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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묵상글 ( 대림 제2주간 금요일. - 지혜는 덧셈이고 어리석음은 뺄셈이다. 배움의 사랑, 배움의 여정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56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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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2.12 04:54
- 지혜는 덧셈이고 어리석음은 뺄셈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사랑에서 비롯된 진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서는 이렇게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과 세례자 요한에 대해
먹으면 먹는다고, 먹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당대 사람들을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인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시며 이렇게 결론 내리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미성숙의 한 형태는 자기중심의 어리석음입니다.
자기가 자기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기에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경청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一理)가 있고
하느님 말씀에 진리(眞理)가 있음을 보지 못하기에 경청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의 말을 경청했다면 건강을 잃지도 않고,
몸뿐 아니라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평안할 텐데
건강할 때는 어리석게도 자기 건강만 믿고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경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지혜가 옳다는 것이, 지혜가 이룬 것으로 드러나듯
어리석음이 그르다는 것은, 어리석음이 이룬 것 곧 건강 상실로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이룸이고,
어리석음은 상실입니다.
지혜는 덧셈이고,
어리석음은 뺄셈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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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사랑, 배움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참 스승이자 인도자인 주님뿐이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8,12)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배움의 대상 역시 끝이 없습니다.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배워야 하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 평생졸업이 없는 평생학인의 신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도, 기도도, 섬김도 모두 아무리 배워도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겸손과 경청이,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배움에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제도 면담성사중 “크게 공부했다, 배웠다, 생각하십시오. 결국 겸손을 배우고 비움을 배우니 그대로 영적성장이겠습니다.” 나누니 실로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배움의 여정을 통해 날로 비워가니 겸손해지고 자유로워지니 그대로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오늘 역시 배움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인간을 만드는 것은 태어나면서 얻는 기질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만들어가는 태도다.”<다산>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이는 배워야 알며. 어떤 이는 곤란을 겪어야 알지만, 과정은 달라도 그 깨달음은 모두 같다.”<중용>
옛 현자들의 지혜 역시 배움의 여정에 항구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어제 역시 피정자들에게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해 “기도하라, 일하라, 공부하라”의 조화와 균형잡힌 지혜로운 삶에 “운동하라”를 덧붙였습니다. 운동은 구체적으로 <걷기>입니다. 걷기를 추천하는 건강 전문가의 가르침을 나눕니다.
1.걷기는 뇌를 자극한다.
2.걷기는 건망증을 극복한다.
3.걷기는 의욕을 북돋운다.
4.걸으면 밥맛이 좋아진다.
5.걷기는 비만치료제이다.
6.걷기는 요통치료제이다.
7.걸으면 고혈압도 치료된다.
8.걷기는 금연치료제이다.
9.걷는 사람은 뇌가 젊어진다.
10.스트레스가 쌓이면 일단 걸어라.
11.자신감을 잃었다면 일단 걸어라.
12.몸이 찌부듯하면 일단 걸어라.
13.마음이 울적하면 일단 걸어라.
14.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일단 걸어라.
15.분노가 일면, 일단 걸어라.
15.인간관계로 얽히는 날 일단 걸어라.
17.할일이 없는 날, 일단 걸어라.
만병치료제이자 지혜로운 삶의 지름길이 평생 <걷기> 운동입니다. 하늘보고 기도하라 <직립인간>이요, 평생 스승이신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걸으라 <두발>을 지닌 사람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에 영원한 스승이 바로 주님입니다. 배움의 노력과 열정에 지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께서는 배움에 충실치 못한 당신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호소하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나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모든 불행은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못함에서 기인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참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께 끊임없이, 한결같이, 충실히 배울 때 편견과 선입견은 물론 무지의 마음병도 치유되어 참으로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만고의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이 개탄하는 세대는 바로 배움이 결핍됐음을 봅니다.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출 줄 모르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무감감, 무공감의 지극히 무뎌진 감성의 사람들입니다.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왜곡되고 변질된 자폐적 내적 불구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왜곡된 심성이, 편견이 점입가경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들렸다’ 하고, 예수님이 와서 먹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매도합니다. 참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함으로, 즉 무지의 편견과 선입견, 오해와 착각의 눈멂으로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무지에 대한 답은 참스승이자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뿐입니다. 주님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따르며 배움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지유롭과 지혜롭고 겸손한 삶이겠습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으니 예수님의 전삶이 하느님 지혜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주님을 닮은 지혜롭고 자유롭고 겸손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1;1ㄱ,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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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슬픔일 것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고 부수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이 ‘찢기어지고 나누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변화와 성화로 새롭게 하여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에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무디어 진 제 마음이 빛보다 어둠에 치우친 까닭입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실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완고함의 벽을 헐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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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공지능이란 말이 이제는 아주 가깝게 들립니다. 많은 분이 인공지능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인공지능과 대화하면서 제가 모르는 정보를 얻곤 합니다. 강론 준비에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의 힘은 미리 학습된 정보를 원하는 질문자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뇌가 작동하는 원리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우리의 뇌는 쉽게 찾아냅니다. 예를 들어 방문이 열렸다면 집에 있는 누군가가 열었음을 알게 됩니다. 집에 어머니가 있었다면 당연히 어머니가 열었다고 우리는 추측합니다. 배고 고프다면 식사할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추측하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가지고 결과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원인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간의 뇌와 경험은 많은 원인의 변수를 다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엄청난 계산으로 다양한 원인의 정확한 이유를 찾아 결과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세포의 배양, 단백질의 구조, 복잡한 수학 문제를 인간의 뇌는 계산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훨씬 쉽게, 훨씬 빠르게 결과를 예측해 냅니다. 지금은 인공지능이 컴퓨터 안에서 활동하지만, 인공지능이 몸을 얻게 되면 세상은 인간과 인공지능을 가진 사이보그와 함께하는 공존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펼쳐지는 세상이 낙원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펼쳐지는 세상이 더 큰 혼란과 고통을 주는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어디에 있어도 늘 ‘가시방석’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듯이 공동체를 갈등과 분란으로 몰고 가곤 합니다.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흙 속에서도 꽃이 피듯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물을 탓을 하지 말고 내 마음의 바가지를 잘 가꾸어야 합니다. 새는 곳이 있다면 새지 않도록 고쳐야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낙원이 되는 세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다.” 그렇습니다. 유목민의 시대에도, 농업의 시대에도, 산업화의 시대에도,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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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다른 이들을 위해 빛이 되어 다는 것!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2월 11일 목요일- 쉰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은총의 은밀한 업적
“불확실함은 우리 마음을 열어, 이웃을 위한 사랑의 봉사로 나아가게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깊이 개인적인 체험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제임스 핀리(James Finely)는 이러한 ‘어두운 밤’이 어떻게 우리의 인간성을 변화시키는지 성찰합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더욱 깊어진 공감과 자비, 그리고 현존의 은총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 요한 십자가는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의 자비심은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었습니다. 한 수도자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작은 모임으로 산책을 나설 때마다, 늘 요한 십자가 성인이 함께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웃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운 밤’은 세상의 어둠을 넘어, 역설적으로 우리의 현존을 더욱 급진적으로 성화시켜, 삶의 조건 속에서 드러나는 거룩함으로 이끌어 줍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저는 때때로 작은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젊은이들이 바라보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게 하소서. 말로만이 아니라, 걸음걸이와 일상의 태도 속에서도, 전화에 응답하는 모습에서도, 손주들과 대화하는 순간에도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게 하소서.’ 우리 모두는 신앙 안에서 ‘말씀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1]
영적 지도자 테레즈 데스캠프(Therese DesCamp)는 ‘영혼의 어두운 밤’ 한가운데에서도,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이웃을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목격하였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의미의 상실, 기쁨의 상실, 확신의 상실을 동반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의심과 자기 의심은 자주 찾아오는 손님이며, 깊은 슬픔 또한 그 자리에 함께합니다.
비록 제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삶의 유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웃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슬픔과 혼란, 그리고 두려움을 깊이 느끼며,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웃을 수 있고, 대개는 제 자신을 향해 웃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가볍게 받아들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저는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우리가 이웃을 돌보는 능력을 줄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능력을 더욱 깊게 합니다. 사실 어떤 날에는, 이웃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방향을 잃은 고통을 덜어주는 유일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자아의 축소가 아니라, 오히려 시선을 자기 자신에서 이웃에게로 돌리게 합니다. 더 이상 내가 선한 사람이라는 위로를 느끼거나, 한때 친밀하게 경험했던 ‘하느님’의 가까움을 체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은 모든 생명이 지닌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우리를 모든 살아 있는 존재와 더욱 깊이 연결시킵니다. 그 어둠 속에서 저는 타인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깊이 느낍니다. 비록 내 안은 어둡게 느껴지지만, 그 안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 남편은 34세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저는 가족의 삶에서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맞추려 애쓰며 깊은 슬픔 속에 있었습니다. 장례 몇 주 후, 문득 저는 흥얼거리며 다가올 하루를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멈추며 "지금 뭐 하는 거지? 상황은 여전히 힘든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느님의 은총이 제 안에 스며들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기쁜 마음은 은총의 짧은 선물, 잠시 머무는 위로였습니다. 힘든 날들은 여전히 찾아오겠지만, 기쁨의 순간 또한 함께 올 것입니다. 저는 매일,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껴안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Mary S.
References
[1] Adapted from James Finley with Kirsten Oates, cohosts, Turning to the Mystics, podcast, season 3, ep. 3 “Dialogue 1: The Ascent of Mount Carmel,” March 22, 2021. Available in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2] Therese DesCamp, Hands Like Roots: Notes on an Entangled Contemplative Life (Santos Books, 2025), 10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aura Barbato, untitled (detail), 2020, photo, Italy,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에 서린 안개를 닦아내는 작은 몸짓은 곧 ‘영혼의 어두운 밤’ 속에 있다는 우리의 작은 표징이 됩니다. 그것은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는 육화된 응답으로, 알 수 없음 속에서도 선명함을 향해 나아가려는 몸짓입니다. 그 옆에서 작고 한결같이 타오르는 촛불은, 겉으로는 계절이 환히 빛나더라도 우리의 내면이 그렇지 않을 때에도 성령께서 여전히 부드럽게 타오르고 계심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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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마태 11,16)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이사야 에언자가 “보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과 나‘’(이사 8,18)라고 한 이들입니다. 또 시편이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시편 19,8)라고 한 이들입니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께서는 요새를 지으셨습니다."(시편 8,3)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장터, 곧 ’아고라’(광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스어 ‘아고라’는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많이 있는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저 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껏 소리를 높여 외쳤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선행을 하도록 노래 불러 주었고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췄던 것처럼 춤추라고 피리를 불어 주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너희는 두 가지 선포, 다시 말해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너희가 가난과 부를 똑같이 경멸하니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을 다 하찮게 여긴 사실이 조금도 놀랍지 않다. 너희가 가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라면, 왜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겼느냐? 너희가 부를 좋아한다면, 왜 사람의 아들을 싫어했느냐? 너희는 이 둘 가운데 한사람에게는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먹보요 술꾼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들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곧 하느님의 가르침과 지시로 드러났다. 하느님의 영광이요 지혜인 내가 올바르게 행동했다는 사실이 내가 이룬 일, 곧 사도들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셨던 것을 그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5 우리의 신성
이것을 위해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고 하셨다(사도 1,4),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즉, 하느님은 자기 바같에서는 어떠한 이유도 찾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자기를 위하는 것만을 찾으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만 모든 것을 사랑하시고 행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만물을 사량하되, 보답이나 명예나 행복을 바라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리는 표지일 것입니다.
목적지에 다다랐는데, 더 이상 수단이 필요하랴. 거기에서 참된 일치와 자유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처음이 끝이 되었고, 근원이 목적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거기에서는 의지 역시 하느님의 의지와 똑같아진다. 내면의 자유가 일어난다. 엑카르트는 이 자유가 방종이 아니라, 이유 없이 사랑으로부터 행동하는 자유라고 말한다. 일치와 자유와 사랑이 있는 이 빈 들에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산다. 온갖 좋은 피조물이 우리에게로 돌아오고. 우리는 만물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밝고 투명하게 본다. 이 세상에서 죽은 것은 모두 저 세상에서 생명이 되고, 이 세상에서 물질의 속성을 띠는 것은 모두 저 세상에서 하느님의 영 안에 있게 된다. 하지만 빈 들의 평화는 이 세계를 피하여 고요와 정적이라는 자기 도취의 골짜기로 뛰어드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소음과 불안 역시 빈 들의 일부이며. 빈 들로 흡수된다. 어떠한 번잡과 교란도 이 심오한 일치와 자유를 어쩌지 못한다.(524)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하느님께 맡겨드림
우리를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직무 때문에 존경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위험하고 힘든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거두지 말아주십시오. 그리스도의 가족인 교회는 베드로와 바오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사도 12,5: 13,3) . 우리는 당신들이 이 가족애 속하는 것을 대단히 기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드로나 바오로가 필요로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긴급하게 우리 형제자매들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거룩하고 일치단결한 마음으로 투쟁하면서 기도히십시오. 여러분 상호간에 서로 투쟁할 것이 아니라. 모든 신도들의 적인 악마를 거슬러 투쟁하십시오. 단식과 깨어 있음 그리고 육제의 욕망을 끊는 일들 중에서 -이런 요쇼들은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도록 촉진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십시오. 어느 한 사람이 이들 중 어떤 것을 해낼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행하시오. 적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행할 수 있는 사람을 방해하지 마시오. 그리고 많이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적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을 강박하지 마시오.
여러분의 양심은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결코 빚을 지지 마시오”(로마 13,8 참조).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에페 3, 20) 주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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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이 세대는 무엇에 비길까? 마치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는 아이들과 같다.”
이는 하느님께서 여러 방식으로 당신 뜻을 보여주고 초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마음을 닫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고행의 삶을 살며 회개를 외쳤지만 사람들은 “그는 미쳤다”고 했고, 주님께서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시며 사랑을 나누셨지만 “먹보요 술꾼이다”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시선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이고, 하느님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판단하기에만 급급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실로 드러난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평가나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행실과 열매로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겉모습이나 규범, 세속적 기준으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지혜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진리를 통해 구체적인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지혜는 바로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지혜였습니다. 그분은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시며 “하느님의 자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외적인 모습보다 진실된 마음을 보셨고, 율법보다 사랑을 앞세우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 즉 세상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참된 지혜입니다.
우리 역시 신앙 안에서 이러한 지혜를 배우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를 쉽게 판단해버리거나 나와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을 배척하기보다,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인지요.
늦은 밤, 외부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 디제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의 끝에 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라고….
맞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요.
밤이 있어 쉴 수 있기에 다행입니다.
밤이 있어 하루를 돌아볼 수 있기에 다행입니다.
밤이 있어 내일을 다시 꿈꿀 수 있기에 다행입니다.
밤이 있어 오늘의 실수를 만회할 내일이 주어져서 다행입니다.
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대의 오늘 밤이 그대에게 큰 힘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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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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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형제님이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술집에서 회포를 풀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로 술자리가 무르익고 있을 때,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가 나타나 말합니다.
“내 손녀딸이 아파서 그런데 껌 좀 사주세요.”
친구 중 한 명이 할머니가 요구했던 돈보다 더 얹어주며 껌 한 통을 샀습니다. 할머니가 옆 테이블로 갔을 때, 그 옆의 친구가 말합니다.
“그 할머니 사기꾼이야. 손녀딸이 없어.”
이 말에 껌을 산 친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곧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휴~~ 정말 다행이다. 그러면 아픈 사람도 없네. 잘 되었으니 우리 모두 건배~~~”
이런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부정적인 마음은 우리의 사고를 닫아버리고 기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려 있으면 사고도 열리고 어떤 상황이든 다 기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 열린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마태 11,16)
당시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장터(agora)와 같은 공공장소에 모여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놀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놀이가 두 가지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어떤 제안에도 반응하지 않고 삐쳐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을 꾸짖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에도 춤추지 않고, 회개의 촉구에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무감각’과 ‘고집’으로,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오셔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장터의 아이들이 보여준 가장 큰 문제는 ‘악행’이라기보다 ‘반응하지 않음’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영적 위기는 하느님의 말씀에 더 이상 가슴 뛰지 않고, 이웃의 아픔에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는 ‘무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에게는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합니다. 실제로 본당 사제가 엄격하면 ‘사랑이 없다’라고 말하고, 사제가 자비로우면 ‘기강이 없다’라고 비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가 참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요? 주님께 더는 무관심으로 다가서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반대의 마음으로 이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세 사람이 걸어가면 반드시 네 스승이 있다(논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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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은 세상의 명성과 허구적 감정에 기대지 않고, 진리와 사랑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이들이 불만을 품었고, 세례자 요한은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님은 요한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가요?
고대 로마인들은 ‘빵과 서커스’만을 원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빵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고, 서커스는 마음에 허구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연극을 보며 흘린 눈물을 보고 자기 어머니가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극장 밖 혹한 속에서 어머니와 자기를 기다리던 마부에게 무정하게 대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머니의 눈물이 실제 고통받는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허구적 인물에게만 머물렀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성의 유혹을 거부하셨습니다(루카 4,9-12). 그분은 ‘연극적 성공’을 거부하셨기에 세상적 기준으로는 성공하지 못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유명인들은 명성을 위해 삶을 희생하지만, 그 명성은 언제든 군중의 무자비한 외면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개선 입성(마태 21,6-11)에도 잠시 연극적 요소가 있었지만,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은 곧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환상이 없는 분’, 곧 진리와 현실을 직면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명성과 허구적 감정에 기대지 않고, 진리와 사랑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허구적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는 자비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결국 예수님은 환상 없는 진리의 빛으로, 우리를 참된 사랑과 은총의 길로 이끄십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탄식 앞에서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까?’(마태 11,16).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자주 그분의 뜻에 순응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음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평하며, 심지어 우리를 괴롭히는 일들에 대해서까지 그분을 탓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위로 드러납니다.’(마태 11,19). 성탄의 신비만 바라보아도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불평은 사실상 하느님께 드릴 응답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요? 이는 대림 시기에 매우 적절한 물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나러 오시지만, 인간—특히 오늘날의 인간—은 그분을 피합니다. 어떤 이들은 헤로데처럼 그분을 두려워하고, 또 다른 이들은 단순히 그분의 현존만으로도 불편해합니다. 요한 복음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없애 버려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요한 19,15).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예수님을 ‘오시는 하느님’이라 부르셨지만, 우리는 ‘떠나가는 인간’처럼 보입니다. 요한은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도망치는 이유는 진정한 사랑과 온유함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작아져야 한다’고 권고했고, 교회는 대림 시기마다 이를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작은 하느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포대기에 싸인 겸손과 참된 사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십니다. ‘포대기에 싸인 하느님’이라는 설교는 전례에 있어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변명과 불성실한 설명으로 자신을 감추려 합니다. 인류의 시작부터 아담은 하와를, 하와는 뱀을 탓했습니다. 수세기가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하느님께서는 오십니다. 베들레헴의 추위와 가난 속에서 그분은 우리를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잘못을 작은 어깨에 짊어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우리의 변명은 이 ‘작은 하느님’ 앞에서 과연 합당할까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표징은 아기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아가며, 사랑의 본질인 겸손한 자기 비움을 그분과 함께 실천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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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생명] 대림 2주간 금요일 - 있는 그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마음
(Week 02. 심장이 뛰는 시간 / 임신 5–8주 / 대림 2주)
있는 그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마음
#있는그대로살기 #마음의자유 #작은생명의존엄 #만삭낙태법반대
어쩌면 우리는 지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세대와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 11. 17)
기쁨이 와도 기뻐하지 못하고,
슬픔이 와도 슬퍼하지 못하는 마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과 같은 모습.
이 복음 구절은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게 비추고 있는 것 같다.
현대인의 마음은 왜 이렇게 반응하지 못할까.
우리는 늘 안정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평온해야 하고,
성공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기준은 점점 더 까다로워졌고,
우리의 마음은 그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적당히’만 느끼려고 한다.
“지금 기뻐해도 되는 걸까?”
“이렇게 슬퍼하면 약해 보이지 않을까?”
이렇게 순간의 감정에 조건을 붙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반응조차 막혀 버렸다.
마음은 반응하고 싶은데,
머리가 허락하지 않는 삶.
그래서 우리는 자꾸 불안해진다.
감정을 억누른 자리에는
언제나 불안이 자라기 때문이다.
불안은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한다.
요즘 사회가 생명 앞에서 갈등하는 이유도
어쩌면 이 불안과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태아가 생명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 생명은 언제나 뜻밖의 방식으로 오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품고 있다.
그 예측할 수 없음, 흔들림, 준비되지 않음이
현대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는 ‘안정된 삶’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통제해 왔다.
그러다 보니
생명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선물 앞에서도
자유롭게 반응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기쁘면 기뻐해도 되고,
두려우면 두려워해도 되는데
우리는 그 감정마저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려 한다.
그 마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군중의 마음과도 닮았다.
요한이 와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가 와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든
예수님도, 새 생명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마음.
불안은 새로운 생명도,
새로운 계시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존재의 자유는 ‘있는 그대로 반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금욕이냐, 식탁공동체냐의 차이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어떤 방식에도 응답하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있는 그대로 반응하는 자유.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존재의 자유가 아닐까.
기쁨이 오면 기뻐하고,
슬픔이 오면 슬퍼하며,
불안이 오면 불안을 인정하고,
생명이 오면 생명에게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삶이 던져주는 순간들 앞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관념과 두려움 대신
내 안의 진실한 울림으로 살아가는 것.
이 단순한 원리가
우리를 다시 자유롭게 하고
삶을 다시 비옥하게 한다.
마음이 반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다시 살아난다.
자기감정에 반응하는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 존재를 다시 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눈물이 날 때는 눈물을 흘리며,
주어진 생명 앞에서는
잘하려는 마음보다
그저 마주할 용기를 내는 것.
그때 우리는
마음이 스스로 흘러가도록 허락하게 된다.
불안은 조금씩 녹고,
삶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있어야 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살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도, 사랑도, 하느님도
다시 자유롭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이의 기도
주님,
크게 살지 못해도 괜찮다고
작게 있어도 사랑받는다고
오늘 제 마음에 속삭여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걸어도
당신께서는 늘 함께하심을
조용히 느끼게 해 주십시오.
아멘.
Today's Word
"있는 그대로 반응할 때, 마음은 다시 살아난다"
by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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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기네 장단에 맞추어 다른 사람이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함께 무엇인가를 한다는 뜻도 있겠지만
자기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자기들의 뜻대로만 움직이기를 원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자기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것은
상대방의 모습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렇게 해도 싫고 저렇게 해도 싫습니다.
이것을 싫어하는 것 같아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해 보지만
그것도 싫어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아니 우리가 무엇을 해서 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
그들 앞에서 굽신거리며
그들의 뜻을 묻고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 실수는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하는 것을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원하는대로 하지 않은 것을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아주고
모든 것을 받아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건강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는 건강한 관계가 아닙니다.
자기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것은
서로 대등한 위치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밑에 있는 사람에게만 고통을 주지 않고
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고통을 줍니다.
권력이 행복을 가지고 오고
편안함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세상에 널리 퍼진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봅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위에 계셔야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군가의 위에 있는 것이 행복이라면
하느님께서 굳이 내려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너를 나와 대등한 관계로 대하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서로를 향한 사랑이며
서로의 행복이기에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육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어떤 행복을 원하는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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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1,16-19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보여주시는 표징을 보고도 당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장터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모두가 함께 재미있게 놀려면 나와 입장이나 생각이 다른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서로에게 맞춰줄 줄도 알아야 하는데, 상대방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각자 자기 하고 싶은대로만 하려고 들면서, 왜 자기 의견에 따라주지 않느냐고 상대방을 비난만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는 서로 편가르고 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게 될 뿐, 아무도 즐겁게 놀 수 없다는 겁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어 모두가 하늘나라에서 열리는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이끄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그분들의 가르침이 내 생각과 달라도, 당장은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힘들고 불편해도 따라야만 하지요. 하지만 유다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극기와 고행을 너무 강조하니 힘들어서 싫고, 예수님은 죄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며 먹고 마시는 모습이 불편해서 싫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요한이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분들을 받아들이면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슬프지 않아도 가슴을 치며 곡을 해야 하고, 내가 즐겁지 않아도 피리를 불며 춤을 추어야 하는데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자유’를 잃게 될까봐, 그로 인해 손해나 희생까지 감수하게 될까봐 두려운 겁니다.
나와 생각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메시아’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온다고 해도 썩 반갑지 않습니다. 진짜 메시아는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이상적인 메시아’의 모습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름 때문에 불편과 손해를 감수할 바에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원하고 바라는 ‘우상’ 이외에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기에, 요한도 예수님도 밀어내고 배척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참된 평화는 흑백논리로 편을 가르지도, 자기만의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배척하거나 소외시키지도 않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풍요로운 다양성 안에서 마음을 모아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가지요.
우는 이가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곁을 지키며 함께 울어주고, 기뻐하는 이가 있으면 마치 내 일인 것처럼 함께 웃어줌으로써 슬픔은 절반으로 기쁨은 몇 배로 만드는 것, 그것이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성숙한 자녀는 기쁨의 춤을 추는데에 장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느리면 느린대로 차분하게, 빠르면 빠른대로 신명나게 춤을 추지요. 그 흥겨운 잔치의 한복판에서 주님이 그 누구보다 기쁘게 춤추고 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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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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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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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2.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_상향적 신앙생활
대림시기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길 따라 꿋꿋하게 걸어가는 시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돌이켜보고, 지난 주일 세례자 요한의 외침대로, 골짜기라면 메우고, 산과 언덕은 낮추고, 굽은 데는 곧게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는 정리 작업, 한 마디로 길을 곧게 하는 수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주님의 길인지, 정확하게 말해서 주님을 향하는 길인지 점검하고 반성하고 새롭게 설정하는 노력이 앞서야 합니다. 참된 회개를 말합니다!
골짜기 곧 상처로 인해 깊게 패인 마음, 산과 언덕 곧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교만, 굽은 데 곧 남의 마음을 왜곡하는 비뚤어진 마음, 거친 길 곧 자기 것만 향해 내닫는 고집스러운 마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골짜기, 산과 언덕, 굽은 데, 거친 길 등,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 또는 이웃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 그것도 깎아지른 듯한 외고집과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을 잣대로 하느님과 이웃을 판단하니, 그런 길만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대림시기를 사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시선은 마땅히 상향적이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향해야 합니다. 나아가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주위의 신자들을 보며,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 본받으려는 마음,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해도 나도 언제가 그와 같은 신앙을 살아보겠다 다짐하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 깎아내리거나 헐뜯는 일은 단연코 삼가고 피해야 합니다. 이런 행위를 고집한다면, 자기 자신도,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도 피폐화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 너무나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이웃의 신앙 자세를 눈여겨보고 인정하고 본받으려는 마음을 가슴에 새기며, 아기 예수님을 뵙기에 아직도 갈 길이 먼 우리를 향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님 맞이에, 오늘 하루 더욱 든든하고 보람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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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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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435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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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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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의정부교구 정재웅 마티아(원출동성탕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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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을 향해 발돋움해야 하는 대림 시기!>
하느님의 극단적인 자기 낮춤의 결과인 아기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 그 절절한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하는 대림 시기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당신의 위치를 스스로 버리시고 완전히 자세를 낮추시어 우리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애틋한 사랑, 각별한 사랑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셨으니, 이제 우리 인간 측의 호응이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향해 발뒤꿈치를 최대한 쳐들고 손을 크게 뻗어 하느님께로 발돋움해야 하는 대림 시기입니다.
신앙 생활, 혹은 영성 생활이란, 내려오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 측의 적극적인 응답입니다. 내려오신 하느님을 향해 부단히 올라가는 일입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능력이 호응하고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보려고 ‘생쑈’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 별 짓을 다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똑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릇된 신앙, 왜곡된 논리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던 율법학자들, 두렵고 경직된 얼굴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바리사이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당신에 앞서 파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새 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자는 마귀 들렸다’며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참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이 도래하셨습니다. 이분까지도 ‘먹보요 술꾼’이라며 거부합니다.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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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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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소 마취된 신앙: 손끝의 쾌락에 갇혀 심장의 고통을 잊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행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이들이 손에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에 행복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영화 『에비에이터』의 실제 모델이자 당대 최고의 억만장자, 영화 제작자, 비행사였던 하워드 휴즈의 삶을 들여다봅시다. 그는 젊은 시절, 세상 모든 남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다 가졌습니다. 막대한 부, 하늘을 나는 명예, 할리우드 여배우들과의 염문까지, 그의 '손끝'에는 늘 쾌락과 성공이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어땠을까요?
그는 세균 공포증과 강박증이라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펜트하우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그는 발가벗은 채 지냈습니다. 세균이 옮을까 봐 티슈 상자를 신발처럼 신고 뒤뚱거리며 걸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소유했으나, 정작 마음의 평안은 단 한 조각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육체의 감각과 욕망에만 치중하느라 영혼의 행복에는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그의 마지막은, 화려한 펜트하우스가 사실은 차가운 감옥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국소 마취된 신앙인'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수술할 때 국소 마취를 하면, 몸의 다른 부분은 멀쩡한데 딱 그 부분의 감각만 사라집니다. 영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욕망'이라는 마취제를 맞고 영혼의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이를 저는 '초점의 오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마치 욕망이라는 현미경으로 눈앞의 이익만 확대해서 보느라, 저 드넓은 하늘을 보여주는 망원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꼴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지혜'란 무엇일까요?
지혜는 단순히 똑똑한 머리가 아닙니다. 지혜란, 손끝의 찰나적인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전체, 즉 '마음의 행복'을 바라볼 줄 아는 눈입니다. 부분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를 보는 능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라고 탄식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 왜 그들은 반응하지 않을까요? 귀가 먹어서가 아닙니다. 자기들만의 놀이, 자기들만의 욕심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할 '심장의 감각'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무감각, 아케디아(Acedia)입니다.
이렇게 손끝의 욕망에만 집중하며 국소 마취된 채 살아가는 이들이 겪게 되는 비극을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주인공 마틸드는 가난하지만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어느 날 파티에 초대받은 그녀는 돋보이고 싶은 허영심, 즉 '손끝의 쾌락'을 위해 부자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립니다. 파티에서의 하룻밤은 꿈처럼 화려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부러움, 찬사... 하지만 그 영광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돌려주기 위해 막대한 빚을 집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무려 10년 동안 하녀처럼 일하며, 고운 손은 거칠어지고 얼굴은 늙고 추해집니다. 10년 후, 빚을 다 갚고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난 마틸드는 충격적인 진실을 듣습니다. "어머, 마틸드! 그 목걸이는 가짜였어. 기껏해야 500프랑밖에 안 되는 모조품이었다고!"
보십시오. '진짜 행복'이 아닌 '가짜 욕망'을 좇은 대가는 이토록 참혹합니다. 찰나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청춘을 낭비해 버린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복음은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한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라고 선언합니다. 진짜 지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최고의 예화가 바로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 우깁니다. 솔로몬은 "아이를 반으로 갈라 나누어 주어라"라고 판결합니다. 가짜 어머니는 "내 것도 안 되고 네 것도 안 되게 그냥 나누자"며 동의합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이 아니라 '소유'라는 손끝의 욕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어머니는 울부짖습니다. "아이를 죽이지 마시고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
진짜 어머니는 내 품에 안는 '소유의 행복'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아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생명의 행복', 즉 전체를 살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녀가 손끝의 욕심을 내려놓고 심장의 사랑을 택했을 때, 지혜로운 왕은 판결합니다. "저 여자가 진짜 어머니이다."
지혜는 이렇듯 행동으로, 그 결과로 드러납니다. 부분을 포기함으로써 전체를 얻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대림 시기는 우리 영혼의 마취를 풀고 깨어나는 시간입니다. 어떻게 하면 욕망의 감옥에서 벗어나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일화가 우리에게 그 답을 줍니다.
요한 23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교회와 세상의 산적한 문제들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 거대한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나?" 하는 책임감과 걱정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꿈속에서 천사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요한아, 교회의 주인은 너냐, 아니면 성령이시냐?" 잠에서 깬 교황님은 무릎을 탁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령님, 교회의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저는 이제 자러 갑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자아의 욕망, 내가 해결사라는 '부분적 집착'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대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심장의 평안'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바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위대한 봄을 열 수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손끝의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행복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내 욕심을 채우려는 현미경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망원경을 들어봅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장터의 피리 소리에 기쁘게 춤추고, 이웃의 아픔에 진심으로 가슴 칠 수 있는 '살아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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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공지능이란 말이 이제는 아주 가깝게 들립니다. 많은 분이 인공지능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인공지능과 대화하면서 제가 모르는 정보를 얻곤 합니다. 강론 준비에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의 힘은 미리 학습된 정보를 원하는 질문자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뇌가 작동하는 원리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우리의 뇌는 쉽게 찾아냅니다. 예를 들어 방문이 열렸다면 집에 있는 누군가가 열었음을 알게 됩니다. 집에 어머니가 있었다면 당연히 어머니가 열었다고 우리는 추측합니다. 배고 고프다면 식사할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추측하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가지고 결과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원인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간의 뇌와 경험은 많은 원인의 변수를 다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엄청난 계산으로 다양한 원인의 정확한 이유를 찾아 결과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세포의 배양, 단백질의 구조, 복잡한 수학 문제를 인간의 뇌는 계산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훨씬 쉽게, 훨씬 빠르게 결과를 예측해 냅니다. 지금은 인공지능이 컴퓨터 안에서 활동하지만, 인공지능이 몸을 얻게 되면 세상은 인간과 인공지능을 가진 사이보그와 함께하는 공존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펼쳐지는 세상이 낙원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펼쳐지는 세상이 더 큰 혼란과 고통을 주는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어디에 있어도 늘 ‘가시방석’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듯이 공동체를 갈등과 분란으로 몰고 가곤 합니다.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흙 속에서도 꽃이 피듯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물을 탓을 하지 말고 내 마음의 바가지를 잘 가꾸어야 합니다. 새는 곳이 있다면 새지 않도록 고쳐야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낙원이 되는 세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다.” 그렇습니다. 유목민의 시대에도, 농업의 시대에도, 산업화의 시대에도,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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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마태 11,16) 기쁘게 놀 줄 모르고 늘 불평하는 아이들과 같은 당신 세대를 꾸짖으십니다.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모든 유다의 지도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위한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열린 마음으로 들었지만, 권력과 풍요를 누리는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에 열려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보다 더 귀먹은 이는 없고, 보려고 하지 않는 이보다 더 눈먼 이는 없습니다. 회개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개로 초대하는 이들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를 옹호합니다.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거부하고자 그를 ‘마귀 들린 자’라고(11,18 참조) 부르고, 예수님을 거부하고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11,19)라고 일종의 인신공격을 하면서 핵심인 하느님 말씀을 피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말에 불만을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도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불만의 이유나 핑곗거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고 믿는다면, 오늘 독서의 이사야서가 말하는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48,17)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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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아이들이 서로 놀이하며 불평하는 비유를 통해, 동시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도, 또 당신 자신도 거부한 모습을 고발하신다. 요한은 금욕과 단식으로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그는 마귀가 들렸다.”(18절) 했고,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며 기쁨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먹보요 술꾼”(19절)이라 비난했다. 성 예로니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풀이한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서로 불평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개를 권하면 듣지 않고, 기쁨을 노래하면 응답하지 않는다.” (Commentariorum in Matthaeum II, 11,16) 이는 곧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어떤 형태로든 거부하는 마음의 완고함을 보여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역시 덧붙인다. “주님께서는 요한과 당신을 서로 대조시키며 말씀하신다. 이는 두 방식이 모두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이며, 목적은 하나였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양쪽 모두를 거부하였다.”(Homiliae in Matthaeum Hom. 37,1) 즉, 하느님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 백성에게 다가오셨지만, 믿음 없는 마음은 어떤 형태의 은총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여기서 지혜란 곧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며,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는 당신의 일들로 드러난다. 요한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행적으로, 그리고 믿는 이들의 변화된 삶으로 나타난다.”(Sermo 33,3) 따라서 요한의 단식과 예수님의 식탁 친교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의 지혜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나는 혹시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은총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오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요한처럼 회개를 촉구하는 준엄한 목소리로, 어떤 때에는 예수님처럼 위로와 기쁨으로 오신다. 그 두 길 모두가 구원의 길이다.
“지혜는 그 행위로 드러난다.”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달라진다. 죄에서 벗어나 회개의 삶을 살게 되고, 동시에 자유와 기쁨 안에서 형제들과 식탁을 나누게 된다. 교회는 이 두 차원을 함께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대림 시기,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마음을 열어, 요한의 목소리 안에서 회개의 부르심을, 그리스도의 잔치 안에서 기쁨의 초대를 함께 받아들이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삶의 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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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너와 함께하는 나>
마태오 11,16-19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너와 함께하는 나>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8-19)
오롯이
나이면서
기꺼이
네가 되는
너와 함께하는 나
기꺼이
네가 되어도
오롯이
나인
너와 함께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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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름다운 동행>
믿음의 삶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벗들과 어울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의의 주님의 길을 걷기에 불의를 보며 분노하는 벗들의 노여움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낮은 자로 오신 주님을 따르기에 없는 이와 어울리는 벗들의 소박함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린 이를 채워주시는 주님을 알기에 고픈 이와 함께 어울려 흥겨워 하는 벗들의 넉넉함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침묵 중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끼기에 고요한 기도 안에서 세상을 품에 안는 벗들의 따스함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주님을 향해 벗들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의 시선을 벗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벗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험을 끝낸 벗들에게 모두가 겪는 과정이라고 깎아내리지 않으며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일을 해냈다고 격려를 보내는 것입니다.
가족을 돌보는 소박한 삶을 일구는 벗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살라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둥지 보듬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침묵 안에서 주님을 찾는 벗들에게 남들과 더불어 살라고 등 떠미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소음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낯선 땅에서 피눈물 흘리는 벗들에게 값싼 위로나 허황된 꿈을 말하지 않고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벗들과 어울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주님을 향해 벗들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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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도대체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6-19)
1) 예수님 말씀을 단순하게 요약해서 질문으로 바꾸면, “도대체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5-6)
그렇게 정말로 많은 사람이 ‘회개의 세례’를 받긴 했는데, 진실하게 회개한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마태 3,7-8)ㅜ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처음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루카 6,17) 그런데 그렇게 많았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거의 대부분 떠나버렸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나중에는’ 거의 대부분 떠나버린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과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바라는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끝까지 남아 있었던 사도들과 몇 명의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기를 희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떠나버린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양식’만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결국 ‘희망의 차이’ 때문에 그렇게 갈라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얻기를 희망하는 것을 따라갑니다.
2) ‘가난한 사람들’은 회개 선포와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고, ‘부유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가난함과 부유함의 차이에서 생긴 일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느냐의 차이에서 생긴 일입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부자들을 부러워하면서 부자가 되기만을 바라는 이들이 많고, ‘세속의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하느님을 섬기지는 않고 재물만 섬기는 부자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물질적인 부유함에 취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부자’와 물질적인 부유함만을 원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빈자’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 세례자 요한이 극기고행의 생활을 한 것은, 회개와 보속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싫어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간절한 희망’에서 ‘간절한 행동’이 나오는 법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극기고행을 싫어한 사람들은 아마도 구원받기를 바라는 희망이 별로 간절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만나신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세리들처럼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저런 죄인들은 아무리 회개해도 소용이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심판은 피하고 싶지만 회개와 보속은 너무 힘들어서 싫다고 생각하거나, 구원은 받고 싶지만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과 함께 구원받는 것은 싫고 ‘나만’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회개와 구원을 자기 마음대로, 또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4)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도,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만나신 일도 다 ‘하느님의 일’이고, 그것은 진실하게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받게 된 사람들을 통해서 증명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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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셨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준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하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는가?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는가?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요, 사랑할 때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한다. 요즘 나라의 혼돈상태를 보면. 서로 남 탓만 하고 있다.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는 이들이 참으로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인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좋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이다.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오늘도 여전하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하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줄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참 신앙인은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동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한다.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에페1,18) 참으로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볼 눈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6)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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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
오늘 복음은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잘못 판단을 지적하시며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듣는 대로가 아니고 본질을 알아보는 진정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한대로 의미가 있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의미가 있는데 편견으로 이래도 아니고 저래도 아니라고 투정을 부리는 미숙한 사람들, 불편 불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참 진리의 길로 이끄십니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이고 진리를 볼 수 없도록 장막을 치는 행위입니다. 저 사람은 친일파, 친미파, 좌파, 우파, 동쪽, 서쪽 사람이라고 편견을 가지면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말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주장에 사로잡혀 사실관계를 알아보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교만한 행위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보고 들으며 있는 그대로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난다.” 하셨듯이 우리는 지혜로운 눈으로 보고, 듣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한쪽에 서서 보면 너는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잘된 일이라고 보게 됩니다. 장님 코끼리 보듯이 편견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눈뜨고 있는 그대로 보려면 편견으로 가려진 눈을 버리고 깨어 의식을 가진 눈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신 것같이 사랑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을 바로 보게 됩니다. 저는 오늘도 깨끗한 마음으로 나를 보듯이 너를 보는 눈을 모두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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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형제님이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술집에서 회포를 풀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로 술자리가 무르익고 있을 때,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가 나타나 말합니다.
“내 손녀딸이 아파서 그런데 껌 좀 사주세요.”
친구 중 한 명이 할머니가 요구했던 돈보다 더 얹어주며 껌 한 통을 샀습니다. 할머니가 옆 테이블로 갔을 때, 그 옆의 친구가 말합니다.
“그 할머니 사기꾼이야. 손녀딸이 없어.”
이 말에 껌을 산 친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곧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휴~~ 정말 다행이다. 그러면 아픈 사람도 없네. 잘 되었으니 우리 모두 건배~~~”
이런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부정적인 마음은 우리의 사고를 닫아버리고 기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려 있으면 사고도 열리고 어떤 상황이든 다 기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 열린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마태 11,16)
당시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장터(agora)와 같은 공공장소에 모여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놀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놀이가 두 가지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어떤 제안에도 반응하지 않고 삐쳐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을 꾸짖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에도 춤추지 않고, 회개의 촉구에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무감각’과 ‘고집’으로,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오셔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장터의 아이들이 보여준 가장 큰 문제는 ‘악행’이라기보다 ‘반응하지 않음’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영적 위기는 하느님의 말씀에 더 이상 가슴 뛰지 않고, 이웃의 아픔에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는 ‘무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에게는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합니다. 실제로 본당 사제가 엄격하면 ‘사랑이 없다’라고 말하고, 사제가 자비로우면 ‘기강이 없다’라고 비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가 참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요? 주님께 더는 무관심으로 다가서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반대의 마음으로 이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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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결국 모든 진실은 밝혀질 것이니>
+찬미예수님
제가 가르치는 윤리신학은 사실상 정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사람은 당연히 선하게 행동해야 하고 죄를 멀리해야 하며 생명을 보호해야 하고 계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답이 정해져 있으니 아무래도 시험이 쉽겠다고 느껴지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답이 정해져 있으므로 그것을 어떻게 설득력있고 조리있게 서술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수업 내내 저는 학생들에게, 정답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좋은 답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개진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얼마 전, 시험을 치른 뒤 학생들의 답안지를 채점하는데,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당수 학생들이 신학적 이론은 없이 자신의 생각만을 조리있게 적어놓은 것이었습니다.
기초적인 윤리 신학적 이론들을 서술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쌓아나가야 하는데, 신학적 이론은 최소한으로 전제하고 개인의 주장을 서술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답안지를 채점하며 한숨만 내쉬던 중, 이러한 제 모습이 퍽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지난 시험에는 학생들이 너무 고민없이 신학 이론만 정리해서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 있다니 제 마음이 마치 청개구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답안지들을 천천히 살펴보니 학생들이 고민한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자한자 적어놓은 글씨들은 특정한 상황을 윤리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열심한 마음들을 정리하며, 자칫 학생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도 그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참 이해할 수 없는 교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담이긴 하지만 사실 이러한 예는 우리 모두의 단면이기도 할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러한 청개구리와 같은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불평불만을 가져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넓은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괜히 엄격하거나 이해의 폭이 좁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듯 자기의 편견에 사로잡혀 진실을 왜곡하는 인간의 심리를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러 온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금식과 고행을 하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회개를 준비했습니다. 이때에 유다인들은 그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말하며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본적인 인간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는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며 특별히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셨습니다. 이것은 쾌락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 사회에서 외면 받는 이들에게도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증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그가 먹보요, 술꾼이며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합니다.
이 상반되는 두 가지 상황을 두고 그들이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열등감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그들이 하기 힘든 고행을 모범적으로 행하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던 것이고, 예수님께는 그들이 선뜻 행하기 힘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모습에 열등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고행을 할 용기도 소외된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용기도 없었기에 이에 대한 열등감이 고스란히 표출된 셈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공통점은 유다인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게 돕는 협력자를 원했는데 그와 전혀 상관없이 행동하니 어떠한 모습이든 불만족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을 받아들이기 원치 않는 사람들의 비겁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하느님을 대하는 세속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원하는 대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 하느님께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도 하고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손쉽게 등을 돌려버립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열심히 봉사하면, 혹은 그럴만한 지위를 얻는다면 그의 인격적 결함이나 부족함을 입에 올리며 그를 깎아 내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결국 모든 진실은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실제로 세례자 요한의 고행은 예수님이 오는 길을 준비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고 그의 겸손한 모습은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됩니다. 예수님의 먹고 마시는 모습은 그 이면에 가려져 있던 소외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드러내게 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결정적 지표가 될 것입니다.
진실을 감추면 그것은 잊혀지는 듯 하지만 언젠가 그 빚을 받기 위해 반드시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퍼트린 험담은 결국 진리 앞에서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며 이후에는 하늘나라의 진실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감추려 했던 이들은 죽음 이후 심판대에 올라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며, 나 역시 편견으로 혹은 열등감으로 누군가를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보아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내가 누군가의 편견에 맞서고 있다면 결국 드러나게 될 진리를 지향하며 악에 휩쓸리거나 그에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을 잘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아멘. 벗들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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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이시는 일>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 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 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 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 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는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슬픔일 것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이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고 부수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이 ‘찢기어지고 나누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이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변화와 성화로 새롭게 하여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에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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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무디어 진 제 마음이 빛보다 어둠에 치우친 까닭입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실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완고함의 벽을 헐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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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사랑, 배움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참 스승이자 인도자인 주님뿐이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8,12)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배움의 대상 역시 끝이 없습니다.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배워야 하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 평생졸업이 없는 평생학인의 신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도, 기도도, 섬김도 모두 아무리 배워도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겸손과 경청이,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배움에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제도 면담성사중 “크게 공부했다, 배웠다, 생각하십시오. 결국 겸손을 배우고 비움을 배우니 그대로 영적성장이겠습니다.” 나누니 실로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배움의 여정을 통해 날로 비워가니 겸손해지고 자유로워지니 그대로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오늘 역시 배움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인간을 만드는 것은 태어나면서 얻는 기질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만들어가는 태도다.”<다산>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이는 배워야 알며. 어떤 이는 곤란을 겪어야 알지만, 과정은 달라도 그 깨달음은 모두 같다.”<중용>
옛 현자들의 지혜 역시 배움의 여정에 항구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어제 역시 피정자들에게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해 “기도하라, 일하라, 공부하라”의 조화와 균형잡힌 지혜로운 삶에 “운동하라”를 덧붙였습니다. 운동은 구체적으로 <걷기>입니다. 걷기를 추천하는 건강 전문가의 가르침을 나눕니다.
1.걷기는 뇌를 자극한다.
2.걷기는 건망증을 극복한다.
3.걷기는 의욕을 북돋운다.
4.걸으면 밥맛이 좋아진다.
5.걷기는 비만치료제이다.
6.걷기는 요통치료제이다.
7.걸으면 고혈압도 치료된다.
8.걷기는 금연치료제이다.
9.걷는 사람은 뇌가 젊어진다.
10.스트레스가 쌓이면 일단 걸어라.
11.자신감을 잃었다면 일단 걸어라.
12.몸이 찌부듯하면 일단 걸어라.
13.마음이 울적하면 일단 걸어라.
14.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일단 걸어라.
15.분노가 일면, 일단 걸어라.
15.인간관계로 얽히는 날 일단 걸어라.
17.할일이 없는 날, 일단 걸어라.
만병치료제이자 지혜로운 삶의 지름길이 평생 <걷기> 운동입니다. 하늘보고 기도하라 <직립인간>이요, 평생 스승이신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걸으라 <두발>을 지닌 사람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에 영원한 스승이 바로 주님입니다. 배움의 노력과 열정에 지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께서는 배움에 충실치 못한 당신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호소하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나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모든 불행은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못함에서 기인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참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께 끊임없이, 한결같이, 충실히 배울 때 편견과 선입견은 물론 무지의 마음병도 치유되어 참으로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만고의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이 개탄하는 세대는 바로 배움이 결핍됐음을 봅니다.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출 줄 모르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무감감, 무공감의 지극히 무뎌진 감성의 사람들입니다.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왜곡되고 변질된 자폐적 내적 불구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왜곡된 심성이, 편견이 점입가경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들렸다’ 하고, 예수님이 와서 먹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매도합니다. 참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함으로, 즉 무지의 편견과 선입견, 오해와 착각의 눈멂으로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무지에 대한 답은 참스승이자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뿐입니다. 주님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따르며 배움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지유롭과 지혜롭고 겸손한 삶이겠습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으니 예수님의 전삶이 하느님 지혜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주님을 닮은 지혜롭고 자유롭고 겸손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1;1ㄱ,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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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혜는 덧셈이고 어리석음은 뺄셈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사랑에서 비롯된 진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서는 이렇게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과 세례자 요한에 대해
먹으면 먹는다고, 먹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당대 사람들을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인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시며 이렇게 결론 내리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미성숙의 한 형태는 자기중심의 어리석음입니다. 자기가 자기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기에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경청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一理)가 있고 하느님 말씀에 진리(眞理)가 있음을 보지 못하기에 경청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의 말을 경청했다면 건강을 잃지도 않고, 몸뿐 아니라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평안할 텐데
건강할 때는 어리석게도 자기 건강만 믿고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경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지혜가 옳다는 것이, 지혜가 이룬 것으로 드러나듯 어리석음이 그르다는 것은, 어리석음이 이룬 것 곧 건강 상실로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이룸이고, 어리석음은 상실입니다. 지혜는 덧셈이고, 어리석음은 뺄셈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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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마태 11,16)
<예수님의 탄식!>
오늘 복음(마태 11,16-19)은 '예수님의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과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 세대의 악한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11,16-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는 예수님 때의 세대만이 아니라, 이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바로 오늘의 세대, 지금 우리의 세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의 세대도 똑같지 않나요?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고, 매일 미사를 통해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는 않나요?
그래서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돌아오지 않는 우리의 완고한 모습에 탄식하고 계시며, 여전히 그런 우리의 죄들이 대못이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의 탄식(슬픔)은 우리가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돌아가 다시 부활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은 언제나 참으로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돌아가는 회개뿐'입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이사 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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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하느님의 지혜는
예수님의
삶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진짜 지혜는
주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된
힘입니다.
참된 지혜는
사람을 묶지 않고
풀어주며,
두려움을 주지 않고
용기를 심어 주며,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게 합니다.
지혜의 옳음은
타자의 생명을
살리는 실천에서
드러나며,
지혜는 옳은
생각에서
끝나지 않고
그 생각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삶의 방식으로
빛납니다.
진리는
말이 아니라
삶의 품격으로
증명됩니다.
지혜의
참된 가치는
세상을 밝히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을
받아들이는 지혜란
하느님의 뜻과
진리를 알아보는
겸손한 마음이며,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지혜의 일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는 사실을
사랑이 된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혜는 약함 속에서
강함을 드러내고,
낮아짐 속에서
높아짐을 완성합니다.
지혜는 모든
어둠을 넘어
삶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 힘입니다.
오늘의 지혜란,
예수님처럼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어
사람을 살리고
희망을 북돋우며,
작은 일 속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신앙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사랑이
삶이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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