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야화> 문정왕후 윤씨
명종 20세 될때까지 수렴청정 외척정치 전성시대…국정 좌우
불교 중흥·승과 부활 등 추진
조선의 13대 왕 명종(1534~1567년, 재위 1545~1567년) 하면 그다지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그 어머니 문정왕후(1501~1565년) 윤씨가 워낙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아들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는 아주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의 본관은 파평으로 1501년(연산군 7년)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태어났다.
파평 윤씨는 정희왕후에 이어 정현왕후를 배출하면서 청주 한씨, 청송 심씨 등과 함께
조선 전기 왕비를 배출하는 대표적인 가문이 됐다.
문정왕후는 “천성이 강하고 사나웠으며, 문자를 알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보듯,
어려서부터 주장이 매우 강하면서도 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은 1515년(중종 10년) 첫번째 계비인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1517년 두번째 계비를 맞이했다.
그전까지는 후궁 출신 중에서 계비를 뽑았으나 이번에는 외부 간택의 절차를 거쳤다.
문정왕후는 왕이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의식인 친영(親迎)을 행한 최초의 왕비이기도 했다.
1517년 문정왕후가 중종의 계비로 들어왔지만, 중종의 후계자는 장경왕후의 소생(인종)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1534년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왕자인 경원대군(훗날 명종)이 태어나자 문정왕후는 인종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1544년 11월 왕위에 오른 인종이 8개월 만에 후사 없이 사망한 후 왕위는 자연스럽게 명종이 이어받았다.
당시 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였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20세가 될 때까지의 수렴청정 기간은 물론이고,
사망할 때까지도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됐다.
문정왕후는 20년간 오라비 윤원형, 윤원형의 첩 정난정 등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윤원형과 정난정의 가세로 명종대는 외척정치의 전성시대가 연출됐으며,
이들은 반대파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정치적 주도권을 잡자 여론을 무시한 채 불교의 중흥을 위해 파격적으로 보우를 등용했고,
이 또한 정치문제로 비화했다.
1550년 12월에는 친서를 내려 선종과 교종 양종의 복립(復立)을 명했다.
봉은사는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는 교종의 본사로 삼았다.
사찰이 일방적으로 빼앗겼던 토지를 반환받게 하고, 연산군 때 폐지된 승과(僧科)제도까지 부활시켰다.
성리학 이념 국가를 지향한 조선사회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른 정책이었던 만큼
신하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 동맹휴학으로 맞섰지만 문정왕후는 흔들리지 않았다.
왕을 뒷전으로 몰아넣고, 불교 중흥정책을 펼쳤던 문정왕후도 세월의 벽은 넘지 못했다.
1565년 4월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명종에게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면서,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왕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
이 심열증을 얻은 것 또한 이 때문이다”라는 사관의 평가는 그녀의 강한 기질과 월권을 잘 보여준다.
문정왕후 사후 명종은 어머니의 무덤을 현재의 서울 노원구에 마련하고 태릉(泰陵)이라 했다.
명종은 자신의 무덤을 어머니 곁에 조성했는데, 현재 태릉 옆에 있는 강릉(康陵)이 그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