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공자의 논어 ‘위정’ 편에는 우리가 많이 쓰는 나이대별 한자가 나옵니다. 열다섯이 지학(학문에 뜻을 둠), 서른이 이립(뜻이 확고하게 섬), 마흔은 불혹(인생관이 확립되어 마음에 혼란이 없음), 쉰은 지천명(하늘의 뜻을 알게 됨), 예순은 이순(귀가 순하게 됨. 남의 말을 받아들임), 일흔은 종심소유불유구(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음)가 그것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 나이 때 그런 삶을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지천명을 넘어 이순을 바라보고 있지만, 하늘의 뜻도 잘 모르는 것 같고 또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제 말만 하려는 꼰대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공자 시대보다 지금의 기대 수명이 훨씬 늘어났으니, 공자에 나오는 나이에 ‘20’씩은 더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위안입니다. 하지만 변화를 무서워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있다면 어른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아무런 노력 없이 나이만 늘어난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그 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혈연, 지연, 학연 등을 내세워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편법을 사용해서 뇌물을 주고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주님께서 명확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정작 그 나라에 들어갈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막연한 희망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나이 들면 저절로 들어가는 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삶 안에서 성실하게 실천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시지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혈연관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면, 하느님 나라에서의 가족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사랑 안에 있기에, 우리는 사랑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변화하고 변화해서 주님의 사랑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가족으로 살고 있을까요? 입으로는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면서도, 사랑의 실천에는 무관심하다면 하느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쓸데없이 나이만 먹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의 명언: 햇빛은 누구에게나 따뜻한 빛을 준다. 그리고 사람의 웃는 얼굴도 햇빛과 같이 친근감을 준다. 인생을 즐겁게 지내려면 찡그린 얼굴을 하지 말고 웃어야 한다(슈와프).
사진설명: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성서상의 토로아스, 카빌라(네아폴리스)의 바오로 공소성당에서의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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