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가티에서 세단을 만들었다면 어떤 차가 나왔을까? 디젤 엔진을 탑재한 슈퍼카는 왜 없을까? 역사에 '만약' 이라는건 없다지만, 자동차 마니아들이라면 한번 쯤은 상상해볼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규제 당국의 정책이나 계열사간의 이해 관계, 회사의 자금 상황 등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모터그래프에서 양산이 좌절된 비운의 슈퍼카를 모아봤다.
# 부가티 16C 갈리비에, 나왔다면 세단 끝판왕!
부가티 16C 갈리비에
2000년대 초 고성능 슈퍼카 브랜드를 휩쓸었던 4도어 세단 열풍은 '끝판왕'이었던 부가티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9년에 등장한 콘셉트카 16C 갈리비에가 그 주인공이다. V12 엔진을 탑재했던 EB112, W18 파워트레인을 품은 EB218에 이은 세번째 세단형 부가티였다.
다른 부가티들이 그렇듯, 갈리비에도 특유의 강력한 성능과 호화로움을 겸비하고 있다. 당시 베이론에 탑재됐던 W16 엔진을 바탕으로 쿼드터보 대신 두개의 슈퍼차저를 올렸고, 이를 바탕으로 최고출력 986마력, 최고속도 378km/h를 발휘한다. 과거의 부가티들에서 영감을 얻은 사치스러운 인테리어는 롤스로이스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갈리비에가 공개된지 13년이 흘렀지만 양산 소식은 더이상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디젤게이트가 발발하며 폭스바겐그룹 전반에 어려움이 더해졌고, 전기차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부가티의 전략 전반이 수정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머릿속에서 4도어 부가티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라며 양산 의지를 드러냈던 당시 볼프강 뒤르하이머 회장의 의지는 물거품이 되어버린걸까.
# 아우디 R8 V12 TDI, 토크가 상용차 뺨친다
아우디 R8 V12 TDI
지금에야 전 세계 자동차 업체들이 디젤 엔진과 점차 거리를 두고 있지만, 아우디는 그 어떤 브랜드 보다도 디젤 엔진에 진심이었던 곳이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르망 24 레이스에 출전했던 아우디 R10 레이스카에 디젤 엔진을 탑재했을 정도였고, 이를 바탕으로 TDI 엔진의 뛰어난 성능과 내구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왔다.
이 같은 디젤 엔진에 대한 자신감은 2008년 공개된 R8 V12 TDI 까지 이어진다. 르망 레이스카 R10에 탑재됐던 V12 TDI 엔진을 미드십 구조로 배치했고, 이를 바탕으로 최고출력 500마력, 최대토크 102.0kgf.m을 발휘했다. 최대토크 발산 시점은 불과 1750rpm에 불과했고, 이를 바탕으로 정지 상태에서 100km/h까지 단 4.2초만에 주파했다.
다만, R8 V12 TDI는 당시 배출가스 기준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강력한 토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동변속기가 없어 수동변속기 만으로 설계됐고, 동급의 경쟁 차량들 대비 이렇다 할 장점이 크지 않았다는 점도 양산을 좌절시켰다. 디젤게이트와 배출가스 기준 강화로 비슷한 콘셉트의 차량을 볼 가능성도 사실상 없어졌다.
# 람보르기니 에스토크, 지금 나와도 되겠는데?
람보르기니 에스토크
람보르기니 에스토크는 2008년 파리모터쇼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포르쉐 파나메라, 애스턴마틴 라피드 등 유수의 스포츠카 제조사들이 4도어 세단을 내놓은 시기에 등장한 모델이다. 양산된 차량은 아니지만, 에스토크는 여러모로 람보르기니의 전통을 깬 파격적인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적인건 외형이었다. 앞서 에스파다 같은 2+2 구조의 GT가 있었지만, 콘셉트카와 원오프 모델을 통틀어도 4도어 세단 형태의 람보르기니는 에스토크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람보르기니가 오랜 기간 미드십 구조를 고집해왔던 것과 달리, 가야르도에 썼던 5.2리터 V10 엔진을 앞에 배치한 모델이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양산차에 가까운 외형에서 볼 수 있듯, 에스토크가 실제 도로를 달릴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람보르기니는 2009년 에스토크 양산을 취소했다고 발표한다. 구체적인 사유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외신들은 폭스바겐그룹 산하에 있는 비슷한 콘셉트의 차량들(아우디 RS7, 포르쉐 파나메라)과 경쟁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 재규어 C-X75, 1.6 하이브리드가 890마력?
재규어 C-X75
재규어 C-X75는 2010년에 등장한 같은 이름의 콘셉트카를 양산화한 하이퍼카다. 모터스포츠 명문가로 꼽히는 윌리엄스 레이싱과 공동개발한 모델로, 한때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로 명성을 떨쳤던 재규어 XJ220의 후속작으로 기획된 차량이었다.
C-X75는 10여년 전 양산이 추진됐던 모델이었지만, 전반적인 구성만 놓고 보면 최근의 고성능 전동화 모델들과 비슷한 성능을 발휘한다. 1.6리터 4기통 가솔린 터보 엔진과 전기모터를 결합해 최고출력 890마력을 발휘했고, 최대토크는 102.0kgf,m에 달했다. 최고속도는 322km/h였고, 전기 모드 만으로 60km를 주행할 수 있는 것도 특징이다.
양산이 취소된건 유독 비싼 가격이었다. 재규어 측에 따르면 C-X75의 예상 판매 가격은 100만파운드(한화 15억원)에 달해 당시 페라리나 람보르기니의 가격보다도 비쌌다. 더욱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는 경제 침체 국면이어서 수요 예측도 어려웠다. 재규어는 5대의 프로토타입만을 남겨둔 것으로 알려졌다.
# 애스턴마틴 라피드 E, '만들 돈이 없어서 그만…'
애스턴마틴 라피드 E
애스턴마틴 라피드 E는 경쟁 업체들보다 발빠르게 등장한 전기차여서 주목받았다. 포르쉐 타이칸의 개발 막바지 단계였던 2019년 초 상하이오토쇼를 통해 실차가 공개됐고, 이후 포뮬러 E에서 세이프티카로 활약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자금 상황이 어려웠던 애스턴마틴이 전기차로 돌파구를 마련할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온것도 이 때였다.
성능도 강력했다. 최고출력 610마력, 최대토크 96.9kgf.m을 발휘했고, 최고속도는 249km/h, 정지 상태에서 100km/h까지는 4.0초만에 주파했다. 비교적 적은 65kWh 배터리팩만으로 320km를 주행할 수 있었고, 800V 초급속 충전 기술을 탑재해 15분만에 배터리를 80%까지 충전시킬 수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위기를 타개할 모델이라는 기대감과는 달리, 애스턴마틴은 2020년 라피드 E 생산 계획을 접어야했다. 이전보다 50% 가까이 폭락한 매출액 규모가 발목을 잡았고, 이에 따라 수익성이 크게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애스턴마틴은 공식적으로 '양산 보류' 라고 말하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사실상 '양산 취소'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