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필은 1906년 7월 29일 종로 4가 112번지 아흔아홉 칸 전 대감 댁 늦둥이로 태어났다. 전형필의 집안은 종로 4가와 종로 6가를 잇는 배오개 장터에서 몇대째 운영해온 미곡상을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었다. 전형필은 책을 열심히 읽고 자라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와세다 법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한 전형필은 아버지가 원하는 일인 변호사가 될지 자신이 원하는 조선어문학을 공부할지 고민하였다. 그 고민을 풀기 위해 휘문고보 시절 미술 교사인 고희동에게 고민을 털었고 고희동은 우리 '문화'를 지키는 게 어떻겠냐며 제안한다. 나중에 고희동은 오세창에게 전형필을 소개해준다. 오세창은 1864년에 태어나 1953년 생을 마감한다. 그의 호는 위창이며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다. 오세창은 1884년 갑신정변에 참가했다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후 3·1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였고 이로 인해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오세창은 전형필을 수집가로써 가능성을 인정하였고 그의 호를 산골물 간(澗)자와 나무 송(松)자를 사용해 간송이라고 지어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는데 논은 800만 평에 1년 순수입이 15만원 정도는 되었다. 당시 재산으로 100만원이 넘으면 백만장자라고 불렸는데 조선인은 불가 43명 뿐이였다. 전형필은 재산을 상속받음으로써 백만장자가 되었다. 전형필은 오세창이 엮은 근역화휘와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서 문화재에 대한 눈을 키우게 된다. 전형필은 백두용이 운영하는 한남서림에서 겸재 정산의 <인곡유거>를 구매하게 된다. 이것이 전형필의 첫 수집품이다. 그 전형필은 그 후 문화재를 수집하였는데 중간에 <몽유도원도> 같이 문화재를 놓치는 일도 있고 백두용에게서 한남서림을 인수하는 일도 있었다. 전형필은 1500원을 주며 겸재의 <해악전신첩>울 사거나 야마나카 상회와 흥정을 해 2만 5천원에 풍속화첩을 수장하는 등 자신의 사비를 사용하여 우리나라 문화재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수장한 문화재를 전시할 개인 박물관을 세우게 된다. 그 박물관은 보화각이라고 불렸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박물관이다. 해방 후 전쟁이 나자 전형필은 어쩔 수 없이 문화재를 보화각에 두고 피난을 가게 된다. 그가 다시 보화각으로 돌아왔을 때 문화재들 뿐만 아니라 전형필의 형편까지 어렵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재단에 빚까지 생겨 자신이 평생을 바쳐 산 문화재를 파는 대신 얼마 남지 않은 땅을 팔아 재단의 빚을 다 갚게 된다. 빚을 다 갚은 그는 결국 급성 신우염에 걸리게 되고 1962년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5원에 팔리던 참기름병이 나중에는 60원에 팔리고 1만 5천원에 팔리더니 오늘날 국보 제 294호가 된 도자기가 매우 기억에 남는다. 이 참기름병의 이름은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채 난국초충문병으로 이름이 좀 어려운 편이다. 도자기에는 3가지 색으로 사용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3가지 색상을 사용하기 위해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평생을 떵떵거리며 먹고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재가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은 전형필을 보며 쉽지 않은 선택을 한 그의 용기를 본받고 싶었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 것인데 언제 광복할지 모르는 조국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바쳐 국보와 다양한 문화재들이 유출되지 않도록 사비로 지킨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