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주권성
고린도전서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찬송가 182장(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오늘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친 말씀 중 일부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아홉 가지 은사를 나눠 주시어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주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에게는 이런 은사를, 어떤 성도에게는 저런 은사를 주신다고 하시면서, 결론적으로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보듯이, 성령께서 그의 뜻을 따라 은사를 나눠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자유의지로, 그의 기쁘신 뜰을 따라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절대 주권성을 사도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 자신이 이것을 그의 사역 가운데 여러번 체험적으로 느낀 바 있습니다. 그가 안디옥 교회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중에 한번은 교회 지도자들의 금식 기도회를 하고 있던 중에 성령께서 그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예언을 주시어 바나바와 바울을 성령의 하시는 일에 일꾼으로 따로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사도행전 13:2 이하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로 가서”(사도행전 13:2~4)
이 말씀에서 분명히 사도 바울은 성령의 주권적인 이방 선교의 사명의 부르심을 엄중하게 받았고 자기 사역의 인도자로 성령을 온전히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차 전도 여행 때에 유럽 선교를 시작하는 대목에서도 성령의 주권성을 깊이 느낀 바 있습니다. 사도행전 16:6 이하에 그 대목이 나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사도행전 6~10)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선교 사역을 성령께서 친히 진두지휘하고 있음을 깊이 자각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적극 환영하며 순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단순한 어떤 영적인 힘에 불과한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그의 주권적인 뜻을 정하시고 그 뜻을 따라 그의 사역을 펼치시며 하나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주권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이르시기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의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분다는 것은 곧 성령의 주권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람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불어가는 그 방향을 사람이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방향을 바람 자체가 결정합니다. 이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서 우리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의 원하시는 바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은혜의 내용도 그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뜻대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의 도구로 쓰시고자 하는 일꾼도 다 그가 택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 어부 베드로를 자기의 일꾼으로 쓰고자 하실 때에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 쓰시듯이, 랍비 중에 탁월한 랍비 교사였던 바울을 쓰시고자 하실 때에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영광의 모습으로 찾아요ㅗ셔서 그를 자기 일꾼으로 삼으시듯이, 성령께서도 그가 쓰고자 하는 자를 택하여 불러 쓰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8세기와 19세기 초에 미국에서 크게 사용한 복음 전도자 디 엘 무디는 구두를 판매하는 판매원이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도 다 나오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설교할 때 종종 맞춤법까지 틀리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영께서 그를 쓰시고자 하시니 그는 위대한 성령의 사람으로 그 시대에 사람들을 살려내는 영적 부흥 운동의 기수가 되었습니다.
또한 디엘 무디에 이어서 성령 사역을 감당하며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이끈 후계자로 성령께서 낙점을 한 사람은 무디와는 전혀 상반된 사람 알 에이 토레이 박사였습니다. 그는 예일 대학을 나온 석학이었는데, 디엘 무디 선생과 만나 성령 사역에 뛰어들어 성령 사역을 계속 이어간 분입니다. 토레이 목사님의 아들은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였고 그의 손자는 우리나라에 와서 사역을 하였던 성공회 소속 예수원 창설자 토레이 목사님이십니다. 3대에 걸쳐 성령 사역과 선교 사역에 힘쓴 귀한 가문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주의 사역을 이어온 것은 성령의 주권적 사역이라 할 것입니다. 전혀 성격과 삶이 다른 사람들일지라도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그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다양하게 일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자기의 계획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또 그의 사역 중에 특정한 일을 위하여 일하도록 역사하시는 모든 일들을 그의 주권적 뜻에 따라 행하시고 계십니다. 영적 부흥을 이루는 시기와 장소도 사람의 바람과 소원을 따르지 않습니다. 마치 바람이 그의 뜻대로 불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이 방향으로 불기도 하고 저 방향으로 불기도 하는 등 다 바람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부흥도 우리와 상관없이 그가 원하시는 바 그의 때에, 그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기다릴 뿐 그에게 어떠한 원망이나 낙심을 해서도 안되겠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간절한 소원과 열심이 부어지고 놀라운 열매가 맺혀진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특별히 열심을 낸 결과라기보다 성령의 주권적인 뜻과 그의 기뻐하시는 행하심의 결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영광을 받거나 우리 자신 스스로가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두렵고 떨림으로 이같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일하신 성령님의 일하심에 감격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성령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신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모두 한평생 항상 경외심을 가지고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갑시다. 성령께서 원하실진대 전적으로 순복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시다. 성령께서 우리의 어떤 것을 쓰시고자 하신다면 언제든지 요구하시는 바를 다 내어드리려는 마음을 갖고 삽시다. 우리의 젊음, 우리의 시간, 우리의 꿈, 우리의 재능, 우리의 꿈 모든 것을 성령께 언제든지 다 내어맡기려는 마음을 갖고 삽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아무리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해도 그것을 성령께서 포기하기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포기하고 내려놓을 줄 아는 마음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한평생 성령님을 우리의 인도자요 교사요 우리 사역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면서, 성령의 주권성을 늘 존중하면서 그와 동행하는 성령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