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죠. 더구나 저는 3,000m급 고봉을 오른 터라 거나하게 한잔 해야죠. 슈퍼마켓에 들러 술과 안주를 챙깁니다. 산바람은 최 소장에게 현지 일본주(청주)를 한 병 골라 달라고 합니다. 어제 술이 살짝 모자랐다며 1.8리터들이 두 병을 사려고 하네요. 제가 소주 한 병 사면 어떠냐고 했더니 섞어 마시면 안 좋다고 가볍게 무시합니다. 회계를 맡겼더니 마치 기재부 장관이나 회사 CFO가 된 것처럼 전권을 휘두르려고 하네요.
전날 구수회의 끝에 피 선배는 저더러 돈을 걷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귀찮아서 산바람한테 떠넘겼죠. "제가 돈을 맡아 가지고 있으면 한동준 교수가 불편해서 뭐라고 못할 거예요. 뭘 사자고 하거나 사지 말자고 할 때도 저보다 산바람에게 말하는 게 편하겠죠"라고 했거든요. 말이야 맞지만 술과 안주를 고르는데 산바람이 이토록 자기 취향을 고집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쓰모토시에서 정성 들여 빚은 술을 골랐습니다. 맥주도 곁들였고요. 전날 문어가 맛있었다고 해서 넉넉하게 샀더니 1만3천 엔이 넘었습니다. 5일 밤 자는데 하루 1만 엔꼴이니 이대로 가다간 모자랄 판이네요.
오늘 숙소는 전날보다 좀더 고급인 일본식 호텔입니다. 박 대표가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들더니 행운의 방이 나왔다고 합니다. 개인용 온천탕이 딸린 스위트룸이라네요. 저희는 당연히 부부가 함께 온 김 교수께서 쓰는 게 마땅하다며 권했는데, 김 교수는 극구 사양합니다. 저는 술자리가 벌어지는 방을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 소장은 재미로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하네요. 한 교수와 김 교수가 뒤로 돌아서 가위바위보를 합니다.
저는 내심 한 교수가 이기면 오늘은 저 방에서 술판을 벌여도 되겠다고 기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 교수가 이겼습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김 교수 내외는 방이 쓸데없이 커서 산바람과 한 교수가 묵는 방과 바꾸자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미 그때는 짐을 다 풀어놓은 상태여서 말씀은 고맙지만 그대로 쓰자고 했다는군요.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나서 식당에 마주앉았습니다. 이틀째여서 일행 사이에 어색함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메뉴도 가이세키인데 좀 더 푸짐합니다. 즉석에서 1인용 알코올 화로로 솥밥을 짓고 고기도 구워 먹습니다. 산바람이 맥주 마시고 싶다며 룸메이트인 한 교수와 함께 달랑 두 병만 주문합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저와 꿈푸리에게 마지 못해 한 잔씩 따라주긴 하는데,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저희도 두 병을 시켜 주변 사람에게 나눠줍니다. 산바람이 CFO가 되더니 쪼잔해졌네요. ㅋㅋ
오늘밤도 저희 방에 모여 술판을 벌입니다. 이 교수와 정 이사는 하루 쉬겠다고 통보해왔습니다. 6명이 마시다가 피 선배와 가상이도 먼저 자러 갑니다. 나머지 4명이 권커니잡거니 하며 연신 술잔을 비웁니다. 저와 동갑인 한 교수와도 말을 트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산바람이 핸드폰을 집어들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라고 합니다. 옆방의 이 교수께서 단톡방에 문자를 올려놓았습니다. 시각은 11시 52분. "이제 좀 주무셔요. 옆방에 시끄러워요."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듯합니다. 그래도 곧바로 자리를 파할 수는 없어서 작은 소리로 대화하며 남은 술과 안주를 해치운 뒤 헤어졌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만나자마자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고 하니 "다른 투숙객들이 방해받을까 봐 그런 거고 전 괜찮아요"라고 하더군요. 거듭 사과드립니다)
여행 3일차인 6월 22일. 아침을 먹고 하쿠바(白馬)로 이동합니다. 오늘은 날씨가 쾌청합니다. 누군가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하자 박 대표가 "일본은 편의점 커피가 맛있습니다. 가성비도 좋고요. 한번 드셔 보실래요?"라고 합니다. 제가 손을 번쩍 들고 "커피는 제가 쏘겠습니다"라고 외쳤죠.
저의 통큰 기부는 선한 영향력을 낳아 후속 기부를 이어지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죠. 편의점 커피가 가장 값싸기도 했고, 제가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지출액은 절약되는 대신 나중에 다른 사람이 뭘 살 때는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요.
오늘은 가벼운 산책입니다. 맨 처음 와사비농장에 들렀습니다. 기념관에는 농장의 역사를 담은 사진과 자료들을 전시해놓았습니다. 지금의 나루히토 천황(일왕)이 황태자 시절 들렀다는 사진도 있더군요. 대왕와사비란 상표를 내걸고 판매도 합니다. 생와사비, 와사비 과자, 와사비 아이스크림 등등 종류도 많네요. 저도 과자 한 봉지와 생와사비 두 튜브를 샀습니다.
아오키코(靑木湖)도 구경했습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카누를 타는 사람도 보입니다. 사자 그림이 있는 안내판이 보이네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제가 실없는 농담을 던집니다. "사자 고기로 끓인 국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 "동물의왕국이래요. 동물의 왕으로 끓인 국이요" "이빨 빠진 사자를 뭐라고 부르게요?" "라온입니다. 라이온에 이가 빠졌으니까요, 같은 용법으로 이빨 빠진 호랑이는 타거입니다." 여기서 그쳤으면 좋을 텐데 한 발짝 더 나갑니다. "사자의 반대 되는 동물은 뭘까요?" "판다입니다" 뜨악한 표정들입니다.
오야우미 습지를 산보하듯 걷습니다. 삼나무 숲과 습지에 피어난 풀꽃들이 싱그럽고 청초합니다. 갈림길이 나오자 앞서가던 일행들이 정상 쪽으로 향합니다. 어제 노리쿠라다케 정상을 못 올랐던 아쉬움 때문인 듯합니다. 박 대표가 황급히 소리칩니다. "그쪽으로 가면 안돼요. 왔다갔다 세 시간은 걸립니다. 이제 저보다 앞질러 가지 마세요." 저는 전날 정상을 다녀와서 느긋한 마음입니다.
이 교수는 아는 것도 많으신 분인데, 궁금증도 많고 호기심도 많아 질문도 많습니다. "이 지명은 한자로 어떻게 쓰나요?" "이 풀의 이름은 뭔가요?" "일본 사람들은 여기 오면 어디를 주로 들르나요?" 등등 버스에서나 걸으면서 박 대표가 성가실 정도로 쉴새없이 질문을 쏟아냅니다. 그 덕에 저희도 배우고 익히는 게 많습니다.
습지를 걸으면서도 질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건 미나리처럼 생겼는데, 뭔가?", "이런 그늘진 곳에서는 고사리가 많이 날 텐데" 등등. 제가 드립을 또 날립니다. "고사리가 많이 나는 마을이 고사리 아닌가요?" 앞서 가던 김 교수가 "이제는 창작도 하시네"라고 합니다. 그동안 제가 늘어놓던 아재 개그를 귀담아 들으셨던 모양입니다.
조그만 현수교를 건너니 기념품 매장과 식당을 겸한 카페가 보입니다. 카페에서는 꿈푸리가 한턱 냅니다. 아들이 여행 가서 쓰시라고 아빠한테 돈을 보냈다는군요. 우리 아들딸 며느리한테 얘기해줘야겠습니다. 물론 더 큰 빚으로 돌아오겠지만요.
오늘 점심도 휴게소입니다. 당초 예약하려던 식당이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하네요. 저는 차가운 메밀국수에 튀김과 공기밥을 곁들인 세트 메뉴를 시켰습니다. 식당이 비좁기는 해도 깔끔하고 푸짐합니다. 한 교수가 갑자기 제비뽑기를 제안합니다. 뽑힌 사람이 만두와 찐빵을 사기로 하자는 겁니다. 나무젓가락 포장종이로 제비를 만들었는데, 역시 설레발친 사람이 걸렸습니다.
박 대표가 마쓰가와(松川)가 흐르는 다리 옆에 차를 세웁니다. 다리 중간에 서니 설산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박 대표가 "일반 패키지 여행에서는 이런 경치 못 봅니다"라고 자랑합니다. 정말 멋집니다. 눈이 녹은 자리와 골짜기에 눈이 남은 자리가 여러 형상으로 보입니다. 다리 난간에는 사진으로 문양을 보여줍니다.
멀리 초록빛 스키 점프대가 보입니다. 버스도 그리로 향합니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곳입니다. 밑에서 봐도 아찔한 느낌이 듭니다. 하늘 위에는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도 보입니다. 한 교수가 질문을 던집니다. "패러글라이딩 최장 비행 기록은 얼마일가요?"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 교수가 답을 들려줍니다. "배고플 때까지, 오줌 마려울 때까지 계속 하늘에 떠 있을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강릉까지도 갑니다."
저도 아는 척을 합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열 때와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을 열 때는 일본이 그야말로 욱일승천의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1998년에는 거품경제가 꺼지고 동아시아에 외환위기가 불어닥쳐 정점에서 내려올 때였죠. 그래서 나가노 올림픽을 나가리시키자는 얘기도 나왔거든요."
박 대표가 제 말을 살짝 수정해줍니다. "1998년까지는 그래도 일본 경제가 전성기였습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관리를 잘못해서 추락한 겁니다. 코로나 때도 기회가 있었는데.."
오후에도 로프웨이를 타려고 이와다케(岩岳) 마운틴 리조트로 향합니다. 대형 스키장인데 스키 시즌이 아니다 보니 산악자전거(MTB)를 타는 사람이 많습니다. MTB 마니아인 한 교수는 물론 도로 자전거를 즐기는 꿈푸리까지 당장 빌려 타고 싶은 모양입니다.
우리는 곤돌라에 몸을 실었습니다. 길이가 꽤 길고 여러 봉우리를 넘다 보니 흡사 놀이기구를 타는 느낌입니다. 해발 1,289m 슬로프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초록빛 슬로프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난 흙길을 따라 자전거들이 곤두박질치듯 쏜살같이 내려갑니다. 그네도 있고 자이언트스윙 등 놀이기구도 있습니다. 전망대에 서니 맞은편 설산들이 코앞에서 손짓합니다. 이른바 시로마다케(2,933m)·쿠시다케(2,932m)·시로마아리카다케(2,933m)를 일컫는 하쿠바 삼산(三山)이죠.
이제 숙소로 향합니다. 물론 슈퍼를 또 들러야겠죠. 산바람이 "이자카야(居酒屋)를 한번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자 박 대표가 "여긴 없고요, 내일 숙소가 시내니까 거기서 가시면 됩니다"라고 하네요. 오늘은 일본 보리소주 중병 두 개를 샀습니다. 그에 맞춰 게맛살과 콩도 사고요.
산바람이 또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일본에 왔으면 오리지날 가라오케를 가줘야 하는데..." 제가 받아칩니다. "가라오케가 가짜 오케스트라란 뜻인데, 오리지날 가라오케라면 진짜 가짜 오케스트라인가?"
오늘 숙소는 산속에 있는 고급 호텔입니다. 노천탕도 있습니다. 하쿠바 삼산 전망이 기막힙니다. 건물 옥상에도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습니다. 노천탕에 뒤늦게 들어온 김 교수가 "루프탑에서 맥주 한잔 하고 내려왔어요"라고 말합니다. 평소에도 욕탕에서 금세 일어나곤 하는 산바람이 "루프탑 가 있을게"라고 말하며 먼저 일어섭니다.
저도 꿈푸리에게 루프탑으로 올라오라고 말하며 방에 들어가 맥주 4캔을 챙겨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산바람이 안 보입니다. 먼저 자리잡고 있던 이 교수와 가상이에게 물어보니 온천탕에 가지도 않고 막바로 올라왔는데도 산바람을 못 봤다는 겁니다. 아마도 올라오는 길을 못 찾은 듯합니다. 객실 가는 엘레베이터와 루프탑 가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거든요. 온천욕하고 설산 전망 바라보며 맥주 들이켜니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산바람은 뒤늦게 올라오긴 했는데, 길을 못 찾은 게 아니라 방에 좀 누워 있다보니 늦었다고 둘러댑니다.
오늘 저녁은 뷔페식입니다. 우리는 큰 방을 따로 배정받았습니다. 누가 맥주를 또 쏘시네요. 제 옆에 앉은 김 교수가 생수병에 담아온 정체불명의 액체를 따라줍니다. 40도짜리 일본 소주입니다. 식도와 위벽을 짜릿하게 자극합니다. 금세 알딸딸해지고 불콰해집니다. 저는 두 잔을 연거푸 마셨고 다른 일행도 조금씩 맛을 봅니다.
내일 다테야마(立山) 트레킹 계획을 얘기하며 걱정을 늘어놓습니다. 하루종일 비 예보가 있긴 한데 숙소가 모두 다른 곳이어서 일정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저께처럼 갔던 길로 되돌아오는 게 아니라 전기버스와 푸니쿨라와 케이블카 등을 갈아타고 다른 곳까지 도착해야 합니다. 최 소장이 인솔하고, 박 대표는 버스를 몰고 도착지에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최 소장은 혹시라도 차질이 빚어질까 봐 시간대별 교통편 탑승 계획을 반복해서 알려줍니다.
아이젠과 등산용 스틱은 필요없다고 합니다. 다만 해발 2,450m 무로도(室堂) 고원에서 3,015m 다테야마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오려면 5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길이 잘 나 있는 곳을 따라 둘러보기만 한다고 합니다.
제가 아이젠의 유래를 설명합니다. "스위스 융프라우 옆으로 묀히와 아이거 세 봉우리가 늘어서 있습니다. 아이거의 북쪽 사면이 대단히 가팔라서 오르기 힘들다고 알려져 있죠. 그래서 노스페이스라는 상표도 생겨났고요. 유명 등산가에게 아이거 북벽을 오를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니 '아, 이거?'라고 하며 자신 있게 오르더랍니다. 그래서 아이거란 이름이 붙었죠. 그런데 오르다 보니 설벽과 빙판이 하도 미끄러워 '아, 이젠 등산화에 쇠날을 끼워야겠네'라고 하며 아이젠을 차고 올랐답니다. 그때부터 그걸 아이젠이라고 불렀죠."
오늘 저희가 묵는 방은 소음이 퍼지는 걸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아예 맨 끝방로 배정했습니다. 그 옆은 산바람과 한 교수 방이고요. 이 두 명도 어차피 끝까지 술자리에 남아 있을 거니까요. 또 그래서 실컷 마시고 떠들다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늘은 저녁 자리에서 소주까지, 많이 마셨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