이 없다.
이것이 오늘날 노년의 빈집이 가진 역설이다.
빈집 증후군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것을 단순히 개인의 외로움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노인이 외롭다면 개인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노인이 비슷한 외로움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문제다.
한두 집의 빈집은 개인의 사정이지만,
젊은 사람은 줄어들고 노인은 늘어나며,
마을마다 빈집이 늘어나고,
노인 혼자 사는 집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과거에는 ‘대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노년의 외로움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 울타리가 사라지고 있다.
자식에게 의존하는 노후도 현실적으로 어렵고,
자식 역시 부모를 외면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꾸려가느라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자식이 부모를 얼마나 돌보아야 하는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자식이 없어도 늙어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나는 이 질문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식에게 기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노년의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매일 찾아오라는 것도 아니고,
용돈을 많이 달라는 것도 아니다.
가끔 전화 한 통 해주고,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여주고,
밥 한 끼 같이 먹고,
“아버지, 어머니 잘 계시죠?”
그 말 한마디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러나 부모도 자식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자식에게 자기 노후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순간,
사랑은 부담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식에게는 자식의 인생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운 것은 자식에게 평생 빚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식 역시 자기 아이를 키우며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노년의 지혜란 자식에게 손을 내밀기보다 자기 삶을 스스로 지탱하면서 자식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까이 있되 얽매이지 않고,
기대하되 의존하지 않고,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는 것.
이것이 늙어가는 부모가 배워야 할 가장 어려운 사랑법일 것이다.
자식이 잘되는 것이 정말 행복의 완성일까
젊을 때 우리는 자식의 성공을 행복의 완성처럼 생각한다.
아들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딸이 좋은 사람과 결혼하고,
자식이 돈을 많이 벌면,
부모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자식들이 모두 자기 자리를 찾아가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식의 성공과 부모의 행복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식이 잘되었다고 부모의 외로움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식이 잘되면 부모는 더 혼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노년에는 행복의 기준을 조금 바꿔야 한다.
‘우리 아이가 얼마나 잘되었는가’에서
‘나는 오늘 얼마나 잘 살았는가’로.
자식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에서
내 인생을 다시 살아가는 것으로.
자식이 보내주는 전화 한 통을 기다리는 것에서
내가 먼저 세상에 전화를 걸어보는 것으로.
노년은 남은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이다
우리는 노년을 자꾸 ‘남은 인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표현에는 이상한 체념이 들어 있다.
남은 시간.
남은 재산.
남은 친구.
남은 건강.
남은 인생.
마치 인생의 본편은 이미 끝났고 이제는 부록만 남은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젊은 시절에는 가족을 위해 살았다.
직장을 위해 살았다.
돈을 벌기 위해 살았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 살았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살았다.
그러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사람도 많다.
그렇다면 노년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시간일 수 있다.
책 한 권을 천천히 읽어도 되고,
아침에 산책을 해도 되고,
친구를 만나 밥 한 끼 먹어도 되고,
평생 미뤄두었던 여행을 가도 된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텃밭을 가꾸고,
배우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지 않는 것이다.
빈집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의미다
빈집을 채우는 방법이 반드시 자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사람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도 산다.
아침에 일어나 해야 할 일이 있고,
오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배우고 싶은 것이 있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고,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혼자 사는 집도 완전히 빈집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수많은 사람과 함께 살아도 자기 삶의 의미를 잃으면 깊은 고독에 빠질 수 있다.
반대로 혼자 있어도 자기 삶에 의미가 있다면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노년의 가장 중요한 준비는 돈만도 아니고 건강만도 아니다.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준비하는 일이다.
자식이 나를 찾아오지 않는 날에도 즐거울 수 있어야 하고,
친구가 한 사람씩 떠나는 날에도 살아갈 이유가 있어야 한다.
배우자와 둘이 사는 날에도 서로의 세계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혼자 남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마음의 집을 지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식과의 인연을 끊으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식에게 기대지 않되 자식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
돈을 요구하지 않되 마음은 나누어야 한다.
자식의 삶에 간섭하지 않되 관심은 가져야 한다.
“왜 자주 안 오느냐”고 따지기보다
“바쁘지? 건강 잘 챙겨라.”
그 한마디가 더 큰 사랑일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은 어쩌면 자식이 부모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희들 인생 잘 살아라.
아버지 어머니 걱정은 너무 하지 마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
그 말을 들은 자식은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마음이 가벼워진 자식이 부모에게 더 자주 전화하게 된다.
사랑은 붙잡는다고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놓아주어야 더 오래 이어진다.
우리 사회가 준비해야 할 것은 ‘노인의 숫자’만이 아니다
노인이 많아지는 시대에 우리는 흔히 연금, 의료, 복지, 요양시설을 이야기한다.
물론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노인이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밥도 필요하지만 대화도 필요하다.
병원도 필요하지만 만날 사람도 필요하다.
복지관도 필요하지만 ‘내가 이 사회에 아직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도 필요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노인 정책은 단순히 노인을 돌보는 정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노인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노인이 가진 경험을 활용하고,
젊은 세대와 대화하고,
마을의 일을 함께하고,
자신이 가진 기술과 지식을 나누고,
작은 일이라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노인은 사회가 부양해야 하는 짐만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실패도 경험이고,
성공도 경험이며,
가난도 경험이고,
가족을 키운 것도 경험이다.
그 경험을 사회가 버린다면 그것은 사람을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빈집을 다시 사랑방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나는 가끔 옛날 사랑방을 생각한다.
옛날 집에는 사랑방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찾아왔고,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젊은이들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어쩌면 현대판 사랑방인지 모른다.
노인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바둑을 두고,
세상 이야기를 하고,
젊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간.
단순히 노인을 모아놓고 시간을 보내게 하는 곳이 아니라,
노인의 경험과 젊은 세대의 미래가 만나는 공간이다.
그런 곳이 마을마다 있다면 빈집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사람이 떠난 집을 무조건 철거할 것이 아니라,
어떤 집은 마을의 사랑방으로,
어떤 집은 작은 도서관으로,
어떤 집은 공동식당으로,
어떤 집은 노인과 청년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바꾸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빈집은 죽은 공간이 아니라,
다시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부모의 마음은 결국 하나다
돌이켜보면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릴 때는 건강하기를 바랐고,
조금 자라서는 남에게 손가락질받지 않고 살기를 바랐고,
성인이 되어서는 자기 밥벌이를 하며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식이 자기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자식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부모에게 남는 것은 의외로 소박한 바람이다.
‘잘 살고 있겠지.’
‘아프지는 않겠지.’
‘부부끼리 싸우지는 않겠지.’
‘아이들은 잘 크겠지.’
그리고 아주 가끔,
“아버지, 잘 계세요?”
그 전화 한 통을 기다린다.
그것이면 된다.
부모가 원하는 것은 자식의 재산도 아니고 자식의 성공도 아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식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다.
빈집은 인생의 마지막 풍경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결국 혼자 떠난다.
태어날 때는 부모의 손을 잡고 세상에 나오지만,
마지막에는 혼자 떠난다.
그 사이에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사랑이 있고,
성공과 실패가 있고,
돈과 명예가 있고,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조금씩 정리된다.
자식도 자기 길로 가고,
친구도 하나둘 떠나고,
직함도 내려놓고,
재산도 남겨놓고,
집도 누군가에게 넘겨준다.
그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보다
**‘얼마나 사랑했는가’,
‘얼마나 좋은 사람으로 살았는가’,
‘누군가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일 것이다.
그래서 빈집을 바라보는 일은 단순히 자식들이 떠난 집을 바라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간 자기 인생을 바라보는 일이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마루,
부부가 함께 앉았던 식탁,
가족들이 명절마다 모였던 거실,
아이들이 떠난 뒤 한동안 열지 않았던 방.
그 모든 공간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집은 비어도 기억은 비어 있지 않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노년의 부모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자식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길이다.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고,
명절이 오기를 기다리고,
손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자식이 시간을 내주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운함도 커진다.
다른 하나는 자식이 잘 살아가도록 마음으로 축복하고,
나는 나의 하루를 살아가는 길이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친구를 만나고,
책을 읽고,
좋은 음식을 먹고,
여행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동네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이다.
그러다 자식에게 전화가 오면 반갑게 받으면 된다.
“그래, 잘 지내지?
바쁜데 전화했구나.
건강 잘 챙겨라.”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면 된다.
그리고 다시 나의 하루로 돌아온다.
이것이 어쩌면 자식과 부모가 함께 행복해지는 방법일 것이다.
빈집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 언젠가는 빈집의 주인이 될 것이다.
자식이 떠난 집,
친구가 줄어든 동네,
전화가 뜸해진 휴대전화,
식탁에 놓인 밥그릇 하나.
그러나 빈집이라고 해서 반드시 쓸쓸한 집인 것은 아니다.
그 집에는 한평생의 기억이 있고,
자식들이 자란 흔적이 있고,
부부가 함께 늙어온 시간이 있고,
수십 년의 웃음과 눈물이 있다.
그것은 빈집이 아니라 인생이 가득했던 집이다.
다만 이제 그 집의 역할이 달라졌을 뿐이다.
젊을 때는 아이를 키우는 집이었다.
중년에는 가족을 지키는 집이었다.
노년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집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그 집을 떠날 때가 오면,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인생도 집과 같다.
처음에는 부모의 집에서 시작하고,
한때는 내가 가족을 이루어 집을 채우고,
마지막에는 다시 비워진다.
그러니 빈집을 너무 슬퍼하지 말자.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시간이 남고,
시간이 남은 자리에는 기억이 남는다.
그리고 기억이 남아 있는 한 그 집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자식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부모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생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잘 키웠다.’
‘그래도 잘 살았구나.’
‘이제 저 아이들이 자기들 인생을 잘 살아가면 그것으로 됐다.’
그리고 조용한 저녁,
불을 켜고 혼자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문득 웃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떠들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그 순간 부모는 깨닫는다.
자식은 집을 떠났지만 내 인생에서 떠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자식은 품을 떠나도 마음에서는 떠나지 않는다.
다만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떠난 자식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평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 옆에 자신의 새로운 삶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그것이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잘난 자식은 세상으로 보내고,
못난 자식은 품어주고,
떠난 자식은 마음으로 축복하고,
비어버린 집에는 다시 자신의 삶을 채우는 것.**
아마 이것이 자식을 키운 부모가 맞이하는 인생 후반전의 지혜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빈집’의 문제도 결국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노인이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노인이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집은 비어도 좋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까지 비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가 늙어가는 시대에 함께 고민해야 할 가장 큰 숙제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