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10일 기아자동차 노조홈페이지에는 당시 16대 노조위원장이던 하모 씨 명의의 `조합원 동지들에게 드리는 글`이란 문서가 게시됐다.
문서의 요지는 노조 간부가 직원 신체검사 병원 선정과정에서 병원 관계자들로부터 뇌물과 향응을 제공받은 사실이 확인됐다는 내용. 16대 집행부는 이 사건으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중도사퇴했다.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이 일이 있기 6개월 전인 2002년 9월 25일 오전. 16대 노조집행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3년간 기아차 생산직원의 병원 검진결과를 재검토한 결과, 직업병 판정을 받아야 할 직원들이 직업병 판정을 받지 못했다며 회사 측이 병원과 결탁해 직업병을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를 계기로 회사가 지정해오던 검진 병원의 선정권은 사실상 노조 손에 넘어갔다.
문제는 선정권을 쥔 노조간부가 수원의 J병원으로부터 뇌물과 향응을 제공받고 이 병원을 지정해 준 것.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져 도마에 오르면서 16대 집행부는 중도하차하며 17대 집행부에 자리를 내줬다.
전 집행부의 비리를 계기로 바통을 이어받은 17대 노조가 최근 채용비리로 `비리 되물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이는 권력을 쥔 강성노조의 폐해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기아차 노조는 강성노조의 전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도사태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회사가 무너지는 고통을 겪었지만 기아차 노조의 행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회사가 문을 닫는 상황에서도 전문경영인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무리한 요구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정치권과 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며 변화의 요구를 외면했다. 기아차 노조를 통해 대한민국 강성노조의 과거를 되짚어 본다.
▶경영진과의 `은밀한 동거`=70년대 말 누적된 적자와 경영난에 직면했던 기아차는 1981년 자동차공업합리화조치(2ㆍ28조치)로 승용차 생산을 중단하고 오너였던 김상문 회장의 지분을 쌍용그룹으로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종업원들이 반발했고 결국 김 회장은 지분에 대한 권리를 당시 김선홍 사장에게 넘겼다. 이후 경영권 우호세력 확보 차원에서 김 사장은 지분을 우리사주조합 등 종업원에게 넘겼다. 이때부터 기아차는 주인 없는 전문경영인체제로 바뀌면서 종업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조가 회사경영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후 경영진은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며 자리를 보전했고 노조는 경영진을 압박해 손쉽게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경영진과 노조의 은밀한 결탁은 1997년 회사부도를 맞아 채권단의 경영진 퇴진 요구로 끝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사사건건 경영진과 맞서며 경영진을 압박해오던 노조는 경영진의 든든한 후원군으로 변신했다. 경영진이 바뀌고 제3자가 주인이 되면 노조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
1997년 7월 31일. 부실 누적으로 채권단이 기아차 처리를 위해 1차 채권금융기관 대표자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이관우 당시 한일은행장은 "노조가 강성이라는데 인력감원 시 노조원의 3분의 2 찬성을 얻을 수 있겠느냐" "경영권을 내놓으라"며 김선홍 회장을 다그쳤다. 당시 나응찬 신한은행장, 장철훈 조흥은행장도 기아차의 정상화를 위해 노조의 협조와 김 회장의 경영권 포기를 강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 사실이 알려지자 노조원들은 그 다음날 김 회장 퇴진과 노조문제를 제기한 은행장들의 집 대문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협박성 글을 쓰고 항의 시위를 해 은행장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기아차 처리가 김 회장과 노조의 버티기로 지지부진하던 8월 15일에는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대선후보가 소하리공장을 방문했다. 이 후보는 공장에서 김 회장, 박제혁 사장, 당시 노조위원장을 비롯해 직원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다. 이 후보의 공장방문은 기아차 노조와 경영진이 `기아사태가 대선에 미치는 영향`이란 자료를 만들어 함께 신한국당의 여러 루트를 통해 접촉한 결과,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차 처리는 어느덧 경제논리를 떠나 정치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 무렵 기아차 노조와 사측은 여러 단체와 함께 기아차 살리기를 국민운동으로 이슈화했고, 기아차는 `국민기업(?)`이라는 허울을 쓰고 일부 언론과 여론의 지원사격까지 받았다. 회사 부실의 주범으로 지탄받아야 할 노조가 기아차 `구사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기아차 노조가 회사 부실에 대해 책임을 지고 환골탈태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됐으며, 결국 대한민국 강성노조가 변화의 기회를 놓친 순간이기도 했다.
사실 노조와 한배를 탄 김선홍 회장이 노조의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997년 기아차는 기아자판을 설립하고 영업직 1만명을 신설 회사로 발령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김 회장은 당시 출입기자들과 만나 "영업직 중 실적이 거의 없다시피한 1000명 중 절반은 노조간부가 소개해 입사한 사람이고 나머지는 회사 간부가 알선한 사람인데 이들 모두 기본급을 꼬박꼬박 받으면서 실제로는 다른 일을 부업 삼아하고 있더라"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런데도 김 회장은 경영권 유지를 위해 노조 측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며 노조의 부당한 행위를 모른 척했다.
▶경영까지 좌지우지=지난 1998년 7월 23일. 기아차 노사는 구조조정의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을 받던 단체협약 개정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노사 동수의 징계위원회가 폐지됐다. 아울러 이전까지 생산직의 경우 자동으로 호봉승급이 되던 것을 회사 측이 인사고과에 따라 승급 여부를 결정키로 했고, 공장이전ㆍ하도급ㆍ용역전환ㆍ합병ㆍ직원 재배치ㆍ파견 등에 대해서도 노조의 동의를 얻도록 돼 있던 것을 노사협의만으로 가능토록 바꿨다. 뒤집어 얘기하면 협약 개정 이전까지 회사는 인사권도, 경영권도 노조의 협조가 없으면 행사할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단체협약 개정을 계기로 제자리를 찾는 듯했으나 단체협약은 슬금슬금 과거로 회귀하고 있었다. 2002년 노조와 회사는 기업합병, 양도, 공장이전과 통폐합, 신차도입 시 노조와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단협안을 개정했다. 지난해 단협에서는 노사 동수의 징계위원회까지 부활시켰다. 징계위원회가 생기면 회사가 노조의 동의 없이는 직원 징계도 할 수 없다. 2003년 현대차 노조가 공장이전이나 기업합병, 신차투입 시 노조의 동의를 얻도록 단협안을 바꿔 재계의 집중 포화를 받았지만 정작 기아차는 한발 앞서 이 같은 단협안에 합의했던 것.
기아차 노조의 파워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이 밖에도 많다.
자동차업계에서 44시간 노동시간을 가장 먼저 깬 곳도(1994년), 노조의 작업중지권이 가장 빨리 도입된 곳도(1994년) 모두 기아차 노조였다.
임금인상 요구도 끊이지 않았다. 700여억원의 적자로 회사에 위기의 감운이 돌던 1995년에도 기아차는 임금을 10.7%나 올렸다. 회사가 망하고 외환위기로 어수선하던 1998년에는 9.0%의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당시 현대차의 요구안이 6.9%였다. 현대차로 인수됐던 99년 2월에는 97년에 받지 못했던 상여금 600% 지급과 전년도 임금 9%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고 파업 이틀 뒤 회사는 상여금 150%를 지급했다.
해마다 파업은 당연시됐고, 회사 부도 전후에는 파업 횟수가 더 늘어나 회사 위기를 제촉했다. 1996년 6월, 1997년 1월, 1997년 9월, 1997년 10월, 1998년 4월, 1998년 6월까지 제3자 매각반대, 임금인상 등을 명목으로 줄파업이 이어졌다.
2003년 5월 2일 기아차 노조는 회사의 항의를 뿌리치고 돌연 직원들을 대상으로 유급 휴가를 시행했다. 샌드위치 공휴일을 쉬게 해 주겠다고 선거 때 노조 집행부가 공약했는데 마침 2일이 노동절(1일)과 4일(일요일), 5일(어린이날) 사이에 낀 샌드위치 데이라는 이유에서다.
▶노조 복마전=1991년 6월 28일. 소하리공장에서는 한 노조원이 붉은색 조끼를 입고 노조 집행부 규탄 농성을 주도하고 있었다. 노조집행부가 노조원들의 대의를 거스르고 사측과 일방적으로 합의를 했다는 것이었다. 통상임금의 23.72% 인상을 요구했으나 집행부가 합의한 인상폭은 20%였다. 농성을 이끌던 그는 바로 지금의 박홍귀 노조위원장이다.
이번 채용비리에서도 노조 내 계파 간 갈등이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 기아차 노조는 예전부터 노조 내부의 알력싸움이 적지 않았다.
노조원들이 사무직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도 수차례 있었다. 95년에는 회사 측 유인물을 뿌리는 사무직 4, 5명을 폭행해 사무직들이 단체로 반발했다. 98년 6월에도 사무직원들에게 노조원이 쇠파이프를 휘둘러 부상을 입혔고 98년 5월에는 생산직을 대상으로 품질교육을 하던 직원이 노조간부에게 맞아 병원 신세를 졌다.
계파 간 갈등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이번 채용비리도 계파의 세 불리기가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변화의 요구를 줄곧 외면해오던 기아차 노조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강성노조가 이번 사태를 새 전환점으로 삼을지 두고볼 일이다.
첫댓글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연수를 받다보면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서울 종로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무슨 놈의 노조 시위가 그렇게도 잦은지...그런 노조라면 빨리 없어지는게 나을 듯 싶은데...윗글을 읽어봐도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노조는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드네요.
또또..지송하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현대나 기아 노조같은 힘있는노조에서 안일어나면일반 중기업이나 소기업들은 얼어죽는거 아시나요? 예를들어 현대가 이번에 임금을 500원올렸다고 했을때. 중기업에서 천원 올려달라고하면..현대도 오백원올리는데 니들이 무슨 천원을 올리냐..이러면 어떡하실래요? 대기업들어갈
자신이 있으신건가요? 아니면 맨날 외국기업의 복지만 부러워 할 건가요? 참고로 기아자동차 생산직 본봉은 7~80만원인거 아세요?
대기업 노조가 중소기업을 이끌어야 하는것은 지난 10년이였구..이제는 회사사정과 발전을 위해서 서로 상생해야 하는때입니다... 언제까지 노조가 정치논리로 회사와 대결해야 할까요?? 그러면 한국이 망합니다.. 정치논리가 아닌 순수한 노조본연의 모습으로 요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