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休戰線)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高句麗) 같은 정신도 신라(新羅)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意味)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廣場).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休息)인가, 야위어 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어야 하는가. 아무런 죄(罪)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건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조선일보』, 1956.1.1.)
[작품해설]
박봉우의 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육성(肉聲)의 시’이다. 그의 시는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불의와 비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이른바 참여시의 특성을 갖는다. 박봉우는 1950년대의 전쟁과 폐허로부터 1960년대의 민주 혁명과 군사 독재, 1970년대의 속 빈 강정같은 풍요 속에서 느끼는 정신적 빈곤감, 그리고 1980년대의 민주화 열망 등 광복 이후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달려온 우리 사회를 온몸으로 맞닥뜨리고 시를 쓴 시인이다. 이 시는 1956년도 조선일조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얼마 안 되는 당시 상황에 대단히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작품애다. 이 시에는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과 적대잠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을 갈망하는 시인의 절규가 완곡한 산문 율조릐 형식으로 절제되어 나타나 있다.
화자는 1 · 5연에서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155마일 휴전선을 마주하고 있는 민족의 분단 상황을 이상할 만큼 담담한 어조로 제시한다. 화자는 휴전선이 ‘꼭 한 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꽃’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꽃’은 실제의 꽃이라기보다는 전쟁은 일시 멈추었지만, 더욱 깊어진 증오심으로 대치해 있는 분단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따. 또한 ‘요런 자세’라는 구절에서 ‘요런’은 ‘겨우 이것 밖에는 안 되는’의 의미로, 일시 포성이 멈추기만 했을 뿐,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닌 분단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화자의 심리가 내재해 있다.
2연에서 화자는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의 휴전선의 모습을 통하여 팽팽한 긴장감으로 대립하고 있는 남과 북의 현실을 제시한다.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 같은 정신’이나 삼국을 통일한 ‘신라 같은 이야기’라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오늘날의 민족 상황을 비판하는 한편, 지금은 비록 남과 북이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로 분단되어 있더라도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라며 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이냐며 하루빨리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민족의 큰 소망으로 발전한다.
3연에서는 분단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분단은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이다. 분단을 ‘정맥’이 끊어진 신체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화자는, 분단 상황이 계속되면 될수록 민족사는 더욱 ‘야위어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며 절망한다.
4연에서 화자는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으로써 동족상잔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모진 겨우살이’와 같았던 6.25의 비극적 체험을 겪은 바 있는 화자는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이 바람에 쓰러지는 것 같은 전쟁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며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라고 외친다. 아무리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죄 없는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정치 지도자들의 허황된 정치 논리라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작가소개]
박봉우(朴鳳宇)
추풍령(秋風嶺)
1934년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1952년 『문학예술』에 시 「석상의 노래」가 당선되어 등단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이 「휴전선」 당선
1958년 전남문화상 수상
1962년 제8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0년 사망
시집 : 『휴전선』(1957), 『겨울에도 피는 나무』(1959), 『4월의 화요일』(1961), 『황지(荒地)의 풀잎』(1976), 『서울 하야식(下野式)』(1986), 『딸의 손을 잡고』(1987), 『시인의 사랑』(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