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튼커튼
박선희
커튼을 열면 리스본에 도착한다
깨지기 위해 완전무장한 유리창은 밖을 응시하고
유리창 뒤에서 커튼은 가슴을 열었다, 닫았다
나란한 낮과 밤은 공복처럼 지나간다
달리는 레일에 공작새가 뛰어들고
기린이 커튼에 귀 대신 코를 들이미는 곳
와락 끌어안으려 해도 닿을 듯 말 듯
팽팽한 거리에 떨어지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
의자 위, 세운 까치발은 벌써 리스본에 닿는다
몸 안의 혓바닥이란 혓바닥은 죄다 꺼내 놓는 커튼
떨어지는 자신을 밀어 올리는 폭포의 반란처럼
바닥만 출렁거린다 떠나가는 유리창
리스본 너머의 길엔 낭만이 있을까
등을 바라보는 등이 등을 내어주는 일상
리스본으로 떠나는 입들은 납작해진다 정거장,
한 정거장만 더 지나가면 방 안이 환해질까
묶인 리본이 풀려도 천둥번개가 쳐도
나는 커튼을 열지 않을 것이다 유리창 응시에 들어갈 것이다
그의 심장 넣어두려는 듯 커튼을 한 차례 들추는 바람
넌출 같은 아이들 웃음이 분수를 타고 오른다
속속들이 펼친다 커튼 칸칸 들어찬 깨진 유리창
나팔 불며 리스본을 떠난다
묶인 일상이 개킨 옷가지에 켜켜이 쌓인다
2019. <<모던포엠>>시향의 숲 발표작
도정
이리저리 치이다 들어온 새벽
쌀을 씻는다, 달빛
어둠 깜빡이며 창을 넘어온다
한주먹 움켜쥔 쌀알 내 손을 문지른다
아린 손목 타고 오른 소리를 꼬르륵 떨어낸다
당신에게 당도하기 위한 나의 도정
쌀눈은 깎고 또 깎고
온몸에 들러붙은 소리 얼마를 깎아야 당신 눈에 들까
당신 눈 밝힐까
얼마나 고독해야 눈과 몸만 남을까
어둠의 배가 빵빵하다
빈 그릇 굴리고
입에 묻은 하현 쓰윽 닦아낸다
눈은 또 어둡다
세상이 온통 너무 밝다
배려가 아프다
감나무가 무심하게 놓아버린 감잎
벽과 벽 사이 거미줄에 걸려 있다
떨어진 감잎은 얼비치는 빛을 뒤척이고
감잎에 가끔 얼비치는 빛마저 지우려 감나무는 바람을 불러 모은다
감나무가 불러 모은 바람에 매달린 감잎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정으로 붉게 타들어간다
감나무가 놓아버린 감잎은 거미에게 옆구리 갉아 먹히고
꼬투리는 빛의 곁눈질이 째려볼 때 조금씩 야위어 갔다
오해는 이해를 위한 해법
난해하게 얽힌 거미줄이 벽인지, 바람인지
거미줄에 걸린 감잎은 점점 몽롱해진다
거미가 가장 아름다운 표정일 때
잘 발효된 날벌레 물고 거미줄을 빠져나가야 할 텐데
거미줄의 고민은 출렁거린다
날아간다, 잎맥에 붙은 말라비틀어진 파리발톱
발버둥치는 거미알 품은 감잎
흙이 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2020. <<문장>> 겨울호 발표작
결핍
브래지어 속에는
아버지가 오지 않는 옥수수밭이 있다
어릴 적 장염으로 죽은 황구의 묽은 똥이 있고
우등상장을 접어 종이배로 띄운 도랑이 흐른다
날마다 브래지어를 찢어버리는 상상을 한다
호크가 단단히 끼워졌는지 살핀다
차가운 쇠의 느낌이 흐뭇해질 즈음
옥수수 잎들이 날을 세울 즈음
밝아진 브래지어 안고 밖을 나선다
겹겹이 쌓이는 계절을 담장 아래 쪼그려 앉힌다
초록으로 무거워진 여름날 매미의 우화까지 사랑해야지
브래지어 타고 징검다리 없는 물을 건너야지
천만 가지 질문 던지면 여름을 사는 브래지어가 가벼워질짜
퍼붓는 소나지 흠뻑 맞아도 브래지어는 젖지 않고
초록 냄새 풍기며 겹겹이 쌓여가는 브래지어
오랫동안 젖가슴에 파묻힌다
브래지어 날아간 울타리 밖은 물컹
옥수수 잎에 베인 길에 않으면
굽이치는 산등성이는 뒤에서부터 붉게 온다
허, 허 웃으시며 아버지가 걸어온다
아레아레아 여자
달 속에 빠진 올챙이가 빨강 통로를 찾는다. 위험한 만삭, 모형 사라진 허공, 바닥과 천장이 경계 없이 축축하다
고요한 타이티 섬은 젖냄새로 가득한 미로다, 내 열 손가락이 할퀸 빨강, 시선에서 밀쳐진 순한 짐승, 너를 딛고 난 우주의 별이 될 거야. 이곳만 무사히 통과하면 아마 밤도 하얘지겠지. 빨강으로 얼굴 지우고 사랑을 게워내려고 난 몸통을 부풀린다. 포만감처럼 입은 벌어지고 짓이겨진 손가락이 물컹한 달의 여신을 민다. 올챙이로 가득 찬 포대를 찢는다
시선에 몰린 발톱이 온몸으로 오그라들고, 자판에 물린 손가락은 흐느적거리는 추리닝 주머니에 구겨 넣는다. 비뚤어진 모기 입으로 돌멩이가 날아온다. 벼 수염이 가늘어질 때 볏물이 찬다며 열 손가락은 모니터를 밤으로 민다. 퉁퉁 불은 젖이 빨강 통로를 뚝뚝 자른다. 만삭이 뫼비우스 띠를 돌린다. 빨강이 허공에 뜬다.
배꼽 잘린 별똥별처럼 나는 운다. 울어댄다. 물풍선 입에 물고 아레아레아 타히티 여인이 부는 피리처럼
2018. 문장 여름호 발표작
카톡방에 내리는 눈
손전화는 달 비친 연못, 진동으로 눈을 쏟아낸다
눈이 눈을 적시는 거라며 손톱으로 책상바닥을 긁는데
멀리서 보내온 눈의 미소가
흐린 창에 울음을 문지른다
‘사랑 한다’ 문자를 써도 꿈쩍 않던 눈이
‘종이비행기’ 라고 쓰자 창밖을 뛰어내린다
뉴스에서는 중부지방에만 눈이 내린다고했는데
떴다 가라앉는 손가락 끝에서
종이비행기 타고 온 눈
춘삼월 카톡방을 흠씬 적신다
깜빡이며 작심한 듯 들어앉는 눈동자들
평소 하던 말이 종이비행기 될 줄 알았더라면
한 칸의 허공 아래
구조매트라도 깔아둘 걸 그랬나
두 눈 질끈 감은 눈들이 달려와
더 이상 물을 수 없는 허리둘레의 안부를
목덜미까지 손톱으로 벌겋게 긁는다
창에는 흘러내린 미소가 번지고
종이비행기 실어 보낸 눈은
기다림의 눈가에 옹기종기
상흔의 돌탑을 쌓는다
누가 불러준 솔리(松里)
우물은 소나무의 고독이다
비추는 소나무의 외로움을 그득 담는다
울타리가 만들어준 우울과는 다르다
몸에 고루 바늘을 꽂을 줄 알지만
바늘 꽂힌 몸은 그 자리에 방 하나씩 만들어
바깥의 일기를 모른 척 한다
나는 예감의 조롱박을 우물의 테두리에 걸어둔다
차츰 우물은 우울할 틈이 없고
소나무는 고독할 여지가 없어졌다
입 하나 떨어뜨려요, 후 불어서 드세요
헬스장 정수기 앞에 붙은 글귀를 읽은 나는
땀 흘린 후 물맛을 위해 매일하는 운동
솔방울이 층층의 성을 쌓는 동안
내 우물에 떨어진 솔잎의 초록성에는
외로움의 손가락이 풍덩거려
빨주노초파남보 켜켜이 내려앉은 햇살
속살은 ‘빨주노’가 아니고 ‘파남보’가 아니고
우울한 진초록일 거라 나는 믿는다
빵 광주리 속에서 솔방울이 예보하는 우리 집 일기
펼쳤다, 쪼그라들었다 습도의 반복에
기억 속 솔의 꽃을 저마다 피우느라
식구들은 분주하다
생쥐가 더 사랑스러워요
무리 지은 생쥐를
손 안의 휴대폰에 넣고도
내 손은 바르르 떤다
손에서 멀어지는 의문의 사건들
생쥐를 보여줘
똑같은 종족이라 악수 나누면 좋겠다
막연하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으면
생쥐가 귀여워지지 않을까
어둔 세계 불티나게 누볐다는 쥐새끼는
언제나 천정을 줄달음친다
조용하다
딱딱한 천정 귀퉁이
지구를 닮은 또 다른 별?
지도를 그리는 이유가 궁금하다
딱딱한 적 없는
고양이 같은 내 울음에
털을 곤두세우는
소프트한 쥐새끼, 그렇군
주먹보다 큰 몸집으로 들락거리는 궁금증은
내가 풀어놓은 빨강 노랑 파랑
손가락뼈가 살려 보낸 기억 속엔
잘린 생쥐의 손가락이 남아있다
한방에 납작하게 세상을 때려잡고도 남을 휴대폰
언제쯤 활짝 대문짝을 열어젖힐까
대문이 닫힐 때마다 그림 같은 집을 짓는
얼굴을 보여줘
천정의 잡음에도 내가 품고 잠들
로댕의 공방
커튼은 주름부터 어두워지고
어둠은 땅을 기다가 온전한 어둠이 된다
팔을 괼 수 없는 로댕은
밀레의 이삭 줍는 아낙을 납작하게 누르며
소파에 앉아 있다
그림자가 액자로 걸어 들어가고
액자가 조금씩 어둠에 깎이고
로댕의 소파는 생각 속에서 깊어간다
아낙의 조각난 머리가 날아간다
심장을 찢어 손가락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믿는 로댕은
겨드랑이에 서로 다른 주먹을 숨긴다
어둠은 곡선으로 접히다 공방을 구른다
소파가 사라지고 사거리 대형 스크린이 뛰어든다
휘청거리며 빛이 사라져도 어둠의 당도는 아직 멀다
무릎이 뒤로 가고 팔이 앞으로 간다
머리꼭지에 무릎이 오를 때
팔은 희미한 별자리 걸린 능선이 된다
스크린 바닥으로 질주하는 좌심방은
밤하늘에서 사라진다
어둠의 뒷배가 다시 둥그레진다
또 다른 행성의 낯선 빛이
공방 바닥 카펫을 말며 들어오면서부터
빛을 마주 보고 앉을 수 없는 나는
멍든 턱 괴고 돌아앉는다
명품에게 묻는다
눈 뜨면 나를 내려다보는 가방이 있다
‘잘 잤니’ 환청인가 싶었다
각진 벽모서리 헤치고 나오느라
등에 얼룩 곰팡이 말라붙은 한 마리 물소
어둠 속에서 손 뻗어 만지면 색 바랠까
깍지 낀 손을 엉덩이 뒤에 숨기고 지긋이 바라본다
내가 건넨 말들에 갸우뚱 어깨 비틀며 뽐내는 목
너도 혼자이고 나도 혼자인 걸 알 때
일 년에 한 번은 꼭 찾아오는 생일
푼푼이 건네받은 돈 알뜰히 모아야 했다
어마어마한 행복의 표정을 담아두려고
명품가방 하나 모셔놓고
구색 맞출 나의 내일 위해
참 이상한 어제를 오늘로 되새김질한다
늪의 파문이 내민 동그라미 하품에도
당겨진 내 몸의 실핏줄은 끝도 알 수 없이 길기만 해
쫑긋 귀 세우는 너에게 나 언제까지나
행복하냐고 묻고 또 묻는다
너무 많은 내 이야기로 네가 입 다물지 못하는 날 오기 전
꼭 한번은 데리고 나가주어야 할
수초 먼지 달라붙은 너의 몸
환청인 듯 현실인 듯 입으로 후후 부는 내 입김을 먹고
긴 건기에도 가방은 살아있다
2018. <<형상시학>> 발표작
-박선희 시인 : 2018년 <<문장>>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