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천시 여행] 제천의병의 성지, 자양영당의 '義(의)'.........19
.
.
[제천시 여행] 제천의병의 성지, 자양영당.........19
.
과거부터 제천은 대한민국 국토 중앙 교통요충지, 월악산·금수산 등 빼어난 산세, 농경문화·호서학파 기원 의림
지 등 다양한 장점을 가진 역사도시로 오랜 세월동안 형성됐다고 알려진 지역이다. 본시 제천은 지대가 높고[해
발 320m] 산세가 깊어 농경 발전이 어렵다는 한계점을 가진 도시로 이렇듯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자긍심과 주체
성을 가지고 국가의 위기엔 선봉장에 섰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
물론 예나 지금이나 나라 구하겠다고 목숨 내놓는 건 민초들뿐이라는 사실은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사실
들이다. 제천의 護國精神[호국정신]은 몽골, 왜구 등 외세의 침략에 맞섰으며 권상하 등 걸출한 선비를 배출해 유
교 학풍을 이끌기도했다.
.
▶먼저 당도한 곳은 자양영당 옆에 있는 제천의병 전시관이다.
자영영당 옆에는 제천의병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공부하던 선비들이 학문에만 치우치지 않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항쟁의 길에 나선, 실천적인 몇몇 안 되는 조선의 지성인의 모습도 배울 수 있다.
.
▶자양영당 옆에는 의병전시관이 있다. 이곳에서 의병의 역사와 생활, 유물을 볼 수 있다. 제천 의병의 주요 인물
은 의암 유인석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동판 부조물이 있다. 위에 보이는 '義‘[의]자는 유인석의 친필을 옮
겼고, 아래 의병들의 모습은 멕킨지 기자의 사진을 옮긴 것이다.
.
▶상상이 아니라 실사를 바탕으로 했다니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된다. 얼굴은 어린 소년부터 중년 남자까지 다양
하고 머리도 상투, 두건, 모자로 갓을 쓴 사람은 없다. 붓 대신 총과 칼을 들고 허리춤에는 총알을 둘렀다. 어쩌면
이들 앞에는 곱절의 일본군이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표정은 의연하고 당당하다.
..
.
제천의 선비들은 조선말기 을미의병을 일으키며 일제강점기 구국 의병운동에 신호탄을 쏴 올렸던 湖西[호서]지
방의 민초들. 제천[호서]은 시대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 말 그대로 한국 역사의 산증인이다. 아무튼 조선은 왜란,
호란 등을 겪으면서도 여태껏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그때마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내놓는 민초들의 호국
정신이 강했기 때문이다.
.
누가? 지금도 매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사대부 놈들은 당파 싸움만 일삼을 때 바로 헐벗고 굶주렸던 민초들은
죽창, 낫, 괭이. 등을 손에들고 목숨을 내 놓고 처절하게 死生決斷[사생결단]. 죽기 살기로 싸웠기 때문이다. 그들
은 스스로 의병이라고 부른다,
.
.
▶이 곳이 어떤 곳인지는 대한국인이라면 위 첫 사진으로 설명이 불필요하다.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에서도 경기도 양평에 집결한 의병들이 이렇게 묘사, 재연된다. 무엇을 위해 무모하게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도 해야 했던 것일까? 그 답을 바로 義라는 단 한 글자에서 찾을 수 있음직하다. 더 무엇이 필요하랴? 초여름! 초복더위를 기다리는 자양영당엔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뭉클한 것인가? 뜻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민초들'의義'는 뜨겁게 꽃피어나고.......,
.
.
.
2018.7.7~9.30일 종영된 케이블 채널 tvN 드라마 24부작 [미스터 션샤인]의 배경이 되었던 제천 의병 이야기. 때
론 영화나 드라마가 종종 가려진 역사에 빛을 비춘다. 최근 영화 [안시성]이 고구려의 투쟁사를, 그 전에 영화 [
암살]
은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사를 대중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였던 사건들이다. 우리가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 잔
재들에게 개욕을 하면서 손가락질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미스터 션샤인'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구한말 의병의 역사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때마침 일본이 제주 관함식
에 욱일기를 고집하며 국민적 공분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까지도 일본의 식민지 이었다느니. 일본
국민 이었다느니 일본의 혜택을 많이 받았으니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는 등.......,개똥같은 주장!
.
.
▶한쪽에는 초토화된 제천의 사진이 있다. 일본의 보복으로 제천은 온전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치 커
다란 쓰레기 더미와 같은 죽음의 마을이 되었다. 참혹한 사진들은 이어진다. 의병들이 잠시 들렀던 주막은 철저
히 파괴되었다.
.
.
.
이런 어처구니없는 억지 말들을 늘어놓는 현 정치권의 악질 친일 잔챙이 나부랭이 놈들은 국민들의 혈세로 그 자
식들 까지 好衣好食[호의호식]하며 배불리 처먹고 처먹이며 살면서 그것도 모자라 국민들 등에 빨대를 꼽고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같은 놈들이 버젓이 백주대로를 활보하며 살고들 있으니 아~~,,,
.
이를 어찌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걸. 넘어 혈관이 막혀 가는 것도 모자라 구역질 나오는 일
들이 거의 매일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아무튼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의 만행과 단
발령을 강제한 데 맞서 '미스터 션샤인'의 대사처럼 민초들이 일어섰다.
.
.
▶일본군에 의해 어린 딸을 잃은 어머니는 가슴을 내 놓은 채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다. 이 밖에도 의암 유인석 선
생의 유물, 의병들의 지도, 칼과 총 등 투쟁에 사용했던 귀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
.
'미스터 션샤인'의 배경이 된 구한말 의병 이야기, 그 출발지, 오늘 유랑자는 충북 제천에서 의병투쟁의 흔적을 더
듬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맞섰던 의병의 산실 자양영당. '의병 이야기'가 제천서 새롭게 태어났다.
유랑자는 지난 늦봄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이 맑게 반짝이던 날, 박달재 동쪽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475번지
산기슭에 자리잡은 紫陽影堂[자양영당]을 찾았다.
.
자양영당은 1895년 춘천에서 내려온 유인석이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의병 봉기를 논의한
의병의 산실이다. 제천은 비밀리에 거사를 도모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산세가 깊다.
.
.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는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제천 시내 한가운데
아사봉(현 제천시 중앙공원)에는 펄럭이는 일장기가 밝은 햇살 아래 선명하게 보였고…….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번화한 거리였는데 그것이 지금 시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있을 따름이었다.
완전한 벽 하나, 기둥 하나, 된장독 하나 남지 않았다. 이제 제천은 지도 위에서 싹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
.
.
일본 군경을 향해 돌진하는 의병을 기린 조각 탑이 인상적인 충혼탑을 지나면, 이름하여 새롭게 단장한 의병전시
관이다. 제천시민이 전국의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제천의병 전투는 얼마나 치열했을까? 또 제천에 모인
의병의 희생과 제천이 입은 피해는 얼마나 컸을까? 이를 입증할 자료들을 모아놓은 전시관이다.
.
충청 내륙과 강원을 연결하는 내륙 물산의 중심지, 남한강 수운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하던 제천은 하루아침에 폐
허의 잿더미로 무너져 내렸다. 의병에 협조하는 주민들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토벌 작전이 빚은 비극이었다.
특히 멕켄지 기자의 기사를 비롯해 제천의병과 관련된 자료와 문헌들은 자양영당 옆 '제천 의병전시관'에 남았다.
.
.
.
..
.
의병들이 사용한 칼 같은 무기류와 유품들이 당시 치열했던 전투 흔적을 간직한 채 탐방객을 맞는다. 전시관 구
석에 비치된 방명록에는 '할아버지가 의병 활동 하시며 쓰시던 칼을 보고 울컥해 눈물이 났다'는 한 후손 할머니
의 글귀가 담겨 있어 이를 보는유랑자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
유랑자도 남겨본다. 호국 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뼈에 새기며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편안한 마음으
로 영면하소서’ 유랑자 올림. 차근차근 돌다보니 제천의병 취재 영국 기자 ‘제천은 지도에서 싹 지워졌다’ 너무나
도 가슴 아픈 신문 기사가 눈에 띤다.
.
.
.
.
.
.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는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제천 시내 한가운데 아사
봉(현 제천시 중앙공원)에는 펄럭이는 일장기가 밝은 햇살 아래 선명하게 보였고…….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번화
한 거리였는데 그것이 지금 시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있을 따름이었다.
완전한 벽 하나, 기둥 하나, 된장독 하나 남지 않았다. 이제 제천은 지도 위에서 싹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
1896년 제천의병 항쟁 뒤 일제 보복으로 파괴된 당시 제천 시내 광경을 전하는 영국 <데일리메일>(Daily Mail) 기
자 멕켄지(1869~1931)의 기사다. 제천의병의 기세를 꺾으려고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기사 행간에 잘 묻어난다.
상상 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니 가슴이 아프다 못해 찢어져 아리다.
.
.
.
.
.
맥켄지 기자의 기사에서 보듯 무고한 주민들을 향해 잔혹한 보복을 펼칠 만큼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제천
의병들은 어떻게 활약했을까? 자양영당에서 거사를 모의한 의병은 유인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당시 호서
지방(의림지 서쪽 지방, 즉 충청도)의 중심도시이던 충주 성을 1896년[고종 33년] 2월 17일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
린다.
.
하지만 조선 시대 남한강 수운의 최대 세곡 보관창고인 가흥창이 자리한 목계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수안보 주둔
군뿐 아니라 조선 관군과 합세해 3월 5일 총공세를 펼쳐 충주 성을 빼앗는다. 의병은 충주에서 제천 남산으로 후
퇴해 5월 25일 일제와 최후의 일전을 치른다.
.
.
.
.
.
유린당한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의 기세는 좋았지만, 군사 수와 장비에서 일제와 관군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선두에서 항전을 독려하던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관 홍사구를 비롯한 많은 의병이 장렬하게 순국했다. 창의대장
유인석은 사로잡혀 압송됐다. 제천시가지는 불탔고, 처절한 제천의병 투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의병 해산 후 유인석, 박장호, 황학수 등은 러시아, 만주지역
으로 가 독립군의 모태가 된다. 특히 당시 남산전투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순국한 의병의 흔적을 더듬어 보려면
제천시 고암동 산 28-9번지 순국선열묘역으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
.
▶제천의병은 을미년에 봉기하였으며, 처음에는 지평의 포수부대가 중심이었지만, 결국은 류인석을 중심으로 한
장담의 선비들이 의병을 이끌게 되면서 ‘호좌의진’으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친일적인 지방 관료들을 처단하며 한
때 충주 성까지 장악한 제천의병은 전국의 의병을 선도하면서 전기의병(을미의병)의 상징이 되었다.
.
.
.
시내에서 태백선 장락역 건널목을 건너 동쪽으로 800m쯤 가면 산속에 제천의병 홍사구 종사관을 비롯한 11분 애
국 열사들이 가슴에 한을 품은채 영면하고 계신다. 순국선열묘역은 제천의병의 뜻을 기리고 애국 충절의 기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1984년 12월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
남산 가마 골에 있던 7인의 제천의병, 곧 김용주, 김재관, 추성손, 우재봉, 우규하, 박원용, 오문용의 묘를 옮겨왔고,
뒤이어 의병장 김상태와 최욱영의 묘를 이장했다. 2007년 4월에는 모산동에 있던 홍사구 종사관의 묘를 옮겨왔다.
또 의병대장 유인석의 직계 제자로 80 평생을 의병과 애국계몽 활동에 바친 이정규의 묘를 제천시 흑석동에서 이
장해 모두 11분의 순국열사를 모신 현재 모습을 갖췄다.
.
.
▶청일전쟁 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개화를 빙자하여 단발까지 강요하자, 제천의 장담마을에 모여 공부
하던 선비들이 나라의 운명에 풍전등화의 위기가 닥쳤음을 깨닫고, 의병항쟁의 길에 나섰다.
.
.
▶조선말 13도의군 도총재인 의암 류인석 선생 휘하에서 일제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의병들을 추모하
기 위한 숭의사를 비롯해 성재 유중교, 의암 류인석 선생의 고택과 의병기념탑이 있으며, 의병전시관에는 당시
의병장들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
▶자영 영당의 방문은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저항한 선조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계기
였다. 요즘 젊은이들이 국제영화제를 잘 알듯이 제천의병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고 이곳 자양영당을 찾아 민족정
신을 익히며 교훈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 성재省齋 유중교선생 거택
.
▶성재(省齋) 유중교는 위정척사를 주창한 화서(華西) 이항로의 제자로서 조선 말기에 정통주자학을 표방하던 도
학자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음악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는 방법에 있어 음악의 중요성
을 인지하고 이를 강학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며, 음악문헌인 '현가궤범'을 집필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현가
를 짓고 자양금이라는 악기를 제작하여 연주했다. 유중교는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치정(致政), 호는 성재(省齋)
이다.
참고로 이항로 선생의 이야기는 유랑자 양평 여행기 2편에 올라있다.
.
▶자양영당은 일제의 총칼 아래 사라져가 수많은 의병들의 그 숭고한 뜻을 이어갈 수 있도록 교육의 장으로 활용
되면서 매년 1만5000∼2만 명에 가까운 관람객이 찾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양영당을 찾는 관람객 대부분이 단체
학생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일본인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대하는 모습과 비교할 때 국민들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
▶ 성재省齋 유중교 선생 거택
.
▶ 성재省齋 유중교 선생 거택 전경 ,유중교의 본관은 고
.
▶그동안 무능한 조선정부와 민족의 친일반역자들에 의해 총 한번 안 쏘고 나라의 주권을 덜렁 내어주었다 여겨
왔지만 역설적으로 분명 의병이 있었기에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 것이었다. 결코 내어준 것이 아니다. 확실히 전
자는 부끄럽고, 후자는 강해지면 다시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
.
☞유랑자는 의병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와 다시 발길을 돌린다.
의병 전시관 바로 옆에 있는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울린 건물들이 보인다. 성리학자 유중교가 후학 양성을 위해
1889년 세운 滄洲精舍[창주정사]를 유인석이 거사, 도모 장소로 썼고, 이후 1906년 유림이 새 건물을 추가하며
자양영당이란 이름을 붙인 곳이다.
.
숭의사가 있는 '자양영당'은 원래 서당이었다. 조선후기 유학자인 유중교가 고종 26년에 '자양서사'를 세워 후학
을 양성했다. 6년 후, 의암 유인석은 이곳에 8도 유림을 모아 비밀결사를 조직 하게 된다. 의병은 상민이 아닌 유
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
▶紫陽影堂廟庭碑[자양영당 묘정비]
.
▶고종 32년(1895)에는 의암 선생과 팔도 유림들이 비밀회의를 하는 장소로 쓰이며 의병운동의 진원지이자 사상
적 기반이 된 역사적인 곳이다. 또 제천을 중심으로 원주, 영월, 단양, 충주 등 전국 의병운동의 총본산 역할을 담
당하기도 했다.
.
▶제천 자양영당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유중교[1832~1893]가 후진을 양성할 목적으로 1889년[고종 26]에 滄
州精舍[창주정사]를 세운 강학처를 기반으로, 1906년 이소응의 주도하에 화서학파에서 존중하는 선현들의 제사
를 모시기 위해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면서 창건되었다. 1977년에 있었던 제천 자양영당 전면 보수 공사 전에는
지붕이 돌기와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1995~2001년에 제천 자양영당 보수, 의병 사당인 숭의사 신축, 의병 전시
관과 의병 탑 건립 등 제천 자양영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수혜자였던 선비들은 나라의 위태로움 앞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그들은 단지 붓대신
총을 들었다. 곧이어 주민도 동참했다. 총을 쏠 줄 모르는 농민은 민병부대에 참여해 포수부대를 지원하고, 집집
마다 비용을 모으고, 성 쌓기 작업에 참여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됐기에 제천이 '의병의 고장'이라 할수 있었던 것
이었다.
.
의병은 1895년 장회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충주성 점령, 일본군 병참기지 공격, 제천 전투 승리등 성과를 거둔다.
滄洲精舍[창주정사]의 강당은 지금 한창 개보수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유랑자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숭의사로 발길을 돌린다.
.
▶華東綱目木板閣[화동강목목판각]
.
.
.
►여기에 소장된 목판은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1819 ~ 1891)과 성재 류중교(1832 ~ 1893)가 중국 송,원대의 사적과 고려의 사적을 합편
한 "송원화동사합편강목" 목판이다
이 목판은 의암 류인석(1842 ~ 1915)의 주도하에 1906년(광무 10) 춘천 가정리 가정서사(柯亭書社)에 간역소刊
役所를 차리고 판각을 시작하여 1907년 5월에 완료하였다
목판의 재질은 박달나무이며, 크기는 가로 53cm, 세로 21.5cm 내외이며, 수량은 전체 2,620면面 중 양면판각
2,450면, 단면판각 137면, 결면 33면이다. 자본字本은 루제원柳劑遠의 글씨다
.
▶자양영당에는 당시 외세의 침입에 항거해 구국의 기치를 높인 의암 선생 등 의병장들의 위패, 처절하고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였던 이름 모를 수많은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무자(無字)병풍과 위패가 모셔져 숭고한 넋을 기리
고 있다.
.
▶崇義祠[숭의사]
.
요즘 '의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의리!"로 인사를 대신하고, 모든 말에 '의리'를 넣는다. 그런데 구한말에도
義理[이리]를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義[의]'를 위해 싸웠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위해 총을 든 사람들 과 붓으로 표현된 꿈을 펼치는 몇몇 안 되는 선비들이다.
.
숭의사 하얀 병풍 앞에서 유랑자는 다시 묵념을 한다. 그림도 글씨도 없는 백지 병풍과 조그마한 위패…. 13도 의
병의 넋을 기리는 '숭의사'의 모습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의병의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어 하얗게 비워 두었다
고 한다.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간 수많은 영령들 앞에서 유랑자의 고개는 더 깊이 숙여진다.
..
►숭의사
*제천 의병의 넋을 기리고자 조성하였다 사당 내부에 깃발과 신위를 모시고, 의암 류인석과 13도 의병의 넋을 기
리고자 매년 10월 제천 의병제 때 고유제를 지낸다.
*깃발/ 湖左昌義陳[호좌창의진]
*신위/ 朝鮮末十三道義軍道總裁毅庵柳先生麾下諸賢神位[조선말13도의군도총재의암류선생휘하제현신위]
.
►자양영당[紫陽影堂]
습재習齎 이소응李昭應과 화서학파 유림이 1907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주자朱子와 우암尤庵 송시열, 화서華西 이항로, 성재省齋 유중교의 영정을 모셨다
후에 의암 류인석과 습재 이소응의 영정을 추봉하고 매년 봄가을에 후손과 유림이 모여 제향하고 있다
.
▶紫陽影堂[자양영당] 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 유중교 선생이 후진을 양성했던 곳으로 고종 26년(1889)에 창주
정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뒤 1906년 유림에서 선현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자양영당으로 새롭게 건립했다.
.
.
▶제천시에서는 지난 1995년 을미의병 창의 100주년을 기념해 1만8479㎡ 부지에 사업비 52억5700만 원 들여
자양영당 보수, 의병사당인 숭의사 신축, 의병전시관과 의병탑 건립 등 자양영당 성역화사업을 실시했다.
.
.
▶의병전시관 옆에는 유인석 선생의 거택이 있다. 1896년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계속 하다가 다시 귀국 하였다가
다시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선생은 사후 자양영당에 배향되
었다.
.
▶ 의암 유인석 선생이 잠시 살던 주택으로 1995년 을미의병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새로 복원된 집이다.
.
▶의암 유인석 선생의 복원된 거택
.
▶자양영당 찾아가기
►주소: 충북 제천시 봉양읍 의암로 566-7
지번]봉양읍 공전리 475
►문의 및 안내: 자양영당 관광안내소 043-641-4811
►휴무일: 월요일 / 1월 1일 / 설·추석 당일
►이용시간: 09:00~17:30
►주차시설: 있음 - 의병전시관 주차장
►화장실 있음 - 남녀 구분/ 의병전시관
►유모차 대여정보 불가
►반려동물 가능여부 불가
.
*https://cafe.daum.net/b2345/9toB/2238👌
.
▶자양영당 찾아가기
.
▶ 의암 유인석 선생이거택
.
▶*의암 유인석 선생 거택: 충북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475
.
▶*제천여행 홈: 휴윗제천 http://tour.jecheon.go.kr/ 👍
▶*문의 및 안내 043-645-2724
.
▶https://tour.chungbuk.go.kr/www/index.do👍
.
▶의암 유인석 선생이 잠시 살았던 주택으로 1995년 을미의병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새로 복원된 집이다.
.
▶의암 유인석 선생 거택: 의암은 강원도 춘천시(춘성군) 남면 가정리 출신으로 공전리에 새로 복원된 선생의 거
택은, 1969년 독립운동 피해보상금(대일청구권)을 기금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가 만들어 지면서,
독립운동사 정사도 만들고 자료집도 만들게 되면서 복원된 것이다. 1969년 '의병항쟁사'에 의암선생의 고택 사진
이 한 컷이 들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사진을 모델로 해서 1995년에 새로 복원을 한 것이다.
.
의암 유인석의 마지막은 1915년 연해주 목화촌(포시에트)에서 74세로 병사하였다. 유인석은 이항로의 학통(學
統)을 계승한 학자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
령장)이 추서되었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