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제주에서
광해군(光海君)
찌는 듯한 바람 비를 몰아 성 위로 지나가니
후덥지근한 장독 기운이 백 척이나 높구나
푸른 바다 성난 파도에 어둠이 깃드니
푸른 산 슬픈 빛은 가을 기운을 보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 늘 왕손초에 맺혀 있고
나그네 꿈은 왕자의 고을에 자주 놀라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낀 파도 위 외로운 배에 누워 있네.
濟州(제주)
炎風吹雨過城頭(염풍취우과성두) 瘴氣薰蒸百尺樓(장기훈증백척루)
滄海怒濤來薄暮(창해노도래박모) 碧山愁色送淸秋(벽산수색송청추)
歸心每結王孫艸(귀심매결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객몽빈경제자주)
故國興亡消息斷(고국흥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연파강상와고주)
[어휘풀이]
-瘴氣(장기) : 남쪽 지방의 습열한 기운
-王孫艸(왕손초) : 고향 떠난 사람의 수심을 불러일으키는 정경을 표현할 때 쓴다.
淮南小山(회남소산)이 지은 시에 “왕손은 노닐면서 돌아오지 않고 / 봄풀은 자라
무성하네”라는 시구가 있다.
[역사이야기]
광해군(光海君:1575~1641)
조선 15대 임금으로 이름은 이혼(李琿)이며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세자로 있을 때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습하고 군대를 모집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이 끝난 후 1608년 선조가 죽자 15대 왕으로 책봉되었다. 안으로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궁궐 재건에 힘쓰는 한편 밖으로는 명나라, 후금, 일본 등 외교에도 수완을 보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 3월 13일)이 일어난 뒤 폐위되어 강화도에 부속된 작은 섬 교동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으며 유배 생활 19년 만인 1641년 67세로 생을 마쳤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한 명분은 크게 세 가지로 먼저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10년간 유폐시킨 죄와 여덟 살 된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죄, 또한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궁궐을 중수하면서 백성들을 피폐케 한 죄, 나아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배반하고 오랑캐인 후금(후에 청나라)과 화친한 죄이다. 그러나 나의 공적 또한 있었으니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백성들을 착취하던 여러 세금제도를 고쳐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며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을 도와줌으로써 질병으로 죽어 가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광해군 1613년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임금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몰아 강화에 위리 한치했다가 이듬해에 죽게 일조하였고 1618년에는 이이첨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의 서인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김류, 이귀, 김자점 등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1623년 3월 폐위당한 뒤 광해군으로 강등되었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조카인 종(倧)을 옹립해 인조의 시대를 열었고 광해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 광해군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유배지가 태안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강화도와 교동도로 옮겨졌다. 그후 1637년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위의 시는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면서 쓴 시라고 한다. 오늘날 광해군의 공과는 양면적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대체로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소용둘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고 있다.
광해군은 제주 귀양 시 4년을 집 밖을 너오지 못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유배형 속에 67세로 생을 마감했다. 광해군이 죽기 1년 전 제주 목사로 이시방이 부임했는데, 그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이귀의 둘째 아들이었다. 광해군은 이시방에게 김만일이 일궜다는 산마장(山馬場)과 그의 묘를 다녀오도록 허락했다.
광해군이 제위에 있을 때 김만일의 도움을 받아 기마부대를 만들어 군사들을 훈련했었다. 제주에서 조련한 말을 헌상한 김만일에게는 헌마공신의 직위와 종2품의 벼슬이 내려졌었다. 그는 제주의 한라산 일대에 산마장을 만들어 1만 마리 이상의 말을 길러 선조와 광해군 때 군마로 조달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허름한 나그네 차림으로 김만일의 묘소를 찾아가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나는 사람의 왕 노릇하다 낙마하여 지옥에 떨어졌으나 그대는 말의 왕 노릇하다 하늘에 올라갔구려” 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