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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되는 후사
롬 4:9-17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9-17 / 그러면 이제 이 복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동시에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교의 규칙은 지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만 믿으면 주어지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그가 믿음을 통해서 이런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만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까? 아니면 유대교의 규례도 지켰기 때문이었습니까? 10)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언제 아브라함에게 이 복을 베푸셨느냐 하는 질문부터 대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가 유대인이 되기 전, 곧 유대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의식인 할례를 받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1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신 때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부터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받아들이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고 선한 사람이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할례의식은 그 확인의 표였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사람들의 조상인 셈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규례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 동시에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유대인의 믿음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 오직 할례만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가졌던 것과 같은 믿음을 본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3) [믿음으로 이루어진 약속]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기 때문에 주어졌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14) 그런데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내려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믿음을 가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의미가 없다. 믿음이란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15)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복과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그의 진노를 사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모든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어기지 않는 한가지 방법은 어길 수밖에 없는 율법을 갖지 않는 방법뿐입니다. 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값없이 주는 선물인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의 복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아브라함은 신앙적인 면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성경에 하나님께서 ㄱ) `아브라함을 많은 무리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아브라함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다 받아들이십니다. 이 약속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장래에 될 일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처럼 확실성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ㄱ. 70인역 창17:5)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때와 할례를 받은 시기를 통해 아브라함의 의로움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되어진 것임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상속자가 되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후손은 육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 의미로서 믿음으로 되는 후손들을 일컫습니다.
할례에 의함인가 믿음에 의함인가(9-12)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할례는 그들이 진정한 유대인이라는 증거이며 이방인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을 때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때의 시간적 순서를 통해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선언한 때는 아브라함의 85세 때입니다(창 15:6). 반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 때의 일입니다(창 17:11). 할례가 칭의보다 14년 늦은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의롭다함은 할례 때문이 아닌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 믿음을 믿기지 않는 것을 믿으려하는 자기 최면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내가 믿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가 상속자인가(13-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는 ‘세상의 상속자’가 되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육신의 후손을 일컫는 것이 아니요, 영적인 의미의 후손을 일컫습니다. 특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을 지킴으로 언약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14절 말씀처럼 두 가지 문제점을 일으킵니다. 믿음은 헛것이 되며, 약속은 파기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속한 유대인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이방인까지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에 의해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언약의 상속자가 됩니다(16). 17절이 이를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유대인들의 조상만이 아닌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믿음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은 없습니까? 오히려 믿음조차도 자신의 의로 여기는 경향은 없습니까? 오직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함을 다시 고백하며 나눕시다.
어느 랍비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하나님, 나는 우리 민족이 해방자 모세처럼 살지도 못했고, 예언자 엘리야처럼 살지도 못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모세처럼 살지 못하고, 엘리야처럼 살지 못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살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우리 모두는 유일무이하며 유례가 없는 하나님의 최고의 예술작품입니다. 꽃은 꽃이 됨으로써, 나무는 나무가 됨으로써, 그리고 나는 내가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 설 교 >
나를 위해 죽으신 주
로마서 4:13-25 / 박조준 목사
이미 봉독한 말씀 중에서 25절 말씀을 다시 받들어 읽겠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 라. 오늘 사순절 마지막 주간에는 예수님이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 에 대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 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내가 목숨을 버리기 때문 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 목숨을 다시 얻으려는 것이다. 아 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히브리서 10장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희생 제물과 예물을 원하시지 않고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불 사르는 제물과 속죄의 제물을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 님! 내게 대하여 두루마리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사실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기독교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 을 잡아서 로마의 집권자에게 넘겨서 죽게 하였다고 해서 그들만을 책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따지고 보면 유대 관원이 예수님을 잡아서 이방인에게 넘겨 결국 십자가에 달리게 한 일이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손과 발에 직접 못을 박은 로마 군인들의 죄도 그 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죽으시기로 결심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 대해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죽게 하셨다 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우연히 된 일입니다. 물론 우 연한 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10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다.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이 말을 들으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 서 권능과 기이한 일과 표징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 이 모든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이 예수가 배반당하신 것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불법한 자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 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을 읽어보면 그처럼 예수를 송사하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들의 메시야로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에 들어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모두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오늘 본문은 위에서 말한 사실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 을 말하면서 그는 하나님을 사망 중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믿었으며 바랄 수 없는 것 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의는 아브라함을 위해서만 허락하신 것은 아니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도 허락하신 것 이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사람은 이 허락을 받을 수 있다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오늘 주신 말씀 로마서 4장 25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주셨다 고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다 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고 하지 않고 다시 살리심을 받았 다 고 했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을 자동적인 행동자로 기록했는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그리스도를 피동적인 피해자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는 이중적인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내어준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어 준 바가 되었다 는 말 이 중요합니다. 어떤 성경 해설가는 주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양도되었다 고 번역했습니다. 법적 인 절차를 생각할 때는 살인죄를 범한 죄인은 사형 집행자에게 넘기어 집행하게 되는 것인데 여 기서도 이런 뜻에서 내어 준 바가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로마서의 중심 사상인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표본으로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대속자로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자로 죽으셨다는 것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아주 흉칙한 죄를 범한 바라바라는 인물이 나옵니 다. 요한복음에는 바라바가 강도라 했고, 누가복음에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범했기 때문에 옥에 갇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의 귀한 절기에는 죄인 하나를 놓아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런데 빌라도 총독은 예수를 심문해 본 결과 아무런 죄를 찾아낼 수 없으므로 그를 놓아주어 그 자신의 곤란한 입장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를 사복음 전체를 통해서 서른 여덟 절이나 기록했습니다. 더구나 바라바에 대한 기사도 여섯 절이나 기록했는데 오히려 주님을 배반하여 판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몇 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바라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의 이름은 순전히 히브리식인데 그 뜻은 아 버지의 아들 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로 말하면 바라바는 모든 아버지의 모든 아들 을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아담의 자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약탈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영혼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죽인 살 인자입니다. 더구나 어두운 죄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내려진 사형 언도를 받고 무서워 떨면서 그 심판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바라바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느 책에서 사형 집행을 당하기 전의 사형수의 심경을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목을 조르는 줄을 붙잡고 놓지 않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손을 묶고 교수형에 처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가스실에 넣어 사형을 집행하는 감옥에서 사형수가 조금이 라도 더 살아 보려고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숨을 깊이 들이쉬는데 얼마나 들이쉬는고 하니 눈 이 툭 솟아 나올 정도로 심호흡을 하더라고 합니다. 사형수들은 자기의 숨이 넘어가는 것을 알고 있고 자기가 억지로라도 들이쉬는 숨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처참한 일 입니까! 여기 바라바라는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형 언도를 받은 그는 집행 시간만을 기다리며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착잡한 심정으로 자기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못이 살을 뚫고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전에 다른 죄수가 십자가형을 받는 것을 본 적 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광경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들이 하루 어떤 때는 이틀씩 십자가에 매달려 몹시도 고통을 당하다가 숨이 끊어진 뒤에야 신음 소리가 그치던 광경도 생각하 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갑자기 군중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바라바가 들어 있 는 감방문이 열렸습니다. 간수들이 들어 왔습니다. 간수들이 바라바에게 다가와서 그를 묶었던 쇠고랑을 풀어놓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는 혼자 생각에 아, 이제 내 사형 집행 시간이 되었나 보 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수들이 바라바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 더니 이제 너는 방면이 되었으니,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네 마음대로 가라 하면서 놓아 주는게 아닙니까? 바라바는 얼빠진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그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의 눈이 믿어지지 않았습니 다. 모두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그가 범한 죄를 인정했고 마땅히 그 런 죄를 범한 사람은 그 당시의 최고의 형인 십자가형을 지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아무런 반 항도 하지 못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방면이 되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바 라바는 어리둥절했습니다. 무조건 풀려났으니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라바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도무지 관심조차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군중들은 다른 데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떠들썩하게 소리 지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 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바라바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서 가까이 가보니 자기가 죽을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서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때 바라바는 깨달았습니다. 우리 명절에 큰 죄인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는데 나를 놓아주고 저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게 되셨구나!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다. 그가 나를 대신 해서 죽으신다. 나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드디어 그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약하신 그 몸이 간신히 발을 옮겨 놓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가며 봅니다. 바라바도 그 군중 속에 끼어서 따라가며 봅니다. 예수님이 쓰러 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넘어진다고 무지한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에게 채찍질하는 모습도 보았 습니다. 예수님은 힘에 지쳐 쓰러지고 또 쓰러집니다. 도저히 골고다까지 갈 수 없겠다는 판단이 났음인지 시골에서 올라오던 구레네 시몬이란 힘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고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이때 바라바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바라바는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 박는 망치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저 못은 내 손바닥을 뚫었어야 했을 터인데.
1. 그 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 렸네그 피로 내 죄 씻었네. 2.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주님 눈물로 기도했네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 네그 피로 내 죄 씻었네. 3. 비웃는 저 무리들 주의 옷 벗긴 후에주님 몸 깊이 찔렀네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 네그 피로 내 죄 씻었네 4.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그 때 구원을 이루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마음의 눈을 들어 나 대신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는 주님을 바 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세요. 그 머리에 쓰신 가시관을 보세요. 가시에 찔리니까 이마에서는 피가 점 점이 흐릅니다. 그 두 손을 바라보세요. 그 큰 못이 사정없이 예수님의 부드러운 살을 찢으며 뼈 짬으로 뚫려서 나무에 박혔습니다. 못 박힌 자리에서는 피가 천천히 흐릅니다. 그 창끝이 나오자 마자 뜨거운 선혈과 물이 쏟아집니다. 주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집니다. 이런 고통이 한 시간만 이 아니고 두 시간만이 아니고 여섯 시간을 십자가 위에서 끝내 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주님은 한마디 말씀하시고 운명하십니다. 바라바는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전에 보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부르짖는 말은 그가 나 대신 죽으셨구나 하고 말 했습니다. 여러분, 육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바라바를 대신하여 죽은 것 외에 아 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주님은 바라바와 같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 다. 나는 형벌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나 대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대속주가 되셔서 그가 친히 내 죄값을 지불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은 조금도 상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세 마디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갈 지옥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갈 곳은 오직 천국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으로써 나를 위해 천국을 사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이 사업이 완성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은 주님이 다시 사시므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우 리가 의롭다 함을 입게 된 후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영수증이 있으면 고지서가 다시 나와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갈보리산 십자가 위 에서 하나님의 계산서대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 리의 모든 빚이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갚아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다시 사림은 이 모든 죄의 빚을 갚았다고 하는 영수증이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성시로 읽은 이사야 53장은 우리에게 퍽 깊은 감명을 줍니다. 여기 우리 라고 한 것 을 나 라는 말로 바꿔 읽겠습니다. 그는 실로 나의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나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 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와 상관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 아닌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나 때문에 고난 당하신 주님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뜻깊은 종려주일 아침 나 같은 죄인 위하여 고난 당하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하여 그 십자가 바라보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는 새로운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광장한 믿음
로마서 4:13-25 / 김삼환 목사
우리는 굉장하다는 말을 잘 사용합니다. 그러나 굉장하다는 이 말은 사실은 한문입니다. 클 굉(宏)자, 또 씩씩할 장(壯)자입니다. 굉장히 크다, 굉장한 일이다,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라고 씁니다. 오늘 특별히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느냐, 정말 아브라함의 믿음은 굉장한 믿음의 사람이지 않느냐, 굉장한 믿음이지 않느냐,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창조함을 받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되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고독한 외로운 존재가 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 같이 우리의 친구, 아버지, 목자도 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우리의 삶을 다스려주시는 통지치자도 되십니다. 우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런 삶을 우리는 믿음으로 살게 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심히 어려운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일대 사학자 웨스터는 혼돈의 시대라고 했고, 오웬은 불안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정말 불안하고 혼돈하며, 공허한 이러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힘 있게, 능력 있게 통과할 수 있습니까? 무사히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불안과 공포와 염려와 긴장은 전 세계적이고, 선진국 미개국할 것 없이 다 같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밤에 잠을 못자는 사람이 42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11개월 동안 TV에 수면제를 선전한 광고비가 2억9800만 달러라는 겁니다. “이 약 먹으면 잠이 금방 옵니다. 잠이 안 오는 분 있습니까? 이 약 드세요. 밥 먹다가도 잡니다.” 계속 선전을 그렇게 많이 합니다. 새로운 약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잠이 안와 죽을 지경입니다. 불안과 긴장에 떨고 있는 밤, 이 고독한 밤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다는 겁니다. 프랑스도 그렇습니다. 항우울제, 진정제, 수면제가 2003년도에만 수면제 스틸녹스가 1500만 톤, 항우울제가 1150만 톤, 진정제가 850만 톤 사용되어졌습니다. 선진국일수록 더하다는 것 아닙니까? 사회보장제도가 어느 나라보다 더 잘 되어 있고 사회가 안정되어 있으며, 질서가 잘 있고 직장이 안정되어 있으며, 불안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는데 전쟁도 없습니다. 모든 주변이 서로 손에 손을 잡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에 왜 이렇게도 잠을 못자고 불안에 떨고 있냐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영적인 피조물,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여야 합니다. 그 품 안에 안기 울 때 이유 없이 우리 몸에는 평안이 있고 잠이 옵니다. 그를 믿고 그의 품 안에 안겨야 됩니다. 저는 부모님이 시골에 계셔서 명절마다 방학마다 늘 자주 내려갔습니다. 서울에서 제가 목회를 했으니까 그래도 괜찮게 잘 지냈습니다. 저의 환경은 이미 30년 전에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신 데에 가면 방 한 칸에 온 식구들이 모여서 밥그릇 다 그대로 있고, 옷가지들 한 달 동안 씻지 못하고 다 집안에 있으며, 항상 일해야 되니까 진흙 옷으로 그냥 그대로 자는 그런 방입니다. 저는 시골 내려가서 우리 어머니 만나고,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면 그렇게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어머님의 품은 제가 결혼했지만 냄새가 나고, 집안이 엉망이어도 어머니의 냄새는 제게 어떤 향기보다도 더 아름다웠습니다. 지내놓고 봐도 어머니와 그때 같이 누워 자던 밤이 너무 좋았습니다. 나를 낳으신 어머니, 그렇게도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한테 갔을 때에 아내하고 자는 사람은 몰라서 그렇습니다. 어머니 하고 같이 주무십시오. 나를 낳으신 분이시기에 참 좋습니다.
교회가 꼭 좋아서 오는 겁니까? 먹을 것이 있어서 옵니까? 교회는 내가 냄새나고 부족해도 참 좋은 것은 하나님, 창조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품 안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분은 여기 나오면 싫은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분은 아버지의 품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죄악의 품, 쾌락의 품, 술 먹는 술집의 품이 좋은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다, 창조주이시다, 나의 가는 길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믿으면 그렇게 마음이 좋습니다. ♬주 예수 넓은 품에 나 편히 안겨서 그 크신 사랑 안에 나 편히 쉬겠네(찬송가 476장)♬ ♬주 날개 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찬송가 478장)♬ 영원히 영원히 우리는 그 품안에 안겨서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라는 겁니다.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아이젠하워라는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분은 어려서 너무 가난했습니다. 저는 위인전기를 많이 읽었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그 어머니에 대해서 읽은 것처럼 감동을 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이젠하워 어머니는 너무너무 가난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 댁에서 살았습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자기 외손녀를 데려다가 학교는 보내지 않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니게 해서 성경을 늘 가르쳐주고 외우게 했습니다. 여러분! 지내놓고 보면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내 것이고, 학교에서 배운 것은 잠깐은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과 내 진리와 내 능력은 될 수 없습니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지만 우리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어려서부터 그것을 축복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처녀 때에 외할아버지 댁에서 성경을 많이 외웠습니다. 외운 성경만 600절 이상입니다. 주기도문도 못 외워서 더듬더듬하고 신앙고백도 다 못하는 분이 있는데 성경 600절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단어도 600절을 외우려면 쉽지 않은데 그렇게 성경을 많이 외워서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을 받고, 결혼해서 아이젠하워를 낳았는데 이 아들에게 또 신앙교육을 잘 시켰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어려서 가난하니까 사관학교를 들어가서 등록금을 내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소위가 됐습니다. 군에 가서 소위가 되어도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전차 안에, 탱크 안에 아이들을 주일이면 꼭 데려다가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말씀을 지킨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동행해 주십니다. 이분은 2차 대전 때에는 이미 세계의 모든 연합군의 책임자가 되어서 전 세계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믿을 것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빨리 자라납니다. 이 사람은 믿을 거리가 없으니까, 하나님만 믿으니까 그의 믿음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한 분도 아이젠하워입니다. 2차 대전을 이끌어 승리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누구나 할 것이 없이 아이젠하워이고 그때 대통령은 루즈벨트입니다. 이분은 한국전쟁도 휴전을 이끈, 이 전쟁이 오래 갈 터인데 이것을 끝낸 분도 아이젠하워입니다.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성경 한 구절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외우는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가랴 4장 6절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 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힘으로도, 능으로도, 권력으로도 못살고, 이 세상의 어떤 군사적인 힘으로도 승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4장 6절이 여러분의 요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959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의 흐르시초프를 초청했습니다. 9월 27일,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 흐르시초프에게 교회에 가자고 간절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교회가, 하나님이 원수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첫째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 이것을 물리쳐야 되니, 교회에 가자 그러니까 갈 리가 있겠습니다. 안 갔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니까 나와 함께 교회에 갑시다.”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말했습니다. “제가 교회에 다녀올 때 까지, 예배드릴 때까지 한 시간 반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흐르시초프를 만났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흐르시초프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한 시간 반 동안 생각을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이렇게 먼 길에 초청을 해 놓고 나를 떠나서 아이젠하워가 교회에 갔다 와서 내게 무슨 핑계를 댈까?” 이것을 생각했다는 겁니다. “나를 데려다 놓고 교회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때에 아이젠하워가 말했습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흐르시초프를 제가 초청해서 귀하지만 예배보다 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배가 정말 제일 귀한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져버리고 무시하며, 하나님 떠나서 홀로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진단 내린다면 믿음이 없어서 고독하고 믿음이 없어서 잠이 안 오는 것이며, 하나님이 없어서 외롭고 슬픈 것이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잠 못 오는 병은 금방 고쳐 낼 수 있습니다. 평생 수면제 먹지 말고, 교회에 나와서 한순간에 잠의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교인은 잠이 너무 많이 와서 탈입니다. 저도 한번만 노래를 안 하면 금방 잡니다. 우리는 정말 행복한 성도들인 줄로 믿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민족, 개인, 사상, 국가, 기업은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떠나면 제일 안 되는 것입니다. 저주가 무엇입니까? 믿음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져버리는 것이 저주입니다. 되는 것 같지만 안 됩니다. 그 증거가 러시아이며 공산주의입니다. 러시아는 천년동안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어 세계 1등 국가, 1등 문화민족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떠나면서 그들은 먹을 것 입을 것도 없는 온 나라가 다 같이 굶어 죽는 거지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도 땅도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습니다. 러시아를 따라간 민족은 다 안 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믿는 사람 따라가고, 잘 믿는 사람 사랑하고, 잘 믿는 사람 친구 되고, 잘 믿는 사람을 귀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안 되려면 안 되는 사람 따라갑니다. 제가 캄보디아에 가서 수상도 몇 번 만났는데 어느 날 저녁에 장관이 호텔에 와서 저한테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실력자입니다. 굉장히 힘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다녀갔습니다. 이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몇 십 년 동안 안 된 것은 안 되는 나라를 따라 갔기 때문입니다.”라는 겁니다. 우방으로 중국과 베트남을 따라 가며, 경비를 북한이 와서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친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나라만 골라가지고 따라갔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캄보디아는 엄청나게 움직이고 경제가 발전하며, 정치가 안정되고 혼란이 질서가 잡히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되는 나라를 잡는 겁니다. 지금 캄보디아는 우리나라를 제일 좋아합니다. 남한을 제일 좋아하고, 미국, 일본 좋아하니 이 나라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좋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를 사랑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라를 여러분도 사랑하고,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민족을 여러분이 귀히 여겨야 귀한 민족이 될 줄로 믿습니다. 러시아는 안됐습니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지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면서 20년 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열배나 더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평창하고 동계올림픽 경쟁한 나라가 러시아입니다. 이 나라가 지금 안집니다. 뭐든지 안집니다. 이제 올림픽을 해도 러시아, 그 전 같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 전 같지 않습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이제는 거지가 아닙니다. 러시아는 지금 힘 있는 나라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70%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70%가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래 안 걸립니다. 금방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하신,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의 증거이며 경험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4천년 동안 안 되다가 예수 믿으니까 금방 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혼란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하나님이 없는 문화와 사상과 하나님이 없는 우리의 삶속에 우리의 가정이 무너지고 우리사회가 분열이 오며, 이렇게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는 개인이나 우리 사회의 아픔은 하나님이 없는 데에서 오는 겁니다. 잘 믿는 곳에는 이런 무질서와 혼돈은 없습니다. 혼돈의 시대, 무질서의 시대에 질서가 있고, 불안의 시대에 평화가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땅도 적고 인구는 6백만 밖에 되지 않으며, 남한의 1/4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 서울 시민 반 밖에 안 되는 이 나라가 오늘 세계를 지배하지 않습니까? 세계 식량회사 다섯 개 가운데 세 개를 유대인이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양식이 유대인 손에 다 달렸습니다. 세계에 큰 석유회사가 7개가 있는데 엑슨 모빌, 스탠더드, 걸프, 로열 터치 셀, 텍사코, 비피, 토탈 등 7개의 큰 석유회사가 있는데 유대인이 6개를 잡고 있습니다. 먹는 것을 유대인이 다 가지고 있고, 세계 기계, 석유시장 올리고 내리는 것 유대인이 다 좌우합니다. 여러분! 돈이 어디로 갑니까? 그쪽으로 갑니다. 세계에 유명한 통신사 AP, UPI, AFP, 로이터, 유대인 겁니다. 신문사 뉴욕타임즈를 비롯해서 월스트리트저널 유대인 겁니다. 수많은 방송 NBC, ABC, CBS, BBC, 다 유대인 겁니다. JP모건, GM, IBM, 다 유대인 겁니다. 세계의 보석 유대인 겁니다. 지하자원 유대인 겁니다. 유대인이 다 움직입니다. 유대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여기 와서 몇 번 예배를 드렸습니다.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우리는 미국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브라질, 아르헨티나도 움직입니다.” 세계 외교를 하던 정치를 하던, 유대인을 비켜서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것도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무엇 때문에 이런 복을 받습니까? 노벨상 받은 사람이 151명이나 이글이글 거리고,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이 왜 다 유대인입니까? 유대인이 모든 일에 왜 이렇게 천재가 되고 물질을 잡으며,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양손에 다 잡고 누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유대인은 4천년 동안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어떻게 교육시키느냐, 하나님 잘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못날 수도 있고 못 배울 수도 있으며, 누구보다 능력이 없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길은 많다는 겁니다. “너는 문화계 쪽으로 가면 되는 것이고, 경제를 모르면 정치 쪽으로 가면 되는 것이고, 정치를 모르면 경제계로 가면 되는 것이고, 너는 이것을 모르면 음악계로 가면 되는 것이고, 과학자로 가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천만가지인데, 다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이, 능력이 많습니다. 내 부족함만 생각하지 말고, 그에게 내 앞날을 맡기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능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께로 옵니다. 위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이 위대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일을 했습니까? 정말 아브라함이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제일 약점 많고 쓸모없으며 가치 없는 백세노인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보통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굉장한 믿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믿음 위에 있었습니다. 큰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아브라함을 높이 세워 주신 겁니다. 나이가 많아도 믿음만 있으면 젊은이보다 백배천배 일을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몸이 약할 지라도, 불구자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건강한 사람 천 명 만 명 일을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려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고향을 떠났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앞날을 맡기고 따라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세인데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줄로 믿었습니다. 가능한 일입니까? 여러분의 조그마한 지식이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내 아는 지식으로 살고 하나님의 능력을 져버릴 때가 많습니다. 내 지식을 넘어서고, 내 생각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능력 있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오, 힘이시오, 능력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은 어떤 것도 위대하지 않습니다. 믿음 하나가 위대합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믿음을 귀히 여기는 곳입니다. 모세는 제일 큰 지도자인데 무엇이 있었습니까?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누구보다도 앞섰습니다. ‘더 바이블’이라고 기독교방송에서 여러 번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저도 여러 번 봤습니다. 참 감동적입니다. 어떤 기업가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유명한 일들을 전부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이게 한 세트입니다. 50 몇 개인가 그렇습니다. 그냥 이렇게 적당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현장감동과 돈을 어마어마하게 들였습니다. 세계적인 배우가 촬영을 잘 했습니다. 저도 여러 편을 보고 눈물을 많이 흘리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더 바이블’ 대단합니다. 여기에 야곱, 요셉, 제가 다 봤는데 모세에 관한 것도 나오는데 잠깐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모세는 공주가 목욕을 하다가 물에서 건져냈는데 바로왕이 아들이 없어, 공주가 후계자입니다. 공주의 아들이 되니 전 애굽의 후계자가 되는 겁니다. 전 세계는 애굽 겁니다. 세계를 통치하는데 모세는 그 밑에서 훈련을 받습니다. 학술, 전쟁, 군사, 애굽의 천문학, 다 배웠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 준비를 다 갖춘 겁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루는 밖에 나가서 시찰하는데 애굽 감독이 유대인을 얼마나 잔인하게 때리는지, 모세가 보고는 내려가서 “너 왜 죄 없는 사람을 때리냐?” 그리고 그 사람을 때려서 죽였습니다. 죽여서 묻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애굽 사람이 보았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보고가 되었습니다. 모세를 끝까지 싫어하는 총리 같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 정보를 받아 바로왕에게 알렸습니다. 바로는 안 믿습니다. “너는 왜 자꾸 모세를 물고 늘어지느냐? 근거도 없이 모세를 왜 자꾸 그렇게 핍박하느냐?”, “이것은 진짜입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그럼 모세를 직접 불러와라.” 모세를 불렀습니다. “모세야! 이 사람이 또 너를 이렇게 헐뜯는데 진짜냐?”, “예. 아바마마. 진짜입니다.” 바로가 기절합니다. 기가 막힙니다. “너, 정말 애굽 사람을 죽이고 히브리 사람 편들었느냐?”, “편들었습니다.” 맞다는 겁니다. “그러면 너는 유대인이냐?”, “저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유대인이 맞습니다. 히브리 사람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너를 귀히 여겼는데, 내가 이 애굽 전체를 너에게 다 주는데 이 애굽의 금은보화가 얼마이고, 이 권력이 얼마이고, 너가 바로가 되면 천하에 너를 당할 자가 없는데, 이 많은 아름다움과 궁궐을, 네가 그럴 수 있느냐? 지금이라도 잘못했다 그래라.” “아닙니다.”, “이제부터 너는 죽어. 짐승이 물어뜯어 죽일 수도 있고 잔인하게 불에 태워 죽일 수도 있으며,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비극에 처할 수도 있어. 너를 광야에 보내어서 말라 죽일 수도 있고, 가장 극악한 처형을 받는데도 좋으냐?” 그러니까 “좋습니다.”는 겁니다. “내가 믿는 야훼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 모든 것을 줘도 그를 떠날 수 없고, 내가 믿는 나의 야훼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바로께서는 나를 그렇게 죽이시려고 하지만 바로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할렐루야!
믿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믿음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소중히 여겨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살 수 없다는 이러한 삶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삽니다. 믿음은 죽지 않습니다. 믿음은 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은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이 있어야 삽니다. 믿음이 있어야 참으로 삽니다. 믿음이 있어야 참 생명, 영원히 사는 생명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님과 함께 삽니다. 믿음이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을 비켜서 떠나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망의 길, 멸망의 길입니다. 믿음이 있는 길만이 삽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시작도 믿음, 출발도 믿음입니다. 우리는 항상 출발만 아니라 끊임없이 어제도 믿음, 오늘도 믿음, 이 발걸음도 믿음, 저 발걸음도 믿음, 우리의 모든 삶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두 번째 믿음은 큰방패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6절에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서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여러분을 지켜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대단한 방패나 빽, 능력, 여러분을 지켜주는 막강한 힘이 없어도 여러분은 이상하게 살아납니다.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 집을 대단한 진돗개가 안 지켜도 이상하게 평안합니다. 막강한 경비원이 없어도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믿음이 방패입니다. 항상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손 방패가 되셔서, 방탄조끼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 방탄조끼, 가정의 방탄조끼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방탄조끼를 입으려면 자녀보고 “믿음으로 살아라.”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녀의 방탄조끼가 되십니다. 옛날에 방탄조끼가 없어서 바울의 믿음은 방패라고 그랬습니다.
세 번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과 만나면 하나가 됩니다. 믿음 하나가 안게 만듭니다. 하나로 만듭니다. 사랑이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듯이 믿음은 야훼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만듭니다. 우리는 높고 낮은 창조된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역할은 믿음입니다. “아버지!”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 앞길을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따라오시고 도와주시며, 축복하여 주십니다.
네 번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외국에서는 선물을 받을 때 보는 분 앞에서 풀어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 반드시 오픈해서 선물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올 때 내가 받은 선물을 늘 말하고 보여 줘야 됩니다. 부부간에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가 준 선물, 남편이 준 선물을 꼭 가지고 다녀야 됩니다. 간직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를 사랑하는 겁니다. 저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면 제가 주일에 그 넥타이를 하고 옵니다. 오늘 그분이 선물한 것을 제가 하고 오는 겁니다. 그분에게 감사하는 겁니다. 그분은 설교 안 들어도 은혜 됩니다. “우리 목사님이 내가 준 넥타이 메고 나왔다.”며 좋아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 살 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이 좋아 하십니다. ‘내가 준 믿음을 쟤가 가지고 있구나. 쟤가 의심하지 않구나.’ 하나님의 기뻐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큰 평안과 자유가 옵니다. 이사야 12장 2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시편 3편 6절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우리 교인들은 왜 늘 신나게 살고 춤추며 살며, 기쁨이 충만하여 살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모든 기적을 가져다줍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정말 여러분의 질병을 믿음이 고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아무리 큰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가기를 바랍니다. 홍해는 갈라지게 되어 있고, 반석에서는 물이 나오게 되어져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은 놀라운 일을 모두 다 하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어렵고 절망스러운 큰 일에 “아유~ 나는 이번에 죽었어.” 이러지 말고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놀라운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계속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겁니다. 율법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로워 지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다 잘해서, 완전해서, 법을 다 지켜서 의로워 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로움은 한사람도 성공한 일이 지상에 없습니다. 법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80년 지켰다가도 한 가지 법만 잘 못하면 80년 잘 행한 모든 공로, 80년 지킨 공로는 소용없이 그 하나 때문에 구속당합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80년에 800가지를 설령 잘했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불의만 있으면 그 불의가 800년 동안 800가지 잘 한 것 다 삼키고 지옥가고도 남게 만듭니다. 사람은 행함으로는 의로워 질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로워 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주셔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내 의로 나오지 말고, 하나님의 의를 힘 입어서 나와서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의의 옷을 입고 예배드리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4장 13절에 보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시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갈 때는 물을 건넜지만 믿음을 떠나서는 물에 빠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내에게 빠집니다. 아내하고 둘이 같이 물에 빠져버립니다. 사랑하지만 믿음 없는 사랑은 우리를 빠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랑은 빠지게 되어져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기업, 정치는 빠지는 겁니다. 아무리 친한 우정도 믿음을 떠난 우정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빠지는 것입니다. 이 좋은 세상에 왜 우울증에 걸리느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좋아도 빠지게 되어져 있습니다. 이 넘실거리는 죄악세상에서 여러분의 가정이, 자녀가 빠지지 않고 승리하는 길은 오직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물 위를 건너는 믿음의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만 굉장하면 물 건너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
로마서 4:13-25 / 성흥모 목사
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주간에 몇 권의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강영우 박사가 쓴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성공하는 삶을 위한 10가지 교육 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자인 강영우라는 분은 중학교 재학 중에 망막이 상하여 실명하였고, 서울 맹학교 고등부를 거쳐 연세대 교육과에 입학하였고 문과대 차석으로 졸업하였으며,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 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맹인으로 박사학위를 얻은 사람입니다. 강박사는 2001년도에 세계 저명 인사 인명 사전에 수록되었습니다. 현재는 일리노이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그의 업적을 다 설명드릴 수 없습니다.
책의 부제로 "성공하는 삶을 위한 10가지 교육원리"를 말하고 있는데, 제6의 원리로 "역할 모델을 가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1944년생인 강영우가 중학생 때에 망막박리라는 병으로 시력을 잃었을 때 시각장애인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해외로 유학을 떠난 사람이 없었답니다. 국립의료원 안과 의사가 현대의학으로는 강영우의 눈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와하시 다께오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와하시 다께오는 와세다대학 재학 중에 실명하였지만 훗날에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일본에 돌아와 교수가 되었고 일본 맹인 복지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영우는 그가 맹인으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때 그 사람을 본받는 역할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나도 이와하시 다께오처럼 중도에 실명하였으니 대학에도 가고, 유학도 다녀오고 대학교수가 되겠다고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어떤 사람처럼 되겠다고 하는 역할 모델을 정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4선 대통령 루스벨트가 설립한 조지아주의 루스벨트 웜스프링스 재활센터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헬렌켈러 여사의 사진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루스벨트가 7년간 소아마비를 고치기 위하여 재활치료하면서 헬렌켈러 여사를 역할 모델로 삼고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헬렌켈러는 시각, 청각, 언어의 장애인으로 3중고의 사람이었습니다. 맹인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인데도 자신을 극복하고 일어섰다고 하면 나는 양다리가 마비된 것뿐이라고 하면서 그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교육현장에서 말하는 것 중에 "인물이 되려면 인물을 만나야 한다"라고 합니다. 강영우 박사는 성경을 읽으면서 바울을 자기의 역할모델로 정하고 고난 속에서도 세계 비전을 가진 것과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과, 약한 것들을 자랑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신앙과 용기를 배우려고 했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의 믿음과 생활의 아주 중요한 모델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에게 초점이 맞춰진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받고, 의롭다 칭함을 입는 것을 아브라함을 들어 확정하고, 우리의 구원이란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과 같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은혜의 계약을 맺고 있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일방적인 계약 곧 은혜의 계약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의 계약을 더욱 공고히 하려고 보조 수단으로 율법을 내려주셨습니다. 율법도 사실은 은혜입니다. 율법이 없었으면 어떻게 은혜를 은혜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다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그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공의로 여기시고 인정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허락하여 주시고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의롭다고 인쳐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이렇게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우리의 죄를 다 아들에게 물으시고 아들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맞이하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원리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자연계에는 합리적인 법칙, 과학적인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합리적인 훈련을 받아왔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칙은 이성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상식에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영적인 세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합리적인 것이요, 이성과 사리에 맞지 않는 것들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세상의 질서나 세상 원리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행한 대로, 율법에 의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노력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인데, 신앙의 세계는 은혜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그의 그런 좋은 믿음, 하나님 앞에서 의로 여김을 받은 그 믿음을 소유하기를 소원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였으며,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세움을 입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의 아주 좋은 모델이 되고 있으며, 오고 오는 세대의 사표가 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 믿음 그러는데 어떤 믿음이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믿음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성장하였으면 좋겠습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13-16)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이 그에게 들려졌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고, 인정하셨고, 그를 통하여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여 주셨다는 것으로 감격이요,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제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택하여 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셨고, 인도하셨고, 믿어 구원받게 하셨으니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은혜로 알았고, 감사하면서 믿고 순종하여 나아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도덕적으로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이어서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도덕과 윤리가 아브라함보다 났다고 자랑할 것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었으면서도 애굽에 내려가서는 부인 사래를 누이라고 속여 말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이제 부인을 내어준 것입니다.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말하면서 돈 받고 파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으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어디 거짓말을 하고 애굽의 황제 바로를 속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시니 금은 보화를 얻어 살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랄이란 지방에 가서도 아비멜렉이라고 부르는 왕에게 부인 사라를 빼앗겼는데, 하나님이 첫날밤에 꿈으로 야단치셔서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윤리, 도덕의 관점에서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나타나셔서 "나는 네 방패요, 네 큰 상급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령하고 따른 것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입니다. 은혜의 계약이 먼저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경건하고 구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을 강조하고, 율법만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만 부르게 되고, 죄가 죄 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놓고 판단 받고, 점수를 얻으려고 할 것입니까? 아니면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만 믿고 신뢰하고 맡길 것입니까? 나의 행위를 내세우고, 행위가 선하다고 알아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다 우리의 운명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에 모든 것을 걸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내 세울만한 것을 찾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그냥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의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습니다. 믿고 맡겨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었습니다. (17-21)
17절 말씀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우십니다.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되게 해야합니다.
창세기17장에 보면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하고, 사래라는 이름을 사라라고 고치고 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요, 사라의 나이가 89세였으며 바로 할례의식을 거행한 후였습니다. 이 부부는 나이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나이 100세가 되었다고 하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옛날 혹 오래 살던 시절이라고 하여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정말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름을 고치라고 하여, '고귀한 아버지'라는 아브람을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이라고 고치고 있습니다.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 부부가 나이가 많은 것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자식이 없었는데, 나이 90세의 할머니가 무슨 자식을 보겠다고 그러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말할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점진적인 믿음이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지고 갈라서는 장면을 보면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벨론 지역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에 제사장이요 살렘 왕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러 왔는데, 그에게 십의 일을 드리는 것도 성숙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말 것을 기도하는 장면은 그의 조카를 살려보려는 간절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가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본 후에 첩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내는데, 참으로 몰인정하게 보내는 것 같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협박하다시피 요청합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참으로 기막히고 결단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언제는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보라고 해놓고, 이제 자기 자식이 생기니 무조건 내쫓으라고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여러분, 이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깁니다. 떡 조금 싸주고 물 한 가죽부대를 어깨에 메어주고 그냥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내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니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기에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박절한 것입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은 다 유익하게 하셨고, 다 생각하시는 것이 있고, 깊은 뜻이 있어서 시킨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실 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내가 믿는 하나님, 나에게 유익을 주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생사를 책임지는 하나님이 되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고 싶어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18절 말씀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100세의 아브라함이나 90세의 사라는 자기들의 몸이란 죽은 것 같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면 하시는 것이요, 거기에 아니라고 토를 달고 안될 이유를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똑똑하다고 합리적인 이론을 가져올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여 그 능력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리분별력의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요,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무엇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을 견고히 하였다고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매달리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다 유익이 되므로 하라고 하신 것이요, 또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22-25)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을 보시고 그것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은혜가 아니라, 오늘 우리를 위한 약속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여 주시고 선택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쁨과 감사의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믿음을 가지다 보니 슬그머니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상식을 가지고 살고, 예전을 경험 삼아 사는데, 행위를 강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행위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뿐이신 독생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고 하나님이 되시기에 한번 약속하신 것을 영원히 지키시고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택하시고 사랑하시고 키워주시고 영광 받으시고 있습니다. 내가 행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림을 받았고, 내가 쓰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전체를 믿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성취하시고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정점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니 우리와 동등하게 맺은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통보요, 우리는 믿음으로 응답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은혜였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의 믿음만이 위대하고 우리의 지금 믿음은 보잘것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은 것을 의롭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믿었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라고 하면 그 믿음 자체가 공로가 됩니다. 의롭게 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믿은 것 같은데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오직 믿음과 신뢰로 하나님 앞에 나가야겠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아브라함이 오직 하나님만 a믿고 순종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감격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겨주시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약하여지지 않는 믿음
로마서 4:16-24 / 김광일 목사
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 대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기로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몸을 진단해 보더니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병약하기 때문에 이 몸으로는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목사가 되었다가는 일 년 안에 목회를 못하고 쓰러져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될 생각은 아예 꿈에도 꾸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순교할 각오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복음을 전하다 죽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오른손으로 그를 붙드시고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84세까지 살면서 건강한 사람보다도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많은 구제 사업을 펼쳤습니다. 노년에 당시의 왕인 에드워드 7세가 그를 버킹검 궁으로 초대했습니다.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은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 남기고 싶은 말을 한 마디 쓰라고 했습니다. 그때 윌리암 부스가 방명록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성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입니다. 그러나 나의 야망은 오직 한 가지, 사람들의 영혼구원입니다.” 그는 영혼구원의 열정을 가지고 평생토록 복음을 전하면서 불쌍한 이웃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병약한 몸이었지만 건강한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말년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젊었던 시절에 저는 목사가 되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때 제 몸을 진단했던 의사가 날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때 의사를 버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신실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기로 결심을 굳혔습니다. 약하여지지 않는 그 믿음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는 법이 없습니다. 자신을 믿으면 실망할 때가 옵니다. 사람을 믿으면 우리 곁을 떠날 때가 옵니다. 돈과 명예를 믿으면 그것이 사라질 때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결코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환경을 바라보다가 의심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이루어 주실까? 기도가 정말 응답될까? 비전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러나 이때에 우리는 믿음이 약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을 유지시키는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든지 약해지려는 유혹을 이겨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가졌습니다. 그 결과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힘들다고 하나님의 손을 놓아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핍박이 두려워서 놓아버리고, 지쳤다고 놓아버리고, 세상 유혹에 흔들려 놓아버리고, 눈앞의 현실이 불리하다고 놓아버리는 연약한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까? 성도는 흔들릴수록 더 확신에 서야 합니다. 시험이 올수록 하나님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일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복음성가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 찬양합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본문 19절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영역을 보면 ‘His body was as good as dead’ 라고 과거 완료시제로 기록하였습니다. ‘죽은 것 같고’는 이미 죽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생산능력이 완전히 상실되어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현재적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환경과 상황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까? 어떠한 상황에도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가졌기에 약하여지지 아니하였습니까? ‘약하여지지 않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어떠한 하나님을 바라야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합니까?
첫째로 창조의 하나님을 바라라
프랑스의 조각가 중에서 로댕 다음으로 각광을 받는 조각가가 있다면 세자르 발다치니(Cesar Baldaccini)입니다. 세자르는 마르세유 미술학교와 파리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했습니다. 1950년대 이후 프랑스 예술계를 풍미한 누보 레알리즘의 거장으로 주로 금속재료를 이용한 작품을 시작으로 철사, 철근, 볼트, 스프링 등 산업화의 부산물인 금속폐품을 압축 또는 팽창시킨 작품들을 제작하였습니다. 고철용접작품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자동차 3대를 압축하여 쌓은 작품을 발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도 했습니다. 자동차, 냉장고, 컴퓨터 등 다양한 고철들을 용접하거나 압축하는 방법으로 현대사회의 단면을 표현하였습니다. 잠실 올림픽공원에 있는 조각품 ‘엄지손가락’이 그의 작품입니다. 세자르는 어린 시절 가난해서 배우지도 못하고 조각할 수 있는 재료를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려진 물건들을 주어다가 그 물건의 특징을 살려서 조각품을 만들곤 하던 것이 오늘의 세자르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작업장을 보면 마치 철공소 같기도 하고, 폐품 수집장 같은 인상을 풍기기도 했습니다. 부서지고 녹슬고, 버려진 것들이라도 조각가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신기한 작품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폐품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조각가의 작업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만지셔서 의인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병든 자를 만지셔서 건강한 사람으로 만드시고, 가난한 사람을 부하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하십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만지심이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도하여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였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여기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에서 ‘부르시는’ 이라는 단어는 ‘존재하게 하다’,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부활과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부활과 창조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만이 율법과 상관없이, 신분에 상관없이, 업적에 상관없이 믿음만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십니다.
바울은 하나님만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존재라고 강조합니다. 무로부터 창조를 가리킵니다. 없다는 것과 있다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컴퓨터는 있는 것의 기술적인 변형에 불과하지 창조는 아닙니다. 무로부터 유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창조의 하나님만이 새롭게 만드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 믿음입니다.
둘째로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라
프린스톤 대학 교수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박사는 기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기쁨은 제자들이 목회자가 되어 신학교에 와서 설교하며 목회보고를 듣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성장한 모습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한번은 제자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작은 도시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인은 많지 않지만 저는 현실에 만족하면서 죄 짓지 않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자마자 윌슨 교수는 제자의 어깨를 툭 치며 “자네의 설교를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을 것 같네” “왜요?” “Your God is too small (자네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다음에 자네를 통해 하나님이 큰일을 했다는 소식을 도무지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작은 하나님이 아니라 능력의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작지 않습니까?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축소시켜 아무것도 하실 수 없도록 무능한 하나님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까?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본문 1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의 신앙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 절망적이며 불가능한 상태이고 또 ‘바랐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가능성을 희망하고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불가능하게 여겨졌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믿었습니다.
바랄만한 것을 바라며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수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후손을 통해서 세상의 많은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바라며 기다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되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며 믿었습니다.
셋째로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라
미안마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선교사업은 수포로 돌아갈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둔 사람들은 조롱하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봐 저드슨, 선교의 전망이 어떻소?’ 그때 저드슨 선교사는 주저하지 않고 강하게 대답했습니다. “선교의 전망은 아주 밝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 하셨으니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소망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프리카 선교에 평생을 바쳤던 선교사 리빙스턴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말이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날을 살아가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선교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약속을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있는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이것이 위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는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주실 줄로 믿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확률에 의해서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거짓종교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미국 국회에서 연설하였습니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하여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거실 벽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젊음을 지속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한 길, 하나님을 믿으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더 견고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약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랄 수 없는 가운데도 바라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람으로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믿음 그 귀한 믿음
로마서 4:15-25 / 김삼환 목사
이 세상에 믿음같이 귀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 나온 모든 성도들, 정말 귀한 믿음, 영원히 변치 않고 그 믿음 생활 잘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천년을 지금 한 달 남겨놓고 있습니다. 오늘은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았지만 역시 2천년은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천년을 더 산다 할지라도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양 세기를 걸쳐서 살고 있고 양 천년의 길목에 서 있는, 양 천년을 함께 걸어가는, 역사적으로 하나님 앞에 특별하게 은혜 받은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천년도 살지만 2천년부터 또 한 천년을 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건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또 감사한 일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북한에 태어나지 않고 남한에 태어난 것도 너무 감사하고 목회를 하든 교회에 다니든 50년 전, 100년 전에 믿었더라면 얼마나 어려웠을 텐데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땀 흘려, 눈물 흘려 고생하고 순교의 피 흘려 세워준 이 터 위에 이 영광, 이 평안을 누리고 있으니 이것 또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잘 태어났고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으로 기대하고 바라고 의지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원히 주님 한 분만을 잘 믿는 자로 이 세상을 살 때만이 남은 한 천년을 다 살지 못하지만 우리는 얼마까지 이 세상에 머물지 모르는 남은 생애를 주와 함께 승리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만 우리에게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삶을 알차게 하고 석류 알처럼 가득 가득 내 잔이 넘치게 채워 주셔서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시오 꿈이시오 힘이신 것입니다. 주님 없는 2001년, 주님이 없는 2010년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있어도 헛된 것입니다.
30년 전 옥스퍼드 대학에는 신입생들의 자살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대학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적인 명문 대학에 자살 사건이 일어나니까 세계의 많은 이목이 집중되고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왜 자살할까? 옥스퍼드 같은 대학에 들어와서 학생들이 자살할 이유가 뭔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문제는 간단했습니다. 영국의 귀족 집 아들들이, 부잣집 자녀들이 그리고 미국과 유럽에 가 있는 제일 잘 살고 모든 영광을 누리고 있는 권력층에 있는 모든 분들이 자녀들을 옥스퍼드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압력을 주는 것입니다.
'너는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라, 옥스퍼드에 가야된다, 그렇게 해서 옥스퍼드에 갈 수 있겠냐, 이렇게 해야 옥스퍼드에 들어갈 수 있다' 자나깨나 옥스퍼드 옥스퍼드 밥 먹든지 만나든지 옥스퍼드 옥스퍼드하고 그 좁은 문을 통과해서 옥스퍼드에 들어왔습니다. 옥스퍼드에 오면 다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옥스퍼드에 들어가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늘에 올라가는 줄 알았습니다. 천국에 온 줄 알았습니다. 가보니 옥스퍼드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옥스퍼드는 우리가 찾는 걸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옥스퍼드는 역시 허무한 것밖에 없습니다. 더 큰 좌절과 허무함과 절망을 가지고 술을 멀고 타락한 길로 걸어가는 수많은 세대,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자살해 죽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무엇이 있고, 21세기에 어디에, 세계에 어디에, 무엇을 하면 우리가 무엇이 거기에 있는 줄 알지만 이 세상 높은 산 위에 올라가도 산 위에도 없고 저 바다 속에 가도 바다 속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하고 "내게로 나오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 학문에 목마르고 지식에 목마르고 이 세상 사랑과 행복과 꿈에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목마른 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주는 생수는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 라고 주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정말 돈만 있으면 돈은 방망이인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신비한 요술 방망이가 되어서 안나오는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집을 가지면 집안에 없는 것이 없이 다 가지고, 다 부족함이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오늘 성가대에서 찬양한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예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오는 미래, 어떤 것에도 주님이 주시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주님께 가야만이, 주님의 품에 안기울 때만이, 그 분을 믿고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버리고 주님에게로 나아가서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을 더 확실하게 해야 되고 믿음을 든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높은 곳에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다 있다고 합니다. 좋은 마음 같지만 성서적으로 보면 욕심입니다. 또 등산하는 사람은 저 사람보다 더 높은 산에 올라가려고, 그리고 산에 올라가면 그 다음에는 몇 번 올라갔느냐 그 기록 세우기 위해서 평생 산에 올라가다가 제일 일찍이 죽고 제 명에 못살고 제일 사고가 많은 것이 등산 하다가 조난을 당하고 생명을 잃는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올라 다도 또 별것 아닙니다. 그냥 '만세' 하고 사진 찍고 내려옵니다. 몇 년을 노력하고 돈을 어마하게 들이고 온갖 고생을 하고 지난주에도 등산했다가 발이 동상 걸려서 그냥 다 없어졌습니다. 달아났습니다. 다 잘라 버렸어요. 아무 것도 얻은 것 없습니다. 산에 왜 올라가느냐? 산이 있기 때문에 산에 간다는 정신없는 말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산에 산밖에 없습니까?
예수님에게 나아갈 때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가 찾는 모든 것이 내게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가면 모든 것을 얻어서 내 잔이 넘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등산의 욕심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더 높은 산, 너보다 조금 더 올라가고 그래서 제일 처음 등산할 때는 우리나라 산을 다 누벼요. 서울을 다 누비고 그 다음 지방 가서 소백산 올라가고 설악산 올라가고 한라산 올라가고 다 올라가고 그 다음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일본 후지산으로 갑니다. 그 다음은 대만으로 갑니다. 그 다음은 중국으로 갑니다. 그 다음은 록키 산으로 갑니다. 그 다음은 네팔로 갑니다. 히말라야로 갑니다. 또 한번 올라가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올라 간 것은 다 잊어버리고, 가진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그 다음에는 더 높이 8천 미터, 또 8천 미터를 몇 번 올라갔느냐 그 기록을 세우려고 다른 것 일절 하지 않고 산에 맞추어서 더 높이, 더 높이... 오늘 현대인들은 등산인의 질병에 걸렸습니다.
차가 좋은데도 더 좋은 차, 집이 좋은데도 더 좋은 집 그래서 얼마나 이사를 많이 다니는지요. 우리 나라 사람같이 차를 자주 바꾸는 사람이 세계에 없다고 합니다. 계속 바꾸는 거예요. 더 좋은 차, 더 좋은 차 합니다. 더 좋은 차 없습니다. 더 빨리, 더 빨리.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지하는 내 주를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주님을 더 사랑하고, 믿는 주님을 더 믿어서 영적으로 내가 더 8천 미터로, 9천 미터로 내 영혼이 위를 향해 올라 갈 때만이 우리는 그 곳에서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은 또 결혼도 신비한 결혼을 하려고 해요. 스카이 다이버와 같이 신랑 신부 둘이 뛰어 내려 가지고 결혼식을 합니다. 거기서 뛰어 내려 가지고 결혼식을 하면 뭐 특별합니까, 특별한 결혼식,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드레스 입고 특별한 신혼 여행 특별한 사람을 만나고 특별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떤 분은 신부를 찾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합니다. '주여! 제일 예쁘고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마음도 좋고 그리고 족보도 좋아서 조상 대대로 특별한 자손을 만나게 해 주시고 좋은 학력을 가진 좋은 사람 만나게 해 주소서'. 몇 달을 주님 앞에 기도하는데 응답이 왔어요. '얘야, 그런 사람은 나도 못 만났다'. 어디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품안에서 행복을, 안식을, 자유를,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를 끝까지 지키고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산으로 알고 믿음의 산을 끊임없이 올라간 사람, 믿음의 길을 달려간 사람, 계속하여 평생을 잘 믿어 믿음으로 승리한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경쟁을 안 했습니다. 사람과 어디 좋은 땅이 있어서 땅을 찾아간 것도 아니고 세상의 어디 무엇을 찾아간 삶이 아닙니다. 믿음을 찾아간 삶이에요. 그래서 좋은 땅이 있는데도 조카 롯을 향해서 '네가 이곳을 하면 내가 저곳을 하겠다' 양보 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좀 양보하며 살아가십시오. 부장? 좀 양보 좀 해 보세요. 잘 사는 것? 양보 좀 하며 살아보세요. 우리의 축복이 거기에 있지 않다 라는 걸 여러분이 증거 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대학교 총장, 좀 양보하세요. 국회의원, 좀 양보하며 살 수 없어요? 금메달 좀 양보할 수 없어요? 그게 뭔데 그거 얻으려고 그러십니까?
이 세상에 생명 걸고 싸울 일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생명 걸고 믿음을 지켜야 되지만 이 땅에 있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 하겠다' 이렇게 선택을 롯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롯이 히히히 정말이세요? 삼촌은 항상 저렇게 착하다니까요 후회 안 하시겠지요? 후회 안 한다 네가 어디든지 선택해라 괜찮다, 나는 좋은 것이 이것저것 물질적으로 계산 할 줄 몰라, 주님이 귀하기 때문에 어디 가서도 나는 주님을 섬김으로 사는 믿음 있으면 이 하나로 승리할 줄로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선택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 보십시오. 청교도들이 102명이 다 없어도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배를 타고 정처 없이 가는 거예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가는 거예요. 어디 가느냐? 믿음으로 가는 거예요.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내 가는 길이 확실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려운 일이 있어도 괜찮아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모든 고국의 부귀영광, 논밭전지, 온갖 영화스러운 것 다 두고 배를 타고 떠난 사람이 청교도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더 좋은 땅으로 가지말고 더 잘 믿기 위해 이사갈 수 없습니까? 교회와 좀더 가까운 곳에서 신앙 생활 할 수 없습니까? 내 신앙 생활에 방해되는 것 좀 버리고 살아갈 수 없습니까? 신앙이 귀한 줄 알면 믿음대로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시오 기쁨이시오 우리가 찾는 모든 것을 갖고 계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믿는 것을 정리를 하면, 사도신경이 중심입니다. 사도신경은 신, 구약 성경 66권의 엑기스입니다. 성경을 다 믿어야 되지만 사도신경을 믿으면 전체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믿고 예배 드리는 거예요. 사도신경 외우고 찬송하라는 거예요. 사도신경 외우고 기도하고, 사도신경 외우고 헌금하는 거예요. 사도신경 외우고 그 다음에 고백하고 그 다음에 말씀 듣는 거예요. 사도신경이 뭐예요? 중요한 것은 다섯 가지예요.
첫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에요. 이 모든 것 창조하신 아버지 앞에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두 번째는, 그의 아들을 믿는 거예요. 나를 구원하시려 이 땅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세 번째는, 성령을 믿는 거예요. 나와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믿는 거예요. 네 번째는,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는 거예요. 구름 타고 오십니다. ♪구름 타시고 다시 오시네 나팔 불 때에 다시 오시네♪ 나팔 불 때에 주님은 재림의 주님으로 온 인류를 이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으로 영접하기 위해 오시는 거예요.
다섯 번째는 다시 오실 주님이 재림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나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 것을 믿는 거예요. 이 다섯 가지를 믿으려고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거예요. 이 다섯 가지가 우리의 생명이에요. 그런데 이 다섯 가지를 따로 다 믿는 것은 아니에요. 전공과목처럼 다섯 가지가 다 하나 하나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물처럼 다섯 가지가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 믿으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창조자는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 믿으면 성령은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 믿으면 내가 주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구원함을 받을 줄로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이 전부예요. 예수를 믿는 것이 가장 귀해요. 그래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거예요.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를 믿음으로 해결합니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예수께서 내 문제를, 국가의 문제를,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의 가는 21세기, 나의 길을 영광스럽게 인도하실 이는 내가 아니요 내가 믿는 주 예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거예요.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 어떤 학생이 논문을 썼는데 이런 주제로 논문을 썼어요. '한국 개신교 성장의 문화적 요인이 무엇인가?' 우리 한국 개신교가 짧은 기간에 어떻게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 많이 하고 성경 공부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해서 이렇게 부흥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과학적인, 문화적인 측면으로 그 원인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건 우리 생각처럼 생각하지 않고 하나 하나 그 배경을 찾아서 쓴 논문이에요. 저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의 답이 뭔지 아세요? 답은, '해답 체계를 갖고 있는 의미의 체계'라고 이렇게 대답이 나왔어요. 분석한 결과가 기독교는 우리가 모두 찾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대답해 주었다 라는 거예요.
다시 쉽게 말씀을 드리면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던 1885년 이후 2000년 초반까지 나라는 극도로 어렵고, 한일 합방이 되고, 을미사화, 갑신정변이라든지 갖가지 어려움을 당해 가지고 나라가 풍랑이 일어나고, 저주를 받아 남자들, 여자들이 다 붙들려서 일본에 종노릇하고, 우리도 알지 못하는 남의 나라에 가서 그냥 잿더미가 되고, 나라는 빼앗기고, 이 나라는 일본이 와서 다 지배하고, 거지같이 살고, 농사지은 것 다 빼앗아가고, 주권도 빼앗아 가고, 이름도 빼앗아 가고, 우리말까지 다 빼앗아 가고, 세상에 이런 저주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불교를 불교 국가로서 천 년을 내려와 이렇게 믿었는데 결과가 무어냐? 하는 거예요. 우리같이 많이 빌고 우리같이 나라에 지금도 아니 그 때에 나라에 꽉 차 있었는데, 뭐냐? 하는 거예요.
유교에서는 우리가 젓가락 하나 드는 것도 삼강오륜 가지고, 걸음 하나 걷는 것도 전부 유교에 의해서 모든 질서를 가지고 남녀칠세부동석 에서부터 모든 것 유교가 제사제도가 우리같이 세계에 조상 잘 섬기는 나라가 전에도 지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많이 빈 데가 어디 있어요? 산이란 산은 다 빌고 나무라는 나무는 다 빌고 바가지라는 바가지는 다 가져다 놓고 빌었는데 뭐냐 하는 거예요. 답이 없다 라는 거예요. 길이 없다, 이게 뭐냐 하는 거예요. 천 오 백 년을 믿어 이것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앞날에 무슨 꿈이나 소망이나 주느냐? 그것도 없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거예요.
길을 잃어버리고 도탄에 빠졌을 때 기독교는 우리에게 해답을 주더라는 거예요. 해답을... 나를 믿으라 는 거예요. 믿으면 구원함을 얻고 자유함을 얻고 평안을 얻고 병 고침을 받고 죄는 용서함 받고, 기독교는 대답을 미루는 종교가 아닙니다. 의문을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부터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고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그렇게 어두운 시대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어두운 때 애굽에서 해방이 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전부 자유가 있고 축복이 있고 비젼이 있고 해방이 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고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길을 찾아 교회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답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인 것입니다. 사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일제 시대 때 우리가 많이 불렀던 찬송이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춰오네♪ 그래서 일본 사람이 이걸 못 부르게 했어요.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고 어둠이 물러가고 자꾸 이런 찬송을 부르니까 못 부르게 했어요. 그래서 해방되고 우리 한국 교회에서 제일 많이 불렀던 찬송이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에요. 그렇습니다. 예수 믿으면 시온의 영광이 비춰옵니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춰오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이 믿음 잘 지키면, 언제나 생명이요 소망이요 길이요 진리이십니다.
어두운 밤에도 빛입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주안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약한 자도 믿으면 그는 강한 자요 다 죽은 것 같은 아브라함도, 백 세나 되어 끝난 것 같은 아브라함도 거기서 새 생명이 태어나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습니다. 무엇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주셨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 백세예요. 사라는 구십 세예요. 구십인데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아내를 보지 않아요. 자기를 보지 않아요. 누구를 보느냐?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거예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아래를 보고 어려움을 보는 분은 벌써 믿음이 아니에요. 그것과 관계없어요. 위에 계신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십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알래스카가 1867년 소련에서 720만 불에 미국 사람에게 팔려 갔습니다. 못 쓰는 땅을 팔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저주의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손에 갈 때 석유가 펑펑 솟아났어요. 미국 52주 가운데 지금도 제일 잘 사는 주로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버림받은 아무 쓸모 없는 돌이라도 주님의 손에 가면 모퉁이 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요긴한 돌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셔서, 쓸모 없는 돌도 주님의 손에 들어가면 요긴한 돌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귀하게 쓰임 받고 영원히 쓰임 받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확실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이십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믿는 것은 다 떠나갈 것입니다. 젊음도 떠나가고 믿었던 부모형제도 떠나가고 권력도, 여러분 뒤에서 누가 밀어 주는지 모르지만 다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떠나가지 않고 여러분을 지켜주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권력이십니다. 영원한 기쁨이시오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우리 나라에 6.25 사변 때 어떤 선교사님이 서울에서 길을 가다가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내렸는데 다리 밑에서 무슨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가보니까 어떤 어머니가 아기를 낳아 겨울에 그 아이를 쌓아서 옷을 벗어 아기를 감싸놓고 아이는 살았는데 어머니가 얼어죽었어요. 몇 시간 안되었어요. 지금도 우리 노숙자들 얼어죽고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래서 어떤 학자는 6.25 사변 십 년 기간은 우리가 사느냐, 생존의 기간이었대요.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잘 먹느냐 못 먹느냐, 잘 입느냐 못 입느냐가 아니고 그냥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버텼던 때가 십 년이었어요. 그러니 뭐 얼마나 얼어죽은 사람이 많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이 선교사가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집에서 길렀어요. 열 두 살이 되었어요. 내가 누군지를 선교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열 두 살 난 아이가 하루는 '선교사님 우리 어머니 산소에 나 좀 데려가 주세요' 그래서 선교사가 묻은 어머니의 산소에 데리고 갔어요. 겨울이었어요. 이 아이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의 옷을 다 벗어서 어머니 무덤에 덮어 드리면서 너무 너무 추우니까 '어머니 그 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이보다 더 추우셨지요? 어머니, 나 살리려고 어머니가 얼어서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옷을 하나 하나 벗어서 무덤에 다 덮어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 주님이 얼마나 나 때문에 아프셨을까? 피 흘리시면서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나 살리려고, 내 죄를 용서하시려고 얼마나 십자가 위에서 아프셨을까? 십자가가 무슨 전시용품인 줄 아세요? 문화의 기구인 줄 아십니까?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무덤이에요.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내 앞에 계신 주님이 나를 살리려고 귀한 생명을 버려주신, 나를 가리켜 준 내 앞에 무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랑에 감동해서 늘 감사의 삶을 살고 불평하지 않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 때문이요. 늘 기뻐하는 것도 소망을 갖는 것도 주님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든지 또 앞으로 아버지가 돌아 가신다든지 하면 사람이 성숙하듯이 교인이 왜 시시한 생각 안하고 아옹다옹 싸우고 경쟁하고 남을 억울하게 하고 우리가 왜 그런 삶을 안 사느냐 하면 주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 때문이에요. 이래서 우리 교인이 크는 거예요. 생각이 달라지고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똑같은 일에도 화내지 않고 남들 같이 살아가지 아니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에요.
제가 이번에 광주 집회를 갔는데 최집사님이라고 아주 잘 사는 가정에서 저를 식사 대접을 했어요. 그런데 아주 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어요. 그 집사님 아들이 승마를 해요. 승마 도 대학이 몇 개 대학이 있나봐요. 좁은 문인데 승마하는 사람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따로 시험을 치는 것보다도 지금까지의 좋은 경력이 있어야 한대요. 국내 대회, 세계 대회의 반드시 일등한 경력이 있어야 들어 갈 수 있대요. 그래서 얘도 벌써 십 몇 년 전부터 승마를 해 왔는데 금년에 대학에 들어 갈 때이니까 1, 2위를 해도 이게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외국에서 아주 비싸게 수 천 만원을 주고 말을 사 왔대요. 그런데 경기를 바로 며칠 앞두고 하필 말이 다리가 탈이 나서 경기에 못 나가는 거예요.
오랫동안 기도하던 일인데 너무 낙심이 되어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그러고, 네가 어떻게 했기에 말이 그러냐 하면서 아들한테도 막 신경질을 냈대요. 그래서 이 아들이 서울서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 왜 그러시냐고, 나는 생각해보니 내가 이번 대회에 일등을 해서 내가 목표한 그 대학에 들어가면 내가 스무 살도 안 되가지고 교만해서 뭐하겠느냐고, 우리 집도 잘 살지 나도 그렇게 자꾸 금메달이나 따 가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내가 뭐가 되겠냐고, 하나님이 나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일 년 재수하게 해 주신 것 나는 너무 감사하다고. 그래서 내가 들어보니 어머니가 뭐 믿습니다 그래도 실질적인 믿음은 이 아들이 훨씬 나은 거예요. 이 아들이 진짜 믿음이 있는 아들이다. 그래서 대학을 포기를 했대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 년 전에 소련에 가서 세계 주니어 대회를 하는데 거기서 메달을 딴 게 있었대요. 그래서 물었대요. 이것도 되느냐 그러니까 된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감사해 하면서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 합니다. 보세요. 우리가 시험 떨어졌다 다리 부러졌다 안 됐다 그래가지고 그런 부정적인 생각, 그 게 신앙이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은 언제나 해석을 해야 되고 때에 따라서는 믿음이 용기도 주고, 때에 따라서는 믿음이 양보도 하게 하고, 때에 따라서는 믿음이 순종도 하게 하고 아브라함 보세요 고향을 떠나라 해도 순종하고 아들을 바치라 해도 순종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때에 따라서 참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고, 조금 더 읽어보면 모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에요? 애굽의 왕의 자리를 거절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때에 따라 거절할 때도 있습니다. 죄의 길, 악한 길, 불의한 길이 있을 때는, 부정부패 잘못된 길에는 믿는 것 때문에 거절해야 해요. 믿음은 언제나 믿음 지키기 위해서 믿음에 맞지 않는 것은 버리기도 하고 참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고 순종하기도 하고 따라가기도 하고 믿음은 주님과 나와 계약 관계이기 때문에 주일은 반드시 지키는 순종의 삶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복음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담대하게 저항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번에 책에 보니까 KBS에서 이상한 교수 하나가 기독교에 대해서 굉장히 비난하는 강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예수님이 사생자라고 하고요.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니지요. 이런 강의를 하면 교인들은 본능적으로 달려들어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 이 천 년 동안 온 인류가 믿어 내려오는 전 세계의 왕의 왕들이 다 엎드리는 주님 앞에 당신이 사생자라고? 빗발치듯 전화해야 할 것 아니냐 말예요. 가만히 있으면 돼요? 우리나라 학교마다 단군이 교회에서 단군상 철거하는 운동이 있는데도 교인들이 뭐 그런 걸 철거 하냐고, 단군이 있는 분이에요? 단군은 그냥 얼마 전에, 몇 백 년 안되잖아요 그냥 이야기에 있는 것을 가지고 단군이 어디 있어요? 우리 조상은 곰이 우리 조상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은 중국에서 왔어요 인정하고 살아요 중국에 있는 사람들이 이 쪽으로 와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된 거예요.
일본은 우리나라 백제시대 때 여기서 건너 간 거예요. 일본이 이것도 인정하지 않아서 요사이 야단입니다. 일본의 고고학자 가운데 후지무라 부이사장이 있는데 일본이 잘 살고 어마어마하지만 자꾸만 우리 나라에서 갔다고 하는 걸 없이 하기 위해서 우리 조상이 삼 만 년 전에 살았다고 발굴을 했다는 둥 하는데 이번에 조작을 해서 세상에 6차 발굴을 했는데 6십 만 년 전 원인의 유적이 있었다 31점을 발견했다. 그렇게 발표를 했어요. 일본 조상이 이미 삼 만 년 전에 있었다 석기 시대에 삼 만 년 전에 있었다. 일본은 계속 올라가는 거예요. 삼 만년, 그 다음에는 팔 만 년, 그 다음에는 십 삼 만년, 그 다음에는 삼십 만년, 그렇게 교과서 다 쓰고요.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이 고고학자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지요? 일본 방송국에서 카메라를 비추었는데 집에 있는 토기를 가져다가 땅을 파서 거기다 감추어 가지고 자기가 아무도 모르는 밤에 가서 거기다 묻는 것이 들켰어요. 그래가지고 칠십 만 년 전이다 그러니까 세계 학자들은 또 믿어요.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 어리석은 거예요. 사람의 말 하나에 그냥 다 놀아나는 거예요. 그래 고고학자이다 보니 다 그런 줄 알고 '어, 일본은 칠십 만 년 전부터 살았대'. 칠십 만 년은 무슨 칠십 만년이에요. 그래가지고 교과서 다 뜯어고치고 일본은 신용만 잃고 세계 앞에 부끄러운 민족이 된 거예요. 일본은 여기서 건너 간 것이고 우리는 단군, 곰이 아니고요 중국에서 내려 온 거예요.
예수는 잘 믿어야 되고 이런 것은 좀 거절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단군 앞에 가서 이렇게 우리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세계적인 민족이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확실히 믿느냐가 민족의 앞날에 소망이 여기에 달려 있는 거예요. 우리 모두 큰 믿음으로 내 믿음 지키고 이 나라 이 민족의 앞날을 건지기 위해서 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