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 7월 2일, 김령은 상주 형과 여러 사람이 침류정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7월 19일, 김령은 배용길 한림이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지나는 길에 탁청정에 들러 부르기에 즉시 보러 갔다. 오후에 배 내한(內翰, 한림의 다른 말)이 돌아갔다. 이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비 때문에 종일 흩어지지 않았다.
8월 11일, 아침에 비가 그쳤다. 김령은 20리를 간 뒤 한강을 건넜다. 난리를 겪은 후 민가가 번성하고 왕래하는 배가 많아져서, 비록 옛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강가의 촌락 곳곳마다 담장이 이어지고, 왕래하는 사람이나 물화도 옛날 태평한 때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밥을 지어 먹은 뒤 제천정에 오르니, 정자는 터만 남아 있고 강산은 옛날과 다름없으니 감개가 절로 일어났다. 김령이 어린 시절 와 본 후 지금 다시 이 정자에 올라오게 되었다.
을유년(1585) 선친께서 복천의 현감으로 계셨을 때, 어버이를 모시고 압구정에서 유숙한 뒤 남쪽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제 20년 세월이 흘러 세상 일이 홀연히 바뀌게 되었다. 동쪽으로 압구정을 바라보니, 제천정 옛터가 더욱 회포를 불러일으켰다.
1604년 4월 2일, 비가 어제처럼 왔다. 아침에 계화가 다시 지난번의 운(韻)으로 화답시를 김령에게 보내왔다. 오후에 비가 잠시 그치자 김령은 찰방과 같이 송암정에 가서 계화를 초청했다. 계화가 술병을 들고 나왔고, 조금 있다가 권중성과 권응순도 이르렀고, 권계도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밤에 대화를 오래도록 했다.
4월 5일, 경망 어른은 이 날 탑대에서 동갑 모임을 한다고 했다. 영천의 황열·황성두 분이 이 동네 길을 거쳐 간다고 하여, 찰방 형제 및 전 형이 술병과 술통을 가로채기 위해 모의하고 종을 시켜 길에서 두 분을 기다리게 했는데, 두 분은 이미 종을 지나친 뒤였다. 이에 전 형이 나타나 가로채려 하자, 두 분이 더 이상 길을 가지 못하고 마침내 송암정에 들르게 되었다.
김령과 찰방 및 용보도 따라 갔더니 권중성 및 류계화·김백온이 먼저 자리해 있었다. 전 형이 낚아챈 술로, 주인이 마침내 술잔을 돌리며 서로 희희낙락거렸다. 중성 및 찰방도 술을 가지고 와서 수작을 했다. 두 분은 날이 저물어 탑대로 갔다. 저녁 무렵에 전 형이 청암정으로 가고, 김령과 중성·계화도 잠시 갔다가 왔다.
1606년 1월 7일, 저녁에 자개가 석천정에 와서 하인을 보냈다. 김령과 금도제가 즉시 가서 세 사람이 현아(縣衙) 근처에 벌여 앉아 저마다 가져온 술로 가득 부어 실컷 마셨다. 산천엔 눈과 얼음이요 새로 돋은 달이 밝은데, 자개가 종의 처를 시켜 가곡 ‘춘천불한(春天不寒, 봄날은 춥지 않네)’을 부르게 했다. 밤이 깊어 가는 줄을 알지 못했다.
1609년 9월 28일, 맑았으나 싸늘했다. 김령은 성 무주.숙명.계명 등과 함께 걸어서 청원정으로 나갔다.
1610년 윤3월 7일, 흐리고 따뜻하며 비가 올 듯하였다.
김령은 정보·권축과 함께 석천정에 나가서 시 한 수를 지어 읊고 내일 문수산에 놀러 가기로 약속하였다.
윤3월 15일, 김령은 영천(영주)으로 떠났는데 군내에 이르니 환자 때문에 어수선하였다. 강 영공은 만나지 못하였고 구학정에 이르니 경치가 좋았다. 강 영공은 사암에 있었다. 오후에 누님의 집에 도착하였다.
윤3월 25일, 맑음. 선당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돌아오다가 석현에 이르러 산 위에서 잠시 말을 내렸다. 춘양에 이르러 한수정을 방문한 진사 이종강을 만나보았다. 공보의 집에 이르니 밥을 차려 놓았다. 저녁에 유곡에 도착하여 선생의 위판을 종묘에 배향하는 일로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예관이 올 터이므로 선비들이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4월 24일, 고산은 강물이 맑고 절벽이 솟아 있다. 밥을 먹고 물을 건너가 금씨의 정자를 감상하였는데, 퇴계 선생의 시가 있고 정자의 형세가 좋았다. 도로 건너와서 강물을 따라 가니 바위 벼랑에 맑은 물이 흐르고 지나는 곳마다 모두 좋았다. 길에는 청석이 많았다. 나부에 이르러 강을 건너니 바로 동였다. 성을 쌓고 나무를 베어내었는데 독용이라고 이름하였고, 산길을 오 리쯤 가면 성문에 이른다. 연대사에 들어가서 월대에 앉으니 기이한 봉우리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절에 도착하여 조금 쉬었다가 시왕전·보문암을 지나 반야대에 이르니, 그 높이가 만 길이어서 온 산의 형승이 다 드러난다. 치원암은 퇴계 선생의 제명으로 중수하였고, 돌아가신 김령의 아버지의 제명도 있다. 치원대는 최치원 신선이 다녀간 유적이다. 상청량과 하청량을 거쳐 반야대에 다시 내려와 앉았다가 절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캄캄하였다.
1611년 4월 19일, 김령은 일찍 일어나 향사에 나가서 학봉묘를 배알하였다. 재실의 당우가 모두 갖추어졌는데 앞쪽의 난간은 강물에 임하였고, 서쪽으로 오 리를 나가면 백운정에 이르는데 김홍주(金洪州)의 정자이다. 자못 훤칠하고 시원하게 연못가에 서 있는데 솔숲의 경치가 선찰(仙刹)보다 더 낫다. 김 홍주의 표자를 만나보았다. 드디어 강물을 건너 고개를 넘고 다시 개울을 지나 여강서원에 도착하였다. 서원이 을사년 홍수에 무너져서 다시 지어 매우 좋았는데 양호루는 더욱 크고 웅장하였다.
1611년 10월 8일, 김령은 묘산의 북쪽을 돌아서 안동에 이르렀다. 내일 일족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귀래정에 들러서 감상하고 있노라니 주인 이몽태가 술을 내어 오고 시를 지어달라고 하기에 전에 지어 두었던 두 수를 써서 주고, 다시 붓을 달려 한 수를 더 지어 주었다. 불을 밝히고 강을 건너서 두 형과 북문 밖에서 함께 잤다.
1613년 4월 2일, 김령은 조곡을 경유하여 내려와 오 영공(吳令公) 댁에 갔다가 다시 박 도사의 하한정에 도착하니 박 어른이 술을 권하였다. 진사(進士) 장무부(張茂夫)가 김령을 찾아서 전 형 집에 왔다가 만나지 못하자 먼저 이 정자에 도착해 있다가 서로 만났다. 저녁에 전 형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경상우도 동당 방목을 보니 여희필(呂姬弼)이 수석을 하였고, 영천 선비로 한성시에 참방한 사람은 4명이라고 한다.
1614년 6월 29일
안개가 짙게 끼다. 아침에 문경현의 마포원을 지나 신원에서 밥을 지어먹었다. 오시에 토잔천로를 지나며 말에서 내려 걸어가자니 희양산성은 헛되이 설치된 꼴이라 매우 우스웠다.
거듭 깊은 시내를 건너 수십 리를 가서 산양에 이르니, 높은 언덕의 소나무 숲 아래로 멀리 너른 들이 펼쳐졌다. 안장을 풀고 옷을 벗은 채로 그 위에 누워서 쉬었는데, 그 마을에 사는 효중의 종이 점심을 차렸다. 오후에 말에 올랐더니 타는 듯한 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청원정을 지나서 중명(仲明) 형 집에 도착하였다. 김령이 온 것이 뜻밖이었지만, 매우 위안이 되고 후련해 하는 것 같았다. 효중과 함께 잤다.
1615년 3월 2일
비가 내렸다. 전 형이 손님들에게 술을 권하여 아침부터 오시까지 끊임없이 술잔이 오갔다. 매화 가지에 처음으로 꽃망울이 터졌다고 전 형이 김령에게 시를 부탁하여 몇 수를 구점(口占)하였다.
효중이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하며 거듭 성암정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다짐하였고 봉길도 서찰을 보내와 오늘밤 꼭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비가 내려 출입을 방해하지만 조금이라도 개면 당연히 갈 것이라고 답을 보냈는데, 봄비는 부슬부슬 저녁이 다 가도록 그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효중 등이 오지 않을 지도 모르고, 만일 온다면 반드시 다시 심부름꾼을 보내어 부를 것이기에 가려던 것을 그만두고 박상지와 함께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4월 5일, 김령에게 아침에 이지가 침락정으로 놀러가자고 전갈을 보내왔다. 밥을 먹은 뒤에 평보 형·효중·자개 그리고 이지 삼형제와 나란히 말을 타고 침락정으로 갔다. 때는 어린 잎새들이 처음 푸른빛으로 물들어 맑은 경치가 참으로 고왔다. 이지와 이도와 김령이 모두 술을 가져갔는데, 저녁이 되어 약간 취한 채로 배를 띄워서 내려왔다. 이날 권수지(權守之) 영공이 노천(蘆川)에 와서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으면서 서로 바라보일 만큼 가까운 곳이니 만나자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지 영공도 배를 타고 올라와 두 배를 서로 마주 대어 놓고 실어온 술로 술잔을 주고받는데 말을 타고 온 손님이 있었으니 바로 김자첨(金子瞻)이었다. 서로 만나 매우 기뻤지만, 날은 이미 저물고 강가의 길도 어슴푸레해져 마침내 여러 사람들과 말에게 길을 맡긴 채로 돌아왔다. 자첨이 다시 조용히 보자고 하고 효중도 그게 좋다고 하여 일휴당(日休堂)으로 들어가 장등 불을 켜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보 형과 자첨 등은 모두 곤하게 자고 있었으니 밤이 깊었음을 알 수 있었다.
1616년 2월 10일, 아침에 서윤이 보러 와서 술잔을 들었다. 오시가 되니 중군도 오고 독운관(督運官) 심율(沈栗)도 왔다. 김령이 취중에 서윤 류도와 시 몇 수를 주고받았다. 오시에 기자정에 가보았는데, 서윤과 판관 심 공이 다 모여 우물물을 길러 맛보기도 하였다. 이날 바람기가 매우 사나웠지만 서윤이 우물가에 술자리를 마련하라 명하였다. 중사도 왔다. 저녁 무렵에 연광정에 올라갔는데, 긴 강과 넓은 들이 아득히 끝이 없어 우리나라에서는 제일가는 풍경이었다. 심 판관도 따라왔다. 조금 있다가 서윤이 도착하여 술상을 내오고 잔을 돌렸다. 바람이 사나워서 처음엔 방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정자에 올라갔다. 저녁 무렵에 중군도 와서 단란함은 밤까지 이어졌다. 이 날은 밥은 한 톨도 내오지 않았다.
1618년 2월 2일, 잠깐 비가 내렸다. 밥을 먹은 뒤에 천성(川城)으로 돌아왔다. 효중(孝仲)이 편지를 보내 내일 석천정에서 만나 이야기하자고 약속하였다.
배경이야기
◆ 정자의 의미
사림들에 의해 지어진 정자는 단순히 시를 읊거나 술을 마시며 즐기는 장소가 아니라 선비들의 높은 이상과 투철한 학문 정신을 실현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과 인간의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며 시와 노래를 짓던 장소였다. 나아가 그 건물은 선비 정신을 바탕으로 고도의 집약과 절제로 완성한 뛰어난 건축물이었다. 건물은 때로 정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단지 하나의 별당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흔히 선배의 생활공간을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의 두 단어로 정의한다. 장수는 학문을 통한 수양을 의미하며, 유식은 즐기며 휴식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다시 장수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충하는 것을 뜻한다. 장수와 유식은 궁극적으로 선비들이 고도의 인격 완성을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자나 정사는 장수와 유식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건축공간인 것이다.
정자라는 명칭은 한자어이다. ‘정자 정(亭)’자는 경치가 좋은 곳에 놀기 위하여 지은 집이라는 뜻의 글자이다. 이규보는 사륜정기(四輪亭記)에서 ‘사방이 탁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자’라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자연 경관이 아기자기 하고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여, 산과 들과 강의 풍정이 철따라 변화한다. 이 같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해 온 우리 민족에게 정자는 극히 자연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널리 보편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조선조 유학의 영향으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다는 생활 철학이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고, 특히 선종이 한국 불교의 주류를 이루면서 자연과의 동화가 생활화되어, 우리 민족은 정자와 더욱 친수개졌다고 본다.
농경을 주로 했던 우리나라는 자연을 사랑함에는 상류층과 서민층에 차이가 없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서민 문화와 상류 문화가 모두 그 바탕을 자연에 두고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맑고 깨끗하여 부정이 없는 자연을 닮으려는 심성이야말로 한국인들의 순수한 기질이라 하겠다. 그래서 정자는 당연히 산 좋고 물 좋은 경관을 배경으로 한다.
신체의 휴식이나 잔치, 놀이를 위한 기능보다는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이 더 강조된 구조물이다. 그런 정자에 앉아있으면, 비록 인공의 구조물이긴 해도 이미 그 인공을 초월한 대자연속에 동화되고 만다.
인공의 구조물이 아닌 이런 정자가 결코 자연 경계 속에서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거기 있는 바위, 거기 있는 소나무처럼 그저 자연스럽기만 하다. 이것이 한국 정자의 모습이자 기능이며 존재 이유인 것이다.
원문정보
◆ 원문 번역
계묘년(1603, 선조36) 7월 2일 흐림. 상주(尙州) 형과 여러 사람이 침류정(枕流亭)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나는 오후에 갔다. 돌아올 때 길에서 자개(子開)를 만났다.
계묘년(1603, 선조36) 7월 19일 아침에 흐림. 배 한림(裴翰林)이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지나는 길에 탁청정(濯淸亭)에 들러 부르기에 즉시 보러 갔다. 아마 배 내한(裴內翰)이 탄핵을 받아 귀향한 모양인데, 사간(司諫) 김순명(金順命)의 논박을 받았을 것이다. 오후에 배 내한이 돌아갔다. 이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비 때문에 종일 흩어지지 않았다.
계묘년(1603, 선조36) 8월 11일 아침에 비가 그쳐 20리를 간 뒤 한강을 건넜다. 난리를 겪은 후 민가가 번성하고 왕래하는 배가 많아져서, 비록 옛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강가의 촌락이 곳곳마다 담장이 이어지고, 왕래하는 사람이나 물화(物貨)도 옛날 태평한 때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밥을 지어 먹은 뒤 제천정(濟川亭)에 오르니, 정자는 터만 남아 있고 강산은 옛날과 다름없으니 감개가 절로 일어났다. 내가 어린 시절 와 본 후 지금 다시 이 정자에 올라오게 되었다. 을유년(1585) 선친께서 복천(福川)의 현감(縣監)으로 계셨을 때, 어버이를 모시고 압구정(鴨鷗亭)에서 유숙한 뒤 남쪽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제 20년 세월이 흘러 세상 일이 홀연히 바뀌게 되었다. 동쪽으로 압구정을 바라보니, 제천정 옛터가 더욱 회포를 불러일으켰다. 오후에 성안으로 들어가 진개(晉介)의 집에 거처를 정했다. 저녁에 최(崔) 형이 사람을 보냈는데, 그에게서 최 형의 정거(停擧)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다. 이실(而實) 군도 같이 묵었다.
갑진년(1604, 선조37) 4월 2일 비가 어제처럼 왔다. 아침에 계화가 다시 전 번의 운(韵)으로 화답시를 보내왔다. 오후에 비가 잠시 그치자 찰방과 같이 송암정(松巖亭)에 가서 계화를 초청했다. 계화가 술병을 들고 나왔고, 조금 있다가 권중성(權仲成)과 권응순(權應順)도 이르렀고, 권계(權棨)도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밤에 대화를 오래도록 했다.
갑진년(1604, 선조37) 4월 5일 흐림. 경망 어른은 이 날 탑대(塔臺)에서 동갑 모임을 한다고 했다. 영천(榮川)의 황열(黃悅)·황성(黃惺) 두 분이 이 동네 길을 거쳐 간다고 하여, 찰방 형제 및 전 형이 술병과 술통을 가로채기 위해 모의하고 종을 시켜 길에서 두 분을 기다리게 했는데, 두 분은 이미 종을 지나친 뒤였다. 이에 전 형이 나타나 가로채려 하자, 두 분이 더 이상 길을 가지 못하고 마침내 송암정에 들르게 되었다. 나와 찰방 및 용보(用甫)도 따라 갔더니 권중성 및 류계화·김백온(金伯溫)이 먼저 자리해 있었다. 전 형이 낚아챈 술로 주인이 마침내 술잔을 돌리며 서로 희희낙락 거렸다. 중성 및 찰방도 술을 가지고 와서 수작을 했다. 두 분은 날이 저물어 탑대로 갔다. 저녁 무렵에 전 형이 청암정(靑岩亭)으로 가고, 나와 중성·계화도 잠시 갔다가 왔다.
병오년(1606, 선조39) 1월 6일 흐림. 내성(奈城)으로 가다가 토곡(吐谷) 냇가 앞에서 말을 쉬게 하하였다. 처가에 당도하니 날이 이미 깜깜했다.
기유년(1609, 광해군1) 9월 28일 맑았으나 싸늘했다. 밥을 먹은 뒤 전행(全緈) 씨가 와서, 회시(會試)의 방을 보니, 김시주(金是柱) 이립(以立)이 생원시에 장원하고, 이민구(李敏求)가 진사시에 장원했다고 말했다. 이민구는 이수광(李晬光)의 아들이다. 성 무주(成茂朱)․숙명(叔明)․계명(季明) 등과 함께 걸어서 청원정(淸遠亭)으로 나갔다.
경술년(1610, 광해군2) 윤3월 7일 흐리고 따뜻하며 비가 올 듯하였다. 정보(精甫)·권축(權築)과 함께 석천정(石泉亭)에 나가서 시 한 수를 지어 읊고 내일 문수산(文殊山)에 놀러 가기로 약속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 윤3월 25일 맑음. 선당(禪堂)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돌아오다가 석현(石峴)에 이르러 산 위에서 잠시 말을 내렸다. 춘양(春陽)에 이르러 한수정(寒水亭)을 방문한 진사 이종강(李終綱)을 만나보았다. 공보의 집에 이르니 밥을 차려 놓았다. 저녁에 유곡에 도착하여 선생의 위판을 종묘에 배향하는 일로 금명간 예관(禮官)이 올 터이므로 선비들이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2) 4월 24일 흐림. 고산은 강물이 맑고 절벽이 솟아 있다. 밥을 먹고 물을 건너가 금씨(琴氏)의 정자를 감상하였는데, 퇴계 선생의 시가 있고 정자의 형세가 좋았다. 도로 건너와서 강물을 따라 가니 바위 벼랑에 맑은 물이 흐르고 지나는 곳마다 모두 좋았다. 길에는 청석이 많았다. 나부(羅浮)에 이르러 강을 건너니 바로 동구(洞口)였다. 성을 쌓고 나무를 베어내었는데 독용(禿冗)이라고 이름하였고, 산길을 오 리쯤 가면 성문에 이른다. 연대사(蓮臺寺)에 들어가서 월대(月臺)에 앉으니 기이한 봉우리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절에 도착하여 조금 쉬었다가 시왕전(十王殿)·보문암(普文菴)을 지나 반야대(般若臺)에 이르니, 그 높이가 만 길이어서 온 산의 형승이 다 드러난다. 치원암(致遠菴)은 퇴계 선생의 제명(題名)으로 중수하였고,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제명(題名)도 있다. 치원대(致遠臺)는 최치원 신선이 다녀간 유적이다. 상청량(上淸凉)과 하청량(下淸凉)을 거쳐 반야대에 다시 내려와 앉았다가 절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캄캄하였다.
신해년(1611, 광해군3) 4월 19일 맑음. 일찍 일어나 향사(鄕社)에 나가서 학봉묘(鶴峰廟)를 배알하였다. 재실의 당우(堂宇)가 모두 갖추어졌는데 앞쪽의 난간은 강물에 임하였고, 서쪽으로 오 리를 나가면 백운정(白雲亭)에 이르는데 김 홍주(金洪州)의 정자이다. 자못 훤칠하고 시원하게 연못가에 서 있는데 솔숲의 경치가 선찰(仙刹)보다 더 낫다. 김 홍주(金洪州)의 표자(表姊)를 만나보았다. 드디어 강물을 건너 고개를 넘고 다시 개울을 지나 여강서원(廬江書院)에 도착하였다. 서원이 을사년 홍수에 무너져서 다시 지어 매우 좋았는데 양호루(養浩楼)는 더욱 크고 웅장하였다. 사당에 배알하였다. 사당의 편액은 장인어른의 수적(手迹)으로 자체(字體)가 좋다. 진학문(進學門)과 문루(門樓)의 편액은 물에 떠내려가서 배대유(裴大維)가 문액(門額)을 썼는데 썩 좋지 못하다. 밥을 먹은 후에 시냇길을 따라서 용산(龍山)을 넘었다. 옹천에서 모이는 일 때문에 제천댁(堤川宅)에 먼저 가기 위해서였다. 이지·사첨·권환(權寏)이 모두 도착하였는데, 옹천의 모임은 형편상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하였다. 들으니 박(朴)과 김(金)의 무리들이 별시를 치를 때에 시문(試門) 밖 영해(營解)에 이점(李蒧)이 일곱여덟 사람의 이름을 썼는데 일이 몹시 구차하였고, 권환은 삭과(削科)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박과 김이 앞서 논의한 것과 이렇게 다르니 한탄스럽다.
신해년(1611, 광해군3) 10월 8일 새벽에 일어나 서쪽으로 가서 장인사(長仁寺)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곧 묘암(墓菴)이다. 절이 속세의 거처가 된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늘어서서 절을 올렸다. 이곳은 소감 부군(少監府君)의 묘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고 무너졌으며, 이 묘 뒤는 영암 군사(靈巖郡事)의 묘가 있다. 언덕의 위 아래에 장씨 가문[張家]의 묘가 있어 지금은 장씨 가문의 산[張家山]이 되었다. 의식(儀式)를 갖추어 소감 부군의 묘에 제사를 올렸는데 제문은 즉석에서 지어 읽었다. 또 영암의 묘에도 제전을 드렸다. 이곳에는 묘갈(墓碣)이 있는데, 나의 6세조의 묘에는 표석(表石)이 없다. 제사를 마치고 산 아래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은 후에 묘 아래에 사는 사람들과 일행이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 먹였다. 묘산의 북쪽을 돌아서 안동에 이르렀다. 내일 일족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귀래정(歸來亭)에 들러서 감상하고 있노라니 주인 이몽태(李夢台)가 술을 내어 오고 시를 지어달라고 하기에 전에 지어 두었던 두 수를 써서 주고, 다시 붓을 달려 한 수를 더 지어 주었다. 불을 밝히고 강을 건너서 두 형과 북문 밖에서 함께 잤다.
계축년(1613, 광해군5) 4월 2일. 맑고 바람이 불었다. 오시에 전 형(全兄)과 함께 백암(栢岩) 영공을 가서 뵈었다. 영공은 이때 조곡(鳥谷)에 계시면서 상류에 정자를 지었는데, 귀학정(龜鶴亭)에서 5리쯤에 있었다. 서쪽 언덕에 대(臺)가 있어서 물을 마신 뒤에 올라갔다. 조곡을 경유하여 내려와 오 영공(吳令公) 댁에 갔다가 다시 박 도사(朴都事)의 하한정(夏寒亭)에 도착하니 박 어른이 술을 권하였다. 진사(進士) 장무부(張茂夫)가 나를 찾아서 전 형 집에 왔다가 만나지 못하자 먼저 이 정자에 도착해 있다가 서로 만났다. 저녁에 전 형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경상우도 동당 방목을 보니 여희필(呂姬弼)이 수석을 하였고, 영천 선비로 한성시(漢城試)에 참방(參榜)한 사람은 4명이라고 한다.
갑인년(1614, 광해군6) 6월 29일 안개가 짙게 끼다. 아침에 문경현(聞慶縣)의 마포원(馬包院)을 지나 신원(新院)에서 밥을 지어먹었다. 오시에 토잔천로(兎棧遷路)를 지나며 말에서 내려 걸어가자니 희양산성(曦陽山城)은 헛되이 설치된 꼴이라 매우 우스웠다. 거듭 깊은 시내를 건너 수십 리를 가서 산양(山陽)에 이르니, 높은 언덕의 소나무 숲 아래로 멀리 너른 들이 펼쳐졌다. 안장을 풀고 옷을 벗은 채로 그 위에 누워서 쉬었는데, 그 마을에 사는 효중의 종이 점심을 차렸다. 오후에 말에 올랐더니 타는 듯한 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청원정(淸遠亭)을 지나서 중명(仲明) 형 집에 도착하였다. 내가 온 것이 뜻밖이었지만, 매우 위안이 되고 후련해 하는 것 같았다. 효중과 함께 잤다. ○ 들으니, 이번 달 보름 사이에 예안이 심하게 수해를 당하여 논밭이 모두 무너졌고, 탁청정 앞에는 모래와 돌이 뒤덮었으며 우리 집 앞도 많이 허물어졌다고 하니 답답하고 놀라웠다.
을묘년(1615, 광해군7) 3월 2일 비가 내렸다. 전 형이 손님들에게 술을 권하여 아침부터 오시까지 끊임없이 술잔이 오갔다. 매화 가지에 처음으로 꽃망울이 터졌다고 전 형이 내게 시를 부탁하여 몇 수를 구점(口占)하였다. 효중이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하며 거듭 성암정(星巖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다짐하였고 봉길도 서찰을 보내와 오늘밤 꼭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비가 내려 출입을 방해하지만 조금이라도 개면 당연히 갈 것이라고 답을 보냈는데, 봄비는 부슬부슬 저녁이 다 가도록 그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효중 등이 오지 않을 지도 모르고, 만일 온다면 반드시 다시 심부름꾼을 보내어 부를 것이기에 가려던 것을 그만두고 박상지와 함께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어제 효중에게 들었는데 삼계(三溪)에 있는 계화(季華)가 초하루 향사(享祀)를 지낸 뒤에 효중을 방문하고 겸해서 나도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계화가 전에 나의 서찰을 보고 내가 영천으로 올 것을 이미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만날 수만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
을묘년(1615, 광해군7) 4월 5일 맑음. 아침에 이지가 침락정(枕洛亭)으로 놀러가자고 전갈를 보내왔다. 밥을 먹은 뒤에 평보 형·효중·자개 그리고 이지 삼형제와 나란히 말을 타고 침락정으로 갔다. 때는 어린 잎새들이 처음 푸른빛으로 물들어 맑은 경치가 참으로 고왔다. 이지와 이도와 내가 모두 술을 가져갔는데, 저녁이 되어 약간 취한 채로 배를 띄워서 내려왔다. 이날 권수지(權守之) 영공이 노천(蘆川)에 와서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으면서 서로 바라보일 만큼 가까운 곳이니 만나자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지 영공도 배를 타고 올라와 두 배를 서로 마주 대어 놓고 실어온 술로 술잔을 주고받는데 말을 타고 온 손님이 있었으니 바로 김자첨(金子瞻)이었다. 서로 만나 매우 기뻤지만, 날은 이미 저물고 강가의 길도 어슴푸레해져 마침내 여러 사람들과 말에게 길을 맡긴 채로 돌아왔다. 자첨이 다시 조용히 보자고 하고 효중도 그게 좋다고 하여 일휴당(日休堂)으로 들어가 장등 불을 켜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보 형과 자첨 등은 모두 곤하게 자고 있었으니 밤이 깊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모(李慕)가 또 강경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었으며 이점(李蒧)도 여유있게 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이 네 사람이 모두 합격되는 것이 혐의스러워서 별시에서 합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모(李慕)의 텅 빈 꼴은 이립(李苙)과 마찬가지일 뿐인데도 장차 이런 일쯤은 자기 손바닥 안에 물건으로 여길 것이니 세태의 변고가 이렇게 심한데 이르렀던가? 등과록(登科錄)을 두루 살펴봐도 삼형제가 한꺼번에 등과한 것은 듣지 못했거늘 유독 오늘에 보게 되다니 참으로 장하고도 장하도다. 대계에서는 완평부원군과 남 참판의 일을 더욱 급박하게 공격하며 멀리 유배하고 안치 하라는 논청(論請)이 그치질 않는다. 청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또 앞일을 헤아릴 수 없으니 걱정되고 걱정된다. 류숙(柳潚)이 대간이 되고 이잠(李埁)이 정언이 되었으니 이런 논의에 힘을 싣게 될 것이고, 성균관에서의 상소도 계속될 것이다. 경향(京鄕)에서 세를 합하여 이모(李慕)가 장의(掌議)가 되었다고 한다.
병진년(1616, 광해군8) 2월 10일 맑음. 아침에 서윤이 보러 와서 술잔을 들었다. 오시가 되니 중군도 오고 독운관(督運官) 심율(沈栗)도 왔다. 내가 취중에 서윤 류도와 시 몇 수를 주고받았다. 오시에 기자정(箕子井)에 가보았는데, 서윤과 판관 심 공이 다 모여 우물물을 길러 맛보기도 하였다. 이날 바람기가 매우 사나웠지만 서윤이 우물가에 술자리를 마련하라 명하였다. 중사도 왔다. 저녁 무렵에 연광정(練光亭)에 올라갔는데, 긴 강과 넓은 들이 아득히 끝이 없어 우리나라에서는 제일가는 풍경이었다. 심 판관도 따라왔다. 조금 있다가 서윤이 도착하여 술상을 내오고 잔을 돌렸다. 바람이 사나워서 처음엔 방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정자에 올라갔다. 저녁 무렵에 중군도 와서 단란함은 밤까지 이어졌다. 이 날은 밥은 한 톨도 내오지 않았다.
무오년(1618, 광해군10) 2월 2일 흐리고 잠깐 비가 내렸다. 밥을 먹은 뒤에 천성(川城)으로 돌아왔다. 효중(孝仲)이 편지를 보내 내일 석천정(石泉亭)에서 만나 이야기하자고 약속하였다.
개요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 錄) | 저자 : 김령(金坽) |
주제 : 시설, 정자의 기능 | 시기 : 1603-07-02 ~ 1618-02-02 |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 일기분류 : 생활일기 |
인물 : 김령, 상주 형, 배용길, 계화, 찰방, 권중성, 권응순, 권계, 경망 어른, 황열, 황성, 전 형, 용보, 김백온, 자개, 금도제, 성 무주, 수경, 계명, 정보, 권축, 강 영공, 이중강, 김 홍주, 이중강, 오 영공, 박 도사, 장무부, 여희필, 효중, 중명 형, 봉길, 박상지, 이지, 이도, 권수지, 김자첨, 서윤 류도, 중군, 심율, 중사, 심 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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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봤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